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32화 (232/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32화

EP 35-국제사회(4)

[아, 여태까지 기사회에서 일하고 있던 건가?]

“예에. 원래는 잠깐만 들릴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붙잡혀서 손이나 보태고 있네요. 공기도 좋고 밥도 맛있는 곳이라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습니다. 허헛.”

[그러면 호루스 그것도 자네가 손댔겠군. 나는 미국이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나 싶었지. 자기네 밥그릇에 목숨 거는 친구들 아니던가.]

“사실 저도 살살 찔러본 수준이었는데 너무 쉽게 밝힌 느낌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 이유가 있더군요.”

미국이 추악한 과거사 좀 털어내겠다고 일방적인 손해를 감수한 건 아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호루스 시스템의 실체는 생각보다 맥빠지는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 게이트가 열리는지 자동으로 알려주는 오버 테크놀로지가 아니었다.

호루스 시스템은 그 뭐냐. 약간 푸르딩딩한 일기예보 비슷한 거였다.

위성사진 상에 구름처럼 떠다니는 마력이 이리 뭉쳤다가 저리 뭉쳤다가 반복하는데, 마력이 바람을 타고 다니지는 않으니 그냥 규칙성 없이 아무렇게나 부유하는 식이었다. (혹은 우리가 아직 규칙성을 찾아내지 못했거나)

그러다가 마력이 너무 많이 뭉치면 게이트가 생기는데, 무조건 생기는 건 또 아니다. 생기는 경우가 있고, 아닌 경우가 있는데, 그 차이점은 아직 연구가 덜 됐다더라.

마력이 뭉치는 방식도 다양했다. 소용돌이처럼 뭉치거나, 안개처럼 뭉치거나, 심지어 공처럼 뭉치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마력을 S파와 N파로 구분하고, 또 원소와 결합했을 때 이상기후를 일으키는 마력이 따로 있고, 게이트에서 금방 나온 싱싱한 마력이 있고, 지구 물 좀 먹어서 탁해진 마력이 있고…….

초상관리부 장관까지 해본 내가 봐도 이해를 못 하겠는데 일반인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미국이 호루스 시스템으로 전세계의 게이트 발생을 예측했던 이유는 단 하나.

“그 조잡한 위성사진에 박사급 인력을 수만 명이나 붙여놨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미국이 호루스 시스템으로 게이트 발생을 예측할 수 있었던 건, 부족한 기술력을 사람을 갈아 넣어서 커버했기 때문이었다.

옛날 냉전 시대에 핵실험 연구소를 중심으로 도시가 만들어졌던 것처럼, 아예 작은 도시 몇 개를 연구소로 개조해버린 것이다.

심지어 이번에 공개된 논문을 보면, 마력역학인지 뭔지 그런 분야를 새로 개척해서 상당 수준의 연구를 끝낸 상태였다.

하긴, 관계자가 그렇게 많으니까 중국한테 연구원을 도둑맞지. 이제야 알겠다.

하여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러나저러나 미국에 손 벌려야 하는 처지는 그대로일 것 같습니다. 푸르딩딩한 위성사진 던져주면 뭐합니까. 정작 분석할 사람이 없는데…….”

[오히려 더 안 좋아졌지. 이제는 돈 주고 맡겨야 하는데.]

그렇지.

양판석의 말처럼 이제는 게이트 예측을 미국에게만 의존할 수 없게 됐다. 기술을 다 공개했으니 당신네 나라 게이트는 당신네가 예측하라 그러면 뭐라고 대답할 건가.

오히려 이제 미국한테 ‘우리나라 좀 관측해주십시오-’ 하고 돈이라도 찔러줘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여튼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세상일이었다.

“미국에 돈 주는 건 상관없고, 그냥 유럽에 했던 수작질만 막으면 되는 경우만 아니면 오히려 손해를 보겠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냥 우리나라만 이득 봤다고 그러게.]

“그러면 너무 정 없어 보이잖습니까.”

[자네도 보면 성격 참 이상하다니까…….]

* * *

미국이 호루스 시스템을 토해냈다고 만사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다만 ‘유럽’ 당하지 않을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됐을 뿐이었다.

우리는 이제 제천 사태의 피해를 씻어내고, 미래의 위협을 대비해야 했다.

일단, 충청방어선 이남이 게이트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새로운 전략을 세우고, 흔들리는 경제를 복구하고, 불안에 떠는 시민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유재경 총리님, 수고 많으십니다. 저번에 부탁하셨던 에너지배터리 관세 개정안 말인데요. 독일 기민당에서 일단 받아다가 유럽의회에 올려주려는 모양입니다.”

[아아! 다행입니다! 대통령님께서도 주의 깊게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일단 안건만 올려주시면 기사회랑 적절하게 공조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나저나 한승문 장관님, 혹시 각료이사회에 인맥은 없으신지…….]

"왜 없겠습니까?"

한국 정치인들이 서로를 향한 신뢰와 믿음이 없는 거지, 능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원옥분 대통령은 아무리 세상 좆같은 놈과도 기꺼이 손잡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내 뒤통수만 알아서 잘 챙기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물론 기사회에 짱박힌 내가 원옥분 정부와 적극적으로 협력하자 국민당에서는 배신자라고 난리가 났지만, 뭐 어쩌겠는가.

국민당은 애초에 원옥분이 대통령 되는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을 얼기설기 모아 놓은 곳이었고, 그나마도 신수광이 날아간 이후로는 당에 망조가 들고 있었다.

친한 동생 2명이 아직 거기 남아있긴 했지만, 양일호는 이미 은퇴했고 이호정은 알아서 밥그릇 챙길 놈이니 뭐 괜찮겠지.

물론 정치인도 공무원도 아닌 내가 이렇게 뺑이를 치니 이따금 자괴감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내게도 떡고물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물론입니다. 잠시 옛날이야기를 하죠. 제가 예전에 대선 패배를 인정하며 말했듯, 저는 미국이 너그럽고, 희망적이고, 포용적이고,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 자세는 세계시민들을 향해서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이제 미국을 위한 미국은 없습니다. 모두를 위한 모두가 있을 뿐입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정치 지도자들 또한 용서와 희망의 시대를 바라고…….]

내가 미국과 척지기 싫어서 적당히 타협했듯이, 미국도 나를 향해 개사료 좀 던져주고 앙금을 털어내려 했다.

미국이 전 세계를 위해 호루스 시스템을 공개한 구국의 결단은, 나와 뤼미에르, 그리고 미국 대통령의 아름다운 우정이 빚어낸 산물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중국의 파렴치한 해킹 시도도 흐지부지 역사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고 말이다.

미국 전직 대통령 측근 몇 명이 감방 들어간 것만 빼면 모두가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이게 바로 상생과 타협의 정치 아닐까? 오늘도 국제사회는 평화로웠다.

나는 흐뭇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짐짓 미소지었다.

“채원아.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면 삼류고, 알게 하면 이류고, 증권가 찌라시로 흘리는 게 일류다…….”

“이거 오뎅고로께 남은 거 어떡할까요.”

“버리렴. 그걸 왜 아직도 들고 있니?”

우리는 프랑스 파리에서 모처럼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국경없는 기사회는 손님들에게 집과 음식을 제공해 줬다.

물론 내가 휴가 나온 여도연처럼 아예 퍼질러 노는 건 아니었다. 이미 생활패턴 자체가 휴식을 거부하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외부인으로서 뤼미에르가 껄끄러워하는 소일거리를 해결해 주는 중이었는데, 그게 나름대로 재미있는 여가생활이었다.

한국에서는 뭐만 하려고 하면 구시렁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는데, 유럽에서는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막 질러도 됐으니까.

어제는 헌터 사조직으로 깡패짓하던 덴마크 사민당 당수를 조졌다. 오늘은 뇌물 먹은 유럽중앙은행 부총재를 날려주마. 아니면 아예 도륙을 내버릴 수도……!

대충 이런 느낌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선아 씨! 그리고 진운 씨까지? 아니 어떻게 이런 먼 곳까지 오셨습니까.”

“지윤이가 날려줬죠. 뭐.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입니다, 의원님.”

홍선아와 설진운이 프랑스에 찾아왔다.

홍선아는 세계초인기구 한국 대표로서 프랑스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러 왔고, 설진운은 기사회 한국지부장으로서 이집트에 원정 가는데 프랑스에 잠시 들린 것이었다.

즉, 한국 최정상 헌터들이 바쁜 와중에 우연히 일정이 겹쳤고, 그 김에 마침 프랑스에 있던 나까지 보러 온 것이었다.

“이야,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이렇게 있지 말고 일단 들어갑시다.”

홍선아는 호주에서 하얗게 불태운 여파가 아직 남아있는지 연약하게 비틀거리는 느낌이 살짝 있었고, 설진운은 어느샌가 소년티가 아예 사라져 있었다. 미남이 됐구나.

그때, 모처럼의 휴가에 온종일 잠만 자던 여도연이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어. 니들이 여긴 무슨 일이냐.”

내가 보기엔 추한 몰골이었지만, 두 헌터들에게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던 모양이다.

“도연이 언니!”

“누나, 잘 지냈어요?”

두 헌터는 여도연에게 달려들었고, 나는 이들이 내게 용건이 있는 게 아니라, 여도연을 보러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3명이 서로 각별한 사이였고, 유달리 심각한 용건도 딱히 없었기에, 모처럼 즐겁고 여유로운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거기에 뤼미에르가 바쁜 와중에 비싼 와인 몇 병만 선물로 놔두고 일터로 떠나갔고, 술잔이 몇 번 돌자 이역만리 프랑스 땅에서 저절로 웃음꽃이 피어났다.

“저기, 한승문 의원님.”

설진운이 정치하겠다는 소리만 안 했어도 완벽했을 것이었다.

“그…… 상담드릴 내용이 조금.”

“어어! 우리 설 헌터 말은 뭐든지 들어 드려야죠.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말해보세요. 불법만 아니면 뭐든지 괜찮습니다. 하하!”

“그게…… 사실 공천 제안이-”

“하지마.”

“예?”

“하지 말라면 하지 마!”

밥상 엎으려다가 참았다. 밥맛이 뚝 떨어져서 눈을 희번뜩 뜨고 씩씩거리고 있으니, 나처럼 정색한 여도연이 설진운을 채근했다.

“어떤 새끼가 꼬드겼냐?”

“네?”

여도연과 나는 설진운을 붙잡고 털어댔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야. 똑바로 말해. 누가 꼬드겼어.”

“하지 마! 그냥! 하지 마!”

“지금 불면 좋게 끝나.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말하자.”

여도연이 설진운의 어깨에 팔을 두르자 녀석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그, 그, 양정석이란 분이 찾아와서…….”

“이, 씹.”

양판석 아들놈이 설진운에게 사악한 마수를 뻗었다. 정치지망생이 셀럽 붙잡고 늘어지는 거야 하루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공천 이야기까지 오갔다면 양정석이가 이미 공천권을 가진 핵심 당직자와 연결됐다는 뜻이었다. 뇌내망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정치대가리를 굴리고 있었으나, 여도연은 나와 다른 부분을 주목했다.

“근데 왜 정치를 하고 싶었던 거냐?”

“…….”

“꼬드김에 넘어간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니야.”

“……그냥. 헌터로 활동해봤자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는 것 같아서요.”

“뭘 바꾸는 게 굳이 너야 할 필요가 있어? 아니. 뭘 바꾸고 싶었는데?”

“……누나도 아시잖아요. 괴수 다 잡으면 좀 괜찮아질 것 같았는데, 기업에서는 게이트 전부 닫지 말고 놔두라고 그러고, 그러다 사람 죽으면 괴수피해가 아니라 산업재해라고 그러고. 그러다가 정작 제천에서 사람 그렇게 죽어 나가는데 기업 쪽 헌터들은 자기 구역만 지키다가 나중에 와서 사진만 찍다 가고…….”

“헌터가 히어로에서 노동자가 됐다 이거냐?”

“……비슷해요.”

“야. 진운아. 조금만 들어봐라…….”

여도연이 즉석에서 인생상담을 해주는 동안, 나는 슬슬 눈치를 보며 홍선아에게 다가갔다.

홍선아는 누가 홍선아 아니랄까 봐 이 와중에도 간식이나 우물거리면서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어이. 선아 씨.”

“왜요? 의원님?”

“이거 해결해 달라고 데려온 거죠?”

“아닌데요? 회의 참석하러 온 건데요?”

“정기회의 다 씹고 원정 다니는 사람이?”

“들켰넹.”

“김춘식 정신인지, 김춘식 소울인지는 나도 존중을 하겠는데, 회의는 좀 제대로 참석을 하십시다.”

“봐서요.”

“에이씨, 진짜.”

원래부터 의뭉스럽던 사람이 호주에서 죽다 살아나더니 여우가 됐다. 옛날보단 밝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 말이 아예 안 통하는 구석이 있어서 골치 아프다.

그래도 압구정에서 박박 구르던 대학생이 어느 정도 헌터로서 자리를 잡았는지, 이제는 정치적인 사리분별이 능숙해졌더라. 약간 흐뭇했다.

나는 홍선아를 슬쩍 찔러봤다.

“그래서, 양정석 씨가 설진운 헌터만 찾아간 건 아닐 테고.”

“제가 창당준비위원장을 하라고 그러던데요?”

“뭐요? 신당이라도 만들겠다는 겁니까?”

“헌터들이랑 그 팬덤을 모아서 3당을 만들자고 하더라고요. 국방당 내부에서 호응해 주는 사람들도 꽤 많고요.”

“하긴. 원옥분이 집권했으니 국방당 내부에 양판석계가 붕 뜨긴 했죠. 근데 그렇다고 양정석 씨가 리더십이 있는 건 아닐 텐데……?”

“연로하신 의원님들은 양정석 씨를 허수아비로 미는 거고. 양정석 씨는 나름대로 지분 확보하려고 헌터들을 끌어들이는 거 아니겠어요? 마침 구색도 좋잖아요?”

“양판석 정부의 컨셉이 초상혁명이었으니. 헌터들 우대하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그림이네요. 제천 사태 직후라 시국도 불안정하니까…….”

그런데 왜 하필 홍선아를 창당준비위원장으로 미는 걸까.

나도 살짝 찔리는 게 있어서 입을 열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그걸 눈치챈 홍선아가 싱긋 웃었다.

“한승문이 헌터 협회를 자기 사조직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폭로해주길 바라는 눈치더라구요.”

“앗.”

“제가 의원님을 엄청 싫어하는 줄 알고 있었어요. 뭐, 사조직 운운한 게 아예 틀린 소리도 아니니 당연하겠지만…….”

홍선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겠어요. 업보라고 생각하셔야지.”

“편하게 쉬는 사람을 굳이 국내로 데려가야겠습니까?”

“우리를 다 정치판에 끌고 들어와 놓고, 혼자만 빠져나가시려고요?”

“말이 좀 치사한데요.”

“다 배운 거죠. 뭐. 한국행 비행기는 내일 저녁이에요.”

EP 35-국제사회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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