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14화 (214/296)

EP 32 - 말, 말, 말 (4)

[양판석 대통령이 신임 비서실장으로 한승문 전 장관을 임명한 이후, 여야 인사들의 ‘초록색’ 신호가 연달아 이어지고 있습니다. 코앞으로 다가온 총선을 염두에 둔 행동으로 보이는데요.......]

[그...... 사실상 정치적인 후계자로 지목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지금 여권에서 배출한 대선주자가 없지 않습니까? 원옥분 지사는 당적은 같지만 여권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석재봉 전 비서실장은 아무래도 대중적인 인지도가.......]

[총선을 앞둔 정계에 불안한 긴장감이 맴도는 가운데, 한편 한승문 신임 비서실장은 다가오는 7일,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예정.......]

* * *

미국 대통령 선거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인류가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이한 시점이었으니까.

비행기에서 기내식 먹다가 문득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피채원이 아리송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인류의 위기라니까 조금 어색하네요.”

“사실이 그런데, 뭘.”

사실 대한민국에 살다 보면 그게 잘 체감되지 않았다. 피자치킨 시켜도 30분 내로 배달이 오는데 그게 무슨 세기말인가. 더럽게 비싸진 문제지.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 국민들의 대부분이 괴수를 접한 적이 없었다. 이게 다 차재균과 김두식의 환상적인 철벽방어 덕분이다.

따라서 3천만에 달하는 남부 인구는 괴수를 본 적도 없고, 1천만 수도권 피난민들도 대부분이 순수하게 ‘피난’만 했지, 괴수에게 습격당한 사람은 훨씬 적었다. 즉 4천만 대한민국 국민 중에 괴수에 대한 위협을 직접 느껴본 사람들은 3백만명 언저리였다. 그마저도 미쳐 버린 땅값 덕분에 충청도 빈민촌에 몰려 사는 처지였고.

그러니까, 대부분의 국민들은 게이트 사태를 북쪽의 위협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우리는 ‘북쪽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는 이골이 난 인간들이었고 말이다.

“그런데요, 의원님.”

“으응?”

어느새 정치판에 통달한 피채원이 딴죽을 걸었다.

“이거는 정부가 유도한 거 아닌가요? 맨날 예능에 헌터들 나와서 괴수는 별것도 아니라고 그러던데요. 툭하면 감동적인 음악 깔면서 한국은 멀쩡하다고 그러고. 또, 국경에서 사고 터져도 저어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도하고.......”

“나, 나는 잘 모르겠는데.......”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시라...... 약간 그런 느낌-”

“아, 아무튼!”

비록 한국은 괴수 사태에 대해 IMF 수준의 국가재난이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그리고 누군가는 괴수 자체가 정부가 꾸며낸 가상의 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인류의 존속마저도 위태로운 최악의 대재앙이었다.

당장 유럽만 보아도 쉘터 하나가 무너져서 수천 명 죽어나가는 건 일상인 데다, 아프리카 같은 경우는 인구가 얼마나 줄어들었는지 계산조차 어려울 정도다.

중국도 당장 이번 겨울에 식량난으로 수백만 명이 사망했고, 러시아는 핵전쟁의 위협이 도사리는 냉전 상태였으며, 일본은 무려 3가지 세력으로 나뉘어 내전 중이었다.

그리고 이런 대재앙을 극복할 수 있는, 혹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모으는 유일한 국가는,

오직 미국뿐이었다.

* * *

“어어, 뤼미에르.”

“장관? 오랜만입니다. 공항에서 다 보는군요.”

“허헛, 이제는 장관이 아니라 실장이에요.”

미국 대통령이 바뀌었으니 온갖 인사들이 공항에 몰려 있었다. 누가 보면 UN 총회가 덜레스 국제공하에서 열렸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나도 뜻하지 않게 뤼미에르를 만나서 악수를 교환했다. 호주 사태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더욱 반가웠다. 나는 그녀의 팔을 툭 건드리면서 인사를 건넸다.

“우연찮게 만나니 더욱 반갑습니다. 혹시 저랑 포토라인 같이 서시려고 기다리셨던 건 아니죠?”

“무, 무슨 그런 말씀을.”

“아무튼, 만난 김에 같이 값시다. 기자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겠어요.”

공항 입구 쪽에서는 벌써부터 기자들의 아우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니 사진 한 방 찍으면 그게 또 외교적 성과 아니겠는가.

뤼미에르와 나는 자잘한 안부를 물으며 입국수속을 밟았다. 양측 다 딸려온 인원이 상당했던지라 대화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녀가 먼저 걱정스런 눈빛으로 말문을 텄다.

“장관. 아니. 실장. 제주도 테러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몸은 좀 괜찮으신지......?”

“아, 예. 저도 괜찮고. 사상자도 없고, 괜찮습니다. 국민들께서 잘 대처해주신 덕분이지요. 그나저나 WPO 평의원 선거 준비는 잘 되십니까?”

“네. 가깡운 시일 내에 총선거를 계획 중입니다. 덕분에 헌터들의 인구조사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쉘터에서 헌터들 숫자를 숨기는 바람에 그간 골치 아픈 일이 많았는데,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핫! 제가 그래서 직선제를 하자고 그랬던 것 아닙니까? 헌터가 투표를 하려면 누가 헌터인지 알아야죠. 그런 핑계 없이 괜히 인구조사 한다 그러면 기본권 침해니, 민간 사찰이니 말이 많아서 원.”

“그, 그게 정치적 경륜이군요.......”

뤼미에르가 살짝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지만, 그러든 말든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WPO 직선제 통과 이후, 헌터들의 대규모 선거가 치러질 예정이다. 평의원 숫자도 5명에서 50명으로 확 늘렸다. 각 나라별로 상위 득표자 10명이 평의회에 들어가는 식이다.

그리고 민주정치라는 게 그렇듯, 평의회는 기존의 막강한 지위를 잃어버리고 사실상 식물의회가 되어버릴 게 뻔했다.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별별 짓거리를 다 하겠지.

그러면 결국 평의회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헌터들의 입장을 충실하게 대변할 터이고, 그게 강대국들이 헛짓거리 못하게 막아주는 자물쇠 역할을 한다면 내 계획이 성공하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헌터들 인구조사도 할 수 있으니까 일석이조였고 말이다.

대충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입국수속이 끝났다.

“아, 입국수속이 끝났나요?”

“이제 기자들 상대하러 갈 시간이군요.”

그러나 내가 기자들을 만나는 일 따위는 없었다.

CIA 직원이 공항을 나서기도 전에 나를 납치해 갔기 때문이었다.

* * *

미국 CIA 국장의 집은 생각보다 아늑했다. 성격 괜찮은 교수님이 정성껏 꾸며놓은 서재 같달까. 책상에는 화목해보이는 가족사진과 야구선수 싸인볼 따위가 놓여 있었다.

우리집도 이렇게 꾸며보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었지만, 무언가 아리송한 기분 탓에 오묘한 표정을 그래도 드러냈다.

가벼운 생활복 차림의 CIA 국장이 피식 웃었다. 원래부터 성질 더러워 보이는 할머니였지만, 안경을 쓰니까 인상이 조금 순해 보인다.

“여기 온 사람들은 늘 그런 표정을 짓더군요. CIA 국장은 집도 온통 검은색으로 꾸며놔야 합니까?”

“저는 커다란 세계지도가 하나 붙어있을 줄 알았는데요. 워싱턴에는 초록색 핀이 꽂혀있고, 북한이나 팔레스타인에는 빨간색 핀이 꽂혀 있고.......”

“그거는 사무실에 있습니다.”

“외계인 머리는 없습니까? 초록색 수용액에 둥둥 떠 있는 거라든지.”

“죄송하지만, 국가 기밀입니다.”

그녀가 커피를 한 잔 건넸다. 나는 커피를 받아들고 살짝 묵례하며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지팡이를 소파 옆에 내려놓았다.

“흐음.......”

CIA 국장과는 지난 몇 년간 공문서를 카톡처럼 주고받았고, UN 총회나 호주 사태로 얼굴도 종종 봤으니, 안면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친분은 전혀 없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할 줄이야.

아무래도 긴밀한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국장이 말문을 텄다.

“우선, 갑작스런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놀라셨을 수도 있겠다 싶군요. 이미 망한 정권의 CIA 국장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서.”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그랬다.

내가 가장 놀랐던 건 국장의 집구석 인테리어 따위가 아니라, 이제 곧 짤릴 인간이 왜 나를 찾느냐는 거였다.

즉, 미국 대통령 선거는 민주당이 이겼다.

이것도 일종의 이변이라면 이변이었다. 미 연방정부는 미국의 감염확산을 저지했고, 호주 사태마저도 가까스로 극복했으니까.

사실 미국 정부가 이번 선거에서 질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적 대위기 속에서 나름 선방한 축이다.

하지만 미국은 돈으로 선거를 하는 나라였다. 그리고 미국 기업들은 민주당의 손을 들어줬다. 대기업의 전횡을 우려했던 연방정부가 기업을 너무 많이 때려잡은 탓이었다.

그리고 정부의 프로파간다로 연예인 이상의 취급을 받던 ‘히어로’들은 대기업 PMC 소속이었으며, 그 변수가 이번 대선을 치열한 접전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민주당은 미국의 정권을 잡았고, 미국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맞이했으며, 내 앞에 있는 CIA 국장은 조만간 짤릴 운명이었다.

그러나.......

“당선인께서 제 연임을 결정하셨습니다.”

“예!?”

미친 소리였다. 세상 어느 정구너이 전 정권의 인사를 살려둔단 말인가. 나는 철저한 보복과 응징의 정치를 하는 나라에서 와서 그런지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쩐지 이 할머니가 오늘따라 인상이 푸근하더라. 정치인이 선거만 떨어져도 사람이 메롱이 되는데, 곧 수술당할 사람이 왜 얼굴이 이렇게 폈나 싶었지.

나는 당황스런 심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 이게 아메리칸 스타일입니까?”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선인께서는 본인이 처한 상황을 최대한 슬기롭게 풀어나가고 싶다는 의향을 밝히셨습니다.”

내가 CIA 국장에게 들은 바로는 이러했다.

첫째. 연방정부와 민주당의 접전이 너무 치열했다. 나라가 개판인데 정권심판론이 안 먹힌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연방정부를 얼마나 지지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둘째. 네거티브 선거 때문에 당선인이 상처를 너무 많이 입었다. 측근도 아니고 본인이 사정기관에 공소가 몇 개 걸려 있을 정도였다.

셋째. ‘멋진 신세대’ 작전이 전세계적인 호응을 얻어 버렸다. 민주당은 세금낭비라며 극렬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결국 공약을 뒤틀어 찬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즉, 민주당이 정권을 잡긴는 했어도, 공화당 지지율이 너무 높게 나왔다는 것이었다.

이걸 보통 상처뿐인 승리라고 한다.

그래서 민주당 당선인은 대통령 노릇을 최대한 오래 해먹고 싶었으니, 국론통합을 위해 이전 정권 인사들을 몇몇 유임시키고, 핵심 사업들을 계속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핵심사업이 ‘멋진 신세대’ 작전. 전 세계의 몬스터랜드를 제거하고, 인류를 괴수의 위협에서 해방시키겠다는 계획.

이전 연방정부의 핵심 사업이, 민주당 당선인에게 고스란히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CIA 국장이 흐뭇하게 웃으며 설명을 끝맺었다.

“그리고 이 판세를 뒤집은 건 호주 전쟁이었고, 호주 전쟁을 승리로 이끈 건 한국이었죠, 덕분에 CIA 국장 노릇을 이어갈 수 있게 됐으니 일단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벼, 별말씀을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제 모든 과오가 낱낱이 밝혀지고. 온갖 언론에 조리돌림 당하며 법원의 심판을 기다렸겠지요. 잘못하면 무기징역이 나왔을 텐데. 이거 참 고맙게 됐습니다. 하하.”

자기가 무기징역을 당할 만한 짓거리를 했다는 소소한 고백이었다. 자기 딴에는 농담이었는지 국장은 슬그머니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런, 서론이 길었군요. 이렇게 모신 건 다름이 아니라, 당선인께서 당부하신 말씀을ㄹ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네, 말씀하시죠.”

“오스트레일리아 전쟁이 조만간 마무리될 겁니다. 이미 미군이 투입됐고, 2개월 내로 오스트레일리아는 완벽하게 정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기쁜 소식이군요. 그런데요?”

“당선인께서 다음 타깃으로 일본을 지목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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