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33화
EP 36-수도를 잃었습니다
개문開門. 최초의 게이트 사태는 세계의 주요 도시를 타격했다.
정치와 산업의 근간이 무너지자 인류는 순식간에 붕괴했고, 정부가 가까스로 재건되는 사이 너무 많은 것들이 폐허 속으로 사라졌다.
만약 게이트 사태가 각국의 수도권을 무너뜨리지 않았더라면, 하다못해 순차적으로 발생했다면 인류가 속절없이 무너지지는 않았으리라는 예측이 학계의 중론이다.
그러나 어째서 게이트가 주요 대도시에 열렸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존재한다.
게이트 사태가 ‘신의 심판’이라 하는 이들은 사람이 가진 원죄와 업보가 괴수를 불러온다고 주장했다.
게이트 사태가 ‘이계인의 침공’이라 하는 이들은 괴수들이 인류의 주요 거점을 타격했다고 주장했다.
게이트 사태가 「태양이 초속 200km로 2억 5000만 년에 한 번씩 우리 은하(Milky way galaxy)를 공전하는 과정에서, 우주의 특정 부분에 존재하는 마력분포지대를 통과하며 발생한 과학적이고 주기적이며 필연적인 현상」이라 하는 이들은 인류가 마력을 품을 수 있으므로, 마력 생물을 사냥하고자 하는 외우주의 포식자들을 불러온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 어떤 이론도 실질적으로 입증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치적 사정이 이러한 해석들을 만든 것에 가깝다.
심판론을 부추기며 헌금을 시원하게 땡기거나, 침공론을 가져와서 지금은 전시 사태이므로 선거를 무효화시키고 계엄령을 무기한 연장한다든가…….
하지만 인구의 밀집이 게이트 사태를 촉발한다는 현상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된 지역 중 하나였다.
* * *
“정치 할 거야? 안 할 거야?”
“아, 안 할게요. 다시는 안 할게요…….”
설진운은 결국 불출마 선언을 내뱉고 나서야 여도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눈이 시꺼멓게 죽어 있었다.
그렇게 목적을 달성한 홍선아는 한참을 킥킥거리다가, 문득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녀는 꽃무늬로 장식된 카드 한 장을 내게 건넸다.
“아, 맞아. 이거 받으세요.”
“뭡니까?”
홍선아는 말없이 웃으며 쑥스럽다는 듯 설진운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다소 음흉하고 야시꾸리했다.
섬뜩한 느낌이 등뼈를 타고 오른다. 동물의 왕국에서 구렁이가 작은 토끼를 먹어치우는 걸 보는 느낌이 이런 걸까.
황급히 카드를 펼쳤다.
청첩장이었다.
* * *
다음으로 홍선아를 만난 곳은 부산 강서구 인근의 결혼식장이었다.
신부대기실 근처를 서성거리던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서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의원님. 결국 귀국하셨네요?”
“웃지 마세요. 한 대 치고 싶으니까.”
홍선아는 하얀 드레스가 아니라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신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즉, 설진운을 오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청첩장을 건네주던 것도 가증스런 헛짓거리였다.
“그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압니까?!”
“장난쳐서 미안하다니까요.”
전혀 안 미안한 표정이었다.
“근데 제가 진운이랑 결혼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헌터 협회 협회장이랑 부협회장 시절에는 내내 붙어 다녔는데?”
“둘이 처음 만났을 때 설 헌터는 고등학생 아니었습니까?”
“근데요?”
헛소리에 대꾸한 내가 잘못이었다. 무관심으로 응대하자 재미가 없어졌는지 홍선아는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떠나갔다. 피채원이 붙잡혔다.
간절하게 나를 쳐다보는 피채원을 버리고 나서야 신부대기실에 방문할 수 있었다.
대기실 입구에는 덩치 큰 경호원들과 비서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서 입구를 막고 있었는데, 그들은 내 얼굴을 보고 살짝 목례하더니 길을 터줬다.
그렇게 만난 신부는 웨딩드레스치고 굉장히 단정하고 검소한 옷을 입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기자들한테 흠 잡힐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이토록 철두철미한 신부는 이호정이었다. 녀석은 지친 기색으로 소파에 반쯤 누워 스마트폰을 두들기고 있었다.
“야. 너는 왜 홍선아 헌터를 시켜서 청첩장을 갖다 주냐?”
“어? 오빠 언제 왔어요?”
“청첩장은 직접 서면 제출이 기본인 거 몰라?”
“전화하니까 번호도 바뀌어 있고. 카톡 청첩장은 답장도 안 하고. 프랑스 간다 그랬으면서 어디 있는지는 알려주지도 않고, 아, 지금 말하는 거 보니까 카톡 청첩장은 아직도 확인 안 한 모양이네요?”
따져 묻는 말솜씨는 여전했다.
“어, 음. 청와대 보안폰 갖다 버리면서 번호가 바뀌었었나 보네. 비서실에서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채원이 탓하기는…….”
이호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행히도 신부대기실에는 사람이 없었고, 내 전직 비서가 나를 쪼는 걸 구경하는 사람도 없었다.
“하여튼 오빠는 주변에 연락 안 하는 버릇 좀 고쳐요. 윗사람 전화는 벨소리까지 구분해 놓고 칼 같이 받으면서, 정작 지인이랑 가족들한테는 연락 잘 안 하잖아. 그거 은근히 위아래 나누는 거 아녜요?”
“너랑 일호도 전용 벨소리는 있어. 전화를 자주 안 걸 뿐이지.”
“됐으니까 어서 나가요. 앞에서 못 들어오게 막지 않았어요?”
“비켜주던데? 아니, 신부대기실도 막아놓을 거면 결혼식은 왜 올리는 거냐?”
“대기실에 국회의원들만 득실거리면 식장 들어가기도 전에 탈진할 것 같아서 그랬죠. 그래서 그냥 일호 쪽으로 다 몰아놨어요. 초상관리부 장관까지 하다가 은퇴했으니 그쪽이 더 영양가 있을지도 모르죠.”
“야, 그래도 네가 현역인데…….”
이호정은 국민당 국회의원이었다. 심지어 짧지만 원내대표까지 해봤고 말이다. 비록 내 이름값을 빌리긴 했지만서도.
그간 고생이 많았는지, 못 보는 사이에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미모는 여전했지만 원래 날씬한 애가 살까지 빠진 바람에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았다.
심지어 권력을 향한 야망으로 번들거리던 눈빛마저 어느새 빛이 바랜 것 같기도 했다. 그냥 대기실에 버려두고 가기엔 좀 그래서 말이라도 더 붙여봤다.
“흠. 일호 은퇴하면 결혼하겠다던 소리는 들었는데 진짜로 할 줄은 몰랐네. 나라 분위기도 어두운데 조금 더 미룰 줄 알았지.”
“사람들 눈치 보면서 조금씩 미루다간 영영 못 할 것 같아서요. 안 그래도 일벌레처럼 사느라 집에 신경도 못 쓰는데, 잡아 놓을 수 있을 때 잡아 놔야죠.”
“일호가 어디 도망갈 애냐?”
“그렇긴 해요.”
이호정은 힘없이 웃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이번에 게이트 열리면 나라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죠.”
“……그게 국회까지 다 퍼졌어?”
“청와대에서 온종일 대피계획만 세우고 있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죠.”
미국의 불길한 예언은 정부 고위관계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한미 합동사령부에서도 매일 워게임만 돌리고 있으니 군부에도 심상찮은 분위기가 퍼졌다고 봐야 했고,
그나마 한반도에 다가오는 위기가 민간 차원까지 전파되지 않은 이유는, 원옥분 대통령이 집권과 동시에 언론을 철저히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듣자 하니 양판석 정권 당시에 나랑도 잘 안 만나주던 언론사 사주를 안드로메다로 날렸다고 한다. 권한대행 시절에 칼춤 추던 것처럼 말이다.
선거 포스터에 적혀 있던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문구가 여러 의미로 증명되는 사건이었다.
이호정이 첨언했다.
“저는 언론통제 풀리는 것도 시간문제니까 천천히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정부가 잘하고 있는 편이긴 해요. 제천 사태 뒷수습까지 포함해서.”
“그래. 대통령 업무 시작하자마자 제천시 합동분향소 찾아간 거 보면 정치감각은 살아 있는 것 같긴 했다.”
“제천 사태로 임기 시작부터 지지율 바닥 치니까 이 악물고 달리는 중이에요. 이번에 유현종 강원군구사령관을 합참의장으로 올리면서 인사청문회를 했는데, 국방당 원옥분계 의원들이 의정부 후퇴랑 속초 후퇴 거론하면서 엄청 띄워주더라고요. 한미연합사 사령관도 미군이 아니라 국군이 가져온 거 아시죠?”
원옥분 대통령은 권한대행 시절의 경륜을 살려 빠르고 신속하게 국내의 혼란을 가라앉혔다. 정확히는 여론을 진정시켰다.
언론플레이와 군부 인사 단행. 그리고 한국에서 손을 떼고 싶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한 한미연합사 작전권 이양까지.
사실상 타협과 날조로 이루어낸 허울뿐인 안정이었지만, 그런 안정이 뱅크런과 경제공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알 만큼 아는 인간들 사이의 혼란만큼은 막아내지 못했다.
결혼식장에 모인 정부 관계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둡고 불안해 보였다.
* * *
정치인은 경조사가 업무의 연장이었던 만큼, 이호정과 양일호의 결혼식장은 국회를 연상시킬 정도로 정치판에 가까웠다.
하필 양판석이 주례를 보는지라 나는 별달리 친한 사람도 없이 오도카니 앉아서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나 청취했다.
“사람이 많다고 게이트가 열릴 거면 중국 동부를 놔두고 왜…….”
뒤쪽에 앉은 안행부 장관이 이름 모를 공무원과 쑥덕거렸다. 양판석 정권 때는 국무조정실에 있던 것만 기억 난다.
“7억 명이나 살아남았다는 선전을 믿으십니까?”
“중국 정부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2억 내지 3억은 있겠지. 그러면 거기에 열려야지 왜 여기에 열리냐고…….”
“거기라고 무사했나요. 우리 멀쩡하게 지내는 동안 중국에선 계속 게이트 새로 열렸습니다. 거기다가 지리적으로만 따지면 우리도 중국 동부죠. 국적이 다를 뿐이지…….”
“우리가 중국 동부라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아니, 지도상으로…….”
“허헛. 녹취록 잘못 걸렸다가 얻어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자네 여의도연구원서 쪽지 돌린 거 못 봤어? 여론이 문제가 아니라 말실수했다가 표 떨어지면 위에서…….”
“아, 죄송합니다.”
그렇게 엿들을 정도로 영양가 있는 대화는 아니었지만, 저 양반들이 주변에 살짝 들릴 정도로 조심성 없게 떠들었다는 데에 의의를 뒀다.
알 만큼 아는 사람들은 정보가 들어간 모양이었다. 이쯤 되면 은닉자금은 다 해외로 빠져나갔다고 봐야 했다.
그렇게 계속 자리를 지키다가 축사 한 번 해주고, 결혼식장 앞에 있는 기자들 앞에서 덕담 몇 번 읊은 다음에야 마음 편한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나는 거침없이 신혼집 문짝을 열어제꼈다.
“너희들 축하한다.”
“왔어요?”
신부는 화장 지우고 소파에 누워 있었고, 신랑은 양복 차림으로 축의금통 엎어놓고 돈 세고 있었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양일호 옆에 앉아서 5만 원권과 1만 원권을 구분했다. 둘 다 가족이 없으니 나라도 도와야지.
“신혼여행은 안 가냐?”
“여행은 무슨. 이 와중에 출국하면 도피죠.”
“제주도라도 가던가.”
“비행기가 이번 주 토요일에 떠요. 옛날처럼 매일 뜨지는 않으니까 바로는 못 가죠.”
양일호는 피곤에 절은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탄했다.
“결혼도 일이네요. 일이야.”
“그래도 오늘이 너희 결혼식인데 얼굴 좀 펴라. 신혼부부 아니냐.”
“동거를 너무 오래 했어…….”
이호정은 따질 기운도 없는지 소파에 누운 상태로 양일호의 등을 툭 찼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결혼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기분이다.
“너희들 좀 있다가 감 기자님네 가족들도 다 올 건데 괜찮겠어? 집안 정리라도 미리 해 놔야지. 고기라도 구워 먹을 거면.”
“지윤이 시키는 건 어떨까요? 손가락 한 번 까딱하면 되잖아.”
“걔 요즘 사춘기라 말도 잘 안 들어.”
“지윤이는 초등학생 때부터 사춘기였어요.”
“하긴, 사춘기가 아닌 적이 없었지.”
파김치 상태로 누워있던 이호정이 소리쳤다.
“아, 배달시켜! 배달!”
결혼식날 저녁에는 역시 짜장면이었다.
* * *
“건배!”
“백년해로 하십쇼!”
결혼식 뒤풀이는 소소했다. 전직 대통령이 끼어 있긴 했지만.
개문 사태 당시 한강에서 요트 타고 도망치던 멤버에다가 헌터들 몇 명 끼어 있는 홈파티였는데, 다 아는 사람들이었던지라 화려하진 않았어도 정겨운 맛이 있었다.
“지윤이가 이번에 신종괴수 찾았다는데요.”
“오, 기특하네. 어떻게 생긴 놈이냐?”
“한 20년 마약한 피카츄……?”
피채원 무릎 위를 차지한 감지윤이 헌터들 상대로 썰을 풀었다. 강시호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사이에 끼어서 귀를 기울였고.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양일호와 이호정은 부엌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서로를 향해 은근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설진운은 약간 어색하게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소개받았고, 홍선아는 웃고 있었지만 묘하게 쓸쓸한 표정으로 베란다에 혼자 나가서 밤바람을 맞았다.
그리고 나는 양판석과 감 기자 사이에서 술이나 따르고 있었다. 살짝 나이 먹은 사람들끼리만 쑥덕대는 느낌이 있긴 했다.
“전국에 헌터를 깔아 놓든. 국제기구를 끌어들이든. 이대로 멍하니 있다가 얻어맞으면…….”
“그렇다고 국민들 상대로 우리 다 망할 수도 있으니까 발 닦고 기도나 하라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치안이 무너질 게 뻔한데.”
“맞습니다. 언젠가는 알려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닙니다. 기자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제천 사태 한 방에 한국 금융이 휘청거렸습니다. 부동산 파생상품은 싹 다 전멸했고요. 저는 우리나라 경제가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은 몰랐습니다.”
“하긴. 대비할 시간도 부족한데 치안까지 엎어지면 해답이 없어질 걸세. 일단 경제부터 어떻게든 회복시키고…….”
"그래도 호루스 시스템 확보했으니 제때제때 대피령 정도는 내릴 수 있겠습니다. 안 그랬으면 양심이 좀 찔렸겠어요……."
사실 감 기자도 공직을 내려놨으니 이 중에 공직자는 없었다. 그러니 지금의 대화는 반쯤 술주정에 가까웠다. 반쯤은 진담이었지만.
술 들어간 사람들 이야기라 별 멕아리는 없었지만 쓸만한 정보가 여럿 오갔다. 주로 감 기자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였다.
“미국 PMC에서 한국 시장을 노려요?”
“예. 아무래도 그쪽 동네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모양입니다.”
“높은 양반 하나가 주식 놀이하려고 흘렸겠지. 어쩐지 유재경이가 금감원에 들락거리더만…….”
나는 이렇게 모인 김에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끌어들이자는 소리를 꺼내 보려고 했다.
미국은 자립할 수 있지만, 아시아권 국가들은 자립이 불가능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식량이든 경제든 서로 너무 깊게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니 하나하나 찾아가 설득하면 긍정적인 사인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충 그런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찰나였다.
“음?”
양판석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문자인지 카톡인지 모를 화면을 슬쩍 확인하더니,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손가락질했다.
“테레비 좀 틀어보게.”
“예.”
티비를 틀었다. 헌터랑 연예인 몇 명 나와서 이산가족 찾아주는 예능이 방송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면이 변했다. 시뻘건 뉴스속보 문구가 화면의 아래쪽을 채우고 있었다.
‘양정석 씨, 긴급 기자회견 발표’라고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