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6 - 필연적 존재 (7)
정치라는 것은 나라를 고치는 일이다.
와꾸를 짜고, 작업을 치고, 외주를 준다. 그 과정에서 싸움도 나고, 누군가 횡령도 하고, 가끔은 엎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공사가 끝났다. 처음 견적에 비하면 비교적 손쉽게 끝났지만, 물론 그 여파는 작지 않았다.
그중 굵직굵직한 것만 몇 개 뽑아보자면.
첫째. 사회 지도층의 개짓거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진흙탕 싸움과 온갖 폭로전을 거친 탓이다. 이제부터 누굴 언제 잡아 조질지는 검찰 마음대로이니, 한동안 국내 정재계가 고분고분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둘째. 2차 한국전쟁이 무산됐다.
국군이 불시에 장전읍을 공격하며 북한과의 관계가 틀어졌다. 당연히 장기밀매 시장을 조성한 북한은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중이다.
그렇게 2차 한국전쟁은 무기한 보류되었고, 애초에 미국 대선에 맞춰 진행되던 일정인 만큼, 미국 또한 다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셋째. 내가 사퇴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다.
먼저, 초상관리부라는 공룡 부처가 당분간 식물인간이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초인지원청, 헌터 아카데미, 초상연구본부 등을 비롯한 산하기관이 붕 떠버린다.
다음 장관이 누가 될지에 대해서도 정부에 부담이 생기고, 지금까지 나를 손가락질했던 놈들의 뱃가죽 속에도 담석이 생기고, 당연히 공직사회 전반의 분위기에도 차질이 생긴다.
참으로 중대한 영향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실례합니다. 한승문 장관님 맞으십니까?
“아, 예. 무슨 일이시죠?”
-그…… 아무래도 관저를 비워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 *
“방 빼란다.”
“……예?”
모처럼 보는 피채원의 얼빠진 모습에, 나는 생긋 웃으며 가죽소파를 툭 건드렸다.
“이거 싹 들고 나가야 해.”
“뭐요?”
“관저는 장관이 사는 곳인데, 나는 이제 장관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제 집에서 나가야지.”
“……아뇨. 그런 뜻으로 여쭌 게 아니라.”
칙칙한 정장 차림의 피채원은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주말에 강제로 출근시키신 이유가, 이삿짐 나르라는 거였나 싶어서요.”
“짜장면 사줄게.”
“제가 사드릴 테니 이만 가봐도 될까요.”
“고, 곱빼기로!”
“……원래는 곱빼기 사줄 생각이 아니셨군요?”
크윽. 피채원의 차가운 눈빛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변명만 내세우는 어른이 되어버린 걸까.
나는 변명 따위 집어치우고 솔직한 나 자신을 보여주기로 했다.
“까라면 까 이놈아. 나는 다리가 없잖아.”
“……정말, 장관님은, 항상 제 기대 이상이시네요.”
뻔뻔하게 철판을 깔자 녀석은 땅이 꺼져라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터덜터덜 주변을 둘러다보며 대충 이삿짐 견적을 냈다.
“TV, 냉장고, 에어컨, 소파, 책장…… 그리고 저어기 안마의자는 전부 장관님 소유인가요?”
“소파랑 책장만 옮기면 될 것 같은데. 나머지는 국가 소유라.”
“비싼 가구만 국민 세금으로 지르셨네요.”
“니 피자도 맨날 세금으로 사준다.”
“합리적인 소비다 이거죠.”
피채원은 무뚝뚝하게 집안을 어슬렁거리다가, 문득 내게 다가와서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봐도 둘이서 옮기기에는 힘들 것 같은데요.”
“너 혼자 옮겨야지. 나는 다리가 없잖아.”
“다리가 없다기보다는 권력이 있으신 거겠죠.”
이제 피채원은 나를 무슨 인간쓰레기 보는 것처럼 째려봤다.
확실히, 비쩍 마른 여자애를 주말에 불러내서, 혼자 책장이랑 소파를 나르게 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사람새끼가 할 짓이 아니었다.
물론 나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는 사람이다. 피채원 혼자만 덜렁 불러냈을 리가 없었다.
“너만 부른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의원실 비서진도 싹 다 불렀어.”
“다행이네요.”
“근데 죄다 어제 사표를 냈더라고.”
내가 본격적으로 욕을 퍼먹기 시작할 쯤에 거의 모든 비서들이 내 뒤통수를 때렸다. 재벌들이 제시한 돈맛에 홀딱 빠져버린 것이다.
사실 내가 주변 관리를 못한 탓도 있다. 비서진에게 꼬박꼬박 용돈도 좀 챙겨주고 그랬으면 괜찮았을텐데. 그러지를 못했다.
이게 내 오랜 단점이다. 일에 집중하면 사람을 못 챙긴다. 학창 시절부터 독고다이로 살아와서 그런 걸까. 맨날 이모 집에 가면 전화 좀 하고 살라고 등짝부터 맞는다.
아무튼.
나와 피채원의 불륜(?) 스캔들, 미성년자와의 부적절한 관계, 등등. 내 사생활에 관한 근거 없는 네거티브 모두가 그놈들 입에서 튀어나온 거였다.
그리고 비서진을 감시하며 내게 보고하던 이가 피채원이었으니, 짧은 설명만으로도 녀석이 지금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충분했다.
“다들 도망친 건가요.”
“그래. 그래도 와서 그랜절이라도 박으면 용서해 주려고 했는데. 어째 코빼기도 안 보이냐.”
“……그러면 저 혼자 이걸 다 날라야 하는 상황이네요?”
“그래도 유재영이는 배신도 안 하고, 사표도 안 냈는데. 안 오는 거 보니까 아빠 건드려서 삐졌다 보다.”
“그…… 주말에 부르시니까…… 안. 오는…….”
“뭐.”
“아닙니다.”
잠시 고민하던 피채원이 짧게 결론내렸다.
녀석은 무뚝뚝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용달 부르죠.”
* * *
“아유…… 역시 검은 소가 일을 잘하네.”
“뭐 이 새끼야?”
“도와줘서 고맙다고.”
검은 츄리닝과 등산자켓을 입고 찾아온 여도연은 흑우黑牛와도 같았다. 한 손으로 자기 몸집만한 가구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참으로 진풍경이다.
나는 소파에 앉아 여도연이 일하는 모습을 구경했고, 피채원은 옆에서 부지런하게 사진을 찍으며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결국, 여도연은 가장 만만한 나를 조졌다.
“어디서 구경만 하고 앉았어. 내가 이삿짐센터 직원이냐?”
“짜장면 사줄게.”
“……탕수육은?”
“깐쇼새우도 사준다.”
여도연은 아예 내가 배달시킨 탕수육을 육포처럼 질겅거리며 일을 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툴툴거리는 것은 여전했다.
“야. 이런 거는 그냥 국정원 직원들 시키면 되잖아. 여기 널린 게 요원들이구만.”
“아니, 누나. 이분들이 뭐 정치인 뒤 닦아주는 분들이야?”
“그럼 아니야?”
이삿짐을 나르던 요원 하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여도연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니…… 굳이 나까지 부를 필요가 있었냐. 이 말이지.”
“누나. 적어도 이분들이 공무원 시험 칠 때는, 나중에 정치인 이삿짐 나르게 될 거라고 생각이나 하셨었겠냐고. 나도 가족 정도는 불러서 일을 시켜야 체면이 서지.”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시점에서 체면이고 뭐고 없는 것 같은데……?”
여도연의 말에 곧장 반박하려던 찰나, 창문 바깥에서 탕- 하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 너머에서는 교복 입은 어린애 하나가 있었다. 녀석은 하이바를 쓴 채로 내게 삿대질했다.
“아저씨! 자꾸 현장에서 부대끼지 말고, 저어기 빠께쓰에서 도라이바나 좀 갖다주셔.”
“얘는 학교도 안 나가는 놈이 뭔 교복을 입고 다녀…….”
“여중생 기분 좀 내 봤으!”
나는 양동이를 뒤적거려 드라이버를 하나 꺼내 감지윤에게 건넸다.
그리고 부루퉁하게 덧붙였다.
“교복까지 입었으면 슬슬 존댓말 좀 하지 그러냐?”
“애는 애답게 굴어야 정다운 것이여!”
“근데 그걸 왜 애가 말하냐고.”
“아이 참……!”
녀석은 팔꿈치로 나를 툭 건드리고서는,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리고 해맑은 미소로 비수를 꽂았다.
“근데 아저씨, 오랜만에 보니까 진짜 삭았다.”
“사람은 언젠가 다 죽어.”
“알아.”
“너도 언젠가는 늙을 거다.”
“나는 아직 젊고 싱싱해서 이해가 잘 안 되는디……?”
“……스무 살만 돼봐라. 사람은 하루하루 성장하는 게 아니라, 하루가 지날수록 조금씩 죽어가는-”
그 순간,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살기에 입을 다물었다.
분노한 여도연의 목소리가 들린다.
“……니는 애한테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감지윤이 덧붙였다.
“맞아! 난 애라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거리던 여도연은 감지윤에게도 한소리 했다.
“야. 거기 마법소녀. 옥상에 올려놓은 장롱이나 좀 들고 내려가라. 계단이 좁아서 안 내려간다.”
“지금 내리는 중이야!”
참고로, 녀석이 드라이버를 가져다달라고 한 이유는, 장롱 문짝을 부숴먹어서 그런 거였다.
* * *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결국 짐을 싹 정리하고 관저를 떠나게 되었다.
“…….”
용달트럭을 불러 이삿짐을 실어 보내고,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정들었던 관저를 쳐다보고 있으니, 여도연의 홀가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드디어 끝났네.”
길쭉한 기럭지의 그녀는 가볍게 몸을 풀며 내게 물었다.
“야. 관저 말고 살 집은 있냐?”
“각하께서 하나 구해주셨어. 부산에 별장이 하나 있으시더라.”
“……별장?”
“해운대 오션뷰 단독주택인데, 시가가 320억이야. 마당이 있어 가지고.”
“그, 그럼, 이제 우리 집인가……!?”
“응. 월세야.”
“염병.”
여도연은 김빠진 표정으로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인생 날로 먹으려던 모양인가 보다.
녀석은 험악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고,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얼마나 꼼꼼한 사람인데, 설마 살 집도 준비 안 했겠어?”
“그래. 차는 있고?”
“아.”
없다.
대학 입학 때 이모가 뽑아준 중고 외제차도. 국회의원 당선되고 뽑은 국산 K5도. 이제는 서울 어딘가에 찌그러져 나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이미 이번 재난으로 인한 재산피해에 ‘보편적’으로 보상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즉, 일일이 보상하면 국고 거덜 나니까, 복지를 짱짱하게 해준다는 소리인데.
“……내 차 못 돌려받네? 그럼?”
“그걸 이제 알았냐?”
“맨날 방탄 에쿠스 타고 다녀서 몰랐지…….”
다음 대선 때는 2번 찍어야겠다.
나는 속으로 대통령을 욕했다. 전화로 욕하기에는 너무 담이 작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차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렸지만, 차에 대한 걱정은 여전히 남아 마음이 무거웠다.
“……국민들 눈치 보여서 국회의원 관용차는 폐지했는데. 어떡하지. 당장 내일 타고 다닐 차가 없는데.”
“돈 모아둔 거 없냐?”
“있으면 이런 걱정 안 했지.”
세비는 들어오는 족족 기부함에 박았다. 당장 다음달 월세랑 생활비 정도는 있긴 한데, 차 뽑으면 그날부터 컵라면만 먹고 살아야 한다.
결국, 나는 다급히 질문했다.
“구, 국회의원은 은행에서 얼마나 땡겨주나……?”
“한 번 가보지 그러냐. 반응 핫할 것 같은데.”
“자, 장난치지 말고……! 나 지금 급하단 말이야!”
“마침 저기 건너편에 국민은행 있네. 돈 빌려서 여기 신호등에 있는 벤츠나 하나 사든가.”
정말 급한 마음으로 손톱을 뜯고 있으니, 신호를 기다리던 벤츠가 미끄럽게 움직였다.
우리 쪽으로.
“어어……?”
뭔가 싶어 뒷걸음치니, 벤츠 운전석의 창문이 내려가며, 익숙한 얼굴이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야. 이사 간다면서요?”
“……어? 천 사장님?”
“흐음. 짐이라도 좀 날라주려고 왔는데. 어째 다 끝난 모양이네요……?”
“……아니. 짐은 됐고요.”
차키가 좀 땡기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