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2 - Make world great again (1)
어두운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왔다.
칼레의 아침은 고요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
따스한 아침 햇살을 타고 불어온 산들바람에, 뤼미에르의 백금발이 나풀거렸다. 후광은 햇빛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녀는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붉게 물든 지평선을. 시체의 산을 타고 흘러내린 피바다를.
그리고 그건,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풍경이었다.
허나.
피바다가 도시를 휩쓸었으나 사람은 아직 건재했고, 시체의 산이 쌓였으나 인간이 그 위에 있었으니.
“…….”
그것으로 충분했다.
“…….”
실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 * *
당연한 말이겠지만 독심술은 아주 편리한 능력이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세상에 살지만 않으면 말이다.
죽는 느낌을 아는가? 눈앞에서 가족이 죽는 심정은? 산채로 괴수에게 먹히는 그 참담하고 허무한 기분은?
평생에 몇 번 느낄까 말까 한 그런 감정을 하루종일 느끼고 있으면, 사람이 말도 못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된다.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삼시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서도 굶어죽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게 피채원이 능력을 다스리는 법을 필사적으로 익힌 이유였다.
그러나.
전장의 한복판에서 귀를 막는다 해도, 이명만은 들리기 마련인 법이었다.
그리고 죽은 이의 단말마는, 그 잔상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
그것도 수천 명의 단말마였으니 말이다.
“흐, 아흐으으……!”
지독한 두통이 피채원의 머리를 감쌌다. 소녀는 배갯잇을 잘근잘근 씹으며 버텼다.
물론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허나, 두번 겪는다고 익숙해지는 경험도 아니었다.
차마 형언하기도 힘든 슬픔과, 고통과, 참혹함의 잔상들이 마음을 적셨다.
소녀는 분명 지하벙커에 있었으나, 지상에서 흘러내린 피는 천천히 땅에 스며들어, 결국 소녀의 마음을 검붉은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피채원이 정신을 차린 건,
한승문이 도착해 지하벙커의 문을 열어줬을 무렵이었다.
* * *
“……채원이니?”
어둑한 칼레의 지하벙커. 가장 안쪽에서 세 번째에 위치해 있는 방. 나는 그곳에서 피채원을 찾아냈다.
워낙 보급이 시원찮은 곳이었던지라, 침대고 이불이고 죄다 역한 냄새가 났다.
나는 대충 둥근 무언가를 덮고 있는 이불을 조심스레 들춰냈다. 이불 속에 있는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채원아?”
침대 위에 누운 소녀는 마치 콩벌레처럼 몸을 돌돌 말고 있었다. 베개를 껴안고서 말이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는 바람에 순간 헷갈렸지만, 녀석은 분명히 피채원이었다. 비록 후줄근해지기는 했지만 내가 사준 양복이 맞았으니까.
“……채원아?”
“…….”
“얘, 일어나봐……!”
애가 미동도 없길래 껴안고 있던 베개를 빼앗았다. 녀석이 베개를 어찌나 세게 물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제서야 녀석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눈빛이 영 흐리멍텅하다.
“……장관님?”
“……그래.”
“장관님…….”
녀석의 초라한 모습을 본 순간, 솔직히 애틋하고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이 어린 녀석이 세상 좀 고쳐보겠다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는가.
녀석은 멍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고, 나는 파르르 떨리는 녀석의 작은 어깨를 토닥였다.
“……고생했다.”
“…….”
녀석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인사가 아니라 소감이었다.
사실 하도 몸을 떨고 있어서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작게 중얼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장관님.”
“……그래.”
“세상이 너무, 이상한 것 같아요…….”
잔뜩 잠긴 목소리가 가냘프게 떨려왔다.
“……제대로 돌아오면, 좋을 텐데.”
“…….”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게 말이다.”
제대로 된 세상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잘 모를뿐더러, 그게 뭐냐고 물어보기에는 너무 창피한 나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
그저. 한 명의 정치인으로서.
마음속 한 켠에 작은 숙제로 남겨둘 따름이다.
* * *
살아남은 이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시체를 치우는 일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 매장까지 할 수는 없는지라 시체는 곧장 불에 태워졌다.
시체 타는 연기 사이로, 남겨진 이들의 울음소리가 섞여들었고, 바닥에 흥건한 핏물 위로는 산 자들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여도연 또한 그 눈물을 더하고 있었다.
“…….”
듣기로는 전우 몇 명을 잃었다고 한다. 그녀는 화장터 앞 사람들 사이에서 눈물을 뚝 뚝 떨어뜨렸다.
가족이 눈시울을 새빨갛게 붉히고서 울고 있다. 그녀가 애도하는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옆에서 한참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담배를 입에 꼬나물고서 자리를 피했다.
“…….”
미시적 감정에 젖어들수록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 감성과 이성은 적절한 비율로 섞여 있어야만 했다.
지금처럼 외줄 위를 걸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나는 재빨리 장례식장에서 도망쳤다.
내가 도망친 곳은 인근 건물의 옥상이었다. 여기서도 시체를 치웠는지 바닥에 핏자국이 자욱하다.
“…….”
침통한 심정으로 라이터를 꺼내든 순간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진운 씨?”
“……오래는 안 걸릴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나는 곧 내가 방금까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도망친다고 도망쳤지만, 나는 옥상에서까지 장례식을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설진운은 내 옆으로 다가와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저어 멀리 광장에서 거행되는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광장은 헌터들로 가득했다.
“……몇 시간 후에 다시 전장으로 향한다고 하더군요. 수십 개의 게이트를 닫기 위해 말입니다.”
“…….”
“……장례식은 지금이 마지막일 겁니다.”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게이트 안에서 시체 수습하는 건 사치겠죠.”
“……저도 참. 뻔한 사실을 저만 아는 것처럼 말했나요?”
“뻔한 건 아니죠. 싸워본 사람만 아는 거니까.”
“……그래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겠죠.”
“……그런데도 모이다니.”
설진운이 피식 웃었다.
“이상하네요.”
“……뭐가 말입니까?”
“저런 사람들이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거 말입니다.”
그게 이상한 거면 제대로 된 세상은 뭘까. 세상이 이상하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들으니 감회가 새롭다.
“…….”
나도 모르게 한참동안 말을 잃었던 모양이다. 설진운이 뻘쭘히 미소 지었다.
“……저어, 장관님?”
“……아, 네. 무슨 일이시죠?”
“고맙습니다.”
“…….”
설진운의 진중한 눈빛이 나를 직시했다.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이런 식으로밖에 말씀을 못 드리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장관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나는 소년의 눈빛을 빤히 쳐다보았다.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진운 씨가, 스무 살이라고 했죠?”
“네? 아뇨, 고3……."
녀석은 말하다가 아차 싶었는지 말을 바꿨다.
"아. 맞다. 스무 살 맞네요. 1년 지났으니까. 그러고 보니 제가 민증을 못 받았군요…….”
“……나, 원.”
이렇게 어벙한 눈치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 또 영락없는 스무 살이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녀석에게 악수를 청했다.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우리 누님이 무사한 걸 보니 마음이 놓이네요.”
“……도연이 누나야 뭐. 제가 항상 신세지는 입장이죠.”
“그렇다고 너무 친하게 지내지는 마시고.”
“네?”
“농담입니다.”
내가 괜시리 장난을 치니 설진운이 머쓱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녀석이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저희 위험한 건 어떻게 알고 와주신 겁니까?”
“아, 뭐냐. 마침 타이밍이 잘 맞았습니다. 일이 하나 터진다 그래가지고…….”
“무슨 일……?”
나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중국에서 쿠데타 터진답니다.”
* * *
잠시 예전 일을 돌이켜 보자면,
나는 기어코 감 기자와 천 사장의 도움을 받아 상당히 불쾌한 추측을 도출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이 중국의 쿠데타를 지원해서 아시아를 제압하고, EU의 축인 프랑스를 무너뜨려 EU를 와해시키려 든다는 것 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각종 사회-경제적 세부사항이 첨예하게 얽혀들긴 했으나, 큰 줄기만 잡아내면 대강 이러했다.
‘……미국은 자신을 제외한 초강대국의 탄생을 막아내려는 겁니다.’
[…….]
‘소련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으니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겠죠. 그래서 지금 혈안이 된 거고요.’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이상, 나는 더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팩트 체크에 들어간 것이다.
‘제 말이 틀립니까? 각하?’
[…….]
전화기 너머, 양판석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대답 대신 돌아온 건 한숨이었다.
[……하아.]
그리고 그 한숨이 가장 명확한 대답이었다.
‘……맞군요.’
[……그래.]
양판석이 내게 간략히 설명했다.
[앞으로 몇 주간 북한을 둘러싸고, 아주, 상당히…… 지저분한 사건 몇 개가 전개될 거야.]
‘한중의 대립을 빌미로 미국이 개입하는 겁니까…….’
[그리고 혼란스러운 대치상황 속에 쿠데타가 진행되는 거지.]
‘……우리도 어느 정도 협력하겠군요. 그 대가는요?’
[한국은 영구 중립국 비슷한 지위를 얻게 되네.]
상당히 달콤한 대가였다. 양판석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중국의 식량지원과 미국의 안보지원을 바탕으로, 한국은 일종의 유토피아가 될 거야. 전 세계에서 가장 안락하고 풍요로운 나라이자, 각성제까지 공급되는 전략적 요충지.]
‘대신 국제사회 정치판에선 미국 거수기 노릇을 하고요?’
[하수인 노릇까지는 아니고. 대충 방관자 비슷하게 갈 예정이네. 그게 그거긴 하다만…….]
설명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침묵을 대가로 한 풍요.
한국이 건네받은 지분이었다. 우리가 미국의 계획에 훼방을 놓으며 얻어낸 최선의 결과이기도 했다.
나는 차분하게 말을 골랐다.
여기서 대한민국의 자유주권 운운하는 건 웃긴 짓거리다. 배부른 돼지의 딜레마를 논하는 건 유치한 짓거리다.
그건 역사가와 철학자의 문제이지, 정치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시점에 내가 모르는 사정도 분명 존재할 것이고, 양판석은 그를 바탕으로 최선의 결과를 택한 것이다.
이는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노회한 정치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협상의 결과물이고, 대통령이라는 직위를 견뎌낸 책임자의 공로다.
나는 그를 믿는다.
이게 '현재' 우리의 최선이었음을 확신한다.
다만,
그에게 묻는다.
‘……이걸로 만족하십니까?’
[…….]
‘사실 저는 국가기밀이나 그런 거 잘 모릅니다. 그래도 미국이 7함대 하나로 대한민국과 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이 나라가 핵탄두 대여섯 개 달고 있는 미사일 하나로 무너질 수 있는 나라라는 것도요.’
미국과의 전쟁.
물론 정치적, 인륜적 문제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적은 미래이기는 하다. 허나, 실현 가능성이 없는 미래는 아니다.
미국 중부가 얼마나 개판이 났든, 달러가 얼마나 휴지조각이 되었든, 한국과 미국의 국력 차이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였으니까.
인정하기 싫지만.
한국은 미국을 넘어설 수 없다.
여긴 소설이 아니다. 아무리 애국심과 민족주의적 감성으로 포장하려 들어봤자, 인구와 국력, 그리고 군사력의 차이는 이겨낼 수 없다.
다만,
‘세상이 이렇게 됐기 때문에. 우리가 미국의 약점을 잡았기 때문에. 이렇게 미국과 대등하게 협상할 위치까지 온 겁니다.’
[…….]
‘이런 결과로 만족하십니까? 여기서 더 들이받지 않았다는 걸,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으십니까?’
정치가는 항상 선택을 하는 직업이다.
당, 공천, 지역구, 정책, 이념, 경제, 노선, 계파, 민심, 언론, 예산안, 비자금, 정경유착, 검경갈등.
모든 정치가는 항상 외줄 타기를 하며 살아간다.
그렇지 않은 정치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외줄 위에서 떨어진 순간,
더 이상 정치가로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각하. 어쩌면 이게 역사상 마지막으로, 우리가 미국에 대해 상대적 우위를 점한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
‘지금의 이 선택이, 이렇게 망가진 세상에서, 한국이라는 나라의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얌전한 척을 한다고 한들,
모든 정치인은 기본적으로 승부사였다.
그리고 나는 가장 성공한 승부사에게 물었다.
‘이 정도에서 만족하시겠습니까?’
[…….]
‘저는 배알이 꼴려서 한 번 들이받아 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저라는 패로는 부족하시겠습니까?’
이에 이 나라의 대통령이 답했다.
[……승문이.]
‘……네.’
[자네가 모르는 뒷이야기가 조금 많아. 그걸 내가 구구절절이 이야기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
[이건 자네 생각 이상으로 섬세하게 조율된 판이고. 이걸 흔들어놓다간 자칫 본전도 못 건질 수도 있네.]
‘…….’
[……계획은 있지?]
계획이야 물론 있다.
사실 그리 정교한 계획은 못 된다. 사실 반쯤은 감정으로 부딪히는 거였고, 나도 지금 누나 때문에 나사가 살짝 빠진 상황이라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다만. 꼴통들에겐 꼴통들만의 방식이 있는 법이다.
나는 분명 정치가였지만 반쯤은 꼴통이었으니 말이다.
‘……지금부터 미국과의 재협상을 주도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아주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지금까지도 충분히 외람되었으니 일단 말해보게.]
‘일단 한 대 후려갈기고 시작할 예정입니다.’
* * *
“……그래서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헌터들을 모았지요. 생각보단 일이 쉽게 풀리더군요. 비행기에서 전화로 설득한 케이스도 있었습니다.”
“…….”
“한 번은 비행기에 왠 괴수가 들이박기 직전까지 갔었는데……, 뤼미에르?”
“…….”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뤼미에르의 표정은, 생각보다 볼만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