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9 - 헌터들의 세상 (2)
“WPO에서 근무하던 요원들이 전부 해임되었습니다.”
서기섭 국정원장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대통령 앞에서조차 참담한 심정을 숨기지 못했다.
안 그래도 차재균 사태 이후로 정권의 시종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건만, 그런 국정원에 또다시 치명타를 가한 것이 대통령의 측근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는 보고라기보다는 일종의 책망에 가까웠다.
“하루아침에 모든 정보망이 마비됐고, 대외작전에 크나큰 차질이 빚어졌습니다. 호주 정국에 대한 영향력도 상실됐고 말입니다.”
“…….”
“전부 한승문 장관의 지시로 압니다. 각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국정원장의 추궁에 양판석은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그리고 별다른 고민 없이 툭 하고 말을 던졌다.
“거, 한승문이 손가락질에 해외 정보망이 마비될 정도면, 한승문이가 국정원장을 해야지.”
“크, 크흠……! 각하, 그런 말씀이 아니오라…….”
“장관도 아니고, 국회의원도 아닌 사람이 국정원을 마비시킨다? 그러면 국정원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요?”
다분히 웃음기 섞인 말이었지만 양판석은 말을 무기로 삼는 인간이었다. 국정원장이 바짝 굳어버린 사이 노인의 무릎 위에 고양이가 올라왔다.
그러나 고양이는 담배 냄새가 싫은지 금방 도망가 버렸고, 양판석은 아쉬운 눈으로 고양이를 쳐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쯧……. 자기도 이제 계산이 선 거지.”
“…….”
“괴물보다 사람이 더 위험하다고.”
* * *
사무실에 들어오니까 소파 위에 콩벌레가 한 마리 있었다.
“…….”
“…….”
피채원이다.
녀석은 누가 업어 가도 모를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그것도 콩벌레처럼 몸을 돌돌 말고서 말이다.
자는데 자기 머리카락은 왜 우물거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녀석의 입에서 축축한 머리카락을 빼내고 담요를 하나 덮어줬다.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으니 담요에 쏙 들어갔다. 그리고 녀석의 머리맡에는 아기자기한 글씨체로 정리된 서류 한 장이 있었다.
“어디 보자…….”
-구호복지위원회. 정석준.
-마석관리위원회. 이설.
-운영위원회. 마르코 페이.
-2사무국. 로레인 코빌리아.
-전술 어드바이저. 조안나 마이어.
전부 각국 정보기관과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물증은 없지만 피채원이 추려냈으니 확실하다. 그게 내가 피채원에게 내린 임무였다.
공익보다 국익을 우선하는 스파이들을 찾아내는 것.
이는 WPO 내부에서 움직이는 변수를 신속하게 제거하는 것임과 동시에, 미국 CIA, 중국 국가안전부, 러시아 정보총국, 등에게 보내는 경고와도 같았다.
내로라하는 정보기관들의 최정예 요원들이 어느날 아침 동시에 해고된다면 얼마나 섬뜩하겠나. 상대방이 더 유능한 정보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인데.
“…….”
“…….”
물론 그 무시무시한 정보조직의 실체는 소파 위에서 콩벌레처럼 낮잠을 자고 있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 * *
“중요한 건, 사람을 쳐내는 겁니다.”
“……사람을 쳐낸다고요?”
“조직을 건드릴 필요가 없어요. 그냥 사람만 쳐내면 됩니다.”
세계초인기구 WPO.
그 이름과는 달리 WPO는 초인들이 아니라 정치가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WPO를 헌터들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마음먹은 이상 그건 그렇게 되어야만 했고, 나는 그를 위해 가장 먼저 노아 뤼미에르를 설득하고 있었다.
“WPO가 강대국들을 견제해야 합니다.”
“……으음.”
“선거 이기겠다고 700만을 죽이려고 드는 인간들에게 뭘 믿고 세계평화를 맡기겠습니까?”
“……저도 마음은 같습니다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뇨. 쉽습니다.”
이미 계획은 내가 다 세워 놨다. 옆에서 대기하던 피채원에게 손짓하자, 녀석이 화이트보드와 매직펜을 건넨다.
뽁! 내가 수성매직 뚜껑을 따자 화이트보드에 큰 그림이 펼쳐졌다. 뤼미에르가 흥미롭다는 듯 몸을 기울인다.
“WPO라는 조직 자체가 애초에 강대국들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만들어진 유령회사나 다름 없습니다. 그래서 지배구조가 아주 부실해요.”
“…….”
“고작 5명짜리 평의회 하나가 21개의 상임위원회와 93개의 산하기관을 컨트롤합니다. 게다가 러시아 몫 평의원은 냉전중이라 선출이 안 됐어요.”
그러니 이 강력한 국제기구는 고작 4명의 손에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4명에 대한 인사권이 강대국 국가원수에게 있다는 점이 WPO가 허수아비 조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물론 하부기관에 잠입한 정보책들이 나무뿌리처럼 퍼져 있었지만, 그건 피채원과 내가 싹 다 뽑아버렸다.
즉, 4명짜리 평의회만 장악하면 WPO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운이 좋게도 지금 대화하는 두 사람이 평의원이네요.”
“…….”
“심지어 제가 부의장이고 당신이 의장입니다.”
물론 이름뿐인 직위였으니 별다른 힘은 없었다. 게다가 여기서 1명을 더 꼬셔서 과반수를 만들 수도 없었고 말이다.
중국 쪽 평의원은 국가안전부 소속 헌터였다. 생사여탈권이 잡혀 있으니 섣불리 끌어들일 수가 없다. 게다가 중국은 리충빈 집권 초기라서 내부기강 잡느라 잠잠한 거지 본성은 국제사회의 깡패였고 말이다.
그리고 미국 쪽 평의원은 연방정부 측 대표가 아니라 대기업들과도 친밀한 로비스트였다. 개인 자격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이 절대 아니다. 하물며 이 시국에 존재감 없이 짱박혀 있다는 건 그가 참으로 현명한 인물이라는 증거였다.
즉, 현 시점에서 평의회를 장악할 수는 없다.
미국과 중국을 싸움붙이고 이를 이용해도 되긴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한 방식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러시아를 끌어들이면 어떨까요?”
“……러시아?”
원래 평의회에는 러시아 몫의 자리가 하나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두 세력으로 나뉘어 냉전 중이라 아직도 1명의 대표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은 그걸 이용해서 양쪽 세력을 저울질하는 중이고, 러시아는 상대방을 고꾸라뜨리기 위해,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그 수작질에 놀아나고 있다.
그런데 WPO가 강대국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면? 러시아 또한 미국의 개입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WPO가 헌터들의 손에 돌아온다면, 러시아 헌터들이 독자적으로 WPO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고 말이다.
“이거 어떻습니까?”
“…….”
“이렇게 판을 짜면, 해볼 만하지 않아요?”
* * *
물론 세상일이 계획대로만 굴러가지는 않는다. 모든 일에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고, 성질 더러운 방해꾼들이 있는 법이다.
당장 뤼미에르도 내게 그 점을 지적했으나, 내가 보기에 이번 작업은 여전히 해볼 만했다.
“장관. 그런데 우리가 WPO를 장악하는 걸 다른 나라들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겠습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그러니 그렇게 만들어야죠.”
“방법이 있습니까?”
“예.”
다행히도 지금은 절호의 기회였다. 호주 전쟁의 여파로 세계는 헌터들에게 열광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미국이 대선 시즌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선거철 민주국가보다 취약한 동네가 없다. 그때쯤 되면 정치인들이 맛이 가버리기 때문이다. 당연히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대선후보는 무조건 예스맨이다.
나는 그 점을 파고들었다.
“당연히 WPO는 헌터들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들이야말로 호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들 아니겠습니까? 민주당과 일부 몰지각한 금권세력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호주를 지킨 헌터들은, 당연히 그 숭고한 정신에 걸맞는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나는 그게 미국의 정신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공화당 후보, 마이크 펜스와의 밀실회담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주지사에 부통령까지 지낸 양반이라 그런지 얌전하고 정중한 분위기 속에서 협상을 끝냈다.
나는 호주에서 발생한 미국 연방정부의 모든 의혹들을 조사하지 않기로 했고, 대신 WPO에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에 대한 묵시적 지지를 약속받았다.
협상이 끝나자마자 미국 대통령의 SNS에 내 사진이 올라오며 언론플레이가 시작된 것도, 내가 지불한 약간의 대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연방정부의 참담한 행태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민들이 안전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헌터들의 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조화와 상생을 추구했지요. 그게 헌터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과의 협상도 나름 성공적이었다. 지난 4개월간 온갖 인신공격과 언론플레이로 나를 천하의 개새끼로 몰아갔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퍽 친근한 자세로 나와의 점심식사에 임했다.
그리고 나는 미국 민주당이 나에게 4개월간 저지른 온갖 욕설과 비방과 정치공세에 대한 원한을 풀기로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미국 민주당은 내가 WPO를 장악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논평도 내지 않을 것임을 약속받았다.
당장 민주당이 정권심판론을 내세우며 선거에서 이기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떻게든 지금 상황에서 나를 개입시키지 않겠다는 의도가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
물론, 나는 이 새끼들이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당선되자마자 내 뒤통수를 칠 것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일단 미국 쪽은 당분간 조용할 겁니다. 물론 미국 대선 끝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흠. 예상되는 배신이군요.”
“그러니 그 전에 우리가 선수를 쳐야죠. 중국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내가 미국을 꼬시는 동안 뤼미에르는 중국을 꼬셨다. 그녀는 리충빈 총통과의 회담 결과를 내게 전했다.
“예상대로, 중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오스트레일리아가 미국의 병참기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동남아시아의 주도권을 상실하니까요. 그래서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이 아니라 기사회가 장악하기로 했습니다.”
“……뭐라고요?”
“아, 물론 WPO, 대한민국과 함께 말입니다. 저도 이제와서 식민지의 정복자 노릇을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다만…….”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만약 오스트레일리아가 안정화된다면, 온갖 세력이 끼어드는 땅따먹기가 시작될 것이었다. 괴수로 가득한 세상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토지였으니까.
사람이 사는 땅. 농사를 지을 땅. 공항이 있는 땅. 괴수에게서 안전한 땅. 원래대로라면 미국이 그 땅을 차지했어야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미국은 철수했고 한국이 호주에 각성제를 들이부었다. 그러니 투자한 만큼은 가져가야 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기사회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러니 중국의 주장은 그 땅따먹기에 숟가락을 얹겠다는 소리였다. 한입만 달라고 해놓고서 정말 한입만 처먹을지는 의문이지만 일단 말은 그렇게 됐다.
그렇게,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일시적인 침묵을 얻어냈다. 그리고 이 깡패들이 얼마 안 가 배신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WPO를 집어 삼켜야 했다.
그래도 일단은, 첫 발걸음을 뗀 것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방해꾼들은 치웠군요.”
“이제 러시아 차례입니까?”
그래. 이제 러시아만 끌어들이면 된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뤼미에르도 긴장이 되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스크바 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 군부로 대립중인 러시아. 이 정세에 개입하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화약고를 건드리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일단 제가 블라디보스토크 군부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뤼미에르는 모스크바 쪽을 설득해 주십시오.”
만약 냉전 상태의 러시아에서 우리에게 우호적인 평의원이 나온다면, 우리가 WPO를 장악해서 강대국들의 개입을 없애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누가 평의원을 배출할 것인지에 대해 싸워대며 미국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으니, WPO 자체가 강대국과 상관이 없게 된다면 상대적으로 이익이 되는 상황이다.
그러니 우리와의 교착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게 내 판단이었다.
이에 뤼미에르가 비장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제가 모스크바 정부와는 친분이 깊습니다. 푸틴 대통령 생전부터 공동전선을 꾸렸지요. 상트페테르부르크 후퇴작전에서도 스페츠나츠 헌터들과 함께 싸운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칼레 때도 모스크바 쪽에서 흔쾌히 도움을 줬던가요?”
뤼미에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만만하게 전화기를 흔들어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모스크바의 메드베데프 총리와 전화가 가능합니다. 지금까지의 교류가 있으니 설득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고요.”
“다행이네요!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릴 것-”
“다만,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예……?”
“그게…….”
뤼미에르는 뻘쭘하게 웃으며 내 시선을 피했다.
조금 불안해진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 예전에 모스크바 쪽에서 유럽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군부와 대립하는데 EU까지 적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판단이었겠지만, 우리에게도 나쁠 건 없었죠.”
“아, 네…….”
“그 이후로 유럽과 모스크바는 꽤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럽 정계에서도 블라디보스토크에 비판성명을 종종 냈는데…….”
“……심각한 트러블입니까?”
뤼미에르는 아직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 무언가 트러블이 있다면 털어내고 가야 했다.
“……아니, 대체 블라디보스토크에다가 뭐라고 그랬는데요?”
“짝퉁 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