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40화 (140/296)

EP 22 - Make world great again (6)

“개문 이후 유럽의 상황은 화약고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 가능합니다. 수많은 봉건 영주들이 중세시대의 참상을 재현하기 직전이었죠.”

“…….”

“여기에는 명확한 해법이 있었습니다. 바로 헌터들이 더 이상 영주 노릇을 못 하게 하는 겁니다.”

TV에서는 뤼미에르가,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프랑스 대통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대통령이 정권의 이익과, 유럽의 내분을 방지하기 위해, 헌터들과 시민들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농단을 저질렀다고 말이다.

그러나.

내 앞에 있는 미국 대통령은,

“내가 유럽에 개입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더 이상 시민들이 헌터를 지지하지 못하게 했죠.”

이 모든 게 자신의 소행이라고 시인했다.

* * *

유럽을 파국으로 몰아넣었던 반-헌터 사상과, 그를 둘러싼 온갖 정치적 공작들. 리즈레 의원의 죽음, 과격단체의 봉기, 헌터에 대한 시민들의 반동까지.

이 모든 게 미국의 내정간섭이었다는 것을 듣고 나서, 내 입에서 처음으로 튀어나온 말은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뒷감당 어떻게 하시려고 이런 짓을 저지르셨습니까?”

“뒷감당은 이미 끝났다고 보는데요.”

“……하.”

그래. 맞다.

지금 TV에서 프랑스 대통령이 모든 걸 독박 쓰고 불구덩이로 밀려나는 마당이었다. 게다가 그가 저질렀던 모든 악행이 폭로되고 있다.

도시 두 개를 불태우고, 아르마다의 클랜장을 청부살인하고, IS와 내통하지를 않았나, 한국 각성제 빼돌리려고 사람까지 보냈다.

이 와중에 이게 다 미국 소행이라고 지껄여 봐야 음모론 이상의 취급은 못 받는다. 너무나도 큰 거물이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프랑스의 대통령이라기보다는 EU의 대표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멍한 정신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니, 미국의 대통령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프랑스 대통령을 평가했다.

여전히 TV 드라마라도 보는 것 같은 태도였다.

“흐음. 조금 유치한 생각일 수 있지만, 나는 시대가 영웅을 부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뵈르트 대통령은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리더였지요.”

“……남은 두 사람은 누굽니까?”

“러시아. 동부 군관구의 빅토르 리 상장. 그리고 아사비야의 지도자 아이샤 하디드.”

빅토르 리는 러시아를 양분하고 있는 군벌지도자인 만큼 대충 들어본 적은 있고, 아이샤 하디드는 처음 들어보지만 이 양반이 거론한 인물인 만큼 보통 사람은 아닐 터였다.

중요한 건,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람을 자기 총알받이로 써먹은, 지금 이 웃기지도 않은 상황 그 자체였다.

만약 프랑스 대통령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을 대체 왜 불구덩이로 처넣는가.

내 의문을 예상했는지, 그는 자연스레 부연했다.

“나는 그에게 디바이드 앤 룰을 제안했지만, 그는 유럽의 통일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성녀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죠.”

“…….”

“그러나 나는 유럽의 단결이 미국의 이익과 합치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소 강경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사건의 전말이었다. 피곤에 찌들어서 그런 건지, 술이 덜 깨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이 살짝 얼얼했다.

그가 내게 말했다.

“하나, 아시다시피, 동양에서 날아온 정치인 하나가 유럽을 순식간에 통합시키고, 나를 사상 최악의 위기로 몰아넣었지요.”

“…….”

“내가 뵈르트 대통령에게 빅 딜을 제안한 건,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문득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이런. 이러고 있으니 내가 빌런같지 않습니까? 그것도 아주 친절하게 자기 계획 설명해 주는 전통적인 악당인데…… 아무튼.”

그는 콜라로 목을 축이고서, 내게 슬쩍 콜라를 권했으나, 나는 그에 무응답했고, 그는 샐쭉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뵈르트 대통령은 나를 위해 다소 험한 길을 감내했습니다. 내가 유럽의 통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프랑스에 대한 무제한적 지원을 승인하는 것을 대가로 말입니다.”

“…….”

“확실히, 유럽에서는 내가 패배한 것 같군요. 인정합니다. 나는 안일했고, 오히려 내 노력이 상당히 부정적으로 작용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 그러면…….”

그가 다시 리모콘을 들자, 나는 이제 섬찟한 느낌까지 들었다.

대체 또 뭘 보여주려고 이런단 말인가.

이건 그가 나에게 보여주는 일종의 프레젠테이션이자, 업무 발표회였다. 정치는 실력과 실적으로 하는 거였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다음 파트로 넘어갔다.

“이제 아랍으로 넘어가 보죠.”

그는 리모콘을 조작해 외부입력으로 들어갔고,

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해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IS가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통일했고, 서방세계에 대한 대전쟁을 선포하려 했으나, 내가 그걸 막았습니다.”

* * *

“과격 무장군벌 세력이 혼란스러운 사회를 점령하는 건 예상할만한 일이었으나, 서방세계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하는 건 아주 무모하고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

“아마 본격적인 마석 경제가 시작되면 몰락하게 될 기름쟁이들과의 이해가 일치했기에 계획된 일이라고 봅니다.”

극단주의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게 점령된 아랍은, 석유 재벌들의 도움을 받아 서방세력에 대한 침공을 계획했다.

그래서 미국은 아랍에 개입했다.

“나는 온건주의 이슬람 세력을 지원했고, 아이샤 하디드가 이끄는 아사비야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대규모 내전이 발발할 겁니다.”

“…….”

“IS는 다시 몰락할 것이고, 아랍은 아랍인들에 의해 정의를 되찾겠지요. 많은 피가 흐르겠지만, 그 빌어먹을 지하드보다는 건설적이고 소규모일 거라고 봅니다.”

미국은 중국, 유럽, 아랍에 개입했으며, 미국의 개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

미국의 대통령은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수많은 세계의 비화祕話들을 내게 터놓았다.

“사실, 세상이 멸망할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굵직굵직한 것만 꼽아보라면 대충 3번이군요. 첫째는 통합된 아랍이 서방세계에 성전을 선포할 뻔한 것이고…….”

“…….”

“둘째는 동서로 분단된 러시아에서, 핵전쟁이 발발할 뻔했던 겁니다.”

푸틴은 괴수에게서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 모스크바 인근을 제외한 모든 국토를 포기했고, 다수를 살리기 위해 소수를 버린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 때문에 탄생한 것이, 동부군관구의 빅토르 리 상장이 이끄는 동부군벌세력이었고, 그들은 푸틴에게 버림받은 러시아인들을 보호하며 세력을 키웠으며.

“푸틴을 암살했죠.”

나는 급사急死했다던 러시아 대통령의 진정한 사망원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직후 핵전쟁이 발발할 뻔했다는 것도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미국이 개입했다.

미국은 모스크바의 수권세력을 갈아치우고, 동부군벌 세력에게 무력적 경고를 서슴지 않으며 양측 사이를 중재했다.

온갖 이권과 권력이 아주 세밀하게 조정되었고, 그 결과 러시아는 동서로 나뉘어 냉전 상태에 돌입했다.

미국은 평화를 지킨 동시에, 자신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 하나를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나는 그의 도덕성은 차처하더라도, 그의 유능함에 대해서는 묵묵히 인정하기로 결심했다.

“…….”

그리고 그는 내게 말했다.

이 세상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말이다.

어떤 사건은 믿기 힘든 것이었고, 어떤 사건은 믿기 싫은 일이었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과 초인세력의 결합. 무력 집단에게 점거된 국가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참상. 그리고 미국의 개입으로 인한 지도부의 몰살.

국제기업의 불법 생체실험. 실험체의 폭주로 인한 도시 하나의 절멸. 폭주 끝에 이성을 되찾은 실험체에게 내려진 사살 명령. 그러나 여전히 살아 뒷세계에서 활동하는 실험체.

감염형 개체로 인한 좀비 사태의 확산. 치료할 수 있는 좀비를 죽인 이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 그리고 정치 논리의 개입으로 혼란에 빠진 사회.

야쿠쟈와 정부군의 내전. 보호받지 못하는 국민의 반동.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삼파전. 한국으로의 대규모 망명 신청 계획.

게이트를 열어야 살아남는 기업, 게이트를 닫아야 살아남는 사람. 그러나, 게이트를 닫으면 벌어지는 혼란.

“…….”

게이트가 열린 세상,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

이 모든 일들에 대해 전해들었을 무렵에는, 어느새 다섯 시간이 흘러버린 이후였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자락에서, 나는 그에게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Mr, President?”

“Yes?”

“Why…… are you telling me this.”

그는 문득 멈칫하더니,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세계에는 경찰이 필요합니다.”

“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쏴죽입니까?”

“경찰도 남들보다 먼저 챙겨야 할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당당했다.

정확히는, 지금까지는 당당했었다.

“나는 때때로 국가의 이익을 위해 비인간적 선택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한 장관도 공감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

“우리뿐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가가 대체로 그럴 겁니다.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선 더더욱 말입니다.”

그는 줄곧 자신 있고 당당한 미소를 보였으나, 지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무표정했고, 그는 어느새 미국의 대통령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노인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내 나라의 가장으로서 가족을 우선하지만, 만약 나의 국가의 이득과 공익이 합치한다면, 손이 닿는 선에서 다른 사람을 도울 의사가 충분히 있습니다.”

“…….”

“다만, 내 나라의 시민들은 너무도 많고, 우리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충분히 이기적이고 야망에 차 있어야 합니다.”

그가 결론 내렸다.

“내 책임은 내가 사과하는 것을 용납지 못할 것이고, 나는 이 점에 대해 충분히 유감스럽다는 말밖에 남기지 못하겠으나, 내 결정을 돌이키지는 않을 겁니다.”

“…….”

“그럼에도, 나는 가급적이면 국익과 공익을 합치시키려 애쓰는 축에 속하고, 이번 만남은 한 장관에게 그 점을 주지시키기 위함이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가 나를 평가했다.

“세계에서 손꼽는 세력을 뽑으라면, 미국, 중국, 유럽, 러시아 즈음 될 겁니다. 게다가 모스크바 러시아는 유럽과 아주 친밀해졌죠. 한 장관 당신이 이어주지 않았습니까?”

“…….”

“유럽의 지도자에게 영향을 끼치고, 중국의 지도자를 견제할 수 있고, 아직까지 세계에서 유일한 각성제를 통제할 수 있는 나라의, 잠재적 국가원수라면. 내 입장에선 아주 친해지고 싶을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 사람이 어떤 측면에서 내 능력 이상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면요?”

그가 양복을 한 차례 털고, 다시금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 나는 개인적 호오를 떠나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나는 무엇이라 표현하기 애매한 표정으로, 그가 내 앞에 내민 두껍고 늙은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내게 말했다.

“Glad to meet you. Secretary Han.”

나는 그의 손을 붙잡으며 문득 물었다.

돌이켜보면, 살짝 멍청한 질문인 것 같기도 하다.

“……Why?”

그가 답했다.

아주, 익숙한 문구였다.

* * *

“……하아.”

갑작스러운 회담이 끝나고.

대통령 전용기를 걸어 나올 즈음에는 양복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양복을 벗어 비서에게 건넸다.

그리고 다섯 시간 동안 비행기 앞에서 나를 기다려준 내 비서에게 씨익 웃으며 물었다.

“……기다리는 동안 안 심심했냐?”

“……”

피채원이 살풋 웃는다.

“……글쎄요?”

아무래도, 집에 가서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EP 22

Make world great again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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