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15화 (215/296)

EP 32 - 말, 말, 말 (5)

“......일본이라.”

“당선인께서는 국내 현안이 해결 되는대로 일본에 접촉을 타진하고 계십니다.”

“일본에서 거부하면요?”

“물론 그쪽에서 어떤 식으로 반응하건, 내전은 종식되고 열도에 산적한 몬스터랜드는 제거되는 편이 사리에 맞겠죠.”

CIA 국장이 확답했다.

외국 특사를 데려다 앉혀놓고 흘리는 말이 이 정도면 VIP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거였다.

비록 세계평화를 위한 게 아니라, 대선에서 묻은 땟국물을 군인 좀 갈아서 씻어내겠다는 못된 심보였지만. 좋은 게 좋은 거였다.

물론 우리에게도 썩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미국을 방문한 목적이 같이 일본을 조져보자는 거였으니까. 제주도 테러범이 일본과 연관되어 있지 않던가.

당연히 CIA 국장쯤 되면 그것까지 계산하고 협상을 시작한 거겠지. 한국과 미국은 기밀정보를 공유하는 사이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국장이 제주도 테러를 운운했다.

“한국도 일본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국정원에게 듣기로는 제주도 테러의 배후가 일본으로 추정된다던데요.”

나는 일단 가볍게 튕겨냈다.

“......제주도 테러의 원흉은 아직 수사 중입니다. 섣불리 확정 짓기 어려운 시점입니다.”

“그것도 맞습니다만. 장전읍 사건도 있지요. 각성제 연구를 위해 한국인 헌터를 사냥한 무리가 있지 않습니까. 정체불명의 괴뢰들이 각성제를 노리고 한국을 공격하고 있다는 건 이제 기정사실입니다.”

“한국인 헌터들을 사냥했던 게 일본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일본이 유력한 용의자 아니던가요? 한국인 헌터에게 빼낸 장기가 대서양을 건너오려면 일본을 거쳐야 하니까요.”

“......뭐라고요?”

장기가 대서양을 건넌다고? 설마 자기네가 범인이라고 자백하는 건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버, 범인을 찾았습니까?”

“일단 보시죠.”

* * *

CIA의 제이나 헤스펠 국장은 내게 사진 몇 장을 건넸다. 사진을 보자마자 구역질이 확 올라왔다. 참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이건.”

“CIA에서 현장을 찾아냈습니다. 장소는 브라질 마나우스 인근의 병원 지하. 범인은 아리아토 파밀리아라고 불리는 중소 PMC였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도, 사진은 생체실험 현장을 찍어낸 참상은 아니었다.

사진은 곱게 포장된 장기들을 보여줬다. 아이스박스 안에 간이나 신장으로 보이는 핏덩어리들이 있었다.

차마 뭐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으니, 국장이 알아서 설명을 이어갔다.

“아리아토 파밀리아는 마약밀매조직에서 출발한 PMC였습니다. 이번에 정부가 카르텔을 대대적으로 처리하면서 장기밀매가 적발되었죠.”

“...그렇군요. 규모는 어땠습니까?”

“그렇게 웅장한 비밀조직은 아니었습니다. 30명 내외의 깡패들이었고, 소개와 유통을 담당하던 놈들이었습니다.”

국장은 몇 가지 사진을 더 꺼내 들었다. 마찬가지로 끔찍한 사진이었다.

“우리는 이들을 시작으로 장기밀매에 관여한 이들을 더 찾아냈습니다. 북한 정부가 자국민을 착취한 흔적들이었죠.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대략 7곳이 적발되었습니다.”

“북한이 인민들 장기를 팔아먹었다더니.......”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그 장기들은 미국, 유럽, 남미, 아프리카 등지의 부호들에게 판매되었습니다. 범죄조직들은 유통 중간에서 이윤을 남겼고요.”

그런데 이게 일본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지? 그런 눈빛으로 국장을 바라보니, 그녀가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했다.

“모든 장기는 일본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북한 시민의 장기가 일본에서 배달됐다라.”

“일본이 장기밀매의 중간지점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인 헌터들의 장기도?”

“그렇습니다. 어딘가로 향하기 전에 일본을 거쳤다고 추리할 수 있지요. 어쩌면 북한 시민들의 장기에 섞여, 생체실험 연구소로 배달되었을 수도 있고요.”

“일본을 털면 유통망을 추적할 수 있겠군요. 그러면 생체실험을 위해 한국인 헌터의 장기를 주문한 놈들이 누군지도 알 수 있겠고!”

“그게 우리가 일본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 * *

일단, 적어도 각성제 문제에 한해서는 미국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이건 사실 정치적인 문제였다. 내가 초상관리부 장관 하던 시절에 미국과 은밀한 시그널이 오간 바 있다.

사실, 미국이 각성제를 찍어낸다고 해도 별다른 이익을 누릴 수는 없었다. 미국 헌터 사회의 주도권은 기업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즉, 미국이 각성제 가지고 줄까 말까 간 보면서 장난질을 시작하면, 초거대 PMC들이 나서서 정부를 욕하고 때려잡을 수 있다는 거였다.

‘정부가 국민 목숨으로 장사를 한다.’

‘각성제는 국방에 직결되는 사안이다.’

‘대통령 탄핵해야 한다.’

대충 시나리오가 뻔했다.

그걸 빌미로 기업들은 당장 연방정부에게 각성제 생산 민영화를 요구할 것이었고, 민영화를 둘러싼 전쟁은 역사적으로 미국을 망가뜨린 주요 원인이었다.

그러다가 만약 각성제 생산권이 대기업에게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순식간에 헌터 군단을 생산한 대기업이 쿠ㅤㄷㅔㅌ를 일으킬 수도 있는 거였다.

그러나 한국이 각성제를 쥐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미국 정부가 한국에게 각성제를 받아가는 식이 된다면, 그들은 각성제를 쥐고서 자기네 PMC들을 편하게 협박할 수 있었다. 도의적인 책임은 한국에 떠넘기고서 말이다.

안 그래도 대기업 PMC 등쌀에 치이는 게 미국 정부다. 그들에게는 각성제 생산보다 각성제를 배분하며 대기업 목줄을 채우는 게 더 중요했다.

애초에 한국은 돈만 주면 각성제 달라는 만큼 주는 나라였으니까(동맹 한정으로), 굳이 분쟁을 일으킬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헤스펠 국장의 제안에 대한 내 대답은 명확했다.

“일단, 미국의 진정성은 알겠습니다.”

“고마운 소리군요.”

국장의 주름진 입가에 미소가 생겼다. 정치적 위기에 처한 CIA 국장이 임무를 성공한 것이었다.

그녀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한 실장. 그러면 호주 사태가 끝나는 대로 미군을 진격시킬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간단한 교전 정도는 각오해야 할 것 같기도 하군요. 꽤나 복잡한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흐음.”

당선자가 대선 때 얼마나 해먹었는지는 몰라도, 무슨 수를 써서든 일본으로 공적을 세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CIA 국장도 처지가 참 곤궁할 것이다. 지난 정권 실세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당선자의 명령에 이토록 필사적으로 임하다니.

하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나는 미국 정부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일을 서두른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쓰읍. 왠지 망할 것 같다.

차라리 내 방식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든 순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헤스펠 국장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왜 그러시는지?”

“국장님. 그래도 내전 중인 나라를 건드리는 건 조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삼파전인데요. 잘못했다간 본전도 못 찾습니다.”

현재 일본의 상황은 대단히 복잡했다.

내전도 그냥 내전이 아니라 3세력이 뒤엉킨 삼파전이었다.

일단, 자위대가 게이트 사태 초기 대응에 실패한 게 만악의 원흉이었다. 일본 육상자위대의 상태가 사실상 반병신이었던 탓이다.

섬나라 특성상 육군이 적었을뿐더러, 병력의 질적 문제도 심각했다. 가혹행위나 똥군기 운운하는 게 아니라 모병제의 특징이 그랬다.

문제는 그 틈을 비집고 야쿠자들이 등장한 것이었다.

“듣기로는 말이 야쿠자지 사실상 군벌 아닙니까? 패잔병들 흡수해서 총기도 빠방하고. 각성자들이 탱크 노릇하니까 상대하기도 버겁고. 자기들 나와바리에서 세금 걷어서 농사까지 짓는데 그게 무슨 깡패예요.”

첫 번째 문제는 야쿠자였다.

자위대가 초기 대응에 실패하고 비틀거리는 동안, 약탈과 협박으로 지방패권을 잡아챈 것이다. 폭력에 익숙할수록 약육강식에 적응이 빨랐다.

망한 세상에선 주먹이 앞섰으니, 각성자들도 야쿠자들에게 혜택을 받으며 이권을 누렸다. 그렇게 모인 인간들이 어느새 불어나다보니 이 지경이 된 것이었다.

“또, 일본 정부랑 이야기가 되는 상황입니까? 그 양반들 지금 이게 다 우리 때문이라고 물타기 하고 있습니다. 평화헌법만 개정했어도 이 지경은 아니었다는 거죠.”

두 번째 문제는 일본 정부였다.

일본 정부는 수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비난을 바깥으로 돌렸다. 이게 다 외국 때문이라는 거였다.

총리는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강한 일본을 만들고 싶었는데, 주변국의 견제로 실패했다’는 논리를 지켰다.

그런ㄴ데 곰곰이 법리를 생각해보면 지금 상황이랑 평화헌법이랑은 별 상관이 없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실종되자 국민 여론이 전환되었다.

“마지막으로, 거기 괴수들 때려잡으려면 무조건 중장비 끌고 가야 합니다. 호주야 사방이 탁 트인 상황이었으니 그나마 괜찮았지, 거기는 몬스터랜드가 숲에 있단 말입니다.”

마지막 문제는 일본 중부의 몬스터랜드였다.

내전 때문에 일본에서는 게이트를 방치했는데, 그때는 게이트를 내버려 두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그렇게 몬스터랜드가 형성됐다. 특히 관동과 관서지방을 양분하는 거대한 산맥과 삼림지대 일대에서 말이다.

여왕이 기어나와 지구에서 알을 까고, 2세대 괴수들이 번식하며 점점 환경에 적응한다.

그리고 헌터가 가장 많이 죽어 나가는 환경은 숲이었다. 괴수가 보호색은 기본이고 맹독까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버섯이나 진균류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숲은 감염성 개체가 등장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통계가 그랬다.

당연히 토벌과정에서 A급 헌터 하나라도 감염되는 순간, 그때부터는 상황이 굉장히 더럽게 돌아가는 거였고 말이다.

“아무튼, 일본은 잘못 건드리면 크게 피를 볼 겁니다. 변수가 많아도 너무 많아요. 호주는 괴수랑 싸우는데도 사람이 더 무섭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람이랑 싸우면 얼마나 머리가 아프겠어요?”

“인정은 합니다만. 그래도.”

내가 일본을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한참을 주장하자, 국장은 꽤나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미국에게는 성과가 필요했고, CIA 국장도 이번 일을 그르치면 피를 볼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나도 대안이 있었다.

“차라리 외교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외교요?”

“예. 방금 막 몇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국장이 흥미가 동했는지 몸을 기울였다.

나는 그녀에게 재차 확답을 받아냈다.

“당선인께서는 일본 내전을 종식시키고, 세계평화를 지켜내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대통령 선거 땟국물 씻어낼 업적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예, 그렇죠.”

“저희도 일본에 엮이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심지어 저는 외국에 자꾸 퍼준다고 욕을 먹는 상황인지라, 운신의 폭이 좁아요. 그러니 가급적이면 테러범들을 한국으로 끌어들일 계획입니다.”

“계속 말해보시죠.”

“일본은 지금 삼파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죠? 정부군, 야쿠자, 시민군.”

“뭐, 시민군이야 한때는 강세였는데, 이제는 다소 밀리는 모양입니다. 사실상 1대1 구도로 돌아왔습니다. 첩보에 따르면 말입니다.”

“저는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고, 지금 시민군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뭐시기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공산당이 주축이 된 모임이죠?”

일본에는 정부군과 야쿠자 말고도 시민군이 있었다. 그 시민군들은 다름 아닌 중부지방의 시민들이었다. 게이트가 열린 그곳이다.

그들은 게이트 사태의 최대 피해자들이고, 야쿠자와 정부군 사이에 끼어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다만, 게이트 열릴 때 있던 인간들이라 각성자 비율은 꽤 높다고 들었다. 그래도 숫자가 워낙 적어서 문제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특이한 건, 시민군이 내건 깃발이 공산당 깃발이라는 거였다. 시뻘건 사회주의 깃발.

듣기로는 시민군의 창설 당시 일본 공산당이 관여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여당과 50년 넘게 투쟁한 정당인지라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시민군 자체가 몰락한 사회에서 생존하는 생존자 집단인지라, 배급제나 공동소유 개념을 동입했다고도 했고 말이다.

사실 이 정도면 진퉁 사회주의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들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헤스펠 국장님. 우리 호주에서 얼마나 고생 많았습니까? 저는 WPO고, 국장님은 CIA고. 비록 서로 견제하는 위치이긴 했지만. 같이 부침을 겪다 보니 내심 걱정도 들고 그랬습니다.”

“그, 그랬나요? 한 실장이 나를 그렇게 생각해줄 줄은 몰랐는데요. 손자뻘 정치인한테 그런 소리를 들으니 생소하긴 하군요. 그런데요?”

“쓸데없이 군대랑 헌터 들이박고서 지지고 볶지 말고. 이번에는 한 번 인텔리하게 해결을 봅시다. 잘하면 당선인께서 대통령이 되기 전에 해결을 볼 수도 있겠어요.”

“......!”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이랑 미국이 착착 행동을 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CIA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할만해요?”

“조직 장악력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좋습니다. 일단, 제가 아는 친구들이 조금 있습니다. 그 친구들을 통해서 일본에 우회적으로 메시지를 전해보겠습니다. 부드럽게.”

* * *

「가증스럽게 놀아대는 간악한 쪽바리들을 가만 두어서는 안 된다!」

「군국주의에 미친 사무라이 악종들이 사회주의 인민을 군홧발로 짓밟고 있다. 그 미친 방동에 전세계가 경악과 분노에 치를 떨고 있다!」

「외로운 섬나라 정치 난쟁이들은 지금이라도 파렴치하고, 간특하고, 악착스럽기 이를 데 없는 싸움박질을 중단하고, 세계의 평화와 안전에 적극 기여해야 한다!」

「또한, 깡패와 승냥이 간 싸움에 고통받는 사회주의 인민들 앞에, 당장 무릎을 꿇고 기어 나와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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