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73화 (173/296)

EP 27 - 멋진 신세대 (5)

요즘 비행기에는 퍼스트클래스가 없다. 일단 항공유가 말도 못 하게 귀해졌을뿐더러, 비행기가 뜨려면 호위기까지 대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 으리으리한 VIP석을 유지한다는 건 경제논리와 국민정서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국은 이미 퍼스트클래스라는 개념이 사라진 지 몇 년쯤 되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우와아아…….”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과장 조금 보태서 이 정도면 비행기 좌석이 아니라 호텔방이다.

피채원도 입이 떡 벌어진 건 마찬가지다. 녀석은 쭈뼛쭈뼛 짐을 풀면서도 조심스런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이, 이렇게 사치 부려도 되는 건가요……?”

“그러게. 사실 나도 퍼스트 처음 타본다. 고작 비행기 좌석이 사람 기를 죽이네.”

“아뇨, 그게 아니라, 나중에 언론에 구설수 나오면 어떡하냐구요…….”

“……이제는 네 마인드도 반쯤 정치인이구나.”

에휴. 퍽 귀염성 있게 퍼스트클래스를 보고 발을 동동 구르더니, 막상 들어보니 의외로 현실적인 걱정이었다. 그래서 현실적인 대답을 돌려줬다.

“이번에 삼성에서 비행기용 엔진을 개발했어. 그래서 비용이 덜 드는 거야.”

“그러면 우리가 탄 비행기도 마석으로 운행되는 건가요?”

“아니. 그건 대외 홍보용 사실이고. 사실은 그냥 항공유 꼬라박는 거지. 이제 막 개발된 엔진을 뭘 믿고 탑승하냐? 게다가 나름 국가대표로 가는 건데 이코노미에서 낑겨 가면 체면이 안 살잖아.”

“아하.”

피채원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사람들이 세금을 안 내려고 하는 거군요.”

* * *

“꼬우면 이코노미로 가던가.”

“세금 잘 걷자 이거죠.”

피채원과 잡담하며 짐을 풀고 있으니 옆자리에서 누군가 일어났다. 그녀는 토끼모양 수면안대를 벗으며 눈을 비비적거렸다.

“거 조용히 좀 합시다……. 사람 자는데.”

처진 눈매, 허름한 양복, 부스스한 머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다크써클.

당연히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니, 천 사장님은 왜 여기서 퍼질러 자고 있어요?”

“어……? 장관님이네?”

“그럼 누군 줄 알고 시비를 걸었습니까?”

“난 또 쟤용이 아저씬 줄 알았죠…….”

“이거 큰일날 사람이네…….”

가볍게 내 말을 무시한 천 사장은 졸린 눈으로 피채원에게 방긋 미소 지었다.

“채원 씨도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나 봐요. 머리가 찰랑찰랑해……. 한번 만져봐도 돼요?”

“천 사장님도 총회 참석하시나요.”

“총회도 총회인데, 사실 미국에 거래처 뚫으러 영업 가는 거예요. 사장이 이렇게 열심히 발로 뛰는데 우리 직원들은 얼마나 복 받았나 몰라…….”

천 사장이 헛소리를 하는 동안 나는 짐을 다 풀고 아늑한 의자에 누웠다.

그러나 곧장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영업용 미소를 띠며 손을 흔들었다.

“어어! 진운 씨!”

“아, 안녕하세요…….”

20대 초반의 헌터협회 부회장이 쭈뼛거리며 내게 인사했다. 설진운은 국경 없는 기사회의 아시아 지부장이기도 했다.

“진운 씨. 총회에서 연설한다면서요? 준비는 잘했고?”

“아, 네…….”

“하하, 이번에 같이 가게 돼서 저도 정말 기분 좋습니다. 모쪼록 같이 국위선양이나 하고 오죠.”

“네…….”

“…….”

쩝. 아무래도 젊은 헌터는 권력자의 관심이 영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반응이 신통치 않다.

그래도 자꾸 말을 붙여보려고 하니, 설진운의 뒤편에 있던 누군가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왜 자꾸 애한테 찝쩍거려?”

여도연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진운이. 가서 짐 풀어. 나는 동생이랑 이야기 좀 할 테니까.”

“아, 왜. 나도 진운 씨랑 좀 친해져 보자.”

“반쪽짜리 헌터가 뭐래.”

“지금 내가 헌터업계 겐세이 좀 쳤다고 따돌리려는 거야?”

“…….”

여도연이 내 귀에 살짝 속삭였다. 조금 전 틱틱대던 것과는 달리, 살짝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홍선아 협회장이 너 때문에 반폐인 됐다는 소문이 돌아서. 분위기가 좀 그렇다. 당분간 조심해라.”

“……아.”

* * *

다음 날.

나는 비행기에서 눈을 떴다.

잠을 잤다가 일어났다는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밤새도록 눈만 감고 있다가 이제 뜬 거였다.

“…….”

비행기 창가로 아침 햇살이 스며드는데, 피채원은 자기 머리카락을 우물거리며 잠들었고, 옆에서는 노트북 타자 소리가 타다닥 들려온다.

나는 소리의 원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천 사장님?”

“아, 일어나셨어요?”

천사장은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했지만, 그 퍼석퍼석한 몰골은 감출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묘한 눈빛을 보냈다.

“……사장님 또 주식 하다 밤새웠죠.”

“어라? 한승문 테마주로 한탕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밤새도록 노트북을 두들기는데 모를 리가 있나. 아니, 그나저나 한승문 테마주는 또 뭐에요? 내 이름 달고 장사하는데 왜 내가 돈을 못 받지?”

“자세한 건 아실 것 없고……. 그나저나 그러면 저 때문에 잠을 못 주무신 거네요? 이걸 미안해서 어째…….”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천 사장과 나는 서로 자기 할 말만 하는데 이상하게 대화가 성립된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니, 뭐, 천 사장님 때문에 못 잔 건 아니고요. 그냥 비행기라서 그런가, 잠이 잘 안 오네요.”

“어머. 장관님 비행기 처음 타는 거예요?”

“예전에 헬기 타고 가는데 바로 위에 게이트가 열린 적이 있어가지고…….”

“…….”

천사장은 기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고, 피채원은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지 자면서도 끄응 침음성을 냈다.

자꾸 머리카락을 우물거리는 것을 슬쩍 빼주니, 비행기가 뉴욕에 도착했다는 알림이 들려온다.

[현재 항공기는 미국 대서양 상공을 지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약 40분 후에 목적지인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잠시 후, 비행기가 미군 방사능 차폐막을 통과할 예정이오니, 기체가 다소 흔들릴 것으로 보입니다. 승객 여러분들의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방사능 차폐막……?

그러고 보니 미국 동부에 원전이 꽤 터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심 걱정하고 있었으나 후쿠시마에서 오이를 씹어 먹은 이명박의 심정으로 버티려고 했는데.

“차폐막……?”

그게 대체 뭔가 싶어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았다.

그리고 입이 떡 벌어졌다.

“……이, 무슨.”

거대한 역장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 * *

역장은 반투명하고 푸르스름했다. 언뜻 보면 뉴욕을 덮은 돔처럼 보였지만, 플라즈마처럼 흐르고 있는 전류와도 같았다.

내가 문과라서 뭐라고 더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아무튼 정말 SF 영화에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다음에도 그게 너무 신기해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이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장관.”

“……아, 뤼미에르. 먼저 와 계셨군요.”

멋들어진 정장 차림의 뤼미에르가 가볍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뉴욕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설진운 지부장님과 여도연 헌터님도 오랜만이군요.”

그녀는 웬 구급상자를 하나 들고 있었고, 내 곁에 쪼그려 앉아 하얀 수술용 장갑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그녀 말고도 수많은 의료진이 다가와 우리를 둘러쌌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두리번거리니 그녀가 설명을 시작했다.

“미국 동부가 방사능으로 상당히 오염된 것은 아시지요? 특히 뉴욕은 항구도시고, 원전은 보통 바닷가에 만드는 것인지라, 솔직히 상태가 심각합니다.”

“세계 최대의 대도시가 방사능에 쩔었, 아니, 고생하는군요.”

그러니 미국 정부에 가해지는 부담이 막중할 수밖에 없겠지. 아무래도 총회에서 조금 강짜를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 뤼미에르는 주섬주섬 구급상자를 뒤적거렸다.

“그래서 미국은 몇 가지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아까 입국하면서 보신 차폐역장이고, 두 번째가 바로 이겁니다.”

그녀는 주사기 하나를 들어 보였다. 초록색 용액이 들어 있다. 불길해 보인다.

뤼미에르가 주사기에 대해 설명했다.

“사람의 몸을 방사능의 위협에서 해방시켜 주는 약물입니다. 원전 터질 때 그 옆에 있어도 끄떡없습니다. 다만 핵폭탄 터질 때 그 옆에 있으면…… 아시죠?”

“……예?”

“마력을 통해 신체를 변형시킨다는 점은 각성제와 비슷하군요. 아무튼 유럽은 원래부터 포션에 일가견이 있었고, 미국은 우리에게 외주를 줬지요. 그래서 나온 약물입니다만…….”

뤼미에르가 조금 미심쩍은 눈치로 나를 보았다.

“……설마 처음 들어보십니까?”

“예.”

“나온 지 꽤 된 물건입니다만. 대한민국 초상관리부 장관이 그걸 모르다니…….”

“……으음, 공부를 조금 더 해야 할까요.”

“아뇨. 아뇨. 부럽다는 뜻입니다. 한국은 이런 물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을 정도로 안전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외국인 아닙니까. 설마 외국인이 말실수한 것 가지고-”

“거참, 오해 안 했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뭐 한국어로 랩까지 하실 수준이구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자, 팔 대세요.”

그녀는 태연히 내 팔을 걷고서 알코올 솜을 들이댔다. 그리고 초록색 주사기로 나를 위협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팔을 뺐다.

“아니, 잠깐만요. 각성제랑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거면 수명 깎이는 물건 아닙니까?”

“걱정 마십시오. 초기 물건은 4년 정도 수명을 깎았는데, 요즘 물건은 1주일 정도밖에 안 깎습니다. 1주일 희생해서 평생 방사능의 위협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남는 장사 아니겠습니까?”

“아, 아니, 그래도, 몸에 어떤 영향이 생길지 모르는데…….”

“임상시험 결과, 적어도 이거 안 맞고 뉴욕 방사능을 견디는 것보다는 덜 해로울 겁니다. 한 개에 옛날 시세로 10억이 넘어가는 물건이니 얌전히 팔 대세요.”

“이, 이거……! 불법시술! 불법시술!”

“저 의사입니다. 그리고 기자들이 찍고 있으니까 웃으세요.”

“아하하하!”

결국 주사를 맞은 나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팔을 문질렀다. 뤼미에르는 후련한 표정으로 구급상자를 도로 챙겼다.

“언젠가 장관에게 주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물건인데. 이제야 속이 시원하군요. 이거 효과 좋습니다. 저 믿고 마음 놓으십시오.”

“……뤼미에르도 이거 맞았습니까?”

“원전폐쇄는 국방의 주요 사안입니다. 예전에 한창 이걸로 바빴었지요. 아마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원전을 저와 제 동료들이 폐쇄시켰을 겁니다.”

“……그, 렇군요.”

즉, 그녀는 이미 한참 옛날에 이 약물을 주사했고.

자신의 수명 4년 따위는 가볍게 버려가며 세상을 지켰다는 뜻이었다.

* * *

잠시 뤼미에르와 헤어지고. 우리는 공항의 기나긴 통로를 걸었다.

수십 명에 달하는 대한민국 사절단의 가장 앞쪽에는 나와 피채원이 있었다.

“채원이. 오늘 일정 뭐야.”

“기자회견 하시고, 백악관에서 점심 식사하시고, 호텔에서 푹 주무신 다음에, 각국 정상이랑 이런저런 개별 만남 가지시다가, 내일모레 유엔총회 참석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피채원은 능숙하게 아이패드를 조작하다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기자회견 대본이 없네요.”

“이야. 이게 아메리칸 스타일인가 그거냐? 여기는 뭐 보도지침도 없다니?”

“아뇨. 그냥 실수라네요. 물론 실수인지 미필적 고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기자회견은 임기응변으로 진행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기자들이 미국 정부한테 질문지를 안 준 걸 수도 있고요.”

“애드립이야 내 주특기지 뭐. 크게 신경 쓰지 말자고.”

그렇게 공항 로비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으니, 갑자기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비명 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웅성대는 것 같기도 하고.

“……뭐지?”

그 정체는 복도 끝으로 나아갈수록 확실해졌다.

소리가 점점 커진다.

이윽고, 공항의 문이 열리는 순간.

[-!!!]

눈앞에 보이는 건 시야를 가득 채운 인파. 귓가에 울리는 건 가열한 함성.

온갖 현수막이 깃발처럼 나부끼는 와중, 나는 순간 그 열기에 놀라 뒷걸음질 쳤다.

“……!”

뉴욕이 우리를 맞이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