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6 - 필연적 존재 (4)
정치는 세상을 바꾸는 학문이다.
세상은 힘 있는 놈 몇 명이 움직인다.
그러니 정치는 권력자 몇 명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작업이었다.
* * *
사실 양판석과 원옥분을 등에 업고 있는 이상, 장기밀매를 둘러싼 싸움의 승패는 뻔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극렬한 반발은 면치 못하겠지만 적어도 질 싸움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양판석과 원옥분이 나서는 판이기 때문이다.
양판석은 한국인 헌터 장기를 털어 각성제 기밀을 훔치려 한 놈들을 처리해야 하고, 원옥분은 차기 대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존재감을 발휘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니 진짜 문제는 얼마나 깔끔하게 이를 제압하느냐였다.
당장 엮여있는 권력집단이 한둘이 아니다.
재벌들을 비롯한 한국 고위층.
애초에 장기밀매 시장을 형성한 북한 정권.
그를 이용해 한국 각성자들 장기를 훔친 개새끼들.
게다가 이를 방관하거나 눈치채지 못한 수많은 책임자들까지.
거기에 2차 한국전쟁, 초상개혁, 정권지지율, 남북관계, 국가신뢰성, 경제발전, 무역관계 등등. 수많은 사안이 얽혀 돌아가는 상황이다.
그런데 장기밀매는 나쁜 짓이라며 닥치는 대로 때려잡는다?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속으로 욕하고 좆같은 세상이라며 소주병이나 까면 될 것을, 뭐 굳이 잘났다고 정의로운 척 칼질을 하는가.
그런 꼴통 새끼가 없다.
문제는 내가 그 꼴통이라는 거다.
가만히 놔두면 될 거 굳이 헤집어서 일을 벌이기로 했으니. 돌아가는 상황에 신경 끄고 나쁜 놈들만 잡겠다고 깽판치는 건 책임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이 싸움이 커질수록 국력이 저하된다. 그리고 그건 개혁이고 나발이고 공익을 해치는 일이다.
결국 가장 이상적인 결과는 이 사회의 썩은 부분만 깔끔하게 도려내는 것이었고, 그를 위해서는 반대파를 초전박살로 조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군산분리법으로 기습적인 선전포고를 하고, 국회 내부의 세력을 동원해 싸움을 크게 확대시키며, 재계, 언론, 정계의 모든 공격을 혼자서 두드려 맞았다.
그들의 힘을 빼놓은 것이다.
그리고 장기밀매 스캔들이 공개되면 여론이 뒤집힐 것이고, 그 시점에서 양판석과 원옥분이 참전한다면, 이 싸움은 우리들의 승리로 끝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 모든 정세가 유재경 총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이미 모든 상황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갑작스레 발의하신 군산분리법으로 여론이 뜨겁지요. 장관님은 이미 재계, 언론, 정계를 하나로 묶어두고 싸움을 벌이셨습니다.”
“…….”
“덕분에 이 와중에 장기밀매 스캔들이 터진다면, 그것 때문에 싸움이 새로 시작되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싸움이 깔끔하게 끝나겠지요. 장기밀매는 군산분리의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주는 이슈니까요.”
요전의 연락 이후, 그는 잔뜩 흐트러진 채로 내 관저를 찾아왔다. 심지어 술냄새까지 풍기면서 말이다.
처지가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평소 넥타이도 느슨하게 안 하는 사람이 와이셔츠 단추를 헤집어놨다. 담판을 짓기 전에 소주라도 걸쳤는지 얼굴은 불콰했고 말이다.
물론 이 경제관료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알코올 좀 섞였다고 녹슬지는 않은 상태였다.
“반전만큼 대중을 흥분시키는 게 없지요. 장관님을 편들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옳았다면서 신나게 떠들 거고, 장관님을 욕하던 사람들은 피해자인 척 모든 책임을 재벌들에게 돌릴 겁니다.”
“…….”
“그렇게 여론이 순식간에 뒤집힌다면, 대중은 자기들이 무슨 역사의 주인이 된 것처럼 분노하겠지요. 실상은 극적인 쇼맨십에 넘어갔을 뿐인데 말입니다.”
“실례지만 저는 대중을 선동한 게 아니라, 그들이 개혁의 주체가 되도록 등을 밀어준 겁니다. 근본적으로 사회가 변화하려면 민중이 개혁을 주도해야 하니까요.”
“……현상에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으면 애초에 이 짓을 안 했겠지요?”
“……그렇다 칩시다.”
유재경은 의외로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술기운 덕분인 걸까, 아니면 숨겨진 한 방이 있는 걸까.
사실, 장기밀매 스캔들이 터지든 안 터지든 유재경의 정치생명은 반쯤 끝장났다 봐도 무방한 상태였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장기밀매가 터지면 유재경은 방관자로서의 책임을 면치 못할 터였고, 안 터지더라도 이미 원옥분이 차기 대권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원옥분을 배신한 전적이 있던 그가 무사하지는 못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는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저는, 저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사람이 장관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뻔뻔하게 대답하자, 그는 허탈한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제가, 청송에 도박사랑 장소장인지 뭔지, 생체실험의 핵심 관련자들이 있는 걸 모를 것 같습니까? 비밀리에 초현상연구본부 핵심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던데요.”
“네. 제가 그 사람들을 숨겨놨지요. 그리고 유 총리님께서는 생체실험 당시 거기에 자금을 대주셨고요.”
“……하하, 그랬지요. 다만,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이제는 기억도 잘 안 나는 일에 사람들이 얼마나 분노할 것 같습니까?”
“……그걸 아는 분이 그러십니까?!”
극도로 예민한 반응이 돌아왔다.
작고 깡마른 중년은 거칠게 안경을 벗으며 항의했다. 이 나라의 국무총리라기에는 너무도 초라하고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저는……! 저는 장관님께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협조했으면 협조했지요. 제가 그렇게 유도리 없는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총리님.”
“그렇게 부르지 마십쇼! 저는 그냥 기재부 예산실장입니다! 나라 살림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아, 예. 물론 나쁜 짓 많이 했습니다. 생체실험도 뒤에서 지원했고, 장기밀매도 암묵적으로 허용하고서 세금 좀 걷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저를 위한 거였습니까?”
이제야 그가 만취 상태라는 게 실감이 났다. 그는 숫제 비굴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내게 반쯤 애원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나는 그를 우습게 볼 수 없었다.
“이, 나라를 위한 거였고! 제 가족을 위한 거였습니다! 저 같은 게 뭔데 차재균이한테 반항을 합니까……? 군권 틀어잡은 사람한테 미쳤다고 그래요? 그리고. 장기밀매도 그렇습니다. 가뜩이나 목숨 간당간당한데 이 나라 전체한테 싸움을 걸 수는 없잖습니까!”
“…….”
“…….나도. 나도 그냥 이 거대한 사회의 말단이란 말입니다.”
솔직한 고백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솔직해진다는 것에는 그만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벼랑 끝에 몰린 유재경은 충분히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
“…….”
오랜 시간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열변을 마친 그는 숨이 차는 모양인지 지친 숨을 헐떡거렸고, 나는 잔잔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의 각박한 처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권력은 누리고 싶은데 책임은 지기 싫다는 거 아닙니까.”
* * *
새파랗게 젊은 놈 앞에서 반쯤 구걸하듯 애원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젊은 놈의 싸늘한 시선을 견디는 건 그보다 더했다.
유재경은 서서히 손끝이 떨려오기 시작한 것을 체감했다. 그런 그에게 한승문이 일갈했다.
“물론 총리님의 처지야 이해는 합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이실 터이고, 위치가 위치인 만큼 책임질 사람이 많지 않으셨겠습니까.”
연신 친절한 말투였지만 눈빛만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승문은 금방이라도 누굴 회쳐버릴 것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총리님께서 자기보고 사회의 말단이라고 하시면, 국민들은 누굴 믿고 의지하겠습니까?”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폐부를 찔렀다.
“저는 뭐 생체실험 건드리는 데 목숨 안 걸은 것 같으십니까? 이번에 장기밀매 건드리는 것도 무슨 권력 잡자고 이러는 것 같으십니까?”
유재경이 외면한 것을 한승문은 외면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지금 한승문이 유재경을 내려다보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유재경은 그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충분히 만족했으니까.
“제가 왜 자꾸 이렇게 일을 치는 것 같으십니까?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제가 지금까지 한국을 몇 번이나 갈아엎었습니까? 그게 다 정권 잡자고 그런 것 같습니까?”
평소의 유재경이었다면 손이 먼저 튀어나가 손사레를 쳤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도 차가웠던 탓이다.
한승문은 지친 목소리로 읊조렸다.
“……마지막 선은 넘지 말자고 이러는 것 아닙니까.”
“…….”
“……물론 저도 그거 못 지키면서 삽니다. 근데 최소한 지키려고 노력은 합니다. 권력을 잡았으면 최소한 사람답게 굴려고 노력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유재경은 분명 뛰어난 사람이다. 그는 위로 올라가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피라미드의 정상을 향해 질주하며 살았다.
그러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볼 줄은 몰랐다.
사실 그의 직업부터가 그랬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숫자를 보는 경제관료였고, 경제관료가 사람 하나하나에 몰입하면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다.
그런 삶의 방식이 결국 그의 숨통을 쥐었다.
사실 모르는 게 아니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고칠 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지킬 가족이 있었으니 조금씩 외면하다 이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유재경은 입도 뻥긋 할 수 없었다. 그는 훌륭한 관료였으나, 훌륭한 지도자는 아니었음을 알았기에.
그런 그에게, 한승문이 최후통첩을 건넸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왜 본인을 그렇게 해코지하느냐고 하셨습니까?”
“…….”
“이유는 간단합니다. 총리님과 정말로 같이 일을 하려면, 총리님을 벼랑 끝까지 밀어 붙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승문은 유재경이 평생토록 도망쳤던 말 한마디를 건넸다.
“총대 매십시오.”
“……!”
이미 판세는 기울어졌다. 한승문은 모든 적들의 공격을 받아냈고, 양판석과 원옥분이 나선다면 이 전쟁은 싸움이라기보다는 학살에 가까울 터.
중요한 건, 이 전쟁은 내전이라는 것이었다.
흐릿한 악은 암덩어리처럼 사회 곳곳을 조금씩 물들였고, 청산은 어디까지나 공익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대수술이다.
국가라는 총체를 조금씩 잠식한 종양을 도려내는 것. 그리고 그 수술의 결과가 손실이 아닌 이익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럴 능력을 가진 사람은 오직 하나였다.
“총리님께 모든 재량을 드리겠습니다.”
누가 장기밀매에 관여했는지. 얼마나 깊게 관여했는지. 생명을 위했는지 이윤을 위했는지. 행여 제거한다면 국정에 지장이 가는지. 지장이 간다면 대안이 있는지.
모든 것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것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판단할 능력이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멈출 수 없을 것이다.
한승문이 그를 그런 입장으로 몰아넣었다.
유재경은 살고 싶으면 달려야 한다. 원옥분을 추격해서 따라잡고. 치밀한 살생부를 준비한 뒤, 반격 당하기 전에 재빨리 숨통을 끊어야 한다.
그렇다면 양판석의 입장 또한 유리해진다.
개혁의 반발과 손실을 유재경이 막아낸다면, 본인은 별다른 상처 없이 시국을 돌파할 수 있다. 게다가 원옥분마저도 견제하게 되는 묘수가 된다.
이에 원옥분은 레이스를 시작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차기 대권을 두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게 된다.
국정에 브레이크를 걸기보다는 검찰을 움직여 실적을 쌓아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
그렇다면 재벌들의 입장은 어찌 되는가? 쓸모 있는 재벌들은 살아남고, 쓸모없는 재벌들은 죽게 된다. 그 때문에 하나로 뭉쳐 정권에 대항하기보다는, 죽은 시체를 나눠먹는 싸움을 벌이게 된다.
GS 그룹은 그 과정에서 이익을 본다.
그들의 리더가 개싸움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군산분리법이 통과되며 GS 아이기스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진다. 산업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업계는 헌터들에게 돌아온다.
하지만 헌터들은 뭉치기 어렵다. 초상관리부의 힘이 강해진다. 헌터 업계의 재개편은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결국 장관이 꿈꾸는 대개편이 가능해진다.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이 세상이었다.
결국은 각자의 욕망을 쫓는 것이다.
그러니 정치는 욕망의 수학이다.
그리고 여기에 두 수학자가 있었다.
“그러니 총리님께서 현명하게 계산을 해주셔야 합니다. 누굴 죽이고, 누굴 살릴지…….”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뭘 어떻게 하긴요?”
식이 완성된 이상, 답은 명확하다.
“살릴 놈 빼고. 싹 물어 죽이세요.”
* * *
며칠 뒤, 사단급 병력이 북한 장전읍을 덮쳤다.
충청방어선 안정화 이후 최대 규모의 군사행동이었다.
장기밀매와 관련한 물증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