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2 - Make world great again (2)
‘……으음. 그러니까. 장관님?’
‘예, 감기자님.’
‘전 유럽의 헌터들을 하나로 모아, 유럽에 있는 괴수들을 막아내고, 시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EU의 주도권을 가져간다. 이런 계획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국경없는 기사회가 EU를 먹을 겁니다.’
‘아니, 아니, 잠깐만요. 그 국경없는 기사회인지 기사단인지 뭔지는 그렇다 치고. 다른 나라 헌터들이 여기에 협력을 하겠습니까?’
‘호루스 시스템의 예측번복이 공표된 이후, 미국이 유럽을 맥이려 했다는 음모론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는 마당입니다. 이런 상황에 알 만한 사람들은 알 거 다 알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래도-’
‘그리고 또 이런 상황에서 말씀드리기는 조금 뭣한 얘기지만, 이 돌아가는 상황 자체가 살짝 재밌어요.’
‘아이고, 돌겠네…….’
‘아니, 생각해 보십쇼. 뭔 재난영화나 좀비영화 같은 데 보면, 높으신 분들이 정치한답시고 꼭 지랄에 지랄을 하지 않습니까.’
‘지금이 딱 그 짝입죠. 예. 예.’
‘우리 그냥 간단하게 생각합시다. 자, 괴수가 나온 상황에서 뭔가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
‘…….’
‘괴수를 다 때려잡으면 이거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거든요?’
* * *
“……그래서 헌터들 모으겠다고 얼마나 품을 팔았는지 모릅니다.”
“그렇군요. 역시 미국이…….”
뤼미에르는 간이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나는 침대맡에 앉아 등산용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얇은 손목에서 이어지는 링거 줄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뤼미에르가 힘없이 웃으며 자조했다.
“……사실. 이 링거 줄을 달아준 분이 제 은사님이십니다.”
“아, 그러고 보니 국경없는 의사회에서도 파견의 수십 명을 보내줬었지요. 아는 분이 계셨습니까?”
“닥터 최라고. 한국인인데. 혹시 들어보셨을지도 모르겠군요…….”
힘없이 읊조리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내저었다.
“……꽤나 감동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정치적인 배경이 숨어 있었을 줄이야.”
“아뇨, 아뇨.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황급히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제가 뤼미에르의 이름을 팔아 정치를 한 겁니다.”
실제로, 다들 뤼미에르에 대한 구조에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니라,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계기를 잡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늘길이 막혀서 구조대가 향하지 못한다거나, 이런 비상시국에 각국 정부에서 헌터들에 대한 출국을 금지시켰거나 하는. 그런 이유 말이다.
“저는 그냥 이런 복잡하게 꼬인 상황에, 살짝 기름칠을 한 것뿐입니다.”
“…….”
“결국 이 사람들을 끌어당긴 건 당신입니다. 뤼미에르.”
그녀는 오묘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
“…….”
침묵이 이어졌고, 혹시 내가 말실수했나 싶을 무렵에야, 그녀가 가볍게 웃으며 내 옆구리를 콕 찔러왔다.
“방금 그거, 은근히 자기자랑하신 거 아닙니까? 내가 이렇게 유능한 사람이다- 뭐 이런.”
“……들켰나요?”
그러면 뭐 어떤가. 나는 슬며시 웃었다.
“원래 자기자랑은 정치인의 직업병입니다.”
“장관. 그거 아십니까? 장관은 너무 바른말만 해서 가끔 밉상입니다.”
“어째 한국어 실력이 나날이 일취월장하십니다.”
“열심히 배웠다니까요.”
“……하하.”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본론을 꺼내들었다.
“으음. 미국이 지금 EU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들고 있다는 건 잘 아실 겁니다.”
“확실히, 약속했던 공습이 오지 않은 이상, 저 말고 다른 헌터들도 슬슬 감을 잡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는 애초에 이게 가능했던 이유가 프랑스로 대표되는 정부측 세력이 EU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이냐 하면.
일은 현장직이 하지만 지원은 사무직이 한다. 그리고 실권을 잡은 사무직이 사내정치에 놀아난다면 현장은 개판이 나는 거다.
그리고 지금 개판이 났다.
“……그러면 실권을 사무직이 잡으면 안되는 게 아니냐- 라는 생각입니다.”
“……헌터들이 EU를 주도해야 한다는 겁니까?”
뤼미에르가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말씀드리기는 조금 그렇지만. 제가 지금까지 정부 측에서 일했던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정부에게 이용당한 게 아니라, 어지간한 건 알면서도 자의적으로 정부 측을 지원했던 것 같다.
그녀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헌터들이 주도하는 쉘터는 민주사회가 아닙니다.”
“……아아.”
“예를 들어 길드장이 여섯 명의 아내를 두고 반대파를 위험지대로 추방해 버리고, 고의적으로 주변 지역을 약탈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게 상당히 순화된 표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세상이 세상이니까요.”
뤼미에르의 표정은 담담했다.
“물론 모든 쉘터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길드장이 방종을 일삼는다면 그런 쉘터는 오래 못 가니까요. 대부분 자멸의 수순을 밟으니 지방 사회도 나름 자정작용이 있습니다.”
“아아, 네.”
“다만 힘과 예절이라는 게 서로 같이 가는 개념은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엿같이 굴었을 때 머리에 총알을 박아줄 윗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엿같이 굴지를 않는다- 이런 말씀이시죠?”
“……공습, 이라는 전략을 일개 쉘터에서 구사하기는 결코 쉽지 않으니까요.”
“좋습니다. 이해했어요.”
지방정부가 막나가지 않도록 총부리를 들이밀 중앙정부가 있긴 있어야 한다. 이런 말 아니겠는가.
불과 어젯밤 그중앙정부에게 대차게 뒤통수를 맞아 죽을 뻔했으면서도, 이렇게 이성을 유지하는 건 그녀의 도덕성 때문일까 천성 때문일까.
아무튼 보면 볼수록 보통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뤼미에르.”
“……네, 장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서로 견제하지 않고, 화목하게 도와주는 시스템이 가장 이상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말처럼 쉽습니까.”
“확고한 구심점이 있으면 됩니다. 유럽에 필요한 건 시스템이 아니라 리더예요.”
나는 빙그레 웃었다.
“예를 들어 지방과 중앙 양쪽의 지지를 받는다거나, 국제적인 신뢰도와 지명도가 높다거나, 사리에 밝고 공의에 충실하다거나.”
“……네?”
“혹은 본인이 헌터인 동시에 아주 정치권과 관계가 없는 사람은 아니라던가, 이름이 N으로 시작하는 사람이라던가.”
“자, 잠깐……!”
“머리카락이 후광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사람이라던가. 파란 코트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던가. 아니면 한쪽으로 쓸어내린 머리가 가장 잘 어울리는 미인-”
“그거 저 아닙니까!?”
“꽤나 당당하시군요.”
“지금 그 소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녀가 따져 물었다.
“지금 국경없는 기사회가 EU를 장악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죠! 바로 그겁니다!”
“……!”
그녀가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서양인이라 그런지 리액션이 좀 세다. 대화가 재밌네.
물론 내가 재밌든 말든 그녀는 내게 반박했다.
“제 말을 지금까지 뭘로 들으신 겁니까! 이런 무법적 상황에 헌터가 정치를 하면 안 됩니다! 외국 관료한테 하기에는 조금 그런 얘기라 지금껏 입 다물었지만, 지금까지 지방 쉘터에서 어떤 비인간적이고 혐오스러운 참상이-”
“뤼미에르. 문민통제의 중요성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쿠데타가 두 번이나 일어난 나라 출신이라서요.”
그런데 말이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에게 반문했다.
“뤼미에르. 혹시 국경없는 의사회에 의사들만 있던가요?”
“……행정팀과 기술지원팀이 대략 40% 정도 됩니다.”
“그러면 국경없는 기사회에 헌터들만 있겠습니까?”
그리고 차분히 핵심을 짚어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뤼미에르 당신의 이름을 내세우고 출마한 정치인이, 당선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
“그렇게, 헌터와 민간의 공존을 바라는, 국경없는 기사회 소속 정치인들이, 유럽 정계를 장악한다면 말입니다.”
“…….”
“내분에서 벗어나 외세에 흔들리지 않는 유럽이, 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 내가 그녀에게 말하고 싶은 건 이거다.
“……뤼미에르.”
시대가 영웅을 부르고 있었다.
* * *
갈대밭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붉은 머릿결과, 은은하게 넘실대는 갈대들은, 같은 바람을 맞고 있는 모양인지 움직임이 퍽 비슷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무수한 괴수의 파도가 밀려왔다.
혐오스런 이물異物들이 녹색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온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여인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화면이 순식간에 불길로 물들었다.
이 모습을 찍고 있는 건 인공위성이었다.
첨단 군사위성이었던지라 흔히 보는 위성사진보다는 좁은 면적을 촬영하고 있었으나, 화면이 잡아내고 있던 건 결코 적은 면적이 아니었다.
즉, 그녀가 폭발시킨 불길은 그 넓은 구역을 순식간에 태워 버렸다는 의미였다.
불의 폭풍은 오랫동안 잦아들지 않았다.
그리고 화면에서 불길이 사라졌을 무렵에는, 그 넓던 갈대밭은 잿더미가 되어 있었고, 그 위에 새까맣게 타버린 고깃덩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여인이 가볍게 손짓하자 근처에서 대기하던 헌터들이 덜 익은 고기를 사냥하러 서서히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리충빈은 화면에서 눈을 떼었다.
“……흐음.”
화면 옆에는 화면이 있었고, 화면 위에도 화면이 있었다.
벽에는 수십 개의 모니터가 붙어 있다. 어쩌면 100개가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벽은 그만큼 거대했고, 모니터는 벽을 채울 만큼 많았다.
리충빈은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목소리로 감탄했다.
“이 화면 하나 하나를 채운 것이 중화의 위성이고, 그 위성을 만들어 띄운 것이 인민의 피땀이니, 내 이걸 자랑스러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지하 2㎞ 벙커 안에서 인공위성의 신호를 잡아내는 기술이 신묘하기도 하고……. 마음은 수십 년 전에 가 있는데, 세월이 노구를 기다려주지 않으니, 때로는 섭섭한 심정이 들기도 합니다.”
그때,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이것 보십시오. 신기하지 않습니까.”
리충빈은 허허실실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그는 중국어로 말했고, 상대방은 영어를 썼다.
“무슨 일로 연락 주셨는지요?”
-으음. 상황이 상당히 틀어졌다고 들었는데…….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면 그게 세상사겠습니까.”
-그건……. 굉장히 존경스러운 마인드군!
호탕한 목소리의 영어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Anyway. 긍정적인 마인드는 존경하지만, 나는 조금 더 생산적인 논의를 거치고 싶은 바요.
“생산적이라 함은 무엇입니까?”
-속히 해결해야 될 문제가 몇 개 있지.
그의 어휘는 거침없었다.
-한국 헌터들이 북한에서 괴수를 막아내는 중이고, 한국 정치가가 유럽에서 십자군을 결성하지 않았던가?
“한국의 역량이 제 생각보다 더 뛰어나더군요. 특히 한승문 장관의 정치적 경륜은 무시할 바가 못 되더이다.”
-가장 유감스러운 건 양 대통령이 약속을 어겼다는 거지. 이래서 민주당 정치인은 믿으면 안 되는데…….
리충빈은 여유롭게 웃으며 지적했다.
“양 대통령의 발상이 아닐 겁니다.”
-으음?
“제가 조심하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 우리 제너럴께서 입이 닳도록 칭찬하던 그 청년 말인가?
“때와 시기를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안다는 건 상당히 귀한 재능이지요. 한 장관을 상대하다 보면 가끔 마음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반쯤은 허풍으로 생각했는데, 한 대 맞아보니까 공감이 되는군.
하지만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이런 종류의 협상에 강하지. 한 대 맞고 시작해도 이길 자신이 있어. 지난번에는 폭탄 두 개를 돌려줬고 말이요.
“거기까진 안 갔으면 좋겠습니다만…….”
-하하! 내 임기 중에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아마도!
그가 리충빈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기존 계획에 수정이 불가피할 것 같은데. 장군께선 어떤 방침을 생각 중이신가?
“대명이라는 것이 결국 산 사람을 위한 것이고, 도리라는 것이 생존을 위한 것임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리충빈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명분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보다, 일단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명분을 잡는 건 어떨까 싶은데…….”
-……상당히 위험한 도박 아니요?
“장부는 위험할지언정 큰 길을 피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도와줄 부분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리충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하벙커는 크고 웅장하고 아늑했다. 이곳이 지하 2㎞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대륙의 기상을 나타내듯 붉은 주단이 대리석 바닥에 깔려있었고, 오성홍기가 곳곳에 매달려 이곳이 국가기관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그리고.
사방에 널브러진 사람의 시체 또한 붉었고,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들 또한 붉었다.
그들을 쓰러뜨린 군인들과 초인들 또한 붉었고,
리충빈의 얼굴에도 붉은 피가 튀겨 있었다.
“혁명에는 죄가 없고, 반동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니…….”
시체로 둘러싸인 옥좌의 옆에서,
주석의 머리에 총부리를 들이밀던,
그가 말했다.
“……혁명은 이미 성공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