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47화 (147/296)

EP 23 - 그 멋진 헌터들의 세상 (4)

잠 못 드는 밤.

병원 최상층의 1인실. 싸늘한 날씨에 히터 소리만 들려오는데,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건 어느새 새벽 3시.

창문 밖은 어두웠으나 도시의 불빛은 찬란했고, 그 불빛을 보고 몰려들 괴수를 막아낼 방공망도 건재했으며, 그 불빛을 이루는 사람들의 마음 또한 아직은 살아 있었다.

“…….”

이 심야에 잠들지 못하고 말똥말똥 눈망울을 깜빡이고 있는 것은, 몸보다 마음이 더 고단한 탓일 터이다.

비서 놈은 나더러 생체리듬을 고치라고 책망하고는 하지만, 내가 매양 잠 못 드는 이유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었다.

그러니 어둑한 밤엔 줄곧 서늘한 창문에 손바닥 올려두고.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잠이 아니라 깊은 상념에 빠지고는 하는 것이었다.

* * *

권력자는 항상 무언가를 어떻게 할지 결정한다.

그러나 무언가를 바꾼다는 건 모두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행동이고, 무언가를 지키는 것과, 무언가를 부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니 정치인은 항상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중요한 건 그를 감내할 수 있느냐.

이제는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붉은 한강에서의 그 어느 날. 요트를 몰던 양판석의 조언 하나가 요즘 따라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리가 감내해야 한다고. 우리가 나아가지 못한다면 나라가 살아남지 못한다고.

“…….”

결국, 나는 미친 듯이 달려 여기에 다다랐다.

옳은 방향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이 나라를 지고 불구덩이에서 도망친 것은 그나마 자랑할 거리다.

하나, 불구덩이에서 도망친 곳이 천당이냐 지옥이냐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황무지에 있었고, 무너진 도시를 다시 세워야 했다.

그리고 그건 온전히 나의 짐이었다.

“…….”

양판석은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물론 미래는 항상 변덕이 심한 법이었지만, 시대가 영웅을 찾았기에 내가 뤼미에르를 유럽의 왕좌에 앉혀놨듯, 대한민국의 여론이 누구에게 흘러가는지를 내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이러한 시점에, 지겹고도 따분한 질문이지만, 나는 내가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나는 차재균처럼 과감하지 못하고, 원옥분처럼 기민하지 못하며, 양판석처럼 치밀하지도 못하다.

그렇다고 뤼미에르처럼 선하냐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그리고 호랑이는 제 말 하면 오는 모양이다.

“…….”

어두운 병실. 새벽 3시에 전화기가 울린다.

“……여보세요?”

-장관.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뤼미에르였다.

* * *

“……이제 슬슬 연말이고 하니 헌터 아카데미를 준비해야겠군요, 뤼미에르도 그때 방한하실 겁니까?”

-으음. 날짜가 언제로 예정됐죠?

“1월 중순 즈음입니다.”

최대한 빨리 잡은 일정이었다. 헌터 아카데미는 1,000명 이상의 각성자를 생성하는 행사였고, 당연히 아카데미가 자주 열릴수록 인류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국익에도 말이다.

“게다가, 각성제 개량도 꽤 진행된지라, 이젠 육체계와 정신계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70% 정도의 확률을 뚫어야 하긴 하지만 거시적 관점에선 큰 도움이 되겠지요.”

-아, 정말입니까?

“그럼요. 커리큘럼도 이미 세분화시켜 놨습니다. 육체계는 나이트, 탱커, 옵저버. 정신계는 염동술, 원소술, 치유술. 등등…….”

아카데미 교육은 이미 관련 연구자들에 의해 정교해지기 시작했다. 국내의 모든 신규 헌터들은 이 1차 교육과정을 의무적으로 교육받고 있으며,

우리는 이들을 3세대 헌터라고 부르고 있다.

3세대 헌터의 특징은 정부의 철저한 정신검사를 거치고, 아카데미에서의 의무교육을 끝마친 헌터들이라는 거였다.

2세대 헌터들보다 수는 아주 적지만, 조금 더 체계적이고 도덕적인 초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각성제의 개량 덕분에 대체적으로 능력이 우수하기도 했고 말이다.

“아무튼,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뤼미에르.”

-한국을 찾아가는 건 항상 제게 기대되는 일이었지요.

참 고마운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순식간에 목소리를 바꾸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장관.

뤼미에르가 묻는다.

-모처럼 안부전화까지 걸어줬는데 일 이야기만 하는 건 무슨 심보입니까?

“저녁밥 뭐 드셨습니까?”

-어, 음…… 샌드위치?

“왜 확답이 아닙니까?”

-비행기에서 대충 때웠거든요.

“밥 좀 잘 챙겨 드십쇼.”

-병석에 누운 사람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웃음기 섞인 목소리의 비아냥이었다. 그녀는 그 목소리 그대로 말을 이었다.

-2월 초의 아카데미라. 아무래도 그때보다는 일찍 찾아뵐 수 있을 것 같군요.

“한국에 오실 일이 있습니까?”

-아마 일본에 가게 될 것 같네요. 그쪽 상황이 영 심상치가 않아서요. 야쿠자랑 정부군이랑, 네. 아마 기사회에서 구호활동을 벌이게 될 것 같습니다.

“설진운 헌터는 무리없이 출국시켜 드리지요. 상황 봐서 저도 합류하겠습니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아무튼 고맙습니다. 장관. 곧 UN 총회 한다는 소리도 있으니 조만간 뵙게 될 것 같네요.

“해외 출장은 피곤한데…….”

우리는 실없는 소리와 중요한 이야기를 반쯤 섞어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새벽 4시에 가까웠고, 뤼미에르는 내게 작별인사를 남겼다.

-이런, 어느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너무 오랫동안 잡아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지금 딱 여유로운 시간대라.”

-다행입니다. 시차 알아보고 전화 드린 거라서. 지금 한국이 오후 3시였던가요?

새벽 3시였다.

나는 그녀의 실수를 정정하려 입을 열었지만, 그녀의 말이 먼저 이어졌다.

-혹시 장관께서 괜찮으시다면 지금 시간대에 종종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 * *

안녕하세요. 정치 평론가 산나비입니다.

불과 하루 만에 다시 찾아뵙게 될줄은 몰랐지만, 나도 세상이 하루 만에 들썩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걸 보통 요지경이라고 하던가요.

[CNN 뉴스 캡쳐본. 앵커 두 명 뒤에 해맑게 웃는 감지윤의 사진이 띄워져 있다. 공사장 안전모를 쓰고 아저씨들과 찍은 사진이다.]

나는 이번 사태가 한승문 장관의 헌터랭크제 개편에 적신호로 작용할 줄 알았습니다. 내심 한승문 장관의 무리한 민간개입에 제동을 걸어줄 것을 기대하기도 했고요.

누가 폭탄 같은 측정기로 능력을 재고 싶어하겠습니까? 그것도 반쯤 의무적으로요. 원래 강제보다 반강제가 더 미운 법입니다.

그런데 누구는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대신 쥐를 잡는 모양입니다. 감지윤 양이 순식간에 전세계적 유명인사가 되며 정권 지지율도 치솟았지요.

나는 우리나라의 소녀가 세계 최강의 헌터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과, 이 정권의 지지율 상승 사이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국익에는 도움이 되는 일이니 굳이 비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연적 사건이나 개인의 역량은 항상 통제 불가능한 변인이고, 진정한 국력은 정밀하게 정비된 시스템과 행정체계에서 오는 법입니다.

[국무회의를 진행 중인 유재경 국무총리. 얇은 테의 안경을 쓴 모습이 지적으로 보인다. 사진 구석에 한승문 장관이 반쯤 걸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태 초 유재경 총리의 행적을 짚어볼까요. 그때는 아마 기재부 예산실장에 불과했을 겁니다.

대신 세종시 정부청사를 이끌고 있었지요. 차재균 씨와 권력을 양분하고 있었으니 지금보다 권한이 더 강했을 겁니다.

제 블로그를 보시던 분들은 익히 아시겠지만, 나는 아주 옛날부터 대한민국의 기술관료들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물론 인성적 측면은 제하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질 더럽고 빳빳한 경제관료들에게 추대받은 유재경 총리의 행정력은 원옥분과 양판석이 인정한 바가 있지요. 그가 아직까지 권력의 중심부에서 목숨줄을 붙이고 있는 게 그 증거입니다.

나는 1년간의 무역단절과 GS발 기업전쟁을 넘어, 모라토리엄 선언과 달러인덱스 붕괴를 딛고,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는 한국 경제를 살펴보고 있으면 이따금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비록 수많은 국민들이 치킨값이 비싸다며 정부를 원망하지만, 조금만 배운 사람들이라면 화폐경제가 유지되고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다들 아실 것이라고…….

* * *

아침 댓바람부터 세상이 뒤집혔다.

[……해외 초상사회가 뜻밖의 한류로 들썩이고 있습니다. 소문의 주인공은 감지윤 헌터인데요. 국내에서는 최초의 9급 헌터로 알려진 바 있습니다.]

[……감지윤 양은 대표적인 1세대 염동술사죠. 내년에 중학교에 들어가는 나이지만, 현대 초상사회의 모든 굵직굵직한 전투에 참여한 베테랑이라고도-]

[……네! 국내 건설업계 영입희망 1순위! 한승문 장관이 현장에서 가장 선호하는 헌터! 한국을 지키는 슈퍼 초등학생! 저희 섹션 TV가 직접-]

[……감지윤 양이 세계 최강의 헌터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됨에 따라, 외신 일각에서는 이번 화재가 한국의 자작극일 수 있다는 음모론이-]

정확히는 내가 잠든 사이에 외국 여론이 발칵 뒤집힌 모양이다.

사람은 항상 자신을 남과 견주는 생물이었고, 이는 헌터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헌터들 간의 비공식적 랭킹이 방송과 여론을 통해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던 상황.

손만 대고도 측정기를 부숴버린 초능력자의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심지어 그게 어리디어린 소녀였으니 더더욱.

그래서 나온 말이 이거다.

“세계 최강의 헌터라…….”

그리고 해외에서 찾아온 한류는 대한민국을 뒤집어놨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병실 보호자석에서 채널을 뒤적이던 양일호가 중얼거렸다.

“누구는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게 아니라 쥐를 잡는다더니. 저는 헌터랭크제 도입 반대시위라도 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상황이 괜찮게 돌아가네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표현이다?”

산나비 칼럼에 나온 표현이었다. 양일호가 가볍게 눈썹을 들썩인다.

“형도 산나비 칼럼 챙겨보세요? 요즘 핫하던데.”

“나야 옛날부터 봤지. 인터넷 보수논객으로 예전부터 나름 유명했잖냐.”

병실 구석에서 다리를 꼬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이호정이 틱틱거렸다.

“블로그에 주절거린 뇌피셜이 전문성은 있어요? 맨날 테크노크라트식 관료주의 운운하는 거 보니까 5공 시절 할아버지 냄새 나던데.”

“기술관료한테 너무 호의적인 논조가 있긴 한데. 그래도 산나비 그 양반이 탄핵정국 때부터 굵직굵직한 사건들 전부 때려 맞췄어. 오죽하면 이 바닥 현직이라는 소리가 있을까.”

나는 매일 아침 인터넷 신문과 정치 커뮤니티 사이트를 전부 흩어보는 습관이 있었고, 심지어는 요즘도 나무위키에서 내 항목을 찾아보고는 했다.

그러니 나름 인터넷 이슈에 대해서는 빠삭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산나비 그 양반 생각 없이 주절대는 사람은 아니더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이 바닥 종사자라고 생각 중이다. 아니면 고위층에 소스가 있던지.”

이호정도 납득했는지 새침하게 고개를 주억거렸고, 양일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박카스 하나를 까서 우리에게 돌렸다.

“아이고오. 다들 성공은 하셨는데 어째 분위기는 옛날이랑 똑같을까요?”

“분위기가 왜?”

“우리는 나중에도 한정식 집은 안 가고, 육개장 사발면이나 돌려 먹을 것 같아서요.”

“어어? 이거 봐라. 지금 사발면 무시해?”

양일호에게 말했으나, 이호정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오빠는 나트륨 덩어리만 좋아하더라.”

“호정이 너도 나트륨한테 너무 그러는 거 아니야. 애가 섭섭하다고 그러더라.”

“오빠가 환자긴 환자네. 진통제 너무 많이 맞은 거 아니에요?”

“그럼 내가 환자지. 계란 흰자냐?”

내 말 한마디에 국민당 원내대표와 국회 초상관리위원회 상임위원장이 기겁하며 대경실색했다. 두 놈 다 나보고 제발 그만하라고 애원까지 했다.

이게 바로 권력인가.

역시 말에는 힘이 있다.

아무튼, 장난은 그만하고, 오랜만에 모인 김에 녀석들 안부나 묻기로 했다.

호정이는 국민당 원내대표가 됐고, 일호는 국회 초상관리위원회의 상임위원장이다. 국회의사당 주차장에서 컵라면 끓여먹던 놈들인데. 아주 감개가 무량하다.

“일호는 뭐, 요즘 국회 일은 편하고?”

“하루종일 법안 깎고 있는데. 죽을 맛이네요.”

“그래도 국방당에서 발목 잡진 않잖아?”

“법 통과시키는 건 쉬운데, 만드는 게 고역이에요. 법을 고치는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만들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웬 장관 하나가 법안 하나 의결시키면 새로운 거 또 주고, 그거 끝내면 바로 또 주고. 아주- 사람을 법안 찍어내는 기계인 줄-”

아무래도 나한테 쌓인 게 많은 모양이다. 솔직히 조금 과도하게 부려먹은 건 사실었으니, 머쓱하게 미소 지으며 답해줬다.

“꼬우면 권력을 잡는 건 어떨까……?"

“와- 이 형 미치겠네. 진짜.”

“아니, 정 힘들면 대선에 출마를 해. 나보다 높아지면 될 거 아니야.”

“아, 저리 가요. 형. 미워.”

리모콘으로 일호 녀석 옆구리를 쿡 쿡 찌르며 괴롭히고 있으니, 이호정이 내 남자 괴롭히지 말라는 모양인지 툭 끼어들었다.

“근데 일호 쟤는 상임위원장할 때보다 간사할 때가 더 잘했던 것 같아요. 발언시간 넘어가면 호통을 좀 쳐야 하는데. 혼자 어물쩍거린다니까?”

“야, 그래도 할아버지 할머니들한테 어떻게 소리를 쳐…….”

“국회에서 발언시간 넘기는 거 하루이틀이야? 마이크 꺼졌으면 입 좀 다물라 그래. 그게 위원장이 할 일이지.”

일호도 보면 클럽 죽돌이처럼 날티나게 잘생겨가지고, 그런 놈이 제대로 잡혀 사는 거 보고 있으면 묘한 재미가 있다.

채원이한테 가끔 슬쩍 찔러보면 금슬은 좋은 모양인지라, 나는 별걱정 없이 이호정에게도 안부를 물었다.

“야, 호정아. 신수광이는 요새 말썽 안 피우냐?”

“지랄 났죠 뭐. 비대위원장 임기 끝나기 전에 기반 다지려고 눈 돌아갔어요 지금.”

“저번에 난민캠프에서 삭발식 하더만.”

“하는 거 보면 가관이에요. 이젠 뭔 짓을 할까 무섭다니까?”

신수광이는 애초부터 수도권 난민캠프 지도자였다. 지금도 난민들의 주된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고 말이다.

그런 신수광이 극단적으로 나간다는 건, 수도권 난민들의 상황이 그만큼 위태롭다는 뜻이겠지. 그들이 극단적이고 공격적인 지도자를 원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짧은 대화 속에서, 얻어낼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머리에 담아내고서는, 나는 히죽히죽 헤실대며 녀석들을 괜스레 놀리기 시작했다.

“야. 그런데 니들 결혼은 언제 하냐?”

푸웁-!

보호자석에 앉아 있던 양일호가 마시던 박카스를 뿜어냈다.

내 얼굴에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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