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40화
EP 37-북상北上(3)
2차 카타스트로피가 한국에 가한 피해는 결코 작지 않았다. 낙후된 동네에서는 아직도 예비군이 괴수를 찾아 설산을 헤매고 있었고, 모든 경제정책의 근거가 부동산 안정성이었으니 경제적 피해도 극심했다.
하물며 베이징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사람들의 불안이 극에 달했다. 아시아가 망할 거라는 둥, 괴수가 한반도로 내려올 거라는 둥,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그러나 진실이 더 끔찍했다.
베이징의 붕괴로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이 보급선을 상실하자, 모스크바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민간에는 공개되지 않은 정보였지만, 적어도 전쟁의 그림자가 서서히 밀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 붕괴가 미국의 의도인지, 아니면 호루스 시스템 계산 미스에서 비롯된 미국의 실수인지.
과연 러시아 통일이 핵전쟁으로 이루어질지, 아니면 협박과 협상으로 이루어질지. 중국 총통이 살아 있기는 한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 * *
“아, 모른다니까요.”
내가 공직을 내려놨다고 아예 개털이 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옛날처럼 자리에 앉아서 삼라만상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헌터들이 집구석에 우르르 몰려와서 나를 쪼아대도, 썩 영양가 있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는 거였다.
근데 이놈들은 그걸 몰랐다.
“의원님, 그러지 말고 말씀 좀 해주세요. 지금 길드장들 모여서 난리도 아니라니까요? 베이징은 대체 왜 무너진 건데요?”
“나도 아는 게 없는데 뭘 대답을 해줍니까.”
“진짜 자꾸 섭섭하게 그럴 거예요?!”
홍선아가 대표로 땡깡을 부리자 집구석을 점령한 헌터들이 제각각 말을 보탰다.
“아니, 장관님. 진짜 너무하십니다.”
“연해주에서 전쟁 난다는 소리가 있던데, 그건 어떻게 된 일이랍니까?”
“우리 길드 후원회장님이 서울 재개발사업 허가 딴다고 건설용역 무지하게 데려갔어요. 정말로 서울탈환 들어가는 거래요? 그것만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네?”
젠장 할 북새통 같으니라고. 귀가 아플 지경이다.
이게 아파트 부녀회도 아니고 뭐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소파에 앉아있는 놈은 함경도 관리하는 치안관이었고, 냉장고에 기댄 여자는 SK 헌터스 길드장이었다.
그리고 내가 게이트 사태 터졌을 때부터 초상산업을 독점했으니, 나랑 면식 없는 고위헌터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따라서 국내 헌터들은 사건 터지면 나부터 찾아와서 조지는 루틴이 있었는데, 오늘도 홍선아가 우리 집에 좌표 찍고 몰려와서 대거리를 벌이는 중이었다.
사실 홍선아는 내가 괴로워한다는 사실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못된 놈 같으니.
“아니, 은퇴한 인간 찾아와서 조진다고 뭐가 바뀝니까? 초상관리부 장관은 따로 있는데 왜 애먼 사람을 잡아요!”
“서울 탈환 선동한 사람이 이호정 의원이잖습니까. 설마 단독행동으로 그랬겠습니까?”
“서중섭 헌터, 거, 말씀 잘하셨습니다. 국민당이 당론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는 사안을, 왜 그렇게 이 한승문이의 음습한 속내라고 단정하고 음해를 하십니까?”
SK 헌터스 길드장이 끼어들었다.
옛날에 서울 게이트 폭주 틀어막을 때 내 옆에서 베리어 깔아주던 친구였다. 그녀는 난데없는 서울탈환에 골이 났는지 영 심통 맞은 표정이었다.
“글쎄요. 제가 아는 의원님은 그렇게 말씀 안 하시던데요.”
“누군데요?”
“그건 말씀 못 드리죠.”
“이태영 전 외교부 장관이요?”
“네? 그, 그걸 어떻게-”
“SK랑 노는 사람이 그 양반 말고 또 있나. 아니, 그건 그렇고 그 사람은 워싱턴바라기 아닙니까. CIA 친구들하고 교감하면서 몇 마디 주워들은 모양인데, 원래 걔네들은 WPO 때부터 심심하면 나부터 손가락질하던 놈들이에요.”
“……그건 장관님이 그때 마석 가격으로-”
“아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그건 넘어갑시다.”
헌터들이 바보 천치라서 나한테 매달리는 게 아니었다. 이중에는 재벌가와 혼맥으로 엮인 사람도 있고, 몇 년째 대기업 PMC 길드장을 해먹고 있는 고위헌터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동북아시아 정세는 잔뼈 굵은 대통령도 파악을 못 해서 손을 떼고 있는 상황. 그런데 거기에 목숨줄이 달린 헌터들이야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그나마 내 성격을 가장 잘 아는 설진운이 의표를 찔러왔다. 녀석은 가벼운 추리닝 차림이었지만, 이 자리의 어떤 헌터보다 영향력 있는 축에 들었다.
“의원님. 정치적인 문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저희도 알아야겠습니다.”
“설 헌터, 나도 그게 궁금합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대로 사건이 커진다면 헌터들이 전장에 투입될 겁니다. 저희들이 왜 싸워야 하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진짜 모른다니까…….”
“대체 중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 * *
한반도 남부에서 대재앙이 예보되었을 당시, 중국은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했다. 한반도의 위기가 중국 동부에 영향을 미칠 것을 대비한 것이다.
인구는 마력을 불러온다. 따라서 한반도에 밀집한 마력이 중국 동부로 이동할 수 있음은 그리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력이 불러오는 것은 게이트 사태뿐만이 아니었다.
“대규모 마력 폭풍이 발생했습니다.”
“마력 폭풍?”
“연방정부에서 설명한 모래시계 전략은 익히 들어보셨을 겁니다. 두 개의 대도시에 인구를 밀집시키면, 그 중간 지점에서 마력이 응집되는 현상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반도 남부와 베이징이 두 개의 대도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황해 일대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마력 폭풍이 발생했고, 한반도와 중국 동부 해안선 일대에 전자기 펄스가 발생했으며, 황해에 서식하는 해양괴수들이 마력에 자극받아 폭주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설명을 마치자, 원옥분은 커다란 가죽의자에 몸을 깊이 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은 내몽골, 티베트를 비롯한 내륙을 ‘독립’시키고, 동부 해안가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굴러가는 나라다. 특히 중국 동부 해안에 밀집한 원전들은 터지는 순간 동북아시아의 멸망을 초래할 수도 있는 위협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EMP 때문에 동부해안 원전이 우르르 터져나가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애초에 작정하고 무기화시킨 EMP를 터뜨린 것도 아니고, 가장 사태가 심각했던 한반도에서조차 겨우 통신망을 무너뜨린 수준이었으니까. 굳이 예시를 찾자면 태양풍 플레어 때문에 국지적인 정전이 발생한 것과 비슷했다.
원옥분이 피곤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EMP 때문에 이 사단이 난 건 아니겠군.”
“사태 당시, 남해에서 해양괴수가 준동했다는 소식을 이미 들어보셨을 겁니다.”
“설진운이가 토벌했다면서.”
“괴수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아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톈진의 경우는 달랐지만요.”
비서실장이 위성사진을 내밀었다. 베이징 남동부의 항구도시는 이제 바다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원옥분은 위성사진에 뚫린 파란색 점을 보면서 충격을 금치 못했다. 해일을 몰고 오는 바다괴수는 영화 속에나 나오는 줄 알았건만.
“……저놈이 부산에 왔으면 수도가 날아갔겠군.”
“전술핵으로 잡기는 잡았다고 합니다만.”
“베이징이 폭발에 휘말린 건가?”
“아뇨. 사실 땅덩이 자체만 보면 베이징은 무사합니다. 문제는 사람이죠. 인민해방군이 무너지고 정부가 무너졌으니 중국의 수도권이 파괴됐다고 봐야 합니다.”
“리충빈 총통은 어떻게 됐고?”
“실종인지 사망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면 중국이 무정부 상태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원옥분의 머릿속이 정리됐다. 베이징 수도권이 파괴된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중국이 지금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수백 개의 핵탄두와 수백 명의 장성들이 혼란에 빠져 있다. 언제 어디서 뭐가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거기에 보급이 마비된 블라디보스토크 군벌과, 러시아 통일을 노리는 모스크바 정부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그 어느 때보다 동북아시아 핵전쟁의 가능성이 거대해졌다는 결론이 나왔다.
“……폭탄이구만.”
* * *
“그래서 무개입이 원칙이라고 대통령께서 국무회의에서 말씀하시더군요. 일단 경제 수습과 서울 탈환을 우선으로 하시겠답니다.”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기밀도 아닌데요.”
유재경 총리는 해맑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 꽃길만 걸을 생각을 하니 저절로 얼굴이 해사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의도치는 않았지만 유재경에게 꽃길을 깔아준 게 바로 나였다. 그는 아예 한식당에 전세를 내고서 한상차림을 깔았다.
솔직히 내가 부탁하면 손수 반찬을 입에 떠먹여 줄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서울탈환은 가부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였지요. 시의적절하게 타협해서 밀어붙이기로 결정됐으니, 조만간 신변을 정리하고 서울시장에 출마할 생각입니다.”
“아직 군대가 서울에 진입도 못했는데 선거를 시작한다고요?”
“일단 서울시장을 선출하고서. 시장이 탈환부터 재건까지 전부 담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잠깐만요. 서울시 지자체에 군대를 주겠다는 뜻입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일종의 자치경찰제를 도입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일일이 공문 보내면서 대응하기에는 워낙 위험한 지역 아닙니까.”
“말이 경찰이지 경찰병력에 헌터들도 있을 거 아닙니까. 허, 그 정도면 시장이 아니라 변경백인데요.”
“허허, 그래도 옛날처럼 서울시장이 전 국민의 5분지 1을 담당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서울시장이 서울에서 활동하는 군인들과 헌터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건, 서울특별시가 아니라 서울 자치령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사실 제주도지사부터가 시장을 임명하고 자치경찰을 부리고 있으니 선례가 없는 일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서울 백작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심지어 서울시장의 권한을 저렇게 펌프질한 건 출마를 준비하는 유재경 국무총리 본인이었다. 정확히는 유재경 라인이겠지.
“흐음…….”
이게 가능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한국이 시스템에 딱딱 맞춰서 굴러가는 나라가 아니어서였다. 그냥 알 만한 사람끼리 몇 다리 건너가며 쇼부 치는 식으로 대부분의 중대사가 굴러간다.
특히 정치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실질적인 사업건전성보다 우선되는 게 이러한 이해관계다. 대충 각 재서 윈윈하겠다 싶으면 세금 퍼부어서 밀어붙이는 것이다.
서울 탈환이 바로 그런 사업이었다.
유재경이라는 구심점을 서울 시장으로 만들고자 하는 세종시 관료들,
좌절한 국민 여론을 대규모 군사행동으로 뒤집으려는 정치권,
무너진 경제를 건설 호황으로 견인하려는 정부, 기업, 등등등…….
시작은 중국 파병에 밑밥을 깔기 위한 선동에 불과했지만, 어느새 북진론은 시대가 당면한 과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것도 나비효과라면 나비효과겠지. 결국 죽 쒀서 유재경 주는 꼴이 됐지만,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없던 뿌듯함도 생길 정도였다.
술 몇 잔에 취했는지, 아니면 희망에 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재경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아아, 사실 게이트를 전부 닫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헌터들이 마석광산 비슷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인근에 편의시설도 건설하고, 인프라도 제대로 해서…….”
“그러십니까.”
“그런데 이번에 서울시장 출마하겠다고 돌아다니는 양반 보니까, 거, 신수광 전 대표 시절에 좌장 노릇하던 사람이더군요. 무슨 피난민한테 나랏돈으로 땅 뿌리겠다고 선전하고 다니던데, 허, 내가 기가 막혔습니다. 한승문 장관님이면 몰라도 지금껏 나라에 기여한 것도 없는 사람이 말이야…….”
“하하…….”
“아, 근데 혹시 한 장관님이 이제 와서 서울시장 출마하겠다고 그러시진 않으시겠죠? 그러면 저 무섭습니다? 허헛!”
“자꾸 놀리시면 선관위 갈 겁니다.”
“으흠. 농담이 과했네요. 미안합니다.”
쯧, 원래 유재경이 가정적인 이미지가 있어서 그렇지 겸손한 사람은 아니긴 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 스타일의 공무원이다.
다만 개문 당시에 국가 사무 전반에 관한 이해도가 가장 높았고, 또 경제정책 결정권자에 걸맞은 능력이 있었기에 아직까지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지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유재경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세종시 카르텔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집단 중 하나였다.
세종시 공무원들은 국가 붕괴 속에서 유일하게 조직을 그나마 건사한 집단이었고, 또 신산업 도입기가 으레 그러하듯 공무원들에게 자연스레 권력이 쏠린 것이다.
따라서 세종시 공무원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유재경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강력한 권력자로 추대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서울시장 직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인사도 드물었고 말이다.
“뭐, 저도 유재경 총리님이 시장직 맡으시면 잘 풀어나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고된 일이겠지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면서도 부담이 되네요. 최대한 성실하게 임해보겠습니다.”
말이 서울을 탈환하고 재건하는 거지, 그 막대한 부동산의 건설과 분배를 책임지고, 헌터를 일일이 부려가면서 인명피해를 관리감독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사실 나도 지금 정치권에 재진입할 각을 노리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서울시장은 하라고 해도 무서워서 못할 것 같았다. 차라리 재보궐로 국회를 들어가지.
그나마 다행인 건 유재경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미 이긴 것과 다름 없는 상황이라는 거였다.
가장 위협적인 상대라고 해봤자 더블스코어 아래로 처지는 피난민 후보였다. 그것도 신수광 전 대표 옆에서 의원 해먹던 양반이다.
물론 수도권 출신 피난민들에게 원래 재산을 복구해주겠다는 공약은 실현 가능성을 떠나서 충분히 혹할 만한 주제였지만, 똑같은 주장을 하는 무소속 후보가 2명 더 있어서 그리 큰 위협은 아니었다.
나나 양판석이 출마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나름대로 염치나 체면이 있지. 애초에 내가 유재경에게 출마를 권했는데 뒤통수를 치는 건 좀 그랬다.
하여튼 서울시장 잘하라고 덕담이나 해주고 좀 말았다. 본인이 이미 시장에 당선된 것처럼 좋아하는 모습은 조금 그랬지만 말이다.
“예에, 아무튼 힘내십시오.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들어가십시오. 나중에 뵙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유재경 총리가 서울 시장에 당선되리라고 생각했다.
피난민 후보들이 단일화에 성공하고, 유재경이 구설수에 오르기 전까지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