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32화 (132/296)

EP 21 - 국경없는 기사회 (14)

보글보글-

감자탕 끓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텅 빈 가게에 진득한 육수 향기가 퍼져나갔다.

푸짐한 등뼈, 토실토실한 감자, 숨 죽은 우거지, 노릇노릇한 국물.

거를 타선이 없다. 건드리는 게 미안할 정도로 환상적인 비주얼이다.

이런 모습을 거침없이 헤집어놓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아마 회식 자리의 가장 연장자이거나 물주物主일 것이 분명했다.

“제가 감자탕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아시고…….”

천금순이 국자를 들었다. 헤실헤실 웃고 있다.

그녀는 자기 앞접시에 큼지막한 뼈다귀를 퍼 담았다.

젓가락으로 살코기만 쏙쏙 골라내서 냠냠 오물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입맛이 돋을 법도 했지만, 나는 가족을 사지死地에 내팽개친 몸이었다.

차가운 얼음물만 벌컥벌컥 마시며 속을 달래고 있으니, 천금순이 내 앞접시에 고깃덩이를 살포시 올려놨다.

“반가운 얼굴들이랑 오랜만에 식사 같이해서 좋기도 하고요…….”

“……얼굴들이요?”

“흡……!”

감 기자와 천금순이 초면이 아니었던가? 나는 의아한 눈치로 두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감 기자는 뻘쭘하게 웃으며 턱을 긁적였다.

“……두 분 구면이셨습니까?”

“아, 네. 예전에 조금…….”

감 기자가 어물쩡거리길래, 대체 뭔 짓을 한 거냐는 눈빛으로 천금순을 쏘아보았다.

감자를 우거지로 돌돌 말던 그녀가 움찔거렸다.

“……으음. 감지윤 양 스카우트 건으로 인연이 조금……?”

“스카우트요? 처음 듣는 소린데요.”

“그야 비밀로 했었으니까……?”

그녀의 티 없이 해맑은 웃음이 나를 슬며시 미소 짓게 했다. 우리는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공무원 상대로 불법로비 해놓고 참 당당하십니다?”

“그게 또 제 장점이죠!”

“그래요. 비하인드 스토리 좀 들어나 봅시다.”

그녀는 뻘쭘하게 웃으며 비화祕話를 풀어냈다.

“으음. 사실 제가 한승문이라는 사람을 잘 몰라가지고. 그러니까- 피아식별이 잘 안 되던 시절 이야기인데.”

감 기자가 내 귀에 ‘저저번주 화요일이요’라고 속삭였다.

“만-약에 감지윤 양이 GS 쪽에서 일할 생각이 있을 수도 있다면, 한 번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게 어떻겠냐-라고, 조심스럽게 사알-짝! 네. 그렇게 됐습죠…….”

“으음. 뭐 거셨습니까?”

“에이……! 걸긴 뭘 걸어요……! 그냥 다 순수한 마음에서-”

“세무조사 들어가면 재미없을 것 같은데.”

“감 기자님한테 GS 아이기스 대표이사직 제의했는데 칼같이 거절하시더라구요.”

나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감 기자를 한 번 쳐다보고, 이젠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눈빛으로 천 사장을 바라보았다.

“……천 사장님?”

“……네?”

“지윤이 빼가면 그날로 셔터 내리는 겁니다.”

“넵…….”

* * *

“아아, 그게 그렇게 된 거였어요?”

“……하아.”

대충 지금 상황을 전부 털어놓을 즈음에 감자탕 왕뚝배기가 바닥을 드러내었다.

감 기자는 충격적인 진실에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고, 천금순은 물티슈로 입 주변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미국이 좀 폭력적으로 나오긴 하네요. 내부 문제가 좀 심한가……? 경제가 망해도 단단히 망하긴 했드만…….”

감 기자가 덧붙였다.

“……미국은 항상 폭력적이었습니다. 중동에서나 하던 짓거리를 이젠 동북아시아에 저질러서 문제죠.”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런 연유로 우리 천 사장님이랑, 감 기자님께 고견을 조금 여쭙고자 하는 겁니다. 혼자서 대처하기가 조금 버겁네요.”

“아, 우선 드리고 싶은 말씀이 조금 있는데요…….”

천금순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지금 가장 큰 문제가, 양판석 대통령님이 가만히 있으라고 그러는 거죠?”

정확했다. 미국이 파리를 밀어버리려 들든, 중국이 북한을 집어 삼키려 들든 간에, 양판석의 모호한 심정이 가장 큰 의문거리였으니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니 천금순이 옛 이야기를 풀어냈다.

“저희 할아버지랑 양판석 의원님이랑 상당히 절친하신 사이셨어요. 민통련이랑 국본에서 6월에 화염병 좀 던졌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녀는 기억을 더듬으며 양판석에 대해 논했다.

“사실 당신께서 그리 청백리 스타일은 아니셨어가지구. 젊었을 적에 요정도 많이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그런데 양통은 가서 술만 먹었대요. 판사라 그런가.”

천금순이 양판석을 평했다.

“흐음…… 뭐랄까. 대의를 중시하는 스타일?”

“대의요?”

내가 아는 양판석은 노괴면 노괴였지 민주투사는 아니었다. 정통 운동권 주제에 민주당 비주류 모아서 수권한 사람 아니었던가.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니 천금순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안 그런 척해도 대의를 좀 중요하게 생각을 하세요. 그분이.”

“……그렇습니까?”

“뭐랄까. 뇌물이나 야합 정도는 용인해도, 군경이 사람 패죽이는 건 눈 뜨고 못 보는 거죠.”

하기야 가족이 삼청 교육대 끌려갔다 그러지 않았던가. 대충 이해할 만한 마인드였다.

“……그러면 지금은 왜 그러는 겁니까?”

“국가가 반드시 국민들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뭐든 감수할 수 있다. 뭐,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지 않을까 싶네요.”

“…….”

“그러니까 북한을 중국에 넘기려는 거죠.”

“예?”

“으음. 정확히는 중국이 북한을 집어삼키는 걸 보고만 있겠다는 표현이 더 낫겠네요.”

그녀가 확신했다.

“쇄국정책이에요. 밖에서 뭔 일이 일어나든 상관 않겠다는 거죠. 몇 명이 죽어나가든 상관하지 않겠다. 4천만을 지키기 위해서.”

* * *

각성자가 되며 보통 사람 이상의 육신을 갖게 된 소감은, 집에서 기르는 멍멍이의 기분을 알겠다는 것이었다.

코가 예민하니 삶이 피곤하다. 특히 이런 전장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화약 냄새, 물비린내, 피비린내, 시체 썩은 내, 고기 타는 냄새, 무너진 건물의 석면 냄새, 거기에 온갖 괴수의 다양한 체액 냄새까지.

여다솔은 전투가 끝나면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노력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대화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었다.

“확실히 뤼미에르가 대단한 사람이긴 한가 봐요. 길드 마스턴지 뭔지 하는 사람들이 뤼미에르 앞에서 꼼짝도 못 하더라.”

소녀는 그리 중얼거리며 신발을 진흙탕에 푸욱 담갔다. 나름 비싼 신발이 갈색으로 물들었지만, 빨간색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흐유…….”

소녀의 한숨이 습한 허공에 섞여들었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하다. 게이트는 닫혔지만 시체는 산처럼 쌓여 있었고 말이다.

여다솔은 주변을 둘러보지 않으려 계속해서 재잘댔고,

그 옆에는 조정식이 있었다.

늘 그렇듯.

“게이트 닫으러 들어간 공격대 있잖아요. 두철이 아저씨 발목이 잘렸다고 그러던데. 정확히는 무릎 아래로 뎅강!”

“……가족 딸린 양반이 현장에서 어슬렁대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집 가라 그래.”

“뤼미에르가 도로 붙여줬대요.”

“쯧. 쓸데없는 짓을-”

절뚝거리며 지나가던 두철이 아저씨가 조정식의 뒤통수를 세게 한 대 후려쳤다.

“아!”

“상놈 새끼네 이거.”

조정식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째려보자, 그는 모르는 척 잽싸게 도망쳤다.

지켜보던 여다솔이 쌤통이라는 둥 미소 지었다.

“조장님은 말 좀 예쁘게 하면 좋겠어.”

“팩트야. 팩트.”

어린 헌터들은 그렇게 담소를 이어갔고, 여도연은 오묘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니들은 왜 거기 앉아 있냐?”

“언니도 와서 앉아봐요! 푹신푹신해!”

여다솔과 조정식은 괴수 시체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머리가 터져 버린 갈색 거인의 허벅지 즈음이었다.

하필 여도연이 잡은 녀석이었던지라, 그녀는 살짝 떨떠름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앉을 데도 많은데 왜 하필 괴수 시체에 앉아 있냐고. 보니까 피도 아직 덜 말랐구만.”

조정식이 불퉁한 표정으로 답했다.

“사람 피 위에 앉는 것보다야 낫죠.”

“……그건 그렇긴 한데.”

여도연이 말을 돌렸다.

“……아무튼 우리 멤버 중에 사상자는 없댄다.”

“사망자는 그렇다 치고. 부상자가 없는 건 좀 이해가 안 되는데요.”

“마지막 부상자가 아까 치료됐어.”

그러면 부상자가 없다고 쳐도 되는 건가. 조정식은 살짝 의아했지만 아무튼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어디 갔다 오시는 길인데요?”

“나야 뭐. 회의하고 왔지. 뤼미에르랑, 채원이랑, 진운이랑, 또, 여기 쉘터장인가, 길드마스턴가, 뭐…….”

검은색 장난감 모형칼로 여다솔의 볼을 쿡 쿡 찌르던 조정식이 심드렁히 질문했다.

“대처 방안은 정해졌대요? 척 봐도 상황이 영 지랄맞던데.”

“프랑스 북부에 열린 게이트가 지금 스무 개가 넘는댄다. 지금도 속속들이 열리고 있고.”

여다솔이 들이민 개머리판에 볼이 쿡 쿡 찔리던 조정식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우리는 어쩌고요?”

“그래도 프랑스 정부랑 연락이 닿긴 했어.”

“……뭐래요?”

“버티라네.”

“하, 씨바, 에반데, 이거…….”

조정식은 어른 앞에서 욕설을 내뱉은 죄로 여도연에게 정강이를 차였고, 곧장 여다솔에게 업혀 힐러를 찾아갔다.

* * *

-덩케르크, 란스, 아미앵, 그리고 디에프를 기점으로 프랑스 북부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는 중입니다. 오팔 국립공원에서는 남하하는 괴수들에 대한 대규모 전면전이 발생했고요.

뤼미에르의 귓가에 프랑스 대통령의 음성이 아른거렸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위성전화를 붙들고 있는 뤼미에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쉘터 생토메르가 붕괴했다고 하더군요. 방어가 아니라 은신을 모토로 한 곳이기는 했다만, 국내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보호령이었는데 말입니다. 하하…….

“……사망자는요?”

-최소 30만.

4인 가족 7만 5천여 가구가 몰살당했다는 소식에 뤼미에르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참으로 비현실적인 숫자다. 허나 현실이었다. 그러니 사람은 움직여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칼레를 지켜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살아남아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뤼미에르.

구출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소리였다.

“…….”

뤼미에르는 눈을 감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현실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사실, EU가 군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한 지금. 정상적인 작전수행이 아주 어려운 상황입니다.

“…….”

-덕분에 쉘터 지도자들의 협조를 기대해야 하는데. 빌어먹을 리즐러들이 헌터 목에 개목걸이를 채워야 한다고 지껄이고 다녔던 통에. 퍽이나 도와주겠다 싶군요.

대통령이 웃었다.

-좆됐다 싶었는데, 프랑스 북부에 거점도시가 하나라도 살아남았다니. 저는 당장이라도 뤼미에르 당신을 위해 엘리제 궁을 비워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하!

“……그런 말씀 마십시오. 각하.”

-나 같은 사람에게 이 자리가 너무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하루이틀이…… 이런. 너무 추했나요?

“솔직히 조금 그랬습니다.”

-그래요. 나보다 더 고생한 사람한테 자꾸 엄살을 부리게 되네요. 내가 그만큼 우리 집행위원장을 아낀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유부남의 애정은 조금 꺼림칙합니다만.”

-저야말로 우리 와이프의 눈빛에 의심이 섞여가는 걸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합니다. 우리 집에 그만 좀 놀러오세요. 친구도 좀 만들고요. 네? 요즘 만나는 사람은 있습니까? 저번에 그 한국 장관이랑은-

“조용히 하십쇼! 사람 정신 사나우니까!”

-신경질은.

마지막까지 성질을 박박 긁어대는 목소리에 뤼미에르는 실로 오랜만에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이내 차분히 본론으로 돌아왔다. 일말의 여유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뤼미에르가 물었다.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프랑스 북부의 게이트를 폐문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대응방안은 있습니까?”

-헌터들이 전부 도망쳤습니다.

‘씨발…….’

뤼미에르의 정신력이 크게 흔들렸다. 가벼운 욕설이 치밀어 올랐으나, 이내 정신을 다잡았다.

뤼미에르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래. 이 정도야 충분히 예상했다. 여기서 쓰러질 정도로 안일하게 살아오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단기적 목표로 초점을 바꾸지요. 프랑스 북부에 대한 피난은 어느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발등에 불 떨어진 쉘터들이 당장 남쪽으로 뛰어오고 있습니다. 물론 헌터들만 도망치지 민간인들까지 챙겨오는 경우는 거의 없더군요.

“대처는요?”

-공습으로 피난행렬 인근 괴수들을 소탕하고, 아직 안 도망친 헌터들을 파견한 상황입니다만, 인력이 영 여의치 못합니다.

“우리 측에서 도울 수 있는 상황입니까?”

-글쎄요. 당장 그쪽도 괴수로 포위당한 상황인데 여력이 됩니까?

“여력 따질 상황은 아니라고 봅니다.”

-…….

대통령은 한참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결단했다.

-아뇨. 뤼미에르는 그 자리에 있어 주십시오.

“왜죠?”

-거기서 버텨 주시는 것만으로도 남쪽으로 향하는 괴수의 부담이 줄어듭니다. 칼레는 지금 게이트 사태의 최중심부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압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 그쪽으로 대규모-

“보입니다.”

-…….

뤼미에르는 지금 칼레를 둘러싼 성벽의 첨탑에 올라가 있었다.

사실 성벽이라봤자 대규모 건물을 무너뜨려 만든 성벽이었지만, 곳곳에 비치된 중화기들을 본다면 충분히 든든해 보이는 성벽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성벽이, 인구 12만의 항구도시를, 60만 명 규모의 군사도시로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다만, 뤼미에르는 그 성벽 위에서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먹구름 사이로 새어든 붉은 노을이 지평선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그 지평선은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

지평선을 가득 채운 괴수들이 파도와도 같이 일렁이는 것이었다.

언제 이리로 다가올지 모르는 놈들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보기에, 그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괴수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전부 죽인 다음에는, 결국 사람이 모인 곳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뤼미에르가 장담했다.

“……대규모 방어전을 준비해야 할 것 같군요. 공습 지원은 가능하겠습니까?”

-프랑스 공군이 그쪽 지역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비행괴수들을 뚫고 지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선 남쪽으로 내려오는 피난 행렬을 지원할 계획입니다.

결국 못 도와준다는 소리였다.

뤼미에르가 애타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그리고요?”

-그래서 방금 영국에 주둔한 미 공군에게 지원을 확답받았습니다.

“……그걸 먼저 말씀하시는 편이 더 나은 대화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왜요. 공습 못 받을까봐 놀랐습니까?

“……각하?”

-하-하!

“임기 마지막 날에 한 대만 때리겠습니다.”

-흐음. 그럴 날이 온다면 얼마든지 맞아드리지요!

대통령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항상 미안합니다. 뤼미에르.

뤼미에르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게 제 책무입니다.”

* * *

“미국은 프랑스 절대 안 도와줄 거예요.”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려다 판 엎어질 뻔했는데?”

“아뇨, 아뇨, 일리가 있습니다. 한국이 방관자 포지션 아닙니까.”

감자탕집의 삼자회담은 치열하게 이어졌다.

주된 논점은, 한국이 정말로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는가.

그리고 천금순은 양판석의 태도를 방관이라 정의했다.

“사노피 포션이라고. 프랑스 지원받고 노바티스 합병한 초대형 기업브랜드가 하나 있어요. 원래는 제약회사였는데 지금은 EU 국방기술원 산하에서 최신기술로 시장 공략하는 일종의 국책기업이거든요?”

“그런데요?”

“그거 지금 도산 직전까지 갔어요. 미국이 돈 빼가지고.”

“자본이 국가의 명령에 따릅니까? 그것도 미국이?”

“국내면 모를까 해외는 아니죠. 경제제재 빡시게 돌리던데, 해외로 자금 융통하는 건 전부 워싱턴 거친다고 보면 돼요.”

천금순은 식탁을 탕탕 두드리며 의견을 피력했다.

“미국이 유럽을 말려 죽이고 있어요. 특히 EU를 주도하는 프랑스를요.”

“……어쩌면 지금 프랑스 정부와 미국 사이에서 협상이 오가고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모르죠. 근데 겉으로만 보면 칼 들이밀고 있는 건 맞아요.”

감 기자가 한 차례 논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미국이 프랑스를 제압해서 유럽을 장악하고. 중국과 야합해서 아시아를 장악한다는 소리 맞습니까? 우리는 그걸 보고만 있고?”

“그렇죠!”

“그러면 미국의 목표는 세계의 패권을 잡는 거겠네요?”

이건 질문이 아니었다.

감 기자는 뭔가 기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림을 이어갔다.

이윽고,

감 기자가 눈을 감고 식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툭. 툭. 툭.

“근데 왜 중국이랑은 타협합니까?”

툭.

“힘이라. 세죠. 세요. 근데 러시아랑 유럽은 놔두고 왜 중국이랑? 그러면 유럽이랑은 타협을 하면 안 되나?”

툭.

“중국한테 북한을 먹여줄 이유가 있습니까?”

툭.

툭.

툭.

나는 저도 모르는 새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천금순마저도 감 기자를 보며 오묘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툭.

“…….”

감 기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는 우리에게 질문했다.

“……북한은 한국 영토죠.”

“……헌법상으로는 그렇죠.”

“한국이랑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어 있지요.”

“……그, 렇죠?”

“그러면 앞뒤 맥락 다 떼놓고 이야기를 해봅시다. 소설이에요. 소설. 그냥 막 지르는 소설이다 이거죠…….”

투욱 -

감 기자가 안경을 벗었다.

“…….”

평소에는 잘 몰랐는데.

눈매가 굉장히 날카로웠다.

“……지금 이거. 한국이 중국의 북한 침입을 침략으로 규정한다면. 미국이 자동으로 참전되는 상황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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