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72화 (172/296)

EP 27 - 멋진 신세대 (4)

“중국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리충빈 주석의 요청이었죠. UN 총회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으니, 그 전에 공식적으로 회동하자는 겁니다. 그것도 중국에서요.”

“……괜히 초인연맹 사이에 불화설이 나돌지 않게 하자는 거군요.”

“역시 이해가 빠르십니다.”

권력자의 행동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외교 관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형식과 체면으로 싸우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충빈 총통의 전략은 대단히 영리했다.

UN 총회에 나와 뤼미에르만 참석하고 리충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초인연맹 내부에 불화가 생겼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확실히 총회 직전에 같이 모이는 것만으로도 우호는 충분히 과시할 수 있겠군요. 총회는 같이 안 가지만 우리 사이가 이렇게 끈끈하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그쪽에서 먼저 딜을 제시할 수도 있겠네요.”

“……장관은 참, 기이한 방향으로 명석하십니다.”

“저야 뭐 직업정치인이니까요. 그나저나 뤼미에르는 왜 한국에 계십니까……?”

어차피 모일 거면 중국에서 모여도 되는 것 아닌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니, 뤼미에르는 그것도 모르냐는 둥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글쎄요.”

“……?”

“아마 저도 뭔가 보여주고 싶은 것 같습니다.”

* * *

정부가 통제하는 관제언론이 흔히 그렇듯, 중국의 언론은 생방송을 꺼렸다. 특히 정치적 사안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러나 오늘 중국의 총통은 이례적인 생방송을 지시했다. 비록 현장과 데스크 사이에 30분 간격의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방송은 대본대로 진행되었지만, 그걸 모르는 인민들은 그저 긴장된 마음으로 TV를 지켜보았다.

애국심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에 격양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린다. 뉴스라기보다는 스포츠 중계에 가까운 어조였다.

[아아! 베이징 국제공항. 저어 멀리서 드디어 비행기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자랑스런 중화항모 랴오닝함에서 발진한 선양 J-15 전투기들이 호위임무를 마치고 선회합니다!]

[중화의 두 귀빈을 모신 비행기입니다. 우리의 인민해방군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위용을 떨치고 있습니다.]

카메라가 주목하는 건 베이징 국제공항.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하자 기자들과 군인들의 움직임이 기민해진다. 세계의 패권을 아우르는 세 인물이 모인 탓이다.

이윽고 비행기 문이 열리고, 하얀 롱코트를 차려입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럽 기사당의 총재, 노야 루미아이러 경입니다. 범유럽연맹의 실질적인 연합장이자, 성녀라고 불리우는 인류의 선봉장이, 밝게 웃으며 인민들을 향해 손을 흔듭니다!]

은은하게 빛나는 금발을 한쪽으로 땋아 내리고, 보석으로 된 브로치 대신 열국의 최고훈장으로 치장한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이에 양복쟁이 하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조심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녀와 함께하는 건 대한민국의 인민대표 한순원입니다. 반도뿐만 아니라 세계를 논하는 정치가이고, 세계에서는 동방의 두 번째 거성이라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중국의 전우들이고, 이들이 바로 연맹의 동반자들입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북경의 땅을 밟았다는 게 감격스럽기만 합니다. 중국은 건재합니다! 여러분!]

뤼미에르는 한승문을 비행기에서 활주로까지 에스코트했고, 계단을 내려온 한승문에게 인민해방군 국방부장이 다가갔다.

[아아! 웨이펑허 상장이 한순원 인민대표에게 지팡이를 선물했습니다. 황산의 영객송迎客松과 백옥으로 만들어진 귀물입니다.]

[한순원 대표는 장애인으로 유명하지요. 그러나 강력한 초인으로서 수많은 전투를 직접 승리로 이끈 명장이기도 합니다.]

날카로운 인상의 절름발이가 능숙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선물 받은 지팡이를 짚으며 기자들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을 맞이하는 건, 검은 인민복 차림의 깡마른 노인.

[러쑨빙 총통께서 두 친구를 손수 맞이하십니다.]

[난세를 끝낸 세 전우가 오랜 이별 끝에 만났습니다!]

[관장을 만난 유비의 심정이 이것일까요? 총통의 표정이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 * *

자신이 나오는 생방송을 실시간으로 보는 기분은 참 오묘했다.

현장과 데스크가 대충 30분 정도 차이가 있다던데, 대충 보니까 포토샵이랑 후처리까지 전부 끝낸 영상이다.

TV를 빤히 보고 있으니, 민망한 리충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대표. 방송에 너무 집중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참으로 오랜만에 이리 만났는데 방송만 보고 있는게요?”

“아, 죄송합니다. 뉴스 멘트 하나하나가 너무 인상적인지라…….”

“한 대표가 한어漢語에 능통한 것이 참으로 한스럽군. 가급적 외신으로도 우리 방송을 접하지는 말아줬으면 하는 당부를 드리는 바요.”

고급스런 호텔방. 아주 피곤해 보이는 리충빈이 TV 볼륨을 끝까지 낮췄다. 자기도 저게 창피한 줄은 아는 모양이다.

뤼미에르는 복잡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의도적인 신격화와 영웅화는 그녀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었으니.

“이해합니다. 총통님. 가끔은 영웅이 필요한 법이죠.”

“사려 깊은 말씀은 고맙지만, 나도 내가 아이언맨보다는 히틀러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소. 이 이상 국내 선전에 대해 논한다면 내정간섭으로 간주하고 강경히 조처하겠으니, 이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말투는 거칠었지만 실체는 농담이었다. 리충빈은 이전보다 한층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거꾸로 말했다.

“이전보다 많이 노곤해 보이십니다. 총통.”

“허어, 그래 보이시오?”

“나라도 좋지만 건강도 같이 챙기셔야지요. 국궁진췌 사이후이라고는 해도 공명보다 현덕이 먼저 죽어서 대의를 그르친 겁니다. 제가 모시는 분도 항상 그게 걱정이라…….”

“하하, 아무래도 양 통령과 내 연배가 비슷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소. 죽을 날이 가까우니 몸보다는 뜻을 중요시하게 되더군.”

홍콩과 대만을 잔인하게 짓밟은 놈이 지껄일 말은 아니었지만, 어째 리충빈은 내 입 발린 칭찬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치였다.

어쩌면 그 노회한 정치장교가 정권 잡고서 약간 무뎌지고 있지 않나…… 속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것도 연막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순간순간 번뜩이는 그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오금이 저린다. 하여튼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인간이다.

물론 겉으로는 환히 웃으며 그를 대하고 있으니, 뤼미에르가 슬쩍 끼어들어 말을 보탰다.

“한 장관은 영어보다는 중국어에 더 능통하시군요.”

“하하! 그거 참 기꺼운 말씀이오!”

우리는 그렇게 화목한 시간을 보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지도 않고, 미국이라는 공동의 가상 적국을 두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서로와의 동맹으로 인해 너무도 많은 이익을 본 사이였다. 감정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서로를 적대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싱글벙글 웃으며 식사를 마치니 직원들이 들어와서 접시를 치우고 차를 내왔다. 뤼미에르를 고려했는지 미남미녀가 고루 섞여 있었다.

찻잔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에야 리충빈이 본론을 내밀었다.

“……고로, 이번 UN 총회에서, 미국이 자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수립하려 들 요량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바요.”

그는 가능성에 대해 말했지만 사실상 그게 정답이었다. 총통의 말은 무거운 법이고, 중국 국가안전부의 역량은 그리 쉽게 볼 것이 아니다.

“내가 알기로 양판석 대통령은 미국과의 공조를 포기하고 독자적으로 북한을 병합했소. 이는 중국과 손을 잡겠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소?”

“흐음. 외람된 말씀이지만 각하와 저는 분업이 확실한 관계입니다. 서로의 뜻을 짐작할 수는 있으나, 명확한 언질을 받지 못한 이상 무어라 확정지어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 대표에게 묻겠소. 미국이오? 중국이오?”

“저야 당연히 중국이지요.”

“좋소.”

리충빈은 잠시 뜸을 들였다. 어차피 유럽이야 이미 미국과 반쯤 척을 졌으니, 굳이 그쪽의 태도를 강요하지는 않으려는 모양이다.

이윽고, 중국의 지도자가 미국의 야욕을 폭로했다.

“……근시일 내에 미국이 호주를 합병할 거요.”

“…….”

“오세아니아가 통째로 미국의 전초기지가 되기 전에. 막아야겠지.”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

나는 뤼미에르의 전용기에서 중국의 풍경을 내려다봤다.

마침 밤이었던지라 문명의 색채가 뚜렷했다. 베이징 인근은 찬란하게 빛났고, 그 바깥은 소름끼치는 어둠이 잠식했다.

분명, 이 모든 곳에 사람이 살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밤에 불을 켜도 되는 곳에 살고, 누군가는 불을 키면 목숨이 위험한 곳에 산다.

그건 개인이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도 적은 사람들의 손아귀에, 너무도 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그런 시대였다.

나는 문득 뤼미에르에게 물었다. 그녀는 은은하게 빛나는 자신의 후광을 벗삼아, 작은 책(한국어 단어사전)을 읽고 있었다.

“……뤼미에르. 오스트레일리아는 이미 괴수화된 지역이었던가요?”

“국토의 대부분인 사막지대를 전부 점령당한 것으로 압니다. 여왕이 게이트에서 나와 플랜트를 심는 단계죠. 괴수가 게이트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서 생성되고 있습니다.”

“…….”

몬스터랜드.

게이트가 오래 방치되는 바람에 내부가 포화되고, 폭주에 폭주를 반복하다 결국 괴수를 생성하던 여왕마저도 게이트 바깥으로 나가버리는 상황.

시베리아, 사하라 사막, 극지대 등 주로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에서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각국은 요즘 게이트 내부를 공격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니 일본 중부가 몬스터랜드가 됐다는 건, 그쪽의 내전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뤼미에르가 덧붙였다.

“정말 위험한 건, 몬스터랜드에서는 괴수가 태어날 때부터 주변 환경에 적응한 채로 태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쪽 괴수들은 게이트에서 나온 녀석들보다 배는 강력하지요.”

“……겪어보셨습니까?”

“노르웨이의 설원은 그야말로 마굴과 다름없었습니다. 예티라는 게 진짜 있긴 하더군요. 한국말로는 설인이었던가요?”

“하이고…….”

그렇다면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그런 괴수들을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처지 또한 뻔했고 말이다.

당연히 미국의 원조는 그들에게 사막에서의 물 한 방울이다. 그러나 중국은 국익을 위해 이를 막으려 든다.

나 또한 국익을 위해서는 옆집 사는 깡패들과 친하게 지내야 하고, 유럽도 미국을 상대하는 마당에 중국과 척을 지면 안 된다.

“…….”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그건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길을 택할 것인지는 뻔히 알겠다.

“……저어, 뤼미에르. 오스트레일리아 말입니다만-”

“도울 겁니다.”

“젠장. 그럴 줄 알았습니다. 왜 그러고 삽니까?”

“사람을 도우면 안 되는 이유는 없습니다. 나머진 다 핑계죠.”

“글쎄요. 가끔은 이유 대신 핑계가 필요한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장관은 저를 그렇게 보고도 아직 제 성격을 모르십니까?”

“저 이제 장관 아닙니다.”

“아! 지금 말 잘하셨습니다. 장관도 때려치우고 나라를 엎어놓는데. 어떻게 저한테 전화를 한 번도 안 하고…….”

* * *

“준비 다 하셨나요?”

“오냐.”

피채원이 건넨 넥타이를 매고, 조심스레 의족 연결부를 다듬는다.

아직 적응도 안 된 집에서 나와 차량에 오르니, 익숙한 벨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양판석이다.

-지금 어딘가?

“아, 예, 이제 막 나왔습니다.”

-그래…….

그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고백했다.

-북한 일은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게.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북한은 내가 오랫동안 기획했던 일이야. 자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깊이.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네. 믿겠습니다.”

-그래. 나도 해외 쪽은 자네 판단 믿겠어. 어지간한 사안은 전부 컨펌 놓을 테니까, 어디 가서 권한이 없어서 못한다는 말은 하지 말게.

“아이고, 든든합니다.”

-그래.

뚝-

양판석이 자기 할 말 끝나니까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다.

이는 그의 오랜 습관이었던지라, 불쾌하기보다는 옛날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기분 좋은 긴장감을 느끼며 올려다 본 하늘은 푸르렀다.

파란 하늘에 비행기 한 대가 이륙했다.

목적지는 미국 뉴욕.

UN 본부가 위치한 세계의 심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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