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83화 (183/296)

EP 28 - 초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8)

정신을 차리니 발목이 잘려 있었다.

“어라.”

팔다리 잘렸다가 포션을 쳐바르는 짓을 오래하다 보면 통증에 익숙해진다. 그래서 바닥에 넘어진 상황에서도 냉정한 판단이 가능했다.

우선, 여기는 전장이고, 나는 전력질주 도중에 넘어졌다. 그 이유는 발목이 잘려서다. 아무래도 땅밑에 숨어있던 괴수가 발목을 물어뜯은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진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을 가린 커다란 발바닥이 보였다.

“씨벌. 좆-”

쿠우우우우웅-!

거대한 괴수의 발바닥이 헌터를 깔아뭉갰다.

피가 물풍선처럼 사방에 튀기지는 않았다.

그저 적당히 조용하고 흉측하게 사람 하나가 죽었다.

* * *

조금은 희귀했던 6급 헌터의 죽음을 지켜본 헌터 하나가 소리쳤다.

그녀는 귓가에 소형 통신기를 달고 있었다.

“옵저버 다운! 오더 맡겠습니다. 샌드웜 접근 확인했으니 다들 물러서세요!”

-뭐!? 여기서 빼면 어쩌려고!

“대형종 떴어요. 그런데 방금 정연이랑 재현 씨도 죽어서 딜 부족합니다.”

헌터는 침착하게 뒷걸음질치며 염력을 사용했다. 강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정교했다. 머리가 으깨진 괴수들이 추욱 늘어졌다.

인근 15m가량이 정리되자, 헌터는 작게 숨돌리며 통신을 이어갔다.

“저도 슬슬 두통이 오네요. 녹기 전에 빼야겠는데요. 우리 팀.”

-그…… 조금만 버티면 안 되겠냐? 3팀이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까-

“누가 무리하게 관할권 따내래요? 수익 뿔리려다 시체나 뿔리고 있으니 환장하겠네. 아무튼 더 죽기 전에 뺄게요.”

-야! 임마! 우리가 무슨 돈 때문에-

“그럼 전부 돈 때문이지. 씹새야. 비각성자 주제에 실장이라고 존댓말 좀 써주니까 주제를 모르네.”

-뭐, 뭣……?!

헌터의 태도는 놀라우리만치 침착했다. 헌터는 무표정으로 인근의 괴수들을 조금씩 저지하며, 손짓으로 팀원들을 후퇴시켰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통신을 이어갔다.

“맘같아선 데스크 놈들 대가리 으깨버리고 싶은데 돈 때문에 참는 거에요. 근데 다 뒤지면 말짱 황이잖아. 못 알아들어?”

-……너 재계약 안 하고 싶-

“X도 모르는 새끼가 오더하지 말고 옆에 어드바이저나 바꿔요. 정치질로 자리 따낸 양반이 욕심으로 사람 죽이는 거 보면 나도 언제까지 참을지는-”

-어, 어어! 주현 씨! 납니다! 전술부 박 차장!

통신기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바뀌었다. 헌터는 차분히 주변을 경계하며 뒷걸음질 쳤다.

“네. 차장님. 우리 팀 일단 후퇴하겠습니다. 3팀 오고 있댔죠? 그쪽이 어그로 끌어가서 괴수 뿌리고. 여기는 마석이나 흩어서 빼는 게 가장 안전할-”

화르르르륵-!

“크으윽…….!”

그때. 거대한 불꽃이 사막을 휩쓸었다. 해일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사방에 퍼지던 물결은 바람이 되어 용솟음쳤고, 헌터들의 눈앞에는 거대한 불기둥이 세워졌다.

순식간에 퍼져나간 상승기류에 헌터들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치이이이익-

괴수들의 흉측한 단말마가 끝나자 불꽃은 사그라들었다. 남은 것은 잿가루와 고기 타는 냄새뿐이다.

“…….”

그렇게 방금 전까지 30인의 공격대를 전멸시킬 것 같던 괴수들이 없어지고, 검은 연기 사이로 누군가 달려와 모습을 드러냈다.

“괜찮으십니까!?”

“……아, 예.”

이 정도 화력이면 홍선아가 온 건가 싶었지만, 도착한 건 누군지도 모르는 청년 화염술사였다. 치안관 배지를 보니 7급 이상의 고위 헌터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멍하게 서 있는 십수 명의 공격대에게 걱정스런 눈빛을 보냈다.

“상황이 좋지 않아 보여서 부득이하게 개입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더를 맡고 있던 서주현 헌터가 대표로 감사인사를 전했지만, 그 누구도 기뻐하는 이가 없었다.

동료의 시체마저도 불타버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슬픈 사실이 있었다.

“……깔끔하게 탔군요.”

괴수들은 전부 불탔지만 수입의 35%를 차지하는 괴수의 시체가 없어져 버렸다. 그래도 마석은 남긴 했지만 관례에 따라 목숨을 구해준 고위 헌터에게 일부를 지급해야 한다.

법적으로 정해진 사항은 아니었지만, 원래 법에서 멀수록 복잡한 법이다. 사냥 주도권이 섞이면 으레 발생하는 애매모호한 상황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고위 헌터가 민망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보상금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동료분들의 시체를 훼손했으니, 유가족들에게 대신 전해주십시오.”

“……아. 감사합니다.”

사실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물론 돈이 가장 중요하기는 했다. 그것 때문에 방금까지 목숨 걸고 싸웠던 것 아닌가.

다만, 30명 중 11명이 죽어나갈 정도의 괴수 무리가, 누군가에게는 손가락질 한 번으로 충분했다는 그 사실이.

이번 사냥을 준비하기 위해 들인 노력이.

그간 동료들과 쌓은 경험이.

목숨과 바꾼 그 돈이.

그렇게 흘린 핏값이.

그런 인생이.

“…….”

한없이 가볍게만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억울할 따름이었다.

* * *

“오늘은 북서부에서 22차례의 전투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상자는 142명. 사망자는 78명입니다.”

헌터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본격적으로 투입된 지 5일이 지났다. 즉, 피채원의 사상자 보고 또한 다섯 번째였다. 덕분에 녀석의 어조는 아주 사무적이었다.

나는 보고사항을 수첩에 받아 적었다.

그리고 가볍게 읊조렸다.

“교전비 괜찮게 나왔네.”

“다른 지역에 비하면 피해가 유의미하게 적습니다. 치안관들을 곳곳에 배치하신 게 현명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치안관들이 많이 도와주고 다녔다고 들었다. 설마 눈치 없게 돈 받아먹은 애들은 없지? 그거 관례 있잖냐. 도와주면 뽀찌 받는 거.”

“없습니다. 애초에 세금으로 때워 준다고 약속하셨으니까요.”

“좋아.”

상황은 아주 순조로웠다.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오스트레일리아 외곽부터 서서히 중앙을 포위하는 작전이 시작된 상황. 고위 헌터들은 전장을 누비며 수백만의 괴수를 파죽지세로 격파하는 중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마석 생산량은 순식간에 전 세계 1위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은 세금면제를 선언하고 마석을 매입하며 삼성과 SK로 벌어들인 자본을 헌터들에게 풀었다.

돈은 좀 썼지만 그 돈을 노리고 수많은 헌터가 몰려들었으니 이득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구입한 마석을 삼성과 SK가 가공해서 해외에 팔아 재낄 예정이니 큰 손해도 아니었다.

심지어, 세계의 헌터들은 그렇게 번 돈으로 GS 아이기스 오스트레일리아 특별분점의 헌팅 디바이스를 구매하고 있었다.

“쯧……. 고속도로 뻥튀기처럼 팔라고 그랬는데. 인심 좋은 뻥튀기 아저씨처럼 팔더라.”

천금순 사장은 전쟁 프리미엄을 붙여 배짱장사를 하기는커녕, 역으로 대규모 세일을 개시하여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GS는 군산분리를 끝냈다. 이제 정부에게 물릴 곳이 없다는 뜻이다.

PMC 사업은 GS 방위대행사 쪽으로 정리되었고, 기존의 GS 아이기스는 완전히 헌팅 디바이스 사업체로 변신했다. 그것도 출범하자마자 점유율과 인지도 1위가 됐다.

그렇게, 삼성 사이오닉과 SK 이노베이션은 천문학적인 마석을 정부에게 선물받았고, GS 아이기스는 세계 최대의 사냥도구 제조기업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물론 계획부터 실행까지 상당히 복잡한 문제였지만, 감기자와 천사장, 그리고 수많은 관료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낸 쾌거였다.

그리고 내 업적이 됐다.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장기밀매로 어수선하던 국내 상황도 괜찮아지겠지. 오랜만에 정부가 기업들 배를 불려줬으니까, 곧 언론도 잠잠해질 거야.”

“언론이 기업의 개라는 걸 자연스럽게 전제로 까시는군요?”

“뭘 새삼스럽게. 그냥 사람이 돈의 노예인 거야. 저걸 좀 보렴.”

나는 피채원에게 작게 턱짓했다. 내가 가리킨 곳에는 천금순 사장이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과로에 지쳐 쓰러졌으면서도, 누군가와 통화하며 소녀처럼 꺄르륵 거렸다.

“어머……. 정말요? 잘하셨어요, 전무님. 현명하게 잘 푸셨네. 괜찮아. 괜찮아. 법적인 문제는 내가 해결할게요. 직원들한테는 자잘한 거 신경 쓰지 말고 돈 챙겨서 한국으로 가라고 하세요. 응. 응. 내가 누구야. 승문 씨는 내가 가볍게 구워삶는다니까…….”

“거, 삶기는 누구를 삶아요? 내가 계란이야?”

“아잇! 자기야. 저 통화하잖아요.”

“쯧…….”

하여튼 저거 날 잡고 세금 좀 걷어야 정신을 차리지. 나는 가볍게 혀를 차고 피채원에게 충고했다.

“채원아. 너는 저렇게 되지 마라. 돈이라는 게 말이야. 독기가 세요.”

“……권력이 더 무섭지 않나요.”

“어이구? 너는 어린애가 너무 경륜이 넘쳐. 이번 일 끝나면 어디 여행이나 좀-”

그때. 핸드폰이 시끄럽게 진동했다.

“여보세요?”

-전데요.

“아, 예. 홍선아 협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다친 곳은 없으시죠?”

-다행히도 다치지는 않았네요! 그런데 조금 문제가 생겼어요.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으음. 조금은, 정치적인 문제랄까요……?

* * *

문제의 발단은 헌터들 간의 빈부격차 때문이었다.

사실, 이 바닥만큼 경력직과 신입의 차이가 큰 곳이 없다. 강한 헌터는 강한 힘으로 괴수를 잡아 끝없이 강해지고, 약한 헌터는 약한 힘으로 괴수를 못 잡아 성장이 정체된다.

물론 희귀한 능력을 가져서 대기업 PMC에게 마석을 대출받거나,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마력적성이 높아 똑같은 마석으로 더 많이 강해질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은 특별하지 못하니까 보통 사람인 것이다.

물론 오스트레일리아에 투입된 헌터들은 질적으로 아주 우수한 헌터들이었다. 하지만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라고, 최상위권 헌터들과 중상위권 헌터들 간의 차이는 극명했다.

그렇게 결국,

고위 헌터들이 마석을 독식한다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공격대 30명이 반쯤 죽어가며 싸우는 걸, 고위 화염술사 하나가 손가락질 한 번으로 정리하더라. 그럴 거면 우리 왜 데려왔냐?]

[전략적인 부분은 몇몇 고위 헌터들이 담당하고, 나머지는 지엽적인 후속작전에 편성되는 게 보이더군요. 하위헌터가 괴수를 몰아오면, 고위헌터가 괴수를 처리하고 마석을 먹습니다. 우리가 몰이꾼입니까?]

표면적으로는 고위헌터들이 중-하위헌터들의 싸움터를 빼앗는다는 주장이었으나, 이건 상당히 복합적인 문제였다.

우선, 정부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고위헌터와 하위헌터를 섞었고, 자연스럽게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고위헌터들이 주로 나서는 그림이 조성되었다.

거기에, 그간 헌터들이 인식하던 힘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목숨이 걸린 현장에서 다가오니 감정적으로 예민하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조금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은근한 열등감이 작용했다.

그리고 중소길드는 수익 극대화를 위해 이를 부채질했다.

물론 고위헌터들도 불만이 없지 않았다.

[강한 사람이 많이 잡고, 많이 버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게 아니꼬운 거면 북한으로 가시는 게…….]

[얘네는 도와줘도 지랄이네. 다 죽을 뻔한거 가서 살려줬더니, 돈 뺏어갔다고 징징대는 거 안 한심하냐?]

치안관들에게 행동지침을 전달하고, 대기업 측에도 협조공문을 발송했으나, 개인 간의 다툼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고위 헌터들은 상당히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래도 뒷감당이 가능한 인종이었을뿐더러, 이걸 일종의 하극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 경우는 은근한 우월감이 작용했다.

거기에 이 기회에 중소길드 때려잡겠다는 대기업이 가세하자, 헌터들 간의 갈등은 짧은 시간 내에 점화되었다.

그러나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일까.

두 세력이 요구하는 바는 공통적이었다.

[하위 헌터와 고위 헌터를 각각 따로 싸우게 하라.]

하위 헌터들은 피 좀 보더라도 마석 많이 가져가겠다는 소리였고, 고위 헌터들은 쓸모없는 짐덩이를 버려두고 알아서 싸우겠다는 뜻이었다.

이는 지극히 감정적인 현상이었고, 그만큼 정치적인 분쟁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안전을 생각하는 정치가의 입장에서 볼 때.

“……하. 이 새키들 봐라.”

이건 아주 배가 부른 짓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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