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87화 (187/296)

EP 28 - 초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12)

“그러니까……. 한국이랑 유럽 사냥터는 지리학적으로 같은 곳에 위치합니다. 등장하는 괴수의 종류나 서식 범위가 대부분 겹쳐요. 그런데 양측 사냥터에서 등장하는 괴수의 위험도가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

“이건 명백히 비정상적인 현상입니다.”

화이트보드에 붙여놓은 오스트레일리아 지도에 매직으로 몇 가지 사항을 표시했다.

대표적인 괴수의 서식지, 가장 가까운 둥지의 위치, 그리고 인근에 위치한 거점기지.

결론은 간단하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괴수의 위험성에 차이가 발생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는 모래사막이 아니라 바위 사막이고, 심지어 습지나 폐허도 별로 없어서 기괴한 괴수들도 잘 안 나옵니다.”

“…….”

“그런데 유럽 쪽 괴수들이 더 강하다는 건…….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겠죠.”

나는 진중한 분위기로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좌중의 분위기는 영 진중하지 못했다.

“…….”

심각하게 지도를 바라보는 설진운.

나한테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여도연.

아까부터 나와 눈을 못 마주치고 있는 뤼미에르.

그리고 나와 뤼미에르를 기묘한 눈빛으로 번갈아 쳐다보는 피채원까지.

이게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헌터들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이 터진 이상, 어떻게든 수습은 해야 한다.

나는 정치인답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무게를 잡았다.

“……WPO 부의장 권한으로 특별수사팀을 결성하겠습니다. 최대한 긴급하게 본 사건에 대해 수사해 주십시오. 수많은 헌터의 생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좋아.

선수 입장이다.

“……자기, 무슨 일 있어요?”

“예?”

항상 피곤해 보이던 천금순 사장은 피부가 참 뽀송뽀송했다. 물론 다크써클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인상이 확 폈다.

요즘 돈 좀 만져서 인생이 즐거운 모양이다.

그녀는 얄미울 정도로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걱정했다.

“요 며칠 사이에 얼굴이 확 갔네……. 어디 아픈 건 아니에요?”

“……하. 하하. 그럴 리가요.”

“흑염소라도 조금 달여줄까요? 삼성에서 선물 들어온 거 있는데. 최상급.”

“제가 제일 싫어하는 동물이 흑염소랑 흑산양입니다. 아무튼, 이래 봬도 멀쩡하니까 걱정 마십쇼.”

멀쩡하긴 무슨. 지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내 부탁을 받은 여도연과 설진운이 사막을 그렇게 떠도는 동안, 이번 이상 사태에 대해 조금의 실마리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괴수들이 왜 갑자기 강해진 걸까. 어쩌면 내가 모르는 위협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이러다가 뤼미에르가 나를 의심하지는 않을까?

아무튼,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요새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게 얼굴로 나타난 모양이다. 천금순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내 표정을 살폈다.

“으음.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요? 그냥 나한테만 이야기해 봐요. 우리 사이에 감출 게 뭐 있다고…….”

“우리가 무슨 사인데요?”

그녀는 곱다란 얼굴을 빙긋거리며 답했다.

“정경유착?”

“……거, 은밀하고 찐한 사이기는 하네요.”

물론 미쳤다고 내가 이 여자한테 속내를 털어놓을 리는 없었다. 차라리 괴수한테 우리나라 대통령 자리를 넘기는 게 낫지.

나는 비즈니스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마석은 물량 들어오는 대로 팍팍 풀어버릴 겁니다. 제가 마석 물가 낮추는 동안 천 사장님은 헌터들 정산금 만지작거리면서 월급에 지장 없게 해주세요. 물론 당분간만 그러시면 됩니다.”

“그거야 쉽죠.”

“좋습니다. 연기금 투자는 아마 연말에 들어갈 겁니다.”

“흐음……. 코 묻은 돈까지 먹기는 조금 그런데…….”

“허어. 국민연금이 코 묻은 돈이라고요? 거, 돈 좀 만지기로서니 그렇게 국민을 무시하면-”

“연기금 투자는 안 받을게요.”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아이고, 우리 천 사장님 같은 기업인이 우리나라에 많아야 하는데…….”

“그러게요!”

요즘 돈을 많이 벌어서 그런가, 천 사장의 성품은 한결 너그러웠다. 그녀는 나긋하게 미소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아무튼, 정부가 이렇게 나서서 대기업을 키워주니까 참 좋네요. 그렇지……. 이렇게 사회에서 서로 밀어주고 끌어줘야 정다운 맛이 있지. 다음에도 1번 찍을게요.”

“저는 2번으로 나갑니다. 국민당이라.”

“아, 맞다. 연립내각이었지.”

연립내각이 뭔지도 아는 놈이 말실수를 했을까.

아무래도 은근히 나를 골려 먹은 것 같다.

그런 생각도 잠시, 천금순이 폭탄을 던졌다.

“그런데 장관님.”

“왜요.”

“혹시 사냥터 가지고 장난치신 건 아니죠?”

“뭐요?”

“아니, 혹시 누구한테 좋은 사냥터 몰아주고 그런 건 아닌가 싶어서요. 그 왜 한국에서 그런 거 많이 하셨잖아. 삼성만 예뻐하고 나한테는 강원도 던져주고…….”

“저, 먹을 거 가지고 그렇게 쩨쩨하게 구는 사람 아닙니다.”

천 사장도 진지하게 물어본 건 아니었는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면 대충 감은 왔는데 진지하게 따져 물을 건 아니라고 판단했거나 말이다.

그녀는 그저 아리송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았다.

“흐음…….”

“뭐 문제 있습니까?”

“그건 아니고요. 요즘 들어오는 마석량이 조금 줄어서…….”

“그러면 헌터 수만 명이 온종일 괴수만 때려잡고 앉아 있는데. 괴수가 줄어들지 늘어납니까?”

“당연히 그건 감안했죠. 그런데 그걸 감안해도 A급 마석이 좀 과하게 줄어들었어요.”

“……한 번 들어봅시다.”

그녀는 내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곱다랗게 미소지으며 취조에 순순히 응했다.

“글쎄요……. 헌터들 사이에 미신 같은 게 조금 있거든요. 똑같은 양이라도 작은 마석 여러 개보다 큰 거 하나 흡수하는 게 더 낫다고요.”

“근거 없는 소리군요. 마석 흡수 효율성, 그러니까 마력적성은 재능 문제입니다. 똑같은 마석을 먹어도 사람마다 강해지는 수치가 다른데, 뭔 이상한 미신을…….”

“감지윤 양이 바다 괴수 잡잖아요. 그래서 그거 보고 생긴 풍문이에요. 커다란 마석을 먹을수록 더 강해진다고요.”

“……흐음.”

“어차피 그 정도급이면 돈이 아까울 레벨은 아니죠. 그래서 커다란 마석에는 프리미엄이 꽤 붙어요. 경매장에서 거래될 정도로 말이죠.”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사실 초상관리부 장관을 하면서도 이런 정보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결국 도장 찍는 사람이지 현역에서 활동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어떤 새끼들이 감히 마석을 경매한답니까? 초인지원청 교환소 안 써요?”

“아, 아잇! 거, 상류층 사이에서 가끔 있는 일이지! 그리고 사냥터에서 조금씩 개평 주고받는 것 정도는 관습법으로다가, 그, 아무튼 있어요!”

“천 사장님은 어떻게 그걸 아시는데요?”

“아, 아무튼! 그래서 PMC들이 10kg 넘어가는 마석들은 아주 귀하게 관리를 하는데-”

“그걸 관리하는 것 자체가 경매질을 할 의향이 있다는 뜻 아닙니까?”

“아! 좀! 넘어가요!”

“아, 예. 한 번만 봐드리겠습니다.”

“거, 50억도 안 하는 거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곤란스럽게 만들고……. 에잉.”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나를 흘겼다.

“아무튼, A급 이상 가는 마석이 어느 시점부터 씨가 말랐어요.”

“……비싸다면서요? 그것만 골라잡은 거 아닙니까?”

“PMC들끼리 관할구 정해서 사냥하는데 A급만 골라 사냥할 이유가 없죠. 남의 땅 들어가서 밀렵하면 사막에 목만 남기고 파묻히는 수가 있으니까요.”

“하기야 한반도보다 수십 배는 큰 땅에서 밀렵할 사람이 지윤이 말고 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상한 거죠. A급 몬스터들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게요.”

“…….”

* * *

「유럽 괴수들이 강해진 게 아니었어. 우리 쪽 괴수들이 약해진 거야.」

「A급 괴수들의 숫자가 비정상적으로 감소하고 있어. 강한 괴수들이 없어지니 해당 지역의 위험성도 하향 평준화된 거고.」

「나는 일단 다윈 공군기지 쪽에 위성정보를 요청하러 가 볼게. 괴수들이 대규모로 이동했나 확인해 봐야겠어. 일단 누나는 설 헌터랑 같이 한국 쪽 사냥터를 확인해줘.」

후우. 여도연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시체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괴수의 시체는 나름 푹신했으나 피비린내가 심해서 그리 좋은 의자는 아니었다.

“제기랄…….”

일단 뭐라도 찾으라니까 찾고는 있는데, 이 빌어먹을 사막에는 정말로 답이 없었다.

애초에 오스트레일리아부터가 유럽대륙보다 큰 땅덩어리였을뿐더러, 한국이 관할하는 사냥터만 쳐도 한국보다 거대했다.

차라리 서울에서 김 서방을 찾고야 말지, 괴수로 넘쳐나는 사막에서 ‘찾긴 찾아야 하는데 딱히 뭔지는 모르겠고 일단 수상해 보이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으니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못 배길 지경이다.

오죽하면 지치지도 않는 여도연이 정신적으로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겠는가.

그럼에도 그녀를 움직이는 건 두 가지였다.

자칫 남동생의 정치생명을 끝장내버릴 뻔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이 짓거리를 하는 인간이 혼자는 아니라는 안도감이었다.

“야. 진운아.”

“네.”

“뭐라도 찾았냐?”

“아니요.”

“근데 왜 그렇게 서성이고 있냐?”

“뭐라도 찾으려고요.”

대답에 매가리가 없는 것을 보니 설진운도 많이 지쳐 있었다. 한참이나 주변을 서성거리던 그는 괴수 목이나 몇 개 베어버리고서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빈손으로 돌아온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언니야아아…….”

“덥다. 앵기지 마라.”

“아이…… 부산 억양 조아요, 조아요!”

“통영이다.”

여다솔 치안관보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여도연에게 매달렸고, 그 뒤로 조정식 치안관이 손을 주머니에 꽂고 설렁설렁 걸어왔다.

“조정식 치안관 보고합니다. 사막을 이 잡듯이 뒤졌는데 뭐 X도 없습니다.”

“응? 아까 죽인 오우거는 꼬추 달려 있던데.”

“그러면 X 같은 거밖에 없다고 치지 뭐.”

조정식과 여다솔의 대화를 들은 여도연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것들을 쥐어박으면 대가리가 깨질 텐데…….”

“어우, 뭐 그렇게 험악한 말씀을. 같은 치안관끼리 그러시기에요? 저는 주말도 반납하고 기어 나왔는데?”

“급식충 새끼…….”

여도연이 길쭉한 다리로 니킥 자세를 취하며 조정식을 위협했다.

조정식이 기겁하며 물러서자, 여도연이 한 차례 분위기를 정리했다.

“그래. 다들 수색 끝났으면 특이사항 하나씩 짚어 봅시다. 일단 나는 저쪽 절벽부터 그 너머에 있는 자갈사막까지 싹 흩었는데, 절벽 틈에 모래비둘기인가? 그 B 플러스 비행 괴수 둥지 하나 작살 낸 거 말고는 별거 없었고요.”

설진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C 구역 전체에서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비행 괴수도 더위 때문에 그다지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곳은 아니었죠. 날씨 때문인지 지상에도 괴수는 드물었습니다.”

찾아봤는데 뭐 좆도 없었다던 조정식이 의외로 몇 가지 정보를 털어놓았다.

“A급 대형종이라……. 일단 바위 사막에는 샌드웜이 없더군요. 지질이 딱딱해서 그런가. 그 대신 골렘은 좀 봤습니다. 끈적끈적한 액체로 된 괴수인데 여기서는 바위랑 잡초가 섞여서 덩치를 불리더라고요. 불이 잘 붙어가지고 다솔이가 소이탄 던지니까 처리는 쉬웠습니다. 저쪽 강변에는 오우거도 몇 마리 사는 것 같고요. 여기 출신 헌터들은 모래원숭이라고 불렀습니다. 돈 받고 처리해줬는데 이거 세금 떼지는 않죠?”

“…….”

“아, 네. 아무튼, A급은 사막에 적응한 놈들 빼고 없습니다. 그리고 사막에 적응한 놈들은 대체로 지구에서 태어난 2세대 괴수들뿐이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A급 괴수들이 사라지니까, 전체적으로 아종이나 혼종들이 사라지고, 괴수들이 약해지는 현상이 생길 법도 하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여다솔이 긴말을 정리했다.

“오늘 수색도 허탕입니다!”

“으음.”

여도연은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결론 내렸다.

“……그러면 오늘은 돌아갈까? 이쪽 구역은 끝난 것 같은데.”

“이예압!”

여다솔이 기다렸다는 듯이 환호하며 퇴근을 연호하자, 4인의 헌터들은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량한 사막에 석양이 내렸다. 사냥꾼들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거대한 협곡에 핀 가느다란 야생화가 흔들렸고, 지평선에 그려진 폐허는 신기루처럼 일렁였다.

“경치 좋네요!”

여다솔이 솔직하게 감상을 털어놓자 나머지 헌터들도 이에 동의했다.

“그래. 경치는 좋네.”

“지금 시야에 들어오는 괴수만 30마리가 넘는다는 것 빼고 말이죠. 지뢰거북이, 톱부리수리, 가시독뱀, 바위악어, 모래숭이…….”

“정식이 너는 그걸 어떻게 다 외웠냐?”

“옵저버의 소양이죠. 그리고 사실 반쯤은 제가 방금 지어낸 것들입니다.”

“미친놈인가.”

여다솔은 내가 침 바른 남자 내가 지키겠다는 심정으로 여도연과 조정식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와! 여기 협곡 엄청 크다! 그랜드 캐니언보다 큰 거 같은데요?”

“가 본 적은 있냐?”

“아뇨!”

여다솔이 석양을 등지고 배시시 웃었다.

“뭐 어때요. 세상 망했는데.”

아무 말 대잔치였다.

여다솔은 갑자기 조정식에게 달라붙어 깐족대기 시작했고, 설진운은 다소 조숙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괴수들에게 검기를 쏘아 보냈다.

“…….”

그리고 여도연은 붉은 석양을 바라보며 협곡의 끝자락을 따라 걷고 있었다.

탁 트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을 걷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스멀스멀 치민다.

“하아…….”

살면서 그랜드 캐니언을 두 번인가 봤다.

부모님이 변호사라 어렸을 때 미국여행을 자주 갔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랜드 캐니언을 봤다. 너무 어렸을 때라 자세히는 기억 안 나는데, 아빠가 목말을 태워주다가 실수로 협곡에 떨어뜨릴 뻔해서 엄마한테 뒈지게 맞았었다.

승문이 국회의원 당선되고 취임하기 전에 가족 여행도 한 번 갔다.

그때 그랜드 캐니언을 한 번 더 봤다. 우연히 한국 유튜버랑 만나서 점심밥도 먹고, 승문이보고 국회의원 당선자라길래 신기해하며 영상도 찍었었다.

아무튼, 여도연은 그랜드 캐니언을 두 번이나 봤다.

장대하고 붉은 협곡. 지구가 만들어 낸 천혜의 절경.

“……어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눈앞에 있는 협곡은 조금 모양이 이상했다.

협곡이 아니라 무슨, 땅이 푹 꺼진듯한-

“……!!!”

뭔가 깨달음을 얻은 여도연이 거대한 협곡 아래로 뛰어내렸다.

쿠우우우웅 - !

그녀가 수백 미터 아래로 떨어지자 운석 떨어지는 것처럼 크레이터가 생겼지만, 여도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살폈다.

같이 걷던 사람이 절벽으로 뛰어내리자, 기겁하며 달려온 3인의 헌터가 여도연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왜 뛰어내리고 그러십니까! 식겁했잖습니까! 정말!”

“이 양반 빠꾸 없네. 뭐에요? 뭐 나왔어요?”

“언니! 괜찮아!?”

설진운, 조정식, 여다솔이 여도연에게 다가왔지만, 그녀는 그들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주변을 살폈다.

여도연이 미친 사람처럼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이게…… 이게 말이…… 이게…… 하, X발…….”

비정상적인 행동이었다.

여다솔이 무섭다는 듯 팔을 감쌌고, 조정식은 단검을 꺼내고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설진운이 여도연에게 다가가 물었다.

“누나. 왜 그러세요.”

“……야. 진운아.”

“예.”

여도연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요르문간드인지 뭔지. 오페라하우스만 한 샌드웜을 잡은 적이 있단 말이지?”

“아, 네. 뉴스에서 봤습니다.”

“그때 쉘터 사람들한테 들은 게 있어요. 사막 뱀처럼 진화한 괴수가 폭격을 피해 모래 속으로 들어갔다고. 그런데 모래 속에서는 천적이 없으니까 바다 괴수처럼 덩치가 커진다고.”

여도연이 손톱을 뜯기 시작했다.

헌터들 사이에 미미한 공포가 퍼졌다.

“그, 내가 들은 바로는, 거대한 지렁이가 땅속을 돌아다니면, 가장 X 같은 게 위로 안 올라와도 위협적이라는 거였어. 지하에 터널이 뚫리면 지상이 푹 꺼진다고. 무슨 싱크홀처럼 붕괴한다고 말이야.”

“…….”

“이 협곡처럼 말이다.”

여도연의 말에는 두서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불안정한 심리상태의 방증이었다.

그러나, 설진운은 그녀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똑똑히 이해했다.

“……이 거대한 협곡이, 지하 깊은 곳을 지나다니는 샌드웜 때문에 생긴 거란 말입니까?”

“그래.”

“……조금, 이상한데요.”

여도연의 말에는 논리가 있었으나, 설진운이 이를 부정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협곡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

“이 협곡이 지하괴수 때문에 생긴 지반침식이라 치면, 괴수가 이 협곡보다는 더 크다는 소리인데. 상식적으로 이 정도 크기의 괴수는 바다에서도 드물-”

여도연의 손가락질이 설진운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무표정으로 이 거대한 협곡을 가리켰다.

“야.”

협곡은 참으로 거대했다.

“세상 어느 협곡이 자로 잰 것처럼 폭이 똑같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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