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2 - 말, 말, 말 (3)
「청문회실시간중계 : 님들. 속보 떴음. 한승문 14억 원대 자산가.」
「헬좃선 : 그럴줄 알았다. 유독 한승문 빠는 놈들만 대가리가 깨졌더라? 아니, 상식적으로 외국에 국부유출 시켰으면 당장 잡아넣어야지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ㅋㅋㅋㅋ」
「뭇시엘 : 빚이 ㅤㅅㅣㅋ빨럼들아!」
「우유주사 : 충격, 한승문 마이너스 14억 원대 자산가!」
* * *
“아니, 그러니까, 후보자.”
“예.”
“재산이 이게 확실한 겁니까? 빚이 14억이 있다고요?”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허.”
내 재산이 공개되자마자 매섭게 달려들던 국회의원들의 얼굴이 울긋불긋 물들었다. 순식간에 자기들만 개자식이 되는 꼴 아니던가.
물론 양판석계 국방당 의원들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내가 왜 양판석의 원픽인지 이해하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최소한 지금 상황이 내가 곱게 파놓은 함정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그것까지 모르면 배지 떼야 한다.
하지만 누가 나더러 ‘왜 함정을 팠냐’고 따질 수 있을까. 국민들 보기에 참으로 구차한 짓일뿐더러, 하물며 지금은 선거철이었다.
그러니 나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청백리처럼 묵묵히 얌전을 떨었다.
그러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혹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여긴) 김재룡 국회의원이 손끝을 부들부들 떨며 의사진행발언을 신청했다.
“……존경하는 위원장님? 의사진행발언-”
“아, 예. 하세요.”
“……후보자. 굉장히 소탈하게 사신 점은 칭찬을 해드리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어째서 이 부분에 대해 해명을 하지 않았던 겁니까? 자료제출은 왜 굳이 안 하셨고요? 혹시 정치적인 이유로 청문위원들을 골탕 먹이려는 의도였다면 굉장히 국회를 우습게-”
“아까부터 꾸준히 말씀드렸습니다. WPO 평의원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UN 국제연합군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해 국회 청문회에서 신변사항을 소명하게 된다면 공익에 해악을 일으킬 수 있으니 양해를 부탁드린다고요.”
즉, 니가 대답 안 들어놓고 왜 나한테 따지냐는 소리였다.
그걸 알아들은 김재룡 의원은 열이 확 받았는지 언성을 높였다. 호통이라기보다는 발악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지금 그 소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대통령에게 헐값에 호화저택을 제공받은 건, 엄연한 뇌물성 부동산-”
“죄송합니다. 당시 너무도 급하게 초상관리부 장관직을 내려놓는 바람에, 거주지가 불안정했던지라…….”
참고로, 내가 초상관리부 장관을 사퇴했던 이유는 장전읍 사태의 역풍 때문이었다.
즉, 북한에서 장기 팔아먹던 적폐들의 여론몰이 때문이었다 이거다.
저 의원도 잽싸게 판단이 거기까지 닿았는지, 순식간에 내 말을 끊고 논점을 흐려버렸다.
“그래서, ‘뇌물성 부동산’에 실거주했다는 혐의. 인정하시는 겁니까?”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장전읍 사태 당시에 초상장관을 너무 급하게 사퇴한 바람에…….”
“아, 인정하시냐고요!”
“급하게 관저에서 쫓겨나 집이 없던 상황이라, 잠시 양판석 대통령님의 도움을 받았던 것인데, 이게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몰랐다? 그게 국회에서 할 말입니까?!”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김재룡 의원이 나를 나무라는 분위기였지만, 방송용으로는 굉장히 추한 모습일 터였다.
슬슬 분위기를 파악한 다른 국회의원들도 제지에 나섰지만, 김재룡이는 이게 마지막이라고 여겼는지 끝까지 맹공을 가했다.
아니면 이성을 잃었거나.
“2천만 서울 피난민들이 아직도 추위에 고통받는데! 그 호화저택에서 얼마나 호의호식을 하셨는지! 본 의원으로서는 그 후안무치한 심정이 상상조차 되지-”
“죄송합니다. 해당 단독주택은 호주 전쟁에 참가하느라 곧장 정리했습니다.”
“아, 그러셨습니까? 제가 알기로 지금 통영 해안가에 거주하시는 걸로 아는데. 거기가 지금 얼마나 금싸라기 땅인지는 알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부동산에는 지식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어릴 적부터 교류했던 친척 내외분의 고향 집입니다.”
“이제는 하다 하다 친척까지 나옵니까? 대체 어디까지 이어지는 비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멀쩡한 부모님 집 놔두고 왜 친척 집에 가서 삽니까?”
* * *
“의원님, 문자 왔습니다.”
“뭔데.”
“국회에서 청문보고서 채택됐다는데요.”
“나는 이미 통과하지 않았나?”
“김두식 국무총리랑 이문영 감사원장이요. 방금 청문보고서 채택됐다고 합니다.”
“그건 좀 믿기 힘든데.”
국무총리, 비서실장, 감사원장.
누구 하나라도 삐끗하면 청와대가 흔들리는 고위인사들이다. 당연히 선거철 국회가 순순히 청문회를 통과시켜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안 된다고 드러눕기는커녕, 청문보고서까지 채택됐다? 그건 말 그대로 마법 같은 일이었다.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내자 피채원이 무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청문회 생방송이 워낙 화제를 모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왜?”
“난민들 커뮤니티에서도 옹호론이 나오는데. 일반 여론은 뻔하죠.”
“국회가 눈치를 봤다?”
“아마도요.”
“흐음.”
사실 김두식 사령관은 어떤 식으로든 흠집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하던 터였다. 그가 생각보다 많은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김두식 장군은 유재경을 내쫓기 위한 포석에 불과했다. 정치색도 거의 없는 무난한 전쟁영웅 아니던가.
본인은 정치에 관심도 없고, 원옥분이나 유재경과의 친분도 두루두루 있고.
사실 청와대가 유일하게 기용할 수 있는 중도층 인사였다.
그런데 제주도 테러가 발생했다.
공포 분위기가 퍼지면서 국방에 대한 우려도 치솟았고, 이는 ‘군인’ 김두식을 향한 국민적 관심으로 이어졌다.
「충청방어선의 영웅. ‘명장’ 김두식.」
「金 장군 2계급 특진시킨 건 元 대행…… 구국의 결단」
「유재경 신년사 발표. “문제는 경제”」
상황이 대강 이러했다.
김두식 사령관. 아니, 김두식 총리는 투톱을 달리던 유재경과 원옥분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비주류가 득세하는 것은 기성 정치권이 바라는 결과가 아니었다.
게다가 김두식은 언제든지 주류가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모든 군인과 예비군이 간접적인 지지기반이고,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국군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이번 청문회야말로 김두식을 다시 밑으로 찍어누를 절호의 찬스였는데, 이렇게 순순히 청문보고서가 채택됐다?
무언가 변수가 발생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 변수가 바로 나였다.
“으음, 다 내 덕분이구만.”
“그걸 대놓고 말씀하시면 멋이 없는데요.”
“채원아, 너는 왜 나에 대한 리스펙트가 없니?”
“그러게요.”
“뭐?”
“저는 항상 의원님 존경하죠.”
피채원이 슬쩍 미소지었다. 기계적으로 입꼬리만 올린 웃음이었지만, 시꺼먼 눈동자는 묘한 장난기를 품고 있다.
내가 피채원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려던 그때, 딩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야. 피자 왔나 보다.”
“제가 받을게요!”
피채원이 순식간에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배달 팁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많이 배고팠나 보다.
그러나 피채원이 현관문을 열었을 때, 그 너머에 있는 건 피자 배달부가 아니라 백발이 듬성듬성한 노인이었다.
“어어, 비서의 비서님이시구만. 오랜만이네.”
“……대통령님?”
“그래, 내 비서는 어디 있고?”
* * *
대통령 비서실장.
대통령의 보좌관. 대통령의 참모총장. 대통령의 분신. 대통령의 오른팔. 대통령의 18번. 대통령의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
오죽하면 대통령이 영부인보다 비서실장이랑 더 많이 지낸다고 해서 오피스 와이프라는 소리까지 듣는 대통령 비서실장이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고 한다.
“예? 출근하지 말라고요?”
“어어, 출근 안 해도 돼.”
양판석이 피자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새삼스럽다는 말투였다.
“청와대가 지하 200m에 있는데. 자네가 거기로 출퇴근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고 눌러앉아 살기에는 자네 일이 그게 아니고.”
“그렇습니까…….”
그래도 비서실장이 자택근무라니. 무언가 배신감이 느껴져서 양판석을 허탈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양판석은 매몰차게 나를 쳐냈다.
“아니, 국정원장도 지하벙커에 살고. 합참의장은 가족까지 데려와서 눌러앉았네. 걸어서 30초면 얼굴 보는데 자네가 와서 중계할 필요가 있냐 이거지.”
“그, 그치만…….”
“총무비서관이고, 수석비서관이고. 참모진이랑 밥상머리에서도 일 이야기하면서 안면 트고 지내는데. 비서실장이 와서 고나리질하면 보고만 길어져.”
“그러면 저는 대체……?”
“그래. 내가 자네한테 맡기고 싶은 역할은…….”
양판석이 휴지로 손을 닦았다.
그리고 피자 끄트머리를 마요네즈에 찍어 질겅거리더니, 씨익 웃으며 본론을 꺼낸다.
“자네는 위쪽에서 일을 좀 해줘야겠어.”
“지상에서요?”
“그렇지.”
양판석은 내 업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줬다.
옛날 비서실장이 대통령에게 찰싹 붙어있는 브레인 같은 느낌이라면, 나는 대통령이 원격으로 조종하는 로보트 느낌이랄까.
대통령은 안전 문제로 지하벙커에서 나오지 못하니, 내가 지상에서 대통령 대신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한다고 한다.
“가끔 언론사 보도국장들 불러모아서 국밥 좀 먹이고. 국회에 종종 놀러 가서 친분 좀 쌓고…… 무슨 소린지 알지?”
“아아. 예, 알지요.”
“피 비서관 이 친구도 재주 좋잖아. 자네가 잘하는 걸 하라고. 평소에는 나 대신에 행사 다니면서 얼굴 비추다가, 일 터져서 지령 내리면 눈치껏…… 으응?”
요컨대, 양판석이 지하벙커에서 국정을 이끄는 동안, 나는 피채원과 함께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정치공작을 벌이라는 소리였다.
참으로 전형적인 로비스트 짓이었지만, 내가 가장 잘하는 분야이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자신 있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양판석은 피채원에게도 시원하게 감투를 던져줬다.
“원래 비서실장 밑에 1, 2 부속비서관이 있는데, 1 부속은 대통령 수행이고, 2 부속은 영부인 수행비서야. 그런데 나는 사별한 지 꽤 됐잖나?”
“예…….”
“그러니까 2 부속은 피채원이 시켜다가 자네가 알아서 돌리게.”
“피 비서를 청와대 부속비서관으로요?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진지한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혼자서 피자를 3조각째 냠냠거리던 피채원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양판석은 녀석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흔쾌히 말을 이었다.
“초상관리부 장관비서관으로 고공단까지 했고. 유럽 사태에서 한국 대사까지 했는데. 안 될 것이 뭐가 있나? 나이를 문제 삼을 거면 자네부터가 일단 황이야.”
“가, 감사합니다.”
내심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청와대는 지하벙커로 옮긴 이후로 주욱 전시행정 체제라 뭔가 대충대충 넘어가는 느낌이 없지 않다고 했다,
애초에 비서실장이 총무, 부속, 의전, 기록, 연설비서관을 데리고 청와대 살림을 도맡아야 했지만, 대통령이 지하벙커에 사는 마당이라 국정원에서 그 역할을 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러니 나는 대통령을 모실 필요가 없었고, 덕분에 내 역할도 굉장히 자유로웠다.
지하벙커에 있는 양판석 대신 협상과 정치공작을 수행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포지션 정리가 일단락되자, 양판석이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그래. 일단 미국에 가줘야겠는데.”
“미국이요?”
“뭐, 그렇게 큰일은 아니고…….”
치익- 양판석이 콜라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내 종이컵에 콜라를 붓기 시작했다.
“미국 대통령이 바뀌었네. 한국 대사로 좀 가줘야겠어.”
“예?”
“당선자랑 만나서 제주도 테러에 대해 이야기해보게. 범인을 색출해서 보복을 할 예정인데. 그쪽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