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EP - 죽은 초인의 사회
게이트 사태 초기, 사회 혼란을 틈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약탈자들은 평범한 피난민들과 함께 구조되었다.
범죄자나 일반인이나 똑같이 사람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특히, 범죄 피해자들이 생존해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니 구분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범죄수사를 위해 서울 한복판에 조사단을 파견할 수도 없고, 간단한 절도나 폭행 정도는 피난민들 대다수가 저지른 범죄였으니 범법자 색출도 힘들었다.
상황이 그러한데 물증도 없이 약탈자를 찾아내자며 사회를 들쑤시는 건, 인민재판으로 이어지며 수도권 피난민들에 대한 차별 문제를 심화시킬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약탈자들에 대한 문제는 서서히 잊혀져 갔다. 모두가 그 수치스러운 역사의 단면을 외면했다.
현역 정치인들이 약탈자 출신이라는 게 밝혀지기 전까지 말이다.
「경북 문경의 박근태 시의원이 한때 ‘월악파’로 활동한 연쇄살인마였음이 밝혀졌습니다. 박 의원은 소백산 전투에서 활약한 초상능력자로도 유명한데요…….」
「신수광 국민당 비대위원장의 측근들이 약탈 전력으로 연이어 물의를 빚는 가운데, 신 비대위원장의 아들 신 모씨가 살인방조 혐의로 검찰에…….」
「국민 여러분! 억울합니다! 제 아들은 납치된 상황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쳤을 뿐입니다! 당장 언론은 가짜뉴스를 중단하고…….」
국회에서 터져나온 초대형 사건이 대한민국의 연말을 뜨겁게 달궜다.
신수광 게이트.
딸이 괴수에게 죽었다는 연설로 인기를 얻은 정치인은, 아들과 측근들의 약탈범죄와 함께 순식간에 몰락했다.
일각에서는 이 정도 대형사건이 몇 년이나 조용하다가 왜 하필 선거철에 터지냐는 의문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대한민국을 가득 메웠다.
그 권력의 공백을 메운 건 청중엽 지사였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국민당의 선거캠프를 장악하고, 총선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인적 쇄신을 약속드립니다! 지금까지 공천이 확정된 모든 인사들을 컷오프하겠습니다. 당명변경 따위의 겉치레가 아니라, 진실된 마음으로 다시 국민 앞에 나아가고자…….”
공천권을 장악한 청중엽은 제주도 출신, 즉, 재벌들과 유착한 친재벌 정치인들을 대거 출마시켰다.
그렇게 제주도의 맹주가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개시한 곳은 경상도였다.
원래라면 원옥분이 철통같이 방어하는 지역이었겠지만, 원옥분이 전라북도에 출마하며 경상도에도 은근한 배신감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재벌자본으로 지역발전을 약속할 수 있는 친재벌 정치인들이 경상도에 유입된다는 것은 막대한 파급력을 불러왔다.
그러니 청중엽의 ‘경상도 상륙작전’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변수가 하나 등장한다.
“부산의 아들! 이 유재경이가 경제 살리겠습니다! 문제는 경제입니다! 경제는 유재경입니다!”
국무총리 교체로 인해 부산에 내몰렸던 유재경이, 신수광의 지지층을 흡수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이다.
“장전읍 장기밀매 심판한 사람이 누굽니까! 한승문 의원이랑 제가! 이 유재경이가 손잡고 때려잡았습니다!”
심지어 유재경은 임기 내내 재벌들의 횡포를 저지하던 반재벌 인사였다. 국민당 친재벌 인사들의 최대 강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위기에 처한 국방당에 유재경이라는 구원투수가 등장하면서, 국방당 내부의 계파관계도 한 차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원옥분의 카리스마에 눌려 있던 경상도 국회의원들이 유재경에게 모여들면서, 원옥분과 은근한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국방당 원내대표 신의섭입니다. 국방당 선대위에 묻겠습니다. 선대위 공동위원장에 유재경 전 총리님을 왜 추대하지 않는……."
이미 검찰 내부에서 양판석에게 공격받고 있는 원옥분이었기에, 국회까지 유재경에게 빼앗기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원옥분은 이상하리만치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흐린 눈빛이 경상도를 주시하고 있음은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경상도는 이번 총선의 최대 격전지가 되었다.
국방당과 국민당. 유재경과 청중엽. 그리고 조용히 사태를 주시하는 원옥분.
신수광의 파멸을 신호탄 삼아, 파국으로 치닫는 진흙탕 싸움이 예고되고 있었다.
* * *
양일호와 이호정은 천생연분이다.
양일호는 고아원 출신이었고, 이호정은 가족이 남보다 못했던지라,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기도 했다.
비록 한승문의 꼭두각시라는 욕을 먹기는 해도, 각자의 재능을 살려 공직생활에서도 순항 중이기도 했다.
그렇게만 본다면 걱정이랄 게 하나도 없을 법한 연인이었겠지만, 그들은 밥상머리 앞에서 울적하게 죽상을 짓고 있었다.
강시호 때문이었다.
‘저, 각성제 먹고 헌터 아카데미 들어갈게요. 두 분 다 지금까지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승문 일행의 보좌관 동료, 강석호는 이제 공식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강시호 본인이 요청한 사항이었다.
생명보험회사가 전부 파산해 버린 마당에 그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싶겠지만, 강석호는 한때 압구정파의 원년멤버로 활동했던 초인이었다.
압구정 탈출작전에도 참전했고, 수도권 기동타격대 경력도 있으며, 결정적으로 서울 방어선 붕괴 당시 전장에서 실종되었다.
‘국가유공자’다.
그리고 강석호의 마지막 동생. 강시호는 형의 순직위로금으로 각성제를 구입했다. 그리고 제주도 헌터 아카데미로 훌쩍 떠나버렸다.
‘저, 훌륭한 헌터가 돼서 서울에 살아있을 형을 찾으러 갈 거예요. 감 기자님이랑 지윤이한테도 그동안 고마웠다고 전해주세요.’
강석호의 실종 이후 강시호를 키우던 이호정과 양일호는, 고심 끝에 결국 강시호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세 명이 있던 집에 두 명만 있으니, 그만큼 마음이 텅 비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바빠서 제대로 된 부모 노릇도 못해준 것 같은데.”
“우리가 퇴근하고 애 얼굴이나 보긴 했어? 맨날 감 기자님한테 맡기고 일이나 했지.”
심지어 사태 발발 당시 양일호와 이호정은 강석호를 버리고 떠난 경력까지 있었다. 꼬드긴 건 한승문이지만 죄책감은 그들 몫이었다.
“쯧…….”
“에휴…….”
두 사람이 그렇게 한숨만 내쉬고 있으니,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에 이호정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호정아. 어디가?”
“오빠. 미안. 갑자기 일이 생겼네.”
“무슨 일?”
“신수광이네 패거리가 국회 앞에서 단체로 삭발한대.”
모처럼의 휴일을 뺏겨서 그런 건지, 아니면 강시호 때문에 예민해져서 그런건지, 이호정의 독설은 평소보다 살벌했다.
“저번에 삭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 난리네. 민둥머리에 바리깡 대면 피나는 거 아닌가 몰라. 볼만 하겠어.”
“그러면 그거 구경하려고 가는 거야?”
“아니. 청중엽 지사가 아예 신수광네 사람들을 국민당에서 제명한다고 하네. 지금 선거캠프에 사람들 불러 모으고 있대.”
“쩝……. 살벌하구만.”
양일호가 묘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요즘 정치판은 난리도 아니었다.
신수광과 그 계파는 언론과 여론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고, 유재경과 청중엽 사이에선 치열한 전면전이 발발했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원옥분이 사람 하나 찍어다가 검찰로 보내버리니, 살벌한 동장군이 칼춤을 추는 계절이 찾아왔다 싶다.
양일호는 문득 중얼거렸다.
“승문이 형도 은근히 살벌하다니까…….”
이게 다 한승문 때문이었다. 정치인들 죄다 싸움 붙여서 피바다를 만들어놓고, 본인은 대통령이랑 겨울낚시 다니고 있다.
우리편이라 다행이기도 했고, 양일호 본인도 이번 계획에 손까지 보태기는 했지만, 그건 그거고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이에 이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 오빠는 원래부터 독했어. 우리야 친하게 지내니까 종종 까먹는 거지.”
“글쎄. 옛날에는 머리만 좋았지 독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호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옷깃을 여몄다. 그리고 양일호의 볼에 작게 입을 맞추고 현관으로 나갔다.
“오빠. 나 갔다 온다.”
“올 때 메로나.”
“오늘 외식하기로 한 거 빵꾸내서 미안하기는 한데, 오빠도 마침 시간 비었으니까 집에만 있지 말고 누구 좀 만나고 다녀. 정치인이 휴일이 어딨어?”
“나도 갈 데 있거든!”
“어머, 혹시 여자 만나는 건 아니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나, 참!”
* * *
“…….…….오늘은 여자시네요.”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용기! 그게 연구자의 소양 아니겠어? 아무튼 어서 와!”
양일호는 청송 연구소를 방문했다. 도박사는 언제나 그렇듯 시끄럽게 재잘대며 양일호를 반겼다.
도박사는 고작 몇 초 사이에 남자로 변했다가 여자로 변했다가를 반복했다. 인체변형의 끝이 어딘지 실험하는 느낌이었다.
“양일호 씨. 장관 되셨다면서? 좋아! 좋아! 솔직히 한가놈은 조금 무서웠어. 조금만 수틀리면 부산 앞바다에 풍덩 빠질 것 같은 느낌이랄까…….”
“연구는 잘 되어가시나요?”
“그럼! 그쪽에서 보내주는 표본이 워낙 훌륭해서 말이지. 요즘은 변형계 능력자들도 현역으로 뛴다면서? 옛날에는 제주도 지하에서 감금, 아니, 요양한다고 하더니만…….”
양일호가 장관이 된 이후, 변형계 각성자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각성제의 부작용으로 괴수의 몸뚱이에 갇혀버린 사람들이, 도박사의 약물을 통해 인간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변형계 능력자들은 터부시되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이 국내가 아니라 동남아시아나 중국 쪽에서 활동한다.
이는 기괴한 외모 탓도 있지만, 결국은 정치적인 문제가 컸다. 변형계 능력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차재균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정권 차원에서 현대사를 애매모호하게 은폐하고 있는 가운데, 차재균 시절의 역사가 조명되는 건 ‘역사정리사업’에 해가 되는 일이었다.
한국 현대사는 철저하게 영웅들의 서사를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니 각성제의 원형이 생체실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서서히 은폐되어야 했다.
그러나 도박사는 이를 언급했다. 한국 사회에서 굉장히 터부시되는 일이었다.
“어쩌면 차재균 차관 스타일 각성제의 완성이 변형계일지도 모르겠네. 그건 의식이 있는 괴수를 만드는 약이었잖아?”
“……사람을 정신만 남기고 괴물로 만드는 약이었죠. 대부분이 정신까지 괴물이 되고 미쳐 날뛰긴 했지만요.”
“그래. 그것만 고쳤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결국은 몸뚱이야 어찌됐든 인간성이 가장 중요했지. 그런데 하필 대부분 범죄자로 실험을 하는 바람에 고분고분하지가 않더라고. 그래서 정신에 대한 연구는 굉장히 미흡했었어.”
양일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당시의 참상을 기억하는 입장에서 도박사의 발언은 매우 경솔했기 때문이다.
도박사도 그걸 인지했는지, 하얀 얼굴을 찰싹찰싹 때리며 말을 정정했다.
“이런! 미안. 미안. 실험을 위해 IQ를 높인다고 자꾸 뇌를 건드리는데, 가끔 잘못 건드리면 윤리관이 희미해질 때가 있어. 방금 말은 생체실험 참여 연구원이 해도 될 법한 말은 아니었지?”
“…….”
“미안해…….”
하얀 피부를 살구색으로 되돌리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도박사는 평범한 인간 여성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변형계 능력자가 자기 뇌까지 조작한다니. 극도의 생리적인 거부감과 공포심이 들었다.
양일호의 기분이 모호해졌다. 한승문이 헌터들을 견제하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이었을까?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맴도는 가운데, 청송 연구소의 책임자인 장소장이 양일호를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양일호 의원님.”
“아……! 소장님!”
“이제는 장관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 * *
도박사는 생체실험에 참여했다가, 결국 자기 몸으로 생체실험을 하며 과학을 발전시킨 연구원이었고, 장소장은 국가를 위해 뭐든지 불사하는 국정원 요원이었다.
그리고 청송 연구소는 이 삐뚤어진 인간상들이 사회와 격리된 곳이었으며, 양일호도 결국 어딘가 삐뚤어진 천재였기에 청송을 찾는 발길이 잦았다.
그리고 도박사는 양일호가 보일 때마다 그간의 연구성과를 전부 꺼내와서 의기양양하게 자랑하고는 했다.
예전에는 언제든지 폐기당할 수 있는 스스로의 처지를 의식한 행동이었지만. 이제는 그냥 친구한테 연구성과를 자랑하는 느낌이었다.
“이거는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떨지 않게 해주는 방향제! 이거는 수혈팩을 RH-로 바꿔주는 수용액, 이건 고양이를 끌어들이는 능력을 주는 딸기맛 각성제, 그리고 이거는 깨지면 터지는 마력 수류탄…….”
도박사의 자질구레한 설명을 들으며 옹기종기 모여앉아 만두를 먹고 있으니, 장 원장이 부드럽게 웃으며 질문을 건넨다.
“그나저나 바깥세상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네?”
“요즘 이래저래 시끄럽던데요.”
“……항상 뒤숭숭하죠. 뭐.”
양일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가끔 서포터 살인사건 일어나고, 심심하면 국경에서 총격전인데다가, 헌터들이 일상생활에서 감정조절 못해서 대형사고 한두 번씩 터지고…….”
“저런, 치안관 제도를 도입했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그렇습니까?”
“이제는 치안관 과잉진압 논란까지 일어나죠. 보통 나쁜 놈일수록 돈이 많더라고요. 개나소나 변호사 불러서 언론플레이하니까 미치겠어요.”
“하하! 그거 참 힘드시겠습니다. 저 시리아에 있었을 때는 국정원 비밀작전을 웬 기자놈이 인권단체에…… 성이 감 씨였는데…….”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으니, 마침 TV에 신수광이 등장했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비참한 몰골로 무릎 꿇고 있었다.
「제 아들도…… 살인마들한테 끌려가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언론은 당장 가짜뉴스를 중단하고…….」
신수광이 초췌한 인상으로 인터뷰를 이어가려던 찰나, 어디선가 계란이 날아왔다.
그러나 힘없이 날아온 계란은 신수광의 어깨 즈음에 톡 부딪히고서 바닥에 떨어졌다.
정작 계란을 던진 사람이 반쯤 시체에 가까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 아들 살려내라! 이놈아! 내 아들……!」
「……네. 현장 연결이 매끄럽지 못했던 점. 사죄드립니다. 그나저나 교수님은 지금 사태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에……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닐 수가…….」
나름 정치인이었던 양일호가 왠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있으니, 장 원장이 슬쩍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흠. 경인권 난민캠프에 약탈자가 섞였다더니, 일이 이렇게 커지는군요.”
“……뭐라고요?”
“사회악이니까요. 차재균 차관님이 꽤나 적극적으로 약탈자들을 사냥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때 대부분 쓸려나갔었는데, 하필 인천 쪽 조직 대장이 국회의원 아들이라서…….”
“……국회의원이요?”
“살아남은 12명의 국회의원 중 하나였고, 서울 포위망이 무너지면서 지금은 사망했지요. 아무튼, 당시에는 국회 협력이 워낙 중요한 상황이었던지라, 그 왈패놈들이 난민캠프 대장 노릇까지 해먹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보안사 쪽 친구한테요.”
“…….”
결국, 별다른 재판 없이 군병력을 이용해 범죄자를 즉결처분했다는 소리였고, 그것도 필요에 따라 범죄자를 방치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장 원장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이유는 곧장 이어졌다.
“그때는 차선책이 시급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죄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사회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게 만족스러울 뿐이죠.”
“……그런가요.”
“뭐, 언젠가는 저 같은 악당들도 역사책에서 지워질 날이 올 겁니다. 사람들은 저를 무서워하지 않고 가볍게 비웃을 거고, 알아야 할 것만 알면서 열심히 이 나라에서 살아가겠죠.”
그렇게 말하는 장 원장의 미소는 선량한 시민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일호는 마음 한편이 조금 굳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양일호가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장 원장은 민망한 듯 혀를 내둘렀다.
“이런, 도박사랑 지내고 있으니 말이 너무 많아지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주책이었나요.”
“왜 가만히 있던 나한테 그래? 자기가 갱년기 온 거 아니야?”
“이 나라도 조금씩 나아지겠죠. 과거의 상처는 잊고, 조금씩, 조금씩…….”
마침 TV에서도 따뜻한 소식이 흘러 나왔다. 장 원장이 뉴스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저기 보십시오. 벌써부터 세상이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
“필요악으로 얼룩진 과거에서부터, 이런 식으로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아나운서는 부드럽게 웃으며 희소식을 전했다.
「강원도 속초를 마지막으로 전국에 공립 보육원이 설치되었습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세계 최초로 모든 재해피해아동을 국가에서 보살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아동들이 부담해야 할 양육비는 전액 무료이며, 특히 두각을 드러내는 일부 아동의 경우, 각성제 복용과 동시에 제주 수렵교육원 국비입학까지 지원해주는 방침을…….」
초상관리부 장관 양일호는, 그저 조용히 미소 지었다.
SIDE EP
죽은 초인의 사회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