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9 - 헌터들의 세상 (3)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니 세상이 눈송이로 물들어 있었다. 유재광 정권때 완공된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설원을 가로질렀다.
게이트 사태 이후로 철도가 망가지는 바람에 보수공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재작년 즈음에 들었는데, 공사판에 헌터들을 동원해서 그런지 훌륭하게 고쳐진 모양이다.
“……경치는 좋네.”
눈꽃이 피어난 침엽수림은 그야말로 윈도우 배경화면에서나 볼법한 절경이었지만, 나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도 추잡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먼저 떠올렸다.
양판석은 유재광 대통령의 개국공신이었고, 당연히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건설될 무렵에는 국토교통위원회 민주당 간사를 떡하니 차지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보좌관이었다. 즉, 과장 좀 보태서 당시 토건족들이 정부에게 전달한 뇌물의 절반 정도는 내 손을 거쳤다. 이 말이다.
물론 당시의 국토교통위원회 경험으로 신분당선 탈출 작전도 세울 수 있었고, 양판석이 던져준 콩고물로 내 재산도 꽤나 축적할 수 있었지만, 그때 뇌물작업에 손댄 심정은 정말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이 기다란 철도에서 내 젊은 날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으니, 건너편에 앉은 동승객이 모처럼의 감흥을 깨버렸다.
찰칵-!
갑작스레 들려온 카메라 셔터 소리. 피채원이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사방팔방을 찍어대고 있었다.
“……뭐하냐?”
“사진 찍죠.”
“……디카는 어디서 났고?”
“감 기자님한테 선물로 받았어요.”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뭐가 그렇게 신나서 하루 종일 찰칵찰칵거려?”
“이게 다 추억 아닐까요?”
찰칵, 피채원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내 사진을 찍었다.
의외로 자세가 꽤 그럴듯해서 피식 웃었더니, 녀석도 슬며시 웃으며 디카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는다.
설원을 달리는 기차 특등석은 호텔방처럼 편안했고, 커피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으며, 피채원은 모처럼의 해외여행에 들뜬 기색이었다.
지금껏 나가본 해외라고는 괴수천지 비상사태뿐이었으니 이 여유로운 분위기가 얼마나 좋을까. 심지어 세금으로 가는 여행 아닌가.
사실 무뚝뚝한 표정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었으나, 피채원은 평소보다 약 3배 정도 말이 많아진 상태였다.
“러시아 크기가 명왕성이랑 비슷하대요.”
“그래?”
“러시아 하나가 전 세계 육지 면적의 11.5%인 걸로 알아요. 남아메리카 전체랑 비슷하다고도 하고요.”
“그렇구나.”
“그런데 예전에 페름기 대멸종 때 터진 화산 하나가 시베리아 대부분을 뒤덮었으니 참 신기한 일이죠. 그걸 시베리아 트랩이라고 하는데요…….”
“으음.”
이제는 무슨 페름기 대멸종까지 나왔다. 그걸 왜 외우고 다니는지가 더 궁금할 지경이다.
그렇다고 진짜로 ‘그걸 왜 외우고 다니냐’고 물어보면, 한때는 명문대 지리학과 입시를 준비했었는데 이제는 못 하게 되었다든지,
아니면 고등학교 지리 선생님이랑 친했는데 지금은 살아 계시는지도 모르겠다든지, 따위의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다.
어쩌면 부모님 취미나 직업이 지질학 쪽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화제를 전환시킬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그러면 지금은 그 넓은 땅에서 온통 괴수가 나오고 있는 거네?”
“…….”
* * *
게이트 사태 직후, 러시아 정부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최후 방어선을 설치했다. 그리고 인근의 모든 국민들을 방어선 안으로 대피시켰다.
러시아의 인구는 유럽과 가까운 지점에 몰려 있었으니 대부분의 국민들이 방어선 안으로 대피할 수 있었지만, 러시아 동부는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시골마을 하나 구하기 위해 기갑여단으로 대륙을 횡단하느니, 인류의 대위기 속에서 국민을 희생하고 군사력을 보존하는 방식을 택했다.
따라서 시베리아 방면에 대한 구조작전은 무기한 보류되었고, 강력한 언론통제와 함께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견고한 방어선이 구축되었다.
그리고 이는 여러 학자들에게 대단히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그 학자들이 대외적으로 그러한 견해를 표출하지 않는 것에서 그 대전략의 단점이 드러난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수십년간 집권한 독재자였기에 가능한 전략이었지만, 그에 반기를 든 인물이 하나 있었다.
“빅토르 리.”
“…….”
“지금 우리가 만나러 가는 사람이다.”
러시아 연방군 극동군구 사령관.
빅토르 니콜라예비치 리.
그는 정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군대를 이끌고 시베리아로 진격했다. 그리고 드넓은 시베리아에 퍼진 러시아인들을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로 대피시켰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군사적 손실이 뒤따랐지만, 그가 구출한 피난민들이 게이트와 아주 밀접한 위치에 있던 이들이라는 점이 전세를 뒤바꿨다.
그가 구출한 피난민 행렬에서 나온 수많은 각성자들이 그에게 충성을 바치기 시작한 것이다. 모스크바에 대한 강렬한 원한을 품고서 말이다.
현재, 러시아 동부군벌세력은 강력한 각성자 전력을 바탕으로, 중국과 긴밀한 협력을 유지하며, 중앙아시아 쪽에도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렇게 러시아는 서쪽 정부와 동쪽 군부로 분리되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러시아 대통령이 죽었지.”
“…….”
“냉전이 터진 거야.”
그가 왜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모스크바 정부는 침묵하고 있고, 블라디보스토크 군부는 괴수로 인한 사고라고 주장하는 중이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은 나에게 동부군벌세력이 러시아 대통령을 암살했고, 미국이 개입해서 핵전쟁을 저지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들었던 게 아마 유럽 크라이시스 직후였을 거다. 피채원도 당시 그 대화를 엿들었던지라, 그 주제가 나오니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나는 잠시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녀석을 안심시켰다.
“뭐, 사실 우리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지.”
“……그런가요.”
“그래. 오히려 미국이 냉전에 개입하면서 이득을 빨아먹고 있잖냐. WPO 평의원을 어느 쪽에서 배출하는지도 주요 이슈고 말이야.”
“정부 정통성은 모스크바에 있지만, 실제 각성자들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지지하겠군요.”
“그렇지. 애매하고 민감한 문제야. 거기다가 평의원 배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미국에게 자꾸 뭘 내줘야 하고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차라리 WPO와 강대국들 사이의 관계를 끊어 버리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미국이 꽂은 빨대가 하나 없어지는 것 아니겠어?”
“유럽이 블라디보스토크 보고 짝퉁 정부라고만 안 했으면 일이 쉬웠을 텐데요.”
“…….”
* * *
러시아 동부군벌세력에서 가장 많은 인구와 자본이 몰려있는 곳은 블라디보스토크였지만, 가장 많은 군대가 몰려있는 곳은 하바롭스크였다.
따라서 그들은 보급망의 핵심인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생명줄처럼 여기며 지키고 있었고, 우리는 쾌적한 기차여행을 즐기며 하바롭스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3일 동안 호텔방에서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쓸데없이 크고 화려하지만 그만큼 난방이 잘 안 되는 펜트하우스였다.
그리고 여기는 러시아였고, 지금은 겨울이었다.
“답장 도착했습니다.”
솜이불 두 겹을 돌돌 말고 있는 피채원이 얼굴이랑 손만 내밀고서 문자 메시지를 읽었다. 동부군벌 놈들이 전화조차 안 하고 문자로 덜렁 보낸 소식이었다.
“빅토르 리 상장이 급한 용무가 있다고 하네요.”
“……오늘도?”
“그래서 너무 미안한데 회담은 내일로 미루겠답니다.”
“그 급한 용무는 대체 언제 끝난대냐?”
“저야 모르죠.”
“에라이!”
하바롭스크에 도착한 지 벌써 3일째. 빅토르 리는커녕 그쪽 간부조차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똑같은 패턴이다. 급한 일은 있는데 뭔지 알려줄 수는 없고, 하루만 기다려달라고 그러더니 내일 또 급한 일이 있으시댄다.
그래서 결국 3일 동안 호텔방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신세다. 게다가 겨울이라서 춥기는 또 무진장 춥다.
그래. 이쯤 되면 막나가자는 거였다.
“이런 생양아치들을 봤나. 꼬우면 꼽다고 말이나 할 것이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멕여?”
“저도 감기 걸린 것 같아요.”
“이래서 빨갱이들이랑은 상종을 하면 안 돼! 이름부터가 불길했어! 그냥!”
빅토르 리.
그 이름부터가 문제였다. 동양권과는 관계 없는 영어권 성씨라지만 어쨌든 이름부터가 ‘Lee’ 아니었던가?
그리고 나는 이름에 ‘리’ 자 들어가는 인간들과는 상성이 영 좋지 않았다. 게다가 사회주의자들과도 악연이 깊다. 두 개가 겹치면 그야말로 환장을 한다.
중국 총통. 리충빈.
탈북자 대장. 리철진.
북한 독재자. 리용수.
하여튼 내가 살면서 만난 빨갱이 나라 리 씨들은 정말 염통 없는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러시아도 옛날에는 빨갱이 나라 아니었던가?
이쯤 되면 일종의 징크스다. 나는 ‘리’ 씨 성을 가진 인간들과는 상종을 하면 안 되는 모양이다. ‘뤼’면은 또 모를까.
게다가 리충빈 총통의 쿠데타에 무기를 대준 게 빅토르 리였다. 모스크바 정부는 유럽과 친하니까 블라디보스토크 군부는 중국과 동맹을 맺은 것이다.
“그래…… 중국 믿고 뻗댄다 이거지?”
“의원님…….”
“이렇게 된 거 모스크바 정권 밀어줘서 국제사회로 끌어내자고. 신사적으로 나가려니까 갑질을 하려는 모양인데. 내가 미국이나 중국이 무섭지 그까짓 러시아 군벌이 무섭겠어?!”
“핵폭탄 든 군벌이잖아요…….”
“……하루만 더 기다려보자고!”
그리고 그 판단은 아주 유효했다.
그날 밤.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때는 밤 11시 16분. 가장 먼저 누군가의 접근을 알아차린 건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던 피채원이었다.
녀석은 미어캣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창가로 달려갔다. 전자레인지에 냉동피자를 데우던 나도 깜짝 놀라서 녀석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기 보세요.”
녀석은 손가락으로 호텔 1층 언저리를 가리켰다.
밤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덩치의 남성과 여성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누군데?”
“빅토르 리요……!”
“뭐?”
“일단 도청해 볼게요!”
피채원은 잽싸게 핸드폰을 꺼내서 메모장을 켰다. 그리고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며 핸드폰 타자를 써내려갔다.
그렇게 우리는 그들의 대화를 도청했다.
[……너무 무서운데. 그냥 자네가 나 대신 이야기하면 안 되나?]
[문 앞까지 와서 무슨 소리예요?]
[우리는 20대 후반에 국제사회의 정권을 틀어잡은 인간을 바람맞혔어. 그것도 3일 동안이나 말이야. 자네라면 빡치겠어? 안 빡치겠어?]
[그렇다고 이제 와서 대리인을 내세우면 그거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짓거리가 될 겁니다. 힘내서 담판 짓고 오세요!]
[자네도 알겠지만, 내가 그리 말주변이 좋은 편은 아니잖나. 상대는 정치인이라고.]
[그거 아세요? 사령관님이 보호하고 있는 민간인들이 남한 인구보다 많아요. 그러니까 자신감 있게 가봐요! 정 자신이 없으면 사령관님 주머니에 있는 핵폭탄을 믿던지!]
[우스갯소리인건 알겠는데 핵폭탄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게. 그리고 자네는 내일 아침에 총살이야.]
[됐으니까 빨리 가요!]
그들은 짧은 실랑이 끝에 우리가 머무는 호텔로 진입했다.
이윽고, 내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장관님. 경호처 보안팀장 장성준입니다. 늦은 시간에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빅토르 리가 왔군요.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 그걸 어떻게……?
“충분히 예상했던 일입니다. 간단한 주전부리 좀 올려주면 고맙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