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8 - 초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14)
「12번의 실패를 거듭한 WPO의 13번째 대피령이 내려진 가운데, 세계무역기구는 한국의 불법 시장개입 범죄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지난 29일 경, 마석가격 폭락으로 인한 에너지 파동의 배후에 한승문 부의장이 있다는 의혹인데요, 실제로 당시 한승문 부의장이 WPO 재정위원회에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게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마석가격 폭락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본 건 한국 대기업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부의 연기금 투자를 바탕으로 천문학적인 물량의 마석을 매입했는데요, 물론 삼성 사이오닉, SK 이노베이션이 독점한 에너지배터리의 가격은 전혀 하락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한국이 불법적으로 국제물가를 조작하고, 한국 대기업은 그 과정에서 독과점을 통해 폭리를 취하는 동안. 연방정부는 정치적 이익을 위해 한국의 경제범죄를 용인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었습니다.」
「한편, 마석가격 폭락으로 인한 중소길드 파산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7대 길드 또한 긴급구조조정에 돌입함에 따라 수많은 헌터들이 이적시장에 방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오스트레일리아 전쟁에 자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상입니다.」
그날 새벽도 평소와 같았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괴수를 기다리며, 근거 없는 음모론자들의 비난을 시청했다.
교묘하게 말 비트는 솜씨가 예술이던데 차라리 그냥 나 망하라고 고사를 지냈으면 좋겠다.
소파에 기대어 있던 뤼미에르가 심드렁히 중얼거렸다.
“흠. 오늘 음모론은 조금 그럴 듯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설마 진짜로 저런 건 아니지요……?”
“제가 그런 쓰레기로 보이십니까?”
나는 쓰레기였다.
덕분에 대한민국 경제는 사상 최대의 호황을 맞이했다. 어쩌면 이번 호황이 경제위기를 극복할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그걸 티내고 다닐 필요는 없었으니 나는 잽싸게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뤼미에르. 오늘은 어째 괴수가 나올 것 같습니까?”
“……헌터들이 감이 좋다고 제가 점쟁이는 아닙니다. 다만 나온다면 최선을 다해 맞서야겠죠.”
“근처에 공격대도 대기시켜놨으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레이드 시나리오도 대강 계획해놓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언제든지 달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상대하는 건 항상 상식을 벗어나 있으니까요.”
으음. 프로다운 멘트군.
뤼미에르의 말대로 그녀는 이미 중무장을 마친 상태였다. 쉴드코어가 장착된 코트, 괴수의 가죽으로 만든 장갑과 장화, 그리고 프랑스 특수부대가 쓸법한 군용 나이프까지.
그녀의 복장은 수틀리면 직접 뛰어나가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보여줬고, 덕분에 지휘부는 현장과 고작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물론 현장에 배치된 헌터들의 화력만 본다면 뤼미에르가 직접 나설 필요가 없을 정도이긴 했지만 말이다.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세계 최고의 탱커들과 딜러들 아닙니까. 덩치 큰 놈 하나 잡아 족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화력입니다. 헬기까지 데려다 놨는데요. 뭐.”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겠습니다만.”
뤼미에르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뒷목을 주무르던 그때였다.
상황실에 비치된 통신기가 시끄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무슨 일입니까!?”
「괴, 괴수들이 나타났습니다!」
“위치는요?”
「셰일라! 마운트 셰일라!」
“예상 위치군요. 공격대 투입-”
「뱅가른! 애쉬비튼! 올랜드! 야루가! 세인트 후아레스!」
“…….”
「그리고 톰 프라이스 캠프 일대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 * *
“막아! 씨발! 막으라고!”
“마석! 일단 마석부터 옮겨!”
“저, 저……! 저 새끼 도망친다!”
캠프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진즉 대피령이 내려지긴 했지만 언론은 그간 이를 허장성세로 깎아내렸고, 결국 사람들은 WPO의 엄중한 경고를 양치기 소년의 허풍으로 받아들였다.
우스운 일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일주일은 여론이 끓었다가 식어내리기 충분한 시간이다. 증오와 광기의 시대에 사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선동과 증오. 조작과 정치.
그 대가는 참혹했다.
“아아아아악-!”
“흐으으……! 크으흐흐흐……!”
“살려줘! 살려줘어어어 - !”
산채로 팔다리가 뜯기는 사람들.
시민을 버려두고 도망치는 헌터들.
돈과 마석 위에 쌓아올린 명예는 허망할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물론 홍선아가 있던 곳은 무사했다. 여도연과 설진운이 지키던 전진보급기지도 무사했다. 한승문과 뤼미에르가 도착한 톰 프라이스 캠프도 가까스로 구사일생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영웅은 모든 사람을 지킬 수 없다. 초인도 결국 사람에 불과하다. 개인은 사회를 바꿀 수 없다. 사회를 바꾸는 건 시스템이다.
그리고 모든 체제가 무너진 불모의 땅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지하에서 올라오는 수백만 단위 괴수 무리의 파상공세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
녹초가 되어 지휘부로 돌아온 한승문은,
붉게 물든 전술지도 앞에 침묵해야 했다.
* * *
「끔찍한…… 끔찍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애쉬비튼, 올랜드 캠프가 붕괴했고, 수많은 전선거점들이 와해되었습니다. 현재 연락은 두절된 상황이고, 헌터들이 구출작전을 시도하고는 있지만…….」
「WPO의 예측과는 다르게 지저괴수의 정체는 샌드웜이 아닌 사막개미로 밝혀졌습니다. 셰일라 광산에 서식하는 늑대개미와 동종, 혹은 아종으로 짐작되며, 개체수와 크기를 봤을 때 1급 침식지역에서 종종 발생하는 4세대 변이괴수로 추정되는 상황입니다.」
「단순 사상자만 수만 명 이상으로 예측됩니다. WPO의 괴수 오판이 주된 전략적 패인으로 여겨지며, 약 50km 내외에서 다발적으로 매복습격을 당한 점이 전술적 패인으로 분석됩니다. 현재 잔존 괴수들은 사방을 향해 진격하고 있-」
콰직.
TV 화면이 박살나며 소음이 중단되었다. 뤼미에르의 손에서 방출된 물리력의 힘이었다.
회의실이 정적에 휩싸였다.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입 밖으로 한 마디도 내지 못하고 있다.
침묵을 깬 건, 손에 꽂힌 유리조각을 뽑아내던 뤼미에르였다.
그녀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냉담하게 질문했다.
“다니엘. 상황은?”
“좆됐수.”
“웰링턴! 입 조심해!”
“아아, 알았어. 알았어…….”
수염이 덥수룩한 서양인 헌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손에 두꺼운 고무장갑을 끼고서 말이다.
“다발적인 기습 때문에 진형이 붕괴됐고 순식간에 난전이 시작됐지. 적과 아군이 뒤섞여 있는 와중에 대규모 능력전개는 택도 없는 소리고. 비각성자나 원거리 계열 각성자만 엄청나게 죽어나더군.”
뤼미에르가 질문을 이어갔다.
“르윈. 너희 쪽은?”
“……저희는 치안관 여도연이 기습을 감지한 덕에 초동대처가 빨랐습니다. 섣불리 도망치던 사람들을 제외하면 캠프 방어선은 무난하게 유지됐어요. 대신 그렇게 버티는 동안 올랜드 캠프는 아무런 지원 없이 무너져내렸죠.”
설진운이 자연스레 보고를 이었다.
“셰일라 방면 공격대는 거대괴수에 대한 레이드를 취소하고 캠프로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애쉬비튼은 이미 개미떼로 가득했지요. 포위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분전해봤지만, 헌터들을 제외하곤 상당수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
뤼미에르와 내가 갔던 곳은 기적적으로 방어에 성공했고, 홍선아가 있던 곳은 애초에 피해를 보지 않았다. 이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으니 1차적인 보고는 그렇게 끝났다.
이에 뤼미에르가 회의를 이어갔다.
“괴수. 괴수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있습니까?”
미 공군 사령부 관계자가 답했다.
“……개미 형태의 괴수에 대해서는 군이 지속적으로 감시를 이어가던 상황입니다. 방치를 오래 하면 수습 불가능할 정도로 무리가 커지기에, 적발되는 족족 공습으로 뿌리를 뽑은 바 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어떻게 된 겁니까?”
“……지하괴수는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파악이 안 되고 있던 괴수 플랜트라는 뜻입니까?”
“파악이 안 된다기보다는 파악이 불가능했습니다. 괴수가 지상에서 활동할 정도는 되어야 관측이 가능한데, 본 무리는 참으로 기이한 형태의 파상공세를 보여줬지요. 원래 개미가 이렇게 공격적인 전술을 사용하는 괴수가 아닙니다.”
군 당국 관계자는 뤼미에르의 싸늘한 눈빛에 긴장한 눈치였지만, 더듬거리는 말에도 불구하고 보고의 요지는 명확했다.
개미. 비정상적인 공격성. 이례적이다.
그 단어에 반응한 내가 그에게 물었다.
“개미들이 이번처럼 공세를 보인 게 비정상적이라는 소립니까?”
“그렇습니다. 곤충형 지하괴수는 지하에서 둥지를 구축하고 생육하는 것을 최우선적 목표로 삼습니다. 가끔 수백 수천 단위의 웨이브가 발생하는 경우는 있지만, 오늘처럼 무리 전체의 명운을 걸고 인간을 습격하는 경우는 이례적인 일입니다.”
개미들이 오늘처럼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경우는 드물다는 뜻이었다.
군인이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아내며 설명을 이어갔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여왕괴수가 모종의 이유로 지휘능력을 학습하고 인간에 대한 기습적 파상공세를 벌였거나, 둘째, 괴수들이 생존본능에 의해 움직였거나.”
“생존본능이요? 그건 또 무슨……?”
“……개미들이 거대 샌드웜으로부터 도망쳐 지상에 올라왔다는 뜻입니다.”
* * *
공포가 퍼졌다.
희망에 찬 여론이 차갑게 식고, 정치세력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증오를 충동했으며,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를 사람에게 풀었다.
결국, 사람들을 지키려고 분투했던 헌터들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괴수를 욕하기에는 그들이 너무 두려웠다. 그래서 시민들은 그들을 지켜주려던 사람들에게 분노했다. 우스운 일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미국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미국 민주당은 가열차게 화력을 쏟아부었고, 외신 언론의 공격성은 날이 갈수록 도를 넘어갔다.
「자신만만하게 오스트레일리아를 지켜준다던 헌터들은 기습 한 번에 쓸려 내려갔습니다. WPO 평의회가 패전 책임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시민들은 어찌할 수 없는 공포에 고통받고-」
“…….”
나야 맨날 언론에게 맞다 보니 맷집이 좀 생겼지만, 다른 헌터들은 차갑게 식어버린 여론이 꽤 무겁게 다가오는 듯했다.
특히 영웅 취급을 받던 고위헌터일수록 정신적인 상태가 심각했다. 옛말에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게 사기(士氣)라던데 그게 조금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뤼미에르의 반응은 의연했다.
“다음 진원지를 찾아 대비해야 합니다. 헌터들의 손실은 적으니 즉시 재편성해서 투입하세요. 지금 상황 자체가 피난민들의 대피가 늦어져서 생긴 문제입니다. 책임은 제가 질테니 강제성을 동원해서라도 피난민들 먼저 대피시키십시오.”
“아직 안 끝났습니다!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위치 지키세요!”
그녀가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자 기사회는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멋들어진 연설이나 결정적인 활약이 아니라, 일개 개인이 보여줬던 평소의 품행이 집단을 장악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장관님. 헌터들이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공포 분위기가 퍼졌습니까?”
“아니오. 이해타산적인 문제입니다.”
1세대 헌터들이야 조용했다. 사람을 구한다는 행위가 주는 만족감이 돈보다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목숨 걱정도 없다. 강하니까.
물론 1세대 헌터들도 싸늘한 언론에게 실망한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그들이 지금껏 지켜온 이타심이라는 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보통 사람들이다.
“돈은 벌만큼 벌었으니 귀환하고 싶다는 여론이 다수입니다. 실제로 PMC 지도부들의 문의가 빗발치고 있기도 하고요.”
“…….”
모두가 초인은 아니다.
이 세상에 사는 건 1%의 초인과 99%의 범인이다. 그리고 민주사회라는 곳이 어떤 것을 지향하는지는 뻔했다.
따라서, 돌아가고자 하는 이들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섣불리 작전권 운운하며 움직임을 통제했다간 폭동 일어나는 건 순식간이다.
그러니,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은 순순히 보내주는 게 정치인으로서의 상책이겠지만…….
“…….”
나는 침묵을 지켰다. 무거운 침묵이었다.
고심을 이어가고 있는 동안 TV 속의 아나운서는 눈물을 흘리며 증오를 토했다.
「참사입니다…… 정말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경제범죄에 몰두한 WPO 지도부와, 대선에 눈이 먼 미국 정부의 야합이, 오스트레일리아 국민들의 피로 돌아왔습니다. 멋진 신세대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우리를 지켜주겠다던 헌터들은 왜 지금 침묵하고 있는 걸까요?」
멘트 하나하나가 미국 정부를 고꾸라뜨리겠다는 민주당의 독기로 충만했다. 그러나 내 시선은 뉴스 배경을 가득 채운 피난민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내 얼굴이 프린팅된 피켓에 식칼을 박아놓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시선은 그들이 흘리는 피눈물에게로 향했다.
“…….”
나는 저 심정을 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나는 느닷없이 찾아온 사고에 모든 것을 잃은 심정을. 차마 원망할 게 없어서 사람을 미워하는 저 심정을 알았다.
나는 일순간에 가족을 잃고 병신이 되어 장례식장에 내팽개쳐진 청소년이었고, 1천만 명의 가족을 잃고 병신이 된 나라의 정치인이었다.
그러니, 나도 결국 초인은 아니었고,
사람 마음이라는 놈이 끝까지 잔인해질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일단. 일단 퇴각은 보류합시다.”
“네?”
“공포는 선동으로 극복하면 되고, 기업가는 돈으로 매수하면 됩니다. 그러니 일단 오스트레일리아부터 어떻게든 탈환시키고……. 지금은 그것만 생각합-”
그때. TV 화면이 갑작스레 전환됐다.
아나운서가 급작스런 속보를 전했다.
「소, 속보입니다! 중국이 전군 후퇴를 선언했습니다! 동시에 중화연방 총지도부 측은 이번 사태의 배후에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있다는 의혹을……. 그, 그러니까, 전략을 사용하는 괴수의 등장이 관제 생체병기 실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자세한 소식은 들어오는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CIA 핵심 관계자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있었던 생체실험에 대해 폭로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미군의 도움을 받아 괴수를 병기화시켜 조종하려는 연구를 진행했고…….」
「연방정부가 미군의 참전을 막아낸 것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심각한 위협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기밀문서까지 유출된 것으로…….」
「미국 7대 길드가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에서의 퇴각을 결의했습니다. 동시에 의회는 연방정부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멋진 신세대’ 작전이 오욕으로 물든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마저도 총퇴각을 고려하고 있다는 발표를…….」
그렇게,
중국 총통이 미국 대통령의 심장에 칼을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