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46화
EP 38-불꽃이 튀기는 국정감사
대한민국 마석산업의 구조는 간단하다. 최대한 많은 마석을 가져와서, 최대한 효율 좋은 에너지 배터리로 가공해 수출하는 것이다.
수익을 높이는 방법은 2가지로 나뉜다. 마석산업체에 연구비를 쏟아부어 에너지 배터리의 효율을 높이든가, 아니면 마석을 더 구하든가.
보통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쉽다.
그래서 한국은 한 줌이라도 더 많은 마석을 구하기 위해 동남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중국, 일본, 북한으로 헌터들을 내보낸다.
현지 정부 대신 헌터 길드가 지역을 보호해 주는 대가로, 그곳에서 나는 마석을 한국으로 보내는 방식이다.
물론 여기에도 단점은 있다.
“필리핀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고요?”
“네. 시장님. 파올로 대통령이 물러나고 신정부가 정권을 장악했답니다.”
외국에서 사고가 터지면 국내 경제에 치명타로 작용한다.
“제가 지금까지 들은 필리핀 쿠데타만 해도 벌써 세 번째네요.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마석 수입 계약만 다시 체결하면 되지 않나요?”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정치인이나 군부가 아니라 헌터들이 들고 일어나서…….”
“이제부터 필리핀 마석은 필리핀 헌터가 얻어야 한다. 앞으로 외세에 마석을 팔아먹는 매국노들은 용납하지 않겠다 이거네요. 그리고 그 외세가 우리고요?”
“정확하십니다.”
“한국 길드가 필요 없다고 배짱을 부리는 걸 보니 필리핀 사정이 많이 나아졌나 보네요. 그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하…….”
나도 국회의원에 초상관리부 장관에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다 거치고 이제는 서울시장까지 해먹고 있다.
이제 어엿한 베테랑 정치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레벨이 높은 정치인은 무당보다 예언을 잘한다는 게 정치학계의 정설이다.
“어디 보자…….”
필리핀에서 들어오는 마석이 뚝 끊겼으니 그만큼 공장 문을 닫을 것이고,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실업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예측한 정부가 공장 문 닫으면 재미없을 거라고 기업들을 협박하겠지.
아마 청와대 정무수석이 마석산업체 대관담당자들을 한정식집에 불러서 조곤조곤 조질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공장을 계속 굴려야 하는 기업들은 즉시 대량의 마석 공급처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아마 그 ‘노력’은 게이트 사태로 박살 난 서울을 재개발하고 있는 서울시장에게 달려가서, 당장 재개발 멈추고 서울에 있는 게이트 닫지 말라고 지랄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조장한 정부는 가만히 방관하겠지. 원옥분 대통령은 국방당이고 나는 국민당이니까.
이게 야당의 설움인가…….
“탕비실에 과자 좋은 거 사놔야겠네요.”
* * *
개문 사태 이후 몇 번이나 대한민국의 멸망을 막아낸 1세대 헌터들은 전부 나름의 보상을 받았다.
출세를 원하는 사람들은 헌터 길드를 차리거나 대기업 PMC에 취직했다. 심지어 재벌가 데릴사위로 들어간 사람도 있다.
아예 헌터 생활을 관두고 연예인을 하거나, 제주도 수렵연수원에서 선생님 노릇을 하기도 한다. 백수로 놀고먹는 사람도 있고.
물론 국경 없는 기사회에 투신해 세계를 떠돌며 인류를 수호하거나, 초인지원청 공안관리국에서 헌터 범죄를 수사하는 치안관이 된 사람도 있다.
그렇게, 압구정 생존자 캠프와 동대문 생존자 캠프에서 시작된 1세대 헌터들의 험난한 여정은 각자의 행복을 찾아가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든지 다시 모일 준비가 되어 있다.
한국에 다시 위기가 찾아오거나, 누가 결혼식을 올리거나.
아니면 헌터 사회의 대의를 수호하기 위해 단체로 항의방문을 하거나…….
“뭐야. 어디 게이트라도 열렸어요? 이 멤버면 S급 게이트도 뚫겠는데?”
“저희 지금 농담할 상황이 아닙니다. 시장님.”
“달달한 과자라도 좀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서 둘러싸니까 나 너무 무서워. 레이드 당하는 초대형 괴수의 기분을 알 것 같단 말이지…….”
서울시 중구에 있는 서울시청이 아직 괴수들 살림집인 관계로 서울시장 집무실은 행정수도인 세종시에 있었다.
부산에서 KTX 타면 2시간 걸린다. 누구나 언제든지 쳐들어올 수 있다는 뜻이다.
그 결과, 삼성 수렵대행사 수렵팀장, LG 헌터스 길드장, GS 방위대행사 전무이사가 응접실 소파에 줄줄이 앉아 있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헌터 길드 관계자만 온 게 아니다. 제주도 수렵연수원(헌터 아카데미) 원장부터, 이제는 영화배우로 전직한 양반까지 우르르 몰려 왔다.
전부 압구정파와 동대문파 계열의 1세대 헌터들이라 딱히 이상한 풍경은 아니었다. 원래 이 양반들은 사건 터지면 나부터 조지러 오는 게 루틴이었으니까.
“으이그, 여기에 폭탄 터지면 대한민국 1세대 헌터들 전부 죽겠네. 무슨 도떼기 시장도 아니고 이게 뭡니까? 차라리 삼겹살집에서 모이지 그래요? 거기는 밥이라도 주지.”
“시장님, 강서구 재개발 딱 한 번만 다시 생각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전쟁이 시작됐다.
“이미 수도권 난민들 대상으로 뺑뺑이 돌려서 강서구 주공아파트에 들어갈 사람들 전부 뽑아놨어요. 여기서 재개발 엎으면 나 진짜 총 맞습니다. 수도권에서 탈출한 난민들 아직도 군인 시체에서 주운 K2 반납 안 하고 지하실에 숨겨두고 있는 거 다들 알잖아요.”
“재개발을 아예 취소하시라는 말씀이 아니라, 조금만 더 미뤄주십사 부탁드리는 겁니다. 강서구에 있는 게이트가 한두 개가 아니지 않습니까. 적어도 필리핀 마석 공급이 정상화될 때까지만이라도…….”
LG 헌터스 길드장이 읍소하는 와중에 삼성 수렵대행사 수렵팀장이 끼어들었다.
“그러면 관악구 재개발이라도 재고해주시죠. 관악산에 숨어든 괴수들도 아직 처리가 끝나지 않았잖습니까. 현장 공사 인원이 자꾸 습격당하니 안전 문제로 재개발이 미뤄졌다는 그림을 만들면 시장님께서도 부담이 덜하실 겁니다.”
“거기는 대통령 모교가 있어서 올해 연말까지 학교 재오픈 기념샷 찍을 수 있게 하라고 청와대에서 자꾸 쪼아서 어쩔 수 없어요.”
“이런…….”
“여러분, 제가 강북에 있는 게이트들은 당분간 안 닫기로 했잖습니까? 정 마석이 궁하면 그냥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서 구하면 안 됩니까?”
GS 방위대행사 전무이사가 뻘쭘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사실 이미 게이트 안까지 싹싹 긁었습니다. 여왕괴수만 남겨두고 돌아왔어요. 안에서 알 까고 새끼 치려면 몇 달 기다려야 합니다.”
“아주 양식장이 다 됐군요. 저 빌어먹을 게이트들 때문에 1천만이 죽었는데…….”
“하하……. 저도 개문 사태 때문에 가족친지를 잃었지만, 그런 원한 때문에 게이트를 전부 닫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인 문제도 있지만 살려주고 두고두고 괴롭혀야죠. 마석이 따지고 보면 괴수 놈들 심장 아닙니까? 그 심장을 뽑아서 건전지로 만든 다음에 인류의 자산으로 쓰고 있으니 얼마나 상쾌한 복수입니까?”
LG 헌터스 길드장이 GS 방위대행사 전무이사에게 말했다.
“……오빠. 조금 또라이 같은 거 알지?”
“내가 왜 또라이야?”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번갈아 가며 달려드는 헌터들을 하나하나 맞상대했다. 전부 국내 기준 7급 이상, 북미 기준 A급 이상의 고위 헌터들이었다.
“서울에 아파트 안 지으면 부동산 가격 못 내리는 거 알잖아요. 이미 재개발하겠다고 공약까지 한 마당에 예전처럼 헌터들 사냥터로 쓸 수가 없다고요.”
“아잉, 시장님, 제발요…….”
“애교부리지 마요. 징그러우니까.”
“민정이가 평소에 시장님 많이 존경합니다. 물론 저도 그렇고요. 귀엽게 봐주십쇼. 제가 절이라도 한 번 올릴까요?”
“아, 당신들 미쳤어?! 자존심 다 내려놓고 왜 이러는 거야!”
“회사에서 한승문 시장 구워삶으라고 법인카드까지 쥐여 줬는데 뭐 어떡합니까.”
“왜 그걸 당신한테 시켜요.”
“서울 게이트 폭주 때 같이 싸웠다고 광 좀 팔았더니 제가 한승문 측근이라고 소문난 지 꽤 됐습니다.”
“미치겠네. 정말…….”
“저기, 시장님, 너무 화내지 마시구 이 자료 좀 봐주십쇼. 강서구에 좋은 게이트가 정말 많습니다. 김포국제공항도 끼고 있어서 대형괴수 끌어내서 사냥하기도 좋아요. 특히 마곡동에 있는 게이트 내부에는 거기서만 나오는 변종이 있는데, D타입 재생 계열 인자를 가지고 있는 아주 특수하고 희귀한 개체입니다. 세계적으로도 일곱 군데에서밖에 발견되지 않았어요. 유럽 포션 산업이 그렇게 발달한 이유가 이런 특수한 케이스를 확보해서 생명공학을 발전시킨 덕 아니겠습니까? 이것도 사실 우라늄이나 천연가스 못잖은 전략자원이라고 봐야 해요. 신개념 전략자원이죠! 정치인들은 이걸 몰라요. 하지만 시장님은 저희를 이해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포션 산업보다 부동산이 더 중요한 것 같은데요.”
구석에 있던 헌터가 ‘그건 맞지……’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가 옆에 있는 헌터에게 팔꿈치로 맞았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니 탕비실에서 내가 사 놓은 과자를 까먹고 있던 최종보스가 나섰다.
“오케이. 거기까지.”
“선아야!”
“너만 믿는다…….”
압구정파의 리더, 헌터 협회장 홍선아.
언제나처럼 맵시 있는 헌터용 코트를 입고 옆구리에 기관단총을 차고 있는 홍선아가 아련하게 미소지으며 내 앞에 앉았다.
“시장님. 아니, 의원님. 나는 이상하게 의원님이라는 호칭이 제일 좋더라. 우리가 신분당선에서 손잡고 탈출할 때 쓰던 호칭이라 그런가……. 그때 껌껌한 지하철에서 불질하느라 잿가루 많이 먹었죠? 저는 아직도 술만 먹으면 그때 생각이 나더라구요. 의원님은 안 그래요?”
“거기서부터 추억팔이를 시작하면 썰 다 풀 때까지 몇 시간은 걸릴 것 같은데요.”
홍선아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에이, 추억팔이라뇨. 그냥 우리 인연이 어느새 이렇게나 오래됐다. 이거죠.”
“인연이고 나발이고 강서구 재개발은 못 물립니다. 빨갱이 소리 들으면서 토지 국유화 밀어붙였는데, 주공아파트 안 짓고 헌터들한테 넘긴다고 그러면 탄핵감이에요.”
단호하게 말했지만 하얗게 새어버린 홍선아의 머리카락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반쯤 시체가 되었던 이후로 하얗게 새어버린 그녀의 머리카락이…….
“쯧. 일단 말씀해 보세요.”
나는 홍선아의 제안을 들어보기로 했다.
“게이트냐 아파트냐? 아파트냐 게이트냐? 이게 고민된다면 게이트 옆에 아파트를 짓는 건 어떨까요?”
“어떤 미친 인간이 괴수들이 꾸득꾸득 기어 나오는 게이트 옆에서 살림을 차립니까?”
“그런 식으로 따지면 김정은 아랫동네에서 살았던 우린 뭐예요? 결국 익숙해지면 상관없어요. 실질적인 안전이 문제지.”
“그러니까 그 안전을 어떻게 보장하냐고요.”
“아파트에 헌터가 살면 되죠! 출퇴근하듯이 게이트 내부를 청소하면 되고. 또 게이트 바로 옆에 헌터 길드 본사도 으리으리하게 세우고.”
“……예?”
“잠깐만요.”
생수로 목을 축인 홍선아가 혓바닥으로 낼름 입술에 침을 발랐다.
“혹시 헌터 아파트라고 들어보셨어요?”
“아뇨.”
“이게 미국에서 시작된 사업인데…….”
* * *
“게이트 옆에 아파트를 짓는다고요.”
“응.”
헌터들을 돌려보내고, 내 곁에 남은 사람은 내 보좌관이자 심리전문가인 피채원이었다.
피채원은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과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 판단을 짚었다.
“너무 위험한 발상 같은데요.”
“위험하지.”
나는 퇴근을 위해 서류가방에 짐을 싸면서 말을 이어갔다.
“근데 한국은 이제 게이트 안전지대가 아니야. 충청방어선만 믿고서 버티던 좋은 시절은 끝났다고. 저번 동북아시아 카타스트로피 이후로 마력 농도가 너무 많이 올라갔어.”
“이제 언제 어디서나 게이트가 열릴 수 있다는 건가요.”
“제주도 똑똑이들의 판단은 그래.”
내가 야당 서울시장이지만 헌터 산업 분야에 한해서는 앉은 자리에서 삼라만상을 들여다볼 수가 있다.
그리고 초상기술연구본부, 삼성 사이오닉 중앙연구소, 국방과학연구소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게이트 전쟁의 형태가 바뀌고 있어.”
몰려오는 괴수를 전선에서 막아내던 시절은 끝났다. 우리가 괴수들을 끝까지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게이트를 반쯤 양식장처럼 쓰는 지경이니 고정된 게이트는 이제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제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인스턴트 게이트를 막아내는 싸움이 주가 될 것이다.
“헌터들 입장에서는 고역이겠네요.”
“그렇지. 5분 대기조 생활을 하면서 돈도 잘 못 벌 테니까.”
동사무소에서 대기하다가 게이트 사태가 발생하면 지프차 타고 달려가서 해결하는 것.
물론 일반인보다는 훨씬 잘 벌겠지만, 그런 형태의 사냥은 힘들고 돈이 안 된다. 사과가 떨어질 때까지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꼴이니.
“그런 의미에서 헌터 아파트인지 뭔지는 괜찮은 발상이라고 봐야지. 헌터들한테 5분 대기조 생활을 시킬 이유를 주니까. 게이트 옆에 살면서 주기적으로 마석을 캐는 일자리를 주는 대신, 근처에 게이트 열리면 바로 달려가는 서비스를 제공하게 시키는…….”
“그게 홍선아 협회장님의 아이디어라고요.”
“아니. 저번에 초청받아서 뉴욕 관광하다가 파티에서 들었대.”
역시 미국인가. 정치 지망생 시절에는 워싱턴만 바라보면서 미국 정책만 따라 하는 정치인들을 무시했는데, 가장 발전한 민주사회다 보니 쓸만한 정책은 미국에서 먼저 나온다.
그러나 이조차 완벽하진 않다. 게이트 청정지대에서 살고 싶다는 국민들의 마음을 꺾어야 하고, 마석기업에 부역한다는 오해를 씻어내야 하니까.
거기서부턴 정책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겠지. 이제 내 역량에 달렸다.
문득 서울시장 노릇하기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읽은 피채원이 내게 말했다.
“오늘은 회식하고 들어가실래요.”
“그럴까?”
“제대로 된 콩고기집 하나 찾았거든요.”
고기가 사치품이 된 세상. 소고기 먹다가 사진 찍히면 지지율 깎이니까, 맛있는 콩고기는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
“채원아.”
“네.”
“니가 최고야.”
* * *
서울시장 노릇을 하면서 좋은 게 있다면 퇴근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거였다.
초상관리부 장관 시절엔 언제 나라가 망할지 몰라서 퇴근을 안 했고,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엔 일이 너무 많아서 퇴근을 못 했다.
과로로 이빨까지 빠져서 임플란트를 박았는데, 쪽팔려서 산재 처리도 못 하고 돈만 깨졌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강하다.
지방선거에서 압승한 선출직 공직자의 막강한 권능으로 조기 퇴근을 선포하니, 서울시 직원들은 환호하며 콩고기 집으로 따라왔다.
“다음 주가 국정감사죠? 이 시국에 법인카드 잘못 쓰면 국정감사에서 탈탈 털리니까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혹시 제 눈치 보고 법카 들고 온 사람 있으면, 나 암살하려고 하지 말고 조용히 도로 갖다 놓으세요.”
내 위트 있는 농담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서울시 공무원들이 깔깔거리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피채원만 썩은 동태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재미없었나 보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내 자리로 돌아왔다. 옆에 앉은 서울시 제1 행정부시장이 넉살 좋게 말했다.
“오랜만에 재충전할 시간을 가지니까 직원들 기분이 좋은 모양입니다.”
“국정감사 준비한다고 다들 고생이 많으시더라고요.”
“고생은 좀 해도 시장님께서 이렇게 종종 챙겨 주시니까 공직 생활할 맛이 나는 것이지요. 아,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하하!”
제1부시장은 양판석 전 대통령이 나를 위해 꽂아준 서울시청 고위공무원 출신의 청와대 행정관이었다. 나와도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부터 안면이 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총선에 출마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었는데, 국민당 원내대표가 내 오른팔인 이호정이었으므로 나에게 무한한 호의와 애정을 보이는 중이었다.
어떻게 할까. 국회로 보내줄까?
“…….”
나는 콜라를 한 모금 홀짝거리면서 계산기를 두들겼다.
양판석 대통령이 있던 시절에는 내가 국회에 사람을 꽂지 못했다. 아니, 안 꽂았다.
나는 오히려 내가 데려온 상이헌터 출신 국회의원들까지 방생하고서, 중앙정계에는 단 한 발자국도 들이지 않았다.
제아무리 내가 양판석 정권의 왕자였다지만, 이미 헌터 사회를 장악한 마당에, 국민당까지 손에 쥐면 독재를 극도로 경계하는 민주투사 양판석에게 수술 당할 것이라는 동물적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고, 양판석도 한 번도 그런 신호를 주지 않았지만, 양판석이 나에게 보여준 무한한 총애에는 분명 내 현명한 처신이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양판석은 대통령 임기를 마치며 내게 사람 하나를 던져 줬다.
바로 여기 있는 제1 행정부시장이다.
서울시청 고위공무원 출신의 청와대 행정관. 아무리 봐도 국회의원 출마 루트를 탄 사람이 아닌가?
즉, 양판석은 은퇴하면서 이제 슬슬 나도 국회에 내 파벌을 만들어도 된다는 그린라이트를 보낸 게 아닌가?
물론 원옥분 대통령의 독주를 경계하라는 임무를 맡긴 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스승님에게 하산을 허락받은 제자의 기쁨을 느낀 것 같기도 했다.
콜라 한 모금을 마시는 찰나의 순간에 이 모든 판단이 끝났다.
나는 콜라를 처마시고 취한 사람처럼 웅얼거리면서 제1 행정부시장에게 하소연했다.
“에이. 제가 밥 좀 사줬다고 서울시 공무원들 사기가 올랐겠습니까?”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게 다 시장님 덕분이지요!”
“아닙니다. 서울시 시정에 경륜이 있으신 우리 채정문 부시장님이 중심을 잘 잡아 주셨기 때문에, 제가 시장 업무에 잘 적응하지 않았나…….”
“어휴,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이제 부시장님 없이 어떻게 시정을 봐야 하나 요즘은 그 걱정밖에 안 합니다. 물론 멀리는 안 가시겠지만…….”
“앗……!”
채정문 부시장의 눈빛에 환희와 감동, 그리고 권력을 향한 욕망이 불타올랐다. 세종시 지역구 국회의원 출마를 보장하겠다는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모양이다.
물론 나는 조만간 국민당 지도부에서 연락이 갈 것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걸 설명하는 것부터가 쿨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이 사람을 추천하면 당 차원에서도 자체적으로 내부검증에 나설 것인데, 거기서 결격사유가 발견되면 바로 짤리는 거다.
그래서 ‘이번 총선에 국민당 국회의원 후보로 나갈 수 있게 밀어주겠다’는 말은 대놓고 하지 않았지만, 출마에 목마른 행정부시장에게 이 정도면 충분히 스윗한 메시지였다.
“시장님……!”
표정을 보니 벌써부터 [‘한승문의 남자’ 채정문……. 세종 갑에 출마]라고 보도자료부터 찍어낼 생각에 몸이 달아 있었다.
“저야 어딜 가나 있는 공무원인데 저 하나 없다고 시정이 무너지겠습니까? 제가 없었어도 시장님께선 현명하게 잘 풀어 가셨을 겁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참 감사하네요.”
“제가 청와대 행정관일 때부터 생각했습니다만, 비서실장으로서 국가에 헌신하시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보면서 나이를 떠나 참 존경심이 들었습니다.”
“아이고, 부끄럽게 왜 이러십니까.”
“특히 일본 내전 당시에 얼마나 많은 부침이 있었습니까? 그때 시장님께서 양판석 대통령님을 모시며 국궁진췌하시는 모습은, 제가 앞으로 어딜 가나 곱씹으며 본받을 겁니다.”
국회에 들어가서도 내 명령을 받잡겠다는 충성 맹세였다.
나는 그윽하게 미소지으며 부시장의 잔에 콜라를 따라 줬다. 부시장은 내 눈만 마주쳐도 좋아 죽겠다는 것처럼 웃었다.
피채원은 아저씨 두 명이 다정하게 콜라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보며 표정이 썩어들어갔지만, 은근히 안 그런 척 이쪽 테이블을 주시하던 서울시 공무원들은 평소 엄격하기 짝이 없던 부시장이 꺄르륵 웃어대는 걸 보고 경악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국회의원이 되어 승천하는 모습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흐흐…….”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출마 약속을 해준 이유는 딱 하나. 소문을 내기 위해서다. 서울시청이 세종정부청사에 있는 점을 이용해 개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아마 내일쯤이면 세종정부청사 전체에 서울시 제1 행정부시장이 한 마리 청룡이 되어 승천했다고 소문이 나겠지.
그러면 혹시나 싶어서 은밀하게 찾아와 ‘실은 나도 한승문을 흠모하고 있어요……’라고 고백하는 고위공무원들이 생길 것이고, 나는 진짜로 그중 몇몇을 채용해 국회의원 후보로 변신시킬 예정이다.
그렇게 세종시 공무원사회에 헛바람을 넣어서 고위공무원들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게 만들면 청와대에 정부장악력에 문제가 생긴다.
원옥분 정부의 고위공직자들이 야당 서울시장 품에 안겨 선거에 나간다? 청와대 참모들이 좋아 죽는 소리가 벌써부터 귀에 들린다.
그렇다고 선거가 코 앞인데 공무원들 손목을 비틀 수도 없고, 넋놓고 고위공무원들이 줄줄이 국민당으로 전향하는 걸 지켜볼 수도 없고…….
분명 여당은 국방당인데 공무원들이 국민당 서울시장 눈치를 보는 꼬라지가 대통령 귀에 들어가면 불벼락이 떨어질 거고…….
청와대 참모들 신세가 참 처량하게 됐다.
근데 아무튼 내 탓은 아닌? 것 같다.
‘필리핀 마석대란 짬 때렸으면 이 정도는 돌려줘야지.’
평화로운 콩고기 음식점에서 세종시 공직사회 뒤흔들 폭풍이 시작된 가운데, 피채원은 지겨운 표정으로 고기를 썰어 넘길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