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34화 (134/296)

EP 21 - 국경없는 기사회 (16)

노아 뤼미에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밤은 어둡지 않았다.

밤은 결코 어둡지 않았다.

다만 별빛이 없었을 뿐이다.

* * *

시퍼런 게이트 불빛이 세상을 비추었다. 지독하게 시린 냉광冷光이었다.

어쩐지 섬뜩한 느낌이 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나 정말 섬뜩한 건 그 푸른빛을 받으며 기어오는 괴수들이었다. 일그러진 살덩이들이 침을 뚝 뚝 흘리며 다가왔다.

스윽-!

입이 네 개로 갈라진 털 없는 포유류가 달려들었고, 설진운은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며 짐승의 목을 베어냈다.

유려한 움직임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차가운 밤바람이다. 선명한 혈향을 품고 있었다.

“…….”

설진운의 검로劍路는 지극히 부드러웠다. 푸른 섬광이 한 걸음 한 걸음 사뿐히 움직이며 허공을 저며내었다.

그러나 소년의 안광은 명백히 혼탁해져 있었다.

집중이 흩어지는 것이다.

날카롭게 곤두선 본능이 무뎌지는 순간, 검에 기댄 몸은 한 차례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크윽……!”

짙은 탈력감과 함께 고통이 찾아온다. 찢어진 근육이 경련하고, 지독한 무력감이 몸을 늘어뜨린다.

푸욱-!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달려드는 괴수의 아가리에 칼을 찔러넣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등 뒤에 있는 이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으리라.

“야! 괜찮아!?”

소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짐작한 여도연이 근처로 다가와 괴수를 막아냈다. 덕분에 설진운은 숨을 돌릴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소년에게 독이 되었다.

관성으로 움직이던 설진운의 검로가 잠시 멈추자, 소년이 크게 휘청거렸다.

어지럽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빈혈이 생긴 모양이다.

그리고 그 잠깐의 휘청거림이 죽음으로 직결되는 곳이 바로 전장이었다.

“……!”

주먹이, 날아들고 있었다.

아주 커다란 괴인의 주먹이 코앞까지 당도했다.

어찌나 생생한지 노란 각질 사이에 끼어있는 핏자국과 살점까지 눈에 들어왔다.

맞으면 상반신이 통째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그런 주먹이었다. 사실 앞발이라는 표현도 어울릴법한 형태이기는 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

소년의 세상이 느려졌다.

주마등이라고 부르는 현상이었다.

소년은 그 여느 때보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생각했다.

……생각했다.

생각 말고는 다른 것을 할 수가 없었다.

찰나의 순간에 눈을 감고, 소년은 많은 것을 생각했다.

‘…….’

만약 괴수가 없는 세상에서 평범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초 계획대로 체대를 나와 부모님의 검도장을 물려받았다면.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초등학생들 기합소리 들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지들끼리 막싸움하다 다친 것 때문에 학부모한테 고개를 숙였을까.

아니면 건강에 신경 쓰는 아저씨 아줌마들에게 칼 휘두르는 법 알려주면서, 가끔 끝나고 관원들과 소주에 삼겹살 같이하는 인생을 보냈을까.

어쩌면 국가대표를 배출하는 명품 검도장이 되거나, 장사가 안돼서 상가 건물을 내놓고 건물주 노릇을 했을지도 모른다.

“…….”

그러나,

역사에 만약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삶에 만약은 없다. 살면서 만약을 운운한다면 그건 미련이나 후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에 붙잡힐 바에는 현실에 열중하는 편이 오래 살아남는 이들의 습관이라고.

적어도 설진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

헌데 자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죽음 앞에.’

그렇다면 자신은 현실에 충실하지 않았는가?

‘충실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전장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전장에 있는가? 사람을 구하고 싶었나? 피가 그리웠나? 목숨이 오가는 전투를, 익스트림 스포츠 비슷하게 생각했나?

‘아니다’

그렇다면 왜 나는 전장으로 향하는가.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솔직해질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리워서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 날의 추억이, 은퇴한 국가대표 후보 나부랭이었던 아버지의 가르침이.

근육통과 피멍에 괴로워하면서도 목검을 쥐던 그 꿈이, 어둑한 교실에서 사람을 살리자 다짐하던 친우들과의 그 꿈이.

피와 현실에 젖어버리기 전, 이 나를 움직이게 했던 그 꿈이.

검 한 자루에 담겨 있었다.

“…….”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비로소 소년의 세상은 고요해졌다.

총성도, 비명도, 파공음도, 단말마도 없는 그 침묵 속에서, 소년은 조용히 생각했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 어찌 몰랐을까.

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쥐는 것이 검이고, 휘두르는 것이 벰이다. 삶 또한 그러하다. 행하는 것이 득이고, 베는 것이 심이다.

미친 세상에 도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법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의 행이 묘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한가?

행이다.

인간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건 행동이다. 그리고 행동을 결심하는 것이 의지다. 꿈이다. 희망이다.

세상에 살아남으려 노력하지 말고, 자신의 길을 걸어감이 살아남는 길이다.

다른 것은 잘라낸다.

이제 세상이 내게서 살아남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나를 위해 죽은, 내가 위했으나 죽은 사람들을 위한, 나의 도리다.

“…….”

그렇게,

검객이 눈을 뜬 순간, 괴수는 이미 베여 있었다.

푸른 섬광은 더 이상 맹렬하게 불타오르지 않았다.

그저 고요하게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을 따름이었다.

“…….”

침묵이 허공을 저며내었고,

칼에 취한 검객이 푸른 밤을 걸었다.

* * *

푸른 밤이었다.

파멸이 도시에 찾아왔다.

뤼미에르는 본능적으로 그를 느꼈다.

“…….”

도시를 감싼 보호막이 무력해지기 시작했다. 본인이 시전하고 유지중인 능력이었으니만큼,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의 보호막은 도시를 덮을 수 있다. 파리 방어전 당시 전우의 죽음을 보며 각성한 능력이다.

과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마력을 응집시켜 얇은 막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 정도까지 넓게 펼친다면 혈박쥐나 검수리 같은 소형종만 막아낼 수 있었으나, 용종龍種이나 하늘어류로 분류되는 대형종은 보호막 내부에 들어오는 순간 바로 대공포로 격추하면 된다는 점에서, 크나큰 전략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헌터들이 앞만 보고 싸울 수 있었으니 말이다. 위에서 날아든 이빨에 목이 뽑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 보호막이 무력화될 예정이라는 걸 직감했다.

도시가 곧 멸망한다는 뜻이었다.

“…….”

피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력 고갈의 징후다.

눈알이 터질 것 같이 충혈되고, 손발이 으슬으슬 떨려오기 시작했으며, 뇌에서 진통제를 뿜어내기 시작했는지 고통이 없어졌다.

죽음의 징조다.

아이러니하게도 피식 하고 웃음이 먼저 새어나왔다.

“……하.”

이 보호막은 유럽의 모든 도시에서 뤼미에르를 원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녀를 성녀로 칭송하는 사람들도 어쩌면 자신이 아니라 이 보호막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그녀의 순수한 선의善意는 누구에게도 가치 있다 인정받지 못했다.

각성하지 못한 국경없는 의사회의 동료들도 전장을 떠돌며 사람을 구하고 있는데, 그 누가 그들을 성녀, 혹은 성자라고 칭송하던가?

성스럽다는 수식은 결국 사람이 붙이는 것이었고, 사람의 도리가 땅에 처박힌 시대에 사람은 결코 성스럽지 못했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다.

원망하고 있지 않은가?

“……흐, 흐흐.”

혹자는 그녀가 멍청한 자원봉사자라 말한다. 머리에 든 것도 없이 착해빠진 사람이라고.

틀렸다.

그녀는 국경없는 의사회의 베테랑이다. 중동과 카슈미르를 떠돌며 사람을 구했고, 따라서 반군과 정부군의 증오와 대립에 누구보다 예민한 사람이었다.

정치에 대해 모르지 않는다.

지금의 상황도 그렇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의미 모를 알력관계도, 미국의 교묘한 패권주의적 행보도, 마침 오류라고 정정된 유럽 게이트와 호루스 시스템의 허점도.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 보면, 알려 하든 모르려 하든 결국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란 게 얼마나 추악한지 말이다.

“…….”

그녀는 다만.

알면서도 행하는 것뿐이다.

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

하여, 뤼미에르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그녀처럼 이타적이기를 바라는 것이 그녀의 이기심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모든 이들이 그녀처럼 어린 시절에 테러리스트의 총알로부터 자신을 지켜준 이름 모를 이슬람 행인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잘 알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신념을 행하는 것뿐이다.

하나, 길을 걷다 보면 종종 비참해질 때가 생긴다.

“…….”

그녀와 헌터들이 칼레를 수성하는 것은 남쪽으로 향할 괴수들을 최대한 붙잡아놓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북쪽에 있고, 괴수는 가운데에 있고, 프랑스 공군은 남쪽에 있다.

따라서 프랑스 공군이 그들을 지원하려면 비행괴수들을 통과해야 한다. 아니면 저어 멀리 빙 돌아오거나 말이다.

게다가 프랑스 공군은 남쪽으로 내려오는 피난민들을 지켜내야 하는 의무까지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효율적인 작전수행을 위해 영국에 주둔중인 미군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군이 오지 않는다.

프랑스 정부도 이 사실을 잘 알 것이다. 당장 그쪽에 보낸 연락이 몇 개고, 군사위성과 정찰기라는 게 몇 개나 있는가.

그런데 이 시간까지 프랑스군이 오지 않는다.

“으, 으흐……!”

정부가 그들을 버렸다.

이게 미국의 방해공작 때문이라면 좋으련만, 미국은 그런 무식한 방식을 쓰는 국가가 아니었다.

프랑스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차후 안전을 보장받았든,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대항마로서 선택받았든,

대충 떠오르는 정치적 시나리오는 몇 개가 있었으나, 전부 의미 없는 짓거리였다.

중요한 건,

조국이 그들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그녀가 진정 전우라고 생각했던 한 정치가가 말이다.

”으흐, 으흐흐, 흐흑……!”

흐느끼는 건지 실성한 건지 자신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시리도록 푸른 밤하늘을 바라보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밤하늘을 향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피눈물이 성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늘은 밝았으나 별빛은 없었다.

“흐흐, 흐, 흐으…….”

그렇게,

버림받은 성녀는, 비참한 밤하늘 아래서,

조용히,

아주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그때였다.

천지를 진동시키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

뤼미에르가 눈을 떴다.

그녀의 보호막이 사라져 있었다.

밤하늘 어둠 속에 꿈틀거리던 괴수들도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밤하늘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 이게 무슨……!”

하늘이 열렸다 -

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이 도시의 상공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모든 먹구름과 짐승들이 사라지고,

마치 은하수와 성단星團이 들여다보이는 듯, 저어 밤하늘의 별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먹구름이 무언가에 밀려난 듯 원형으로 넘실대고, 맑게 갠 하늘에 처음으로 보름달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

별빛이 움직인다.

그리고 깜빡거린다.

……별빛이 초록색이었나?

-치직-치지지직-!

뤼미에르가 화들짝 놀라 통신기를 살폈다. 몇 시간째 침묵을 고수하던 통신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 들립니까?

“……다니엘?”

-잘 들리냐고, 이 아줌마야.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아, 대충 방금 전에 영국 협회에서 제명당한 무소속 S급 전격술사 다니엘 웰링턴. 프랑스 칼레에 낙하산 타고 내려가는 중입니다. 대공포 쏘면 지져버릴 거니까 그리 아세요.

“……다, 다니엘? 그, 그, 하늘에 아직 괴수들이-”

-존나 개 쩌는 꼬맹이가 한 방에 정리했으니 걱정 마시고. 그쪽에서 대공포만 안 갈기면 무사히 착륙할 것 같습니다. 오버.

뤼미에르는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통신은 끝나지 않았다.

-……쉘터 덩케르크. 자경단장. 세히즈 아도힐. 자경단 휘하 32인과 함께 칼레에 합류합니다.

-누님! 들리십니까!? 아미앵의 그윈 슈미트체바입니다! 르윈은 괜찮습니까!?

-클랜 샹메르. 클랜장 쥬히 빌테르 휘하 일동. 셍피에르 공원에 착륙 예정.

-모스크바. 스페츠나츠의 세르게이다. 오랜만이군 뤼미에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빚을 갚으러 왔다.

-뤼미에르! 모하드랑 같이 내려가고 있다! 살아만 있어라!

-아르마다의 나탈리아다. 공중지원팀이 서쪽 방어선에서 요격을 개시했다. 저기 괴수 한복판에서 왠 미친놈이 칼들고 날뛰는데, 아군인가?

-여기는 바티칸. 싸이커들이 포션을 적재한 컨테이너를 들고 내려가는 중이다. 항공관제 부탁한다. 오버.

-국경없는 의사회. 총본 최정예 선발인력 86인. 앙코뉴 광장에 착륙 중이다.

“…….”

뤼미에르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까와 비슷했지만, 분명히 다른 느낌의 떨림이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어둡고, 가혹한,

저 차갑고 푸른 밤하늘에.

수많은 비행기 불빛들이 모여 아름다운 은하수를 그려내고 있었다.

“……아아.”

노아 뤼미에르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로 길을 걸어온 사람이었다.

다만, 묵묵히 걸어가는 그녀의 뒤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녀가 구해낸. 그리고 그녀를 바라본.

수많은 행行과 업業.

행동에는 그에 따른 업보가 쌓인다.

그러니. 지금의 풍경은.

그녀를 축복하는 저 수많은 별빛들은.

저 선의와 희망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밤하늘은.

오롯이 노아 뤼미에르라는 한 인간의 삶이 만들어낸 모습이었음이.

“……아아.”

그리도 기쁠 수 없었다.

* * *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편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준비한 선물은 마음에 드셨을런지 모르겠습니다.”

터억 -

하늘에서 내려온 양복쟁이 하나가 땅에 발을 디뎠다. 가슴엔 금뱃지를 달고 있었고, 옆에는 후드티를 입은 소녀가 있었다.

노아 뤼미에르는 익숙한 그 목소리에 뒤돌아 눈시울을 붉혔다. 자연스레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처절한 모습에 양복쟁이가 괜히 움찔했다.

“……어, 음, 그. 미안합니다. 저번에 괜히-”

“아저씨.”

“으, 으응?”

“여기 무전양식 그거 아니랬잖아.”

소녀의 재촉에 양복쟁이가 괜스레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목에 달린 통신기를 입에 대고서,

조심스레 인사를 전한다.

“……대한민국. 초상관리부 장관, 한승문.”

“…….”

“국경없는 기사회의 총본부장을 모시러 왔습니다.”

EP 21

국경없는 기사회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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