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31화 (231/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31화

EP 35-국제사회(3)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김해 국제공항에는 전투기, 전투헬기, 전투식량만 득실거렸다. 그래서 분위기가 조금 전투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민간인, 택시, 음식점도 좀 보이니까 공항 느낌이 난다. 심지어 익숙한 뒤통수까지 보였다.

여도연이었다.

“어이!”

“거깄었냐.”

내가 이제 정치인도 아닌데 경호처에 손 벌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휴가 낸 여도연을 유럽에 끌고 가기로 했다.

사실 어지간한 경호원보다는 여도연이 낫다. 수류탄 날아오면 나랑 누나랑 손잡고 피채원을 둘러싸 3단 합체하면 이론상 무적이었다.

이론상.

“왜 찾기도 힘들게 구석탱이에 박혀 있어? 어둠의 자식들이야?”

“어묵고로께나 먹어.”

“참나, 하다하다 고로께에 오뎅을 처넣네…….”

“맛있는 건 유럽에서 먹자고.”

그녀는 와이셔츠에 양복바지 차림이었다. 치안관 복장에서 검푸른 코트만 벗은 거였다.

모처럼의 유럽여행에 들떴는지 꽃무늬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여행가방을 들고 왔다. 아마 과자 따위나 들어 있을 것이었다.

“채원이 너 간만에 보네. 잘 지냈어?”

“언니 오랜만이에요.”

“승문이 수발드느라 고생이 많다.”

“아니에요.”

아니, 이 사람들 보게.

“수발을 들긴 누가 수발을 들어?!”

* * *

“의원님, 일어나시죠.”

“어…… 어?”

“아침이에요. 이제 곧 내리셔야죠.”

“어…….”

“조식 안 나온다니까 여기 귤 드세요. 공항에 기자들 있으니까 빗질도 하시고, 의족도 끼우시고요.”

기내식으로 나온 오뚜기 카레라이스 먹고 잠깐 졸았는데 8시간이 지나 있었다.

비행기는 아직 어둑어둑했고, 공기는 꿉꿉하다. 피로가 쌓여서 그런지, 늙어서 그런지 몸이 잘 안 움직였다.

담요 안에서 꼼지락 꼼지락거리며 기지개를 켜니, 창문에 달라붙은 여도연이 보인다.

“뭐해. 밖에 뭐 있어?”

“어…… 뭐가 있긴 있지.”

괴수라도 나왔나. 인생 패턴상 슬슬 트러블이 생길 때긴 한데.

대체 뭐가 있나 궁금해서 조그마한 비행기 창문에 얼굴을 쑤셔 넣었다.

아침 해와 함께 솟아오른 에펠탑이 있었다.

“이야아…….”

서서히 동이 트자 뭉게구름이 흩어진다. 그 아래로 프랑스의 심장, 파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도 많이 바뀌었네.”

“옛날에는 저기가 전쟁터 아니었냐? 건물들 싹 다 세운 거야?”

파리는 지난 대재앙의 상처를 씻어낸 뒤였다. 낮고 단단하게 솟은 건물들 사이로 수많은 차량이 도시의 혈관처럼 흘러갔다.

도시의 규모도 거의 2배로 커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프랑스의 심장이었지만 이제는 유럽 대륙의 중심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이 유럽에 보급하는 모든 물자가 파리를 거치는 만큼 수송기도 우글거렸다. 공항이 미어터지는 바람에 우리 여객기는 인근을 몇 바퀴 돌고서야 착륙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샤를 드골 국제공항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여기에 비하면 김해공항은 고속도로 휴게소였다.

문득 이제는 없는 인천공항이 그리워졌다. 옅은 그리움과 함께 공항을 나섰다.

“장관!”

“오.”

노아 뤼미에르가 공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 *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군요.”

뤼미에르가 혀를 찼다. 눈치를 보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모양이다.

“미국 쪽에서 아무 말도 없었습니까?”

“오늘 저녁에 미국 대사가 급하게 만나자고 하긴 했습니다.”

“원래 말 안 하려다가 우리 만난다니까 부랴부랴 약속 잡은 거 같은데요.”

“그 치들은 일관적이라 좋군요. 그런데 부랴부랴가 무슨 뜻입니까?”

국경없는 기사회 본부. 뤼미에르의 집무실에는 나와 그녀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일어난 비상사태, 그리고 미국이 경고한 ‘전조현상’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뤼미에르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녀는 사태의 심각성을 금세 알아챘다.

“그러니까, 한국에 세컨드 카타스트로피가 발생할 예정이라는 것 아닙니까?”

“저도 2차 대재앙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고,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렇게 신중하게 파악하지 마십시오. 만약 사태가 터진다면 한국 정부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겠죠. 헌터도 많고 능력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한반도는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뤼미에르가 예언했다. 확신에 차 있는 어조였다.

“몬스터들은 잡아 죽이면 됩니다. 무너진 건물은 다시 세우면 됩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다시 살릴 수 없습니다. 만약 한반도 같이 좁은 땅에서 대규모 게이트 사태가 발발한다면, 일시적으로 모든 국토를 상실하는 건 피할 수 없습니다. 물론 되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동안 인구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겠죠. 그러면 나라가 망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다른 나라가 한국에 개입하려고 해도 방법이 없을 겁니다. 그쯤 되면 내전이나 쿠데타로 나라가 쪼개질 테니까요.”

묘하게 설명이 구체적이었다. 이미 비슷한 거 한 번 당해봐서 그런 모양이다.

나는 미묘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지만, 일개 주한미군 사령관의 조언으로 계엄령 때리고 총력전 준비하기에는 나라 사정이 워낙 복잡합니다. 무엇보다 제게는 그럴 권력도 없고요.”

“아……. 이제 내각에서 나오셨었지요. 정말로 모든 권력을 놓으신 겁니까?”

“제가 뭐 놓을 권력이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공직은 다 내려놨습니다. 그러니 제가 기사회에다가 뭐 한국을 도와달라, 이런 말도 꺼낼 수가 없는 상황이지요.”

“그러면 대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사람을 모으려고 합니다.”

“…….”

정치는 술담배 다음으로 몸에 해롭고 인격수양에 별 도움도 안 되는 짓이었지만, 내가 정치하면서 얻은 교훈이라는 게 있다면 혼자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조직을 하나 만들려고 했다. 그게 내가 민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그러나 뤼미에르는 나를 조금 석연찮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어떤 조직을 만들려고 그러십니까?”

어떤 조직이긴 어떤 조직이겠는가.

일단 국익에 좌우되지 않고, 정의로워야 하며, 사람 구하는 게 최우선이고, 나름대로 능력도 있고, 정치적 위치도 있어야 하고, 한국이 위기에 처하면 달려가서 도와줘야 하고, 무엇보다 목숨이 위험해도 대가리부터 들이밀고 보는 진짜(정신 나간) 헌터들이어야 한다.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어디 모여 있을까. 그런 조직을 만드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우선 기반을 만들기 위해 인맥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로 했고, 그중에 가장 먼저 설득 가능할 거라고 본 게 뤼미에르였다.

사실 뤼미에르가 가장 만만하기도 했다.

“싫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단칼에 내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서 어버버 거리고 있는데, 뤼미에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번개처럼 치고 들어왔다.

“그냥 기사회 들어오시면 안 되는 겁니까?”

“예?”

“다국적 인명구조 헌터조직 하면 우리 국경없는 기사회 아닙니까. 유럽 위주로 활동하긴 하지만 한국지부도 이미 있고요. 아니면 기사회에 들어오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아,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만.”

“아니, 생각해 보니 기사회도 당신이 만들었고. 애초에 장관 당신 이미 기사회 명예고문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조직을 만드네 들어가네 하는 것이지요? 이건 합리적이지 못한 처사라고 봅니다만…….”

“제가 언제 다른 데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저는 물론 기사회밖에 없지요. 그런데 제가 정치를 하는 입장이라 소속을 신중하게-”

“허. 자기가 이미 기사회 소속인 것도 모르고 계시다니요. 장관이 평소 우리를 얼마나 남처럼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선거철마다 명함에 기사회 이름 박아넣고 돌리더니, 이제와서 남이라고…….”

“아! 기사회 들어가겠습니다!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들어오는 게 아니라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겠지요. 제가 장관을 배려해서 특별히 받아들이겠습니다.”

* * *

“그렇게 됐다.”

피채원은 오랜만에 나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는 애써 그 시선을 피했다.

호텔까지 따라온 뤼미에르가 방긋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장관, 나는 장관이 감나무 밑에서 홍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국말 잘하시네요.”

“감사합니다. 혹시 다음 계획이 있습니까? 장관 성격에 없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아, 예…….”

나는 식탁에 세계지도를 깔아두고 설명을 시작했다. 여도연이 그새 과자를 집어 먹었는지 부스러기가 널려있었다.

나는 드넓은 중원을 향해 손가락을 짚었다.

“일단 중국에 좀 비비적거릴 생각입니다.”

“리충빈 총통은 고립주의에 맛을 들였던데요. 그렇게 붙어 다니던 블라디보스토크 동부군벌과도 소통을 안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모스크바 사람들이 좋아하더군요.”

“그건 중국이 고립주의 노선을 타는 게 아니라, 그냥 노인네가 칩거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겁니다. 국내 정국이 워낙 불안해서 벙커 밖으로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중국을 어떻게 끌어들일 작정이죠? 아니, 애초에 뭘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같이 호루스 시스템 털어먹자고 하면 좋아 죽지 않을까요.”

나는 호루스 시스템을 털어먹을 작정이었다.

그게 있어야 최소한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감이 잡힐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미국놈들이 그거 관리만 잘했어도 제천 사태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참된 (전직) 정치인으로서 한 대 처맞고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우리가 피를 보게 했으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게 만들어야 했다.

물론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중국이 해킹까지 해가면서 손에 넣는 데도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호루스 시스템을 훔칠 수 있겠습니까?”

“안 훔칩니다. 지들이 토해내게 해야죠.”

“그렇다고는 해도 미국을 건드리는 건…….”

“걱정하지 마십쇼. 어지간하면 윈윈으로 매듭지을 생각이니까.”

안 그래도 해킹까지 해가며 호루스 시스템을 갈망하던 중국 정부는 기꺼이 우리의 계획에 참여했고, 나는 조금씩 절차를 밟아나갔다.

미국 정계에 개입할 명분을 쌓고. 연방정부를 은근히 공격하고. 터뜨릴 건 터뜨리고, 수습할 건 수습하고. 정체는 꽁꽁 숨기고…….

“애초에 호루스 시스템으로 유럽에 불질한 건 전 정권 작품입니다. 워낙 미국에 치명적인 약점이라 지금 대통령이 입 다물고 있는 거지, 세탁할 기회가 있으면 깔끔하게 털어내고 싶지 않겠습니까?”

“호주 사태 끝나고 세계초인기구의 굵직굵직한 후원자들이 전부 빠졌습니다. 일 처리가 영 미덥지 못했던 거죠. 당연히 동남아 쪽 진격계획은 죄다 엎어졌는데, 그러면 그 양반들 후원금은 누가 해 먹었을까요?”

“헤드라인 잘 뽑았네요. 영국이랑 프랑스에서 동시에 터뜨립시다. 장관 몇 명 날려버리면 독기가 오르겠죠. 그때 중국 정부에서 동남아시아에 항공모함 좀 돌려주세요. 그러면 여론도 쉽게 가라앉지는 않겠죠.”

* * *

원옥분 정부의 출범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제천 사태라는 초대형 악재가 놓인 까닭이었다. 대통령은 첫 업무를 위령비에서 무릎 꿇으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꿇은 무릎이 아직까지 펴지지 않았다. 제천 사태로 인한 일시적인 경제불황은 양판석 시절의 경제호황과 비교되었고, 덕분에 대통령 지지율도 지지부진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원옥분 대통령을 괴롭히는 것은 미국이었다. 정확히는 미국의 경고였다.

뭔가. 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

“이번에는 부산 말고 광주에 방어선을 둔다 칩시다. 그러면 식량자급율은 방어가 될 텐데…….”

덕분에 원옥분 대통령은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비상대책회의에 소비했다. 게이트가 언제 어디에 열릴지 모르니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보는 것이었다.

원옥분 대통령은 특유의 집요한 근성과 공무원들의 피땀으로 비상사태매뉴얼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이런 주먹구구식 방법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한계란 원옥분 대통령의 스트레스성 위염으로 나타났다. 언제 게이트가 열릴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반복되는 과로 속에 결국 대통령이 드러누운 것이었다.

나이도 많은 양반이 병원에 드러누우니 국민들 사이에서도 대통령 사망설이 루머처럼 떠돌았다. 그렇게 지지율이 개박살나자 장관이고 수석이고 가리지 않고 국무회의에서 개판을 쳤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겁니까! 경제 문제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하루종일 지도나 붙잡고 있으니, 원!”

“그렇다고 아예 손 놓을 수는 없잖습니까. 언제 어디서 두 번째 제천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어쩌면 더 심각해질 수도-”

“허허. 부정 타는 소리 마세요. 게다가 이건 군인의 영역 아닙니까? 과도한 우려가 국정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것 같아 걱정됩니다.”

“이게 그럼 대피계획이지 작전계획입니까? 피난민들은 죄다 죽어도 된다 이거에요!?”

“아, 자네까지 왜 그러나! 카메라도 없는데서 왜 흥분을 하고 그래!”

제천 사태는 천재지변이었지만 수습은 사람이 해야 했다. 그러나 수습은 못하고 다음 천재지변을 막으려고 제사나 지내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

차라리 국내 문제였다면 어떻게든 잘 조져봤겠지만, 이 나라 바깥은 원옥분의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이었다. 결국 호루스 시스템이 없는 이상 맨땅에 헤딩하며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이었다.

“각하!”

“말씀하세요.”

병석에서 링거 꽂고 업무를 보던 원옥분에게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병실 텔레비전 속에서 백악관 대변인이 따박따박 선포했다.

[……공화당 정부는 증오, 미움, 차별로 미국을 분열시켰습니다. 대체 무엇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까? 저들이 말하는 위대한 미국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유럽에서의 참사는 가장 추악한 정권의 가장 추악한 면모입니다. 미국은 이런 일을 미덕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적어도 지금, 우리의 미국은 그렇습니다.]

[……이에 연방정부는 호루스 시스템을 공개하여 전세계와 강력한 연대를 이어가기로 다짐했습니다. 존경하는 미국 시민 여러분, 부디…….]

원옥분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늘이 돕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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