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2 - Make world great again (4)
시대는 영웅을 부른다.
[……유럽의 영웅들이! 유럽의 영웅들이! 에투왈의 개선문을 지나고 있습니다! 모든 파리의 시민들이 영웅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영웅은 희망을 건넨다.
[……Chevaliers Sans Frontières. 국경없는 기사회가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는 비로소 국가적,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인류 구호에 대한 사명을 받들고-]
희망은 힘이 된다.
[……헌터들에 대한 추모행렬이 콩코드 광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거리를 행진하는 수많은 촛불들은, 어두운 파리를 다시금 빛의 도시로-]
그리고,
그 힘을 다루는 건 정치가였다.
[……불과 30분 전, 국경없는 기사회의 뤼미에르 총본부장이 대통령과 긴밀한 회담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 * *
어두운 밤.
에펠탑은 찬란한 광휘를 두른 채 도시를 비추었고, 수많은 촛불은 거리를 따라 서서히 흘러갔다.
빛의 도시 La Ville Lumière.
파리는 그 이명에 걸맞는 위용을 자랑했다.
적어도 오늘 밤만은 말이다.
“에펠탑에 불이 켜진 게, 몇 달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
“빛을 보고 달려드는 괴수보다는, 사실 전기세가 더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하군요. 조금 우스운 소리이기는 합니다만. 하하…….”
가장 화려한 엘리제 궁전의, 가장 화려한 응접실의 창가에서, 프랑스의 대통령은 가장 화려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가 줄곧 뒷짐을 지고 있었던 건, 어쩌면 이 풍경이 자신의 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중년인은 창백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빛의 도시의 주역을 돌아보았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뤼미에르.”
그러나 뤼미에르는 섣불리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이곳은 사석이었고, 그녀의 사적인 감정은 대통령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원망이라는 단어 하나로 치부하기에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
“…….”
여러 감정이 뒤섞인 침묵을 깬 건, 차분히 미소 짓던 대통령이었다.
“프랑스란 나라는, 사실 1년 전에 이미 망했습니다.”
이는,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처절한 자기고백이었다.
“국가의 3요소는 영토, 인구, 주권입니다. 그리고 그걸 지켜내는 걸 보통 국방이라고 하지요. 그러니 국방이 실패한 나라는 나라가 아닌 겁니다.”
“……각하. 그런 말씀까지는-”
“이런 상황에서까지 나를 감싸주는 모습이 참 고맙고 미안합니다. 뤼미에르. 하지만,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합니다.”
그가 뤼미에르에게 물었다.
“뤼미에르. 가장 가까이서 프랑스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솔직하게 답해주십시오. 이게 나라였습니까?”
“…….”
“이런 건 보통 나라라고 안 합니다. 부족 연맹체면 모를까요. 하하…….”
힘없이 미소 짓던 그가 단정 지었다.
사실 반쯤 고해성사에 가까웠다.
“프랑스는 망한 지 오래고, 나는 지금까지 시체가 안 썩게 방부제를 뿌렸던 겁니다.”
“…….”
“구더기가 끓어오르는 순간부터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대통령은 그가 행해왔던 차악의 역사에 대해 풀어놓기 시작했다.
“개문 이후 미국은 퇴각했고, 프랑스는 순식간에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했습니다. 쉘터와 PMC들이 각자도생을 시작하니 얼마 안 남았던 군사력도 뿔뿔이 흡수되어 버렸지요.”
“…….”
“이렇게 나라가 최악으로 치닫는데도 정부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헌터들이 도시를 지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권이 분산됐기 때문에 주권에 따른 책임도 분산됐던 겁니다.”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앉기에는 너무 큰 소파였다. 그도 그걸 모르지 않았는지, 그의 목소리는 처참하게 갈라져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현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고, 고맙게도 총리 또한 이에 동의해 줬습니다. 나와 평생을 싸웠던 노인네가 말이죠.”
“…….”
“그렇게 몇 가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가 잠시 망설였다.
어쩌면 한참을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망설임 끝에는, 충격적인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초인과 일반인 사이의 갈등을 조장한 게, 바로 납니다.”
* * *
확실히, 한때 유럽 전역을 광기로 몰아넣은 반-헌터주의 사상.
‘리즈레즘’의 생성과 전파는 굉장히 작위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다.
헌터에게 가족을 잃은 정치인, 리즈레 의원이 발의한 ‘헌터 관리법’.
이어지는 언론과 여론의 광적인 호응.
결국 신원미상의 헌터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 리즈레 의원.
그리고 그 영정사진을 들고 일어난 수많은 광신자들.
거기에, 헌터들의 몸속에 독소를 박아 넣겠다는 정신 나간 비밀계획의 추진은, 그 뤼미에르마저도 한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게 할 정도였다.
물론 그 또한 유럽을 구하겠다는 마음의 발로였지만, 유럽의 성녀가 유럽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는 건, 당시의 충격이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 지금 그녀가 내뱉은 질문의 무게 또한,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걸 전부 각하께서 추진하셨다는 겁니까?”
“내가 모든 걸 기획했고, 또 진행시켰습니다.”
대통령의 대답은 깔끔했다.
반면, 이어지는 뤼미에르의 목소리는 아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셨던 겁니까? 아니, 애초에 그걸 이제 와서 말씀하시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
“말씀해 주십시오. 각하.”
대통령은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나갔다.
“……나는 현 상황의 유지를 바랐고, 내가 가장 우려하던 건 헌터들이 민중의 지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파리 정부가 헌터들의 위에 설 수 있었던 건, 민주적 정당성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즉, 시민들이 정부보다 헌터들을 지지한다면, 정부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헌터들과 민중 사이를 이간질했습니다.”
반-헌터주의 사상의 전파로, 헌터들은 쉘터 내부의 반동분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고, 결국 민의民意는 헌터들에게서 떠나갔다.
허나, 뤼미에르에게 필요한 건, 이 따위 대답이 아니었다.
“……정말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
“몰락한 나라와, 영락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럽의 민중들을 그렇게 분열시키셨단 말씀이십니까……?”
대통령이 답했다.
“……프랑스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제발-!”
뤼미에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반쯤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기도 했다.
“프랑스라는 나라에 그럴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
그녀의 후광이 거칠게 요동쳤다. 뿐만 아니라 이 방 안의 모든 불빛이 그녀의 의지에 휩쓸려 일렁거렸다.
빛과 그림자가 제 자리를 잃은 모습은, 기괴하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허나,
대통령은 기세에 밀리지 않고 초연하게 대답했다.
매마른 눈빛이 뤼미에르를 올려다보았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있어야…….”
“…….”
“덩케르크라는 나라와 베르됭이라는 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지 않을 테니까요.”
거칠게 요동치던 뤼미에르의 후광이 우뚝 멈췄다. 대통령이 설명을 이어갔다.
“헌터들이 시민의 지지를 얻는 순간, 도시국가 하나가 탄생하는 겁니다.”
“…….”
“그리고,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야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는, 이런 시대에, 수백 개의 도시국가가 탄생한다면…….”
그가 물었다.
“몇 명이나 죽어나갈지 예상이나 되십니까?”
그의 차악은 최악을 피한 선이었다. 그러나 모든 선이라는 게 그렇듯, 선 바깥에 있는 이들을 보듬지는 못했다.
그리고 뤼미에르의 평생은, 선 바깥으로 밀려난 이들을 위한 것이었음에, 이런 차악은 결코 용납 가능한 선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게 최선이었단 말입니까?”
“……가장 합리적인 차선책이었습니다.”
“그러면 더 노력했어야지요!”
뤼미에르의 핏발 선 눈동자가 이 나라의 대통령을 향했다.
“사람이라는 건 포기하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는 겁니다!”
“나도 충분히 노력했습니다.”
“노력하다 안 되면 저보고 도와달라고 하셨어야지요! 대체 왜 헌터들 몸에 칩을 박겠다는 개 같은 짓거리를-”
“그걸 당신에게 알려준 게 정보총국의 테레지아 요원이었던가요?”
“……예?”
“헌터들 몸에 칩을 박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나고, 그걸 당신에게 알려준 것도 나고, 당신이 그걸 무기로 나를 탄핵시키고 새로운 프랑스의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 것도 나라는 겁니다.”
대통령이 쓰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세상 일이 대체로 그렇듯, 예상대로 굴러가지는 않더군요. 어쩌면 제가 무능해서 예측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
“참…… 별별 짓을 다 했는데 말입니다. 제대로 성공했던 게 거의 없군요.”
그는 책장에서 파일 하나를 꺼내, 뤼미에르에게 내밀었다.
“PMC 아르마다가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했을 때, 나는 IS에게 당시 클랜장에 대한 암살을 청부했습니다.”
“…….”
“결국 암살은 성공했지만, 누가 알았겠습니까? 헌터도 아니었던 클랜장의 딸이 산하 세력의 반란을 모두 정리할 줄 말입니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대통령의 파일은 아주 두꺼웠고, 종이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수많은 비밀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뤼미에르조차 모르던, 아주 비밀스런 일들이었다.
“세인들은 모르지만 프랑스 남부에 감염폭발이 발생했을 때도 있었지요. 쉘터 두 개를 불태우고, 관련자들이 전부 사망한 다음에야 일이 마무리됐습니다.”
“…….”
“아, 한국 각성제의 제조공정을 파악하기 위해 첩보 활동을 벌이다가, 그쪽 정보총국에게 21명에 달하는 관계자가 암살당한 사건도 있었지요.”
그는 한참동안 자신의 차선책을 설명했다.
그것들은 분명 최선은 아니었고, 선과는 거리가 먼 짓들이었지만, 적어도 최악의 결과는 아니었다.
대통령의 부드럽게 웃으며 소회를 밝혔다.
“파리에서 132명을 쏴죽인 테러범들에게 살인을 청부하고, 도와달라고 부르짖던 국민들에게 백린탄을 끼얹는 짓거리가, 나름 합리적인 차선책이 되는 세상이라는 게. 참. 그렇지 않습니까?”
“…….”
“그러고 보면 나는 항상 조금씩 뭘 버렸던 것 같습니다. 인간성이나, 도덕성, 혹은 칼레에서 투쟁하던 애국자들. 그래놓고 하는 짓이라곤 어정쩡한 차선책뿐이었지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나아갔다.
대통령의 발걸음에는 힘이 없었으나,
도시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시는 빛나고 있었다.
“그래요. 나는 항상 이런 모습을 원했습니다. 빛나는 도시와 희망에 찬 시민들. 하나 된 유럽. 정작 하는 짓은 정반대였지만 말입니다.”
“…….”
“……그래도 가장 마지막에만큼은, 내 삶을 불태워 이 도시를 빛낼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찬란한 도시의 야경을 등지고 선 늙은 정치인은, 젊고 위대한 정치가에게 자신의 인생을 건넸다.
담아내는 데 파일 한 장이면 충분했다.
“받으십시오.”
“……이걸, 왜, 제게.”
프랑스의 대통령은, 새로운 유럽의 지도자에게 말했다.
“뤼미에르.”
이 빛의 도시에,
이 어두운 세상에.
“……이 파일을 공개하십시오.”
빛을 되찾아달라고 말이다.
* * *
그 시각, 한승문은 미국 대통령의 연락을 전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