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1 - 겨울철 여행은 가는 거 아니다 (2)
비행기 국유화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현대사다, 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비행기에 대한 논쟁은 복잡했다.
비행괴수 출몰, 항공유 가격 폭등 따위의 이유가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정치적인 문제다.
게이트 사태 직후, 유재광 대통령은 모든 비행기를 국유화시키고 공항을 봉쇄했다.
국가전략자원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재벌들의 해외도주를 막아낸 것이다. 평생을 재벌과 싸운 정치인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비록 유재광 대통령은 난리 중에 서거했지만, 차재균 군부가 그 정책을 이어받았다.
철저하게 효율만을 중시하던 군사정권은 비행기를 민간에 돌려줄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징발한 비행기를 서울에 돌리며 이능사태 초기대응에 톡톡히 활용했다.
그 뒤를 이은 원옥분 권한대행은 비교적 안정된 사회를 이끌었다.
이즈음에 재벌권력이 다시 부활하면서 비행기를 반환해달라는 요구도 조금씩 있었는데,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초법적인 권력을 자랑하던 12인 국회는 아예 ‘개인의 비행수단 보유’를 불법으로 만들어버렸다.
사실 이건 ‘어차피 항공사 관계자들도 거의 다 죽었는데, 비행기는 그냥 국가가 꿀꺽하겠다’는 도둑놈 심보였는데, ‘서울 포위망 붕괴-의정부 사태-서울 폭주’로 이어지던 국가 위기에서, 비행기 국유화는 민간인 구출과 재벌들의 해외도주 방지에 아주 효과적이었다.
덕분에 양판석 민주정부에서도 비행기는 여전히 국가가 소유하고 있다.
아예 국민연금공단이 기존 항공사 주식들을 쓸어 담으면서 항공분야 전체를 먹기도 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모든 비행기들은 국가에 예속되나 싶었는데…….
“하지만 우린 답을 찾았죠. 늘 그랬듯이.”
“……아니, 전용기 하나 장만했다는 소리를 뭐 그리 진지하게-”
“쉿. 일단 들어보세요.”
천금순 사장은 자기가 어떻게 전용기를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방산비리가 비행기들을 국가로부터 해방시켰어요.”
비행기들을 관리하는 건 공군이었다. 그리고 공군 장성들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그들은 재벌들에게 ‘투자금’을 받고 비행기를 대여해 줬다. 놀랍게도, 이 모든 과정이 합법이었다고 한다.
“대략적인 계획을 설정한 건 저였지만…… 삼성 법무팀이 가장 크게 활약했죠. 전직 국방부 장관을 감옥에서 꺼내와서 짬으로 누른 건, 아무리 생각해도 천재적인 발상…….”
“그만, 그만! 더 듣기 싫습니다!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공무원한테 하는 겁니까?”
“원래 여행길에는 썰 푸는 게 정석이죠. 제주도 도착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혹시 헌팅 디바이스 공장이 방위산업체가 아닌 이유는 관심 없으세요?”
”아! 관심 없다니까!“
* * *
천 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순식간에 제주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따가울 정도로 매서운 겨울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동장군이 칼부림을 하고 있구만…….”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솜털 같은 눈송이가 수북이 깔렸고, 피채원은 가방에서 우산을 펼쳐 내게 건넸다.
“의원님, 배 안 고프세요?”
“너는 비행기에서 떡볶이를 두 그릇이나 먹어놓고도 배가 고프디?”
“……!”
흠칫. 피채원이 가슴에 비수가 박힌 것처럼 몸을 떨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청포도맛 사탕을 꺼내 녀석에게 쥐여 주고선, 전용기 승무원들과 대화를 마친 천 사장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다음 일정이 뭡니까.”
“네?”
“추워서 얼어죽을 날씨에 제주도 올레길이나 걷자고 부른 것 같지는 않은데.”
* * *
[제주도 올레길 만남…… 젊은 리더십]
[한승문-천금순 제주도 회동…… “이쯤되면 절친?”]
[韓 ‘경제 이끌어줘서 감사’, 千 ‘기업인 소임’]
[신수광, “한승문이 경제 운운? 뻔뻔하다!”]
돈까스 사준다 그래서 따라갔더니 주사를 맞은 기분이었다. 이 얼어죽을 날씨에 제주도 올레길에서 바닷바람까지 맞다니.
한나절 정도 제주도를 돌아다녔더니 인터넷이 후끈했다. 그리고 추운 날씨에 돌아다녀서 그런지 핸드폰 배터리는 맛이 갔고 말이다.
나름 반응을 보니 정치적으로는 꽤나 영양가 있는 만남인 것 같았지만, 추운 겨울에 생고생을 한 것 같아서 마음이 꽁했다.
“오늘 재밌었어요?”
“저리 가십쇼.”
“에이. 그래도 내일이 전경련 모임인데. 이 정도 홍보는 해줘야 끗발이 먹히지 않겠어요?”
“재벌들 친목질 하는데 발언권 키우려고. 나를 철저하게 이용하고 버렸다는 소리 아닙니까?”
“대신 저녁은 거하게 쏘죠!”
“제가 고작 음식에 넘어가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라고 말하기에는 고기가 너무 맛있었다. 스테이크를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린다. 이빨 사이로 버터향 육즙이 흘러내렸다.
이게 대체 얼마만의 별미인지. 오죽하면 피채원 몫으로 나온 것까지 뺏어먹고 싶을 정도다.
“……!”
흠칫. 불길한 예감을 느낀 피채원이 접시를 휙 가져갔다. 천 사장이 빙글빙글 웃으며 감사인사를 전한다.
“오늘 고마웠어요. 이런저런 일이 있었는데, 덕분에 깔끔하게 해결된 것 같네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천 사장이 말없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다크서클이 주렁주렁 매달린 눈매가 드러났다. 거의 판다 수준이었다.
제아무리 그녀가 돈 버는 맛에 취해 밤샘을 일상으로 여기는 인간이라 해도, 저 정도 몰골이면 당장 안 쓰러지는 게 이상했다.
“사실…… 오늘이 GS 아이기스 상장한 지 1주일 되는 날인데요. 코쟁이들이 공매도를 질러놓고 미국에 가짜뉴스를 퍼뜨려서…….”
“아, 아무튼 해결된 거죠?”
“덕분에요.”
천 사장은 서양인들을 욕하면서도 기어코 양주를 깠다. 조막만한 머리통에 술이 어찌나 많이 들어가던지.
지금도 그녀의 핸드폰에는 수없이 연락이 밀려들고 있었지만, 그녀는 양주 한 잔을 비우고서는 나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대통령 비서실장 지명받으셨다면서요?”
“청와대에서 발표도 안 한 일을 너무 태연하게 말하는 거 아닙니까?”
“돈은 솔직하잖아요. 대통령 비서실 쪽 사람들이 재산을 이상하게 굴리더라고.”
아무래도. 그녀는 그녀만의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는 모양이었다. 나는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
“흠. 제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자신 없으신가 봐요?”
솔직히 그랬다.
“아마, 내년 1월 개각에 맞춰서 청문회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제가 딱 서른 살 아닙니까. 서른 살에 대통령 비서실장이면 유례가 없는 일인데요.”
“그러면 지금까지는 유례가 있었나요?”
그것도 그렇군. 당선되자마자 임기 첫날에 국회의사당 지붕이 무너지며 괴수가 떨어진 정치인은 나 말고 있을 리가 없다.
“하긴. 세상이 이 꼴이 아니었으면 제가 출세를 했겠습니까? 끽해야 국회의원 4년 하다가 낙선해서 종편 예능이나 나갔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솔직히 자기도 정석적으로 정치하는 스타일은 아니잖아요? 공직사회에서 크게 성공할 상은 딱히…….”
그래. 솔직한 말이라서 마음이 아프다. 어느새 요지경이 되어버린 세상에 허망함을 느끼고 있으니. 천 사장이 가볍게 미소지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뭐요.”
“저는 호주에서 우리가 질 줄 알았어요.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기만 하는데, 거기서 어떻게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었죠.”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 예상이 빗나가더라고요. 그래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내가 어디서 계산이 틀린 건지.”
그녀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항상 그랬죠. 호주, 유럽, 서울, 의정부…….”
“…….”
“내 예상에서 벗어나는 곳에는 항상 누가 있더라고요.”
* * *
다음 날 저녁. 제주도의 한 호텔.
“도착했습니다. 보좌관님. 내리시죠.”
“네, 의원님.”
나는 운전기사처럼 피채원을 모셨다. 녀석에게는 운전면허가 없었으니까. 아마 보좌관을 모시고 운전하는 정치인은 내가 처음일 거다.
우리는 호텔 입구에서 내렸다. 직원이 차량을 받아가는 동안, 나는 피채원에게 작게 중얼거렸다.
“머리 복잡한 사람들 많이 모였다고 무리하지 말고. 그냥 맛있는 거나 많이 집어먹어도 돼.”
“네.”
대답은 그래도 피채원은 이미 진통제 4알을 삼킨 뒤였다. 재벌들 속내를 낱낱이 파악하겠다는 심보가 느껴졌다. 무리하다가 쓰러지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나는 지팡이를 짚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지라 로비에서부터 사람이 북적거렸다.
천장에 큼지막하게 매달린 현수막이 보인다.
‘전경련 정기총회’.
“이야. 오랜만이네.”
“예전에 가보신 적 있으신가요.”
“보좌관 때 한번 가봤었지.”
옛날에 양판석을 따라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그때는 국회의원 여럿이 피켓을 들고 재벌개혁해야 한다고 난리를 치고선, 저녁에 대기업 대관담당자들이랑 사시미를 먹었다.
어쨌든 당시 총회의 분위기는 굉장히 얌전했다. 재벌 총수들이 기본적으로 할아버지 할머니라 그런가, 식사도 무슨 호박죽이랑 수정과가 나오더라.
하지만, 그때에 비해 지금은 굉장히 활기찼다. 재벌들의 전체적인 연령대가 젊어진 게 확실히 눈에 들어온다.
장전읍 사건 때 그렇게 조져댔으니 당연한 일인가. 재벌들도 보면 살기 참 피곤한 세상이다 싶다. 나 때문에.
“자, 장관님 오셨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호텔 프런트에서 안내직원이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그러나 누군가 직원을 제지하며 안내역을 자처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장관님. 먼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중엽 지사님? 이거 반갑습니다.”
“하하! 제주도에서 뵈어서 그런지, 더 반가운 것 같네요!”
그는 나를 끼고 연회장을 한 바퀴 돌았다. 별로 안 친한 사람이랑 친분을 과시하는 것 같아서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괜히 이리저리 다니면서 누구 인사 돌리지는 않았으니, 이제는 나를 아랫사람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하긴. 국민당 당대표 자리를 떠먹여줬으니 누군들 천사처럼 보이지 않을까.
청중엽은 나를 지정석에 안내하고서는 훌쩍 떠나갔다. 깔끔한 이별이라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왜 아무도 안 오지?”
피채원과 올리브 치킨 샐러드를 퍼먹으면서 자리에 앉아 있는데. 아무도 내가 있는 테이블로 찾아오지 않았다.
피채원이 그 해답을 제시했다.
“의원님 표정이 너무 굳어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내 표정은 항상 이런데.”
“솔직히 의원님 연세 드시면서 인상이 많이 날카로워지셨어요. 특히 호주 사태 이후로는 가만히 있어도 화내는 것 같고요.”
“젠장. 이래서 정치를 끊어야지.”
장난스럽게 대답하긴 했지만, 나는 사실 장전읍 사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재계 절반 이상이 갈려 나간 사건이었으니까.
가족의 위독함으로 인해 북한 쪽 장기밀매시장에 손을 댄 재벌들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양반들은 유재경 손에 남김없이 색출되었다. 물론 내가 충동질한 짓이었다.
거기에 한국 헌터들을 살해해서 장기를 팔아먹던 놈들도 있었던지라, 정부는 예외 없이 철저하게 장기밀매 시장을 박살 냈다.
심지어 헌터들 장기 털어먹던 놈들은 아직까지도 잡히지 않았다.
일단 각성제 제조비법 연구하려는 외국 세력으로 추정 중인데, 꼬리를 깔끔하게 잘라버려서 수사가 어렵다고 그랬다.
그래서 장전읍 사태는 아직까지도 양판석 행정부의 역린으로 남았다.
덕분에 재벌이고 뭐고 집행유예 없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지금 모인 재벌들은 그들로부터 자리를 물려받은 이들이었고 말이다.
즉, 누군가는 내 덕에 기회를 잡았고, 누군가는 나 때문에 부모님을 감옥에 보냈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였다. 일단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흐음…….”
어쨌든. 아무도 내게 찾아오지 않은 덕분에, 나는 가만히 앉아서 연회장을 구경했다.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은 트레이에 돌아다니는 샴페인을 홀짝였다. 자세히 보니까 의외로 아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피채원과 쑥덕거리며 잡담을 나눴다.
“저 사람 이유정 헌터 아니냐? 금강산 3대 길드 대표가 재벌집에 며느리로 들어갔네. 뭐하는 회사래?”
“APT 에이전시네요. CEM 계열사 사장이 독립해서 만들었는데, 지금 지주회사랑 법적으로 문제가 많아요.”
“어어? 저 사람도 헌터네. 8급 헌터 서중섭. 압구정파에서 전기뱀장어로 통하던 초능력자였는데, 옆에 있는 여자는 누구지?”
“대성생명보험 일가 둘째 딸이요. 일단은 공개연애 중인데…… 임신했네요.”
피채원은 방금 알아낸 정보를 원래 알고 있던 것처럼 이야기했다. 덕분에 나도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피채원도 이쯤 되면 두통이 생겼을까 걱정했는데, 이 짓도 익숙해진 모양인지 그냥 우물우물 샐러드를 먹고 있었다.
“맛있냐?”
“네.”
“그래. 많이 먹어라.”
어린애 취급이 창피한지 피채원이 나를 째려볼 무렵이었다.
“둘이 뭐 해요? 나도 끼워줘!”
“오, 천 사장님.”
천 사장은 항상 공식 석상에서 하얀색 양복을 고집했고, 오늘도 눈토끼 같은 차림으로 우리를 방문했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자리는 편하세요?”
“편합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네요.”
“그게 다 제가 어저께 침 발라놔서 그래요.”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별말씀을요!”
공식 석상이라 그런지 그녀는 사석에서보다 한층 활기차 보였다. 많이 피곤할 텐데. 조금 불쌍하다.
어느새 테이블에 자리 잡은 천 사장이 우리가 먹던 치킨 샐러드를 한 입 퍼먹었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린다.
“어우. 퍽퍽해. 왜 이런 자리에서 샐러드를 먹고 있어요?”
“그러면 전경련 정기총회에서 등갈비라도 뜯어먹을까요?”
“못할 거 없죠.”
“하지 마세요. 창피하니까.”
그렇게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던 와중이었다.
쿠웅-!
호텔 로비 쪽에서 무언가 들려왔다. 누군가 짐덩이라도 떨어뜨렸다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소리였다.
회장이 순식간에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해졌다. 그리고 그 어수선한 분위기를 잠재운 건,
타앙-!
선명하게 들려온 총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