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31화 (131/296)

EP 21 - 국경없는 기사회 (13)

폭풍우 치는 여름의 끝자락에, 하늘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구멍에서는 수많은 괴물들이 쏟아져 내렸고,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 *

거센 비가 내렸다.

흙탕물이 흐르기 시작한 바닥을 설진운이 철퍽철퍽 헤치며 걸어나갔다. 그나마 늘 들고 다니던 장우산이 있던 덕분일까, 우산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년 뿐이었다.

소년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뤼미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빗줄기 속에서도 그녀의 후광은 여전했다.

“괜찮습니다. 한국 쪽은 무사하십니까?”

“덕분에 다들 무사합니다. 아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설진운은 정중하게 웃으며 상공에서의 기억을 더듬었다.

확실히, 허공에 수놓인 빛줄기가 거대한 장벽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감탄을 금치 못할 광경이었다.

“르윈 양도, 굉장히 인상깊었습니다.”

“…….”

설진운의 진중한 인사말에 하얀 머리카락의 소녀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무심코 소녀에게 물었다.

“혹시 아까…….”

멀리서 다가오던 비행괴수를 절반으로 갈라버린 그 기술. 대체 어떻게 쓰는 겁니까-

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 다분했지만, 설진운은 금세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설진운은 스스로의 실수를 바로잡으며 다시금 눈매를 번뜩였다.

서울이라는 지옥 한가운데에서 수백명을 이끌었던 지도자의 판단력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뤼미에르 집행관님. 아무래도 빨리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개활지는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됩니다.”

“아아, 네.”

“가급적이면 게이트와 멀어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특히 저쪽 농장지대에 열린 게이트 말입니다.”

주변을 살핀 뤼미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좋습니다. 일단 인근 쉘터로 합류하지요. 지금 열린 게이트도 게이트지만 애초에 이런 외곽지역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쉘터라면……?”

“초인들이 운영하는 일종의 도시 비슷한 거라고 알아두시면 됩니다. 어지간한 데는 탱크도 있지요. 아무튼 이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쉘터가…….”

가벼운 보호막으로 빗물을 차단한 그녀는 푸른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지도 하나를 꺼내들었다.

유럽의 모든 쉘터가 기록된 유일한 지도였다.

“……칼레.”

* * *

비가 내렸다.

무너진 도시의 노상을 한 여자가 걸었다.

여도연의 양복은 흠뻑 젖어 있었다. 빗물이 반이었고 핏물이 반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와이셔츠가 몸에 달라붙은 덕분에, 언뜻 호리호리해보이는 체형 속의 근육이 드러났다.

“…….”

그녀의 싸늘한 눈빛이 거리를 스쳤다.

시골 교외 대형마트의 깨진 유리창. 그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진열장은 텅 비어 있다.

쓰러진 가로등과 끊어진 채로 얽혀있는 전선. 전기가 끊긴 덕분에 누군가 감전되지는 않을 것 같다.

한때 가정집으로 쓰였을 것 같은 폐가廢家. 이제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으나, 빗물로도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이 무너진 담벼락에 남아 있다.

“…….”

담벼락 근처에 널려있는 하얀 부스러기들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제는 뭐가 플라스틱인지 뭐가 뼛조각인지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여도연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차분히 숨을 들이마시고, 또, 내쉰다.

도시가 죽어 있었다. 마치 서울처럼 말이다.

“후우…….”

지독한 냄새가 났다.

참으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죽음의 냄새다.

무너진 도시의 노상을 걷다 보면 이따금 죽음의 향기라는 것을 느끼고는 하는 것이다.

그래. 죽음의 향기.

영정 앞 제단에 피어오르는 향냄새, 빈객들의 담소 사이에 퍼져나가는 알코올 냄새 따위가 아니다.

“……쓰읍.”

썩은 나무 냄새, 미세하게 풍겨오는 화약 냄새, 이런저런 고깃덩이에 피어오른 곰팡이 냄새,

그리고,

이 지독한 물비린내로도 차마 씻어낼 수 없는 피비린내와, 놈들의 아가리에서 배어나는 참담한 시체 썩은 냄새다.

그리고 그 냄새는 위쪽에서 풍겨오고 있었다.

그녀의 건조한 시선이 담벼락 위를 향했다.

“…….”

키익-

사람 비스무리하게 생긴 무언가가, 쪼그려 앉은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빗줄기 사이로 노란 안광이 빛났다. 머리는 대충 길쭉하게 생긴 것이 사마귀를 연상시켰다. 두 손에 달려있는 낫도 말이다.

녀석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키기기긱-

죽어가는 귀뚜라미 울음 비슷한 게 몇 번 들리더니, 녀석의 입이 네 방향으로 갈라지며 곧장 여도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캬아아악-!

그리고,

여도연의 주먹이 파공음과 함께 휘둘러졌다.

아스팔트 바닥을 부수며 굴러간 괴수의 시체는, 정확히 머리 부분이 으스러져 있었다.

여도연은 시체의 가슴팍에 구둣발을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즈려밟았다.

으직-으지직-!

괴수의 갈비뼈가 무너지고, 시퍼런 마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

여도연은 허리를 숙여 마석을 향해 손가락을 쿠욱 찔러넣었다. 마석은 은은한 빛이 되어 그녀의 피부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키긱-!

바로 앞에서 4m에 달하는 놈이 그녀를 향해 앞발을 내리꽂고 있었다.

카드드득-!

한 발 뒤로 물러서자 그녀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낫이 틀어박혔다.

이후로도 커다란 낫이 그녀를 향해 쇄도했으나, 여도연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회피하며 무덤덤한 시선으로 괴수를 바라보았다.

“…….”

괴수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죽이려 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방금 죽인 놈이 새끼였던 모양이다. 어쩐지 어벙하게 사람 구경하고 있던 꼬라지 하고는.

“……쯧.”

이런 덩치랑 싸우면 양복을 더 못 쓰게 된다. 커다란 놈을 주먹으로 때려봤자, 이 커다란 덩치가 휙 날아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대형종을 상대로 한 여도연의 공격은, 마치 바늘을 찔러넣는 것과도 같았다.

사람이 거대한 괴물을 때려봐야 괴물이 날아가지는 않는다. 주먹이 살을 뚫고 박힐 뿐이지.

그리고, 그러면 대체로 옷을 버리게 된다.

여도연은 잽싸게 손을 들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푸슉-!

괴수의 머리에 바람구멍이 뚫렸다.

총소리가 들려올 즈음에는 괴수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던 괴수가 완전히 쓰러졌을 즈음에는, 저어 뒤쪽에서 백업을 맡던 여다솔과 조정식이 도착했다.

어디 마트에서 이상한 걸 주워다 입었는지, 두 어린 헌터들은 세트로 노란 병아리 우비를 차려입고 있었다.

여도연이 피식 웃었다.

“다솔이. 이건 니가 먹어라.”

“으으……. 피 묻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네가 잡은 거니까.”

“아직 꿈틀대는데…….”

징그러워서 조금 꺼림칙하다는 반응에, 조정식이 잽싸게 튀어나와 괴수의 가슴팍에 손을 박아넣었다.

“그럼 내가 먹지. 뭐.”

“야! 쓰레기야!”

여다솔이 조정식에게 개머리판을 붕붕 휘두르기 시작했을 무렵, 설진운이 이끌던 타격대가 도착했다.

여도연은 살짝 손을 들어 인사했고, 설진운은 곱게 접은 장우산을 칼처럼 쥐고서 다가왔다.

소년이 담담하게 물었다.

“총소리가 나던데요.”

“이미 잡았어. 큰놈 하나. 작은 놈 하나.”

여도연이 구둣발로 괴수의 시체를 툭 쳤다.

그리고 조언했다.

“새끼 친 거 같으니까 조심해라.”

“……마침 지하실에 있던 알집을 불태우고 오는 길입니다.”

“잘됐네. 그래도 몇 마리 더 있을 수도 있어. 속도는 나름 빠르니까 사이커들한테 조심하라 그러고.”

설진운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뤼미에르 집행관이 이끄는 본대가 칼레 인근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도 슬슬 합류하죠.”

여도연과 설진운을 필두로 한 몇몇 헌터들은 본대의 안전을 위한 기동 타격대 역할을 맡고 있었다.

헬기 조종사, 통역사, 피채원 같은 민간인을 일부 포함한 본대는, 염동력자들의 방진을 위시로 온갖 것들을 쳐부수면서 나아가고,

소규모로 어지간한 괴수를 상대하는 게 가능한 올라운더들이 주변을 떠돌면서 정찰 겸 소탕을 병행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유럽과 한국 합쳐 100명에 달하는 대인원이 약 20km 거리를 주파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5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칼레에 도착했을 무렵,

도시는 멸망을 앞두고 있었다.

* * *

잿빛 하늘에 폭풍이 휘몰아치고, 거센 빗줄기 사이로 괴수들이 들이닥쳤다.

뒷골목을 날렵하게 떠돌던 붉은 안광이, 도망자의 허리를 물고서 짐승처럼 흔들어대며 숨통을 끊었고,

하늘에서 들이닥친 괴조가 거대한 부리로 사람의 머리통을 툭 툭 터뜨렸다.

현실이라고는 차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었다.

땅에 떨어진 빗줄기는 핏물에 섞여 흘렀고, 물비린내인지 피비린내인지 구분되지 않을 비참함이 도시에 퍼져나갔다.

잿빛 하늘 아래서 도시가 죽어가고 있었다.

갈 길 잃은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늘 그랬듯이,

성녀가 나타났다.

“……허.”

잔해더미를 들추고 사람을 끄집어내던 여도연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빛이었다.

폭풍이 멈췄다.

거대한 마력이 도시를 덮었다.

회색 하늘에 새로운 태양이 떠올랐다.

찬란한 광휘가 도시를 비추자, 사람들의 상처에 조금씩 새 살이 돋아나기 시작했으며, 헌터들의 능력은 더욱 맹렬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도시를 덮은 거대한 보호막이 하늘에서 들이닥치는 괴수들을 막아냈고, 이따금 뿜어져나온 광선은 저어 하늘에서 들려오던 괴성을 침묵시켰다.

“…….”

결국,

사람들의 눈빛에 무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성녀가 열아홉 번째 도시를 구원하는 순간이었다.

* * *

[……수백만 인파가 충청 방어선 일대에 몰려들었습니다. 북한의 시민들입니다. 이들은 국군과 대치하고 있는 것으로-]

[……수많은 탈북민들이 남한으로의 이주를 희망하는 가운데, 국민당 이호정 원내대표는 보다 침착하고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이러한 소요 사태가 지속되며 부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선양 게이트의 여파는 자강도 일대를 덮친 것으로 알려졌-]

소요 사태라.

수백명에 달하는 대규모 압사壓死와, 탱크를 몰고 들어오던 인민군이 포격당한 것도 나름의 소요 사태라면 소요 사태일 것이다.

아무래도 양판석이 언론을 꽤나 잘 틀어잡고 있는 모양이다.

“……흐음.”

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의 상황은 간단하다.

북한으로 밀고 들어오는 괴수를 피해, 북한 인민들은 남쪽으로 내려왔고, 우리는 충청 방어선에서 그들을 막아내고 있다.

이후의 상황도 간단하다.

중국은 곧 북한 인민들을 구조하겠답시고 중국 인민해방군을 북한에 진군시킬 것이다. 애초에 괴수를 밀어넣은 녀석들이 말이다.

“…….”

확실히, 여러모로 좆같은 상황이었다.

북한 인민을 남한에 들여보내는 순간 식량-정치-주거-치안-문화-국방을 아우르는 수많은 트러블이 발생할 것이 뻔했고,

북한 인민을 남한에 못 들어오게 막아내는 순간 양판석은 수천만을 학살한 도덕적 흠결을 지니게 된다.

“나. 원…….”

다만 여기서 하나 짚히는 점은, 이런 개같은 상황을 풀어내는 데에는 내가 적임자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내가 지금 돌아가는 모든 상황을 알게 된다면, 양판석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가 산 인생이 그랬다.

일종의 자기과신일수도 있겠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특기라는 게 있는 거고, 절대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뭔가를 해내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한데, 양판석이 그걸 모르는 사람이 아닌데, 왜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는 걸까.

“…….”

어쩌면.

아주 어쩌면 말이다.

지금 이 개같은 상황 자체가 우리의 역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이 짜놓은 각본 상에서, 대한민국이 맡은 역할 말이다.

내가 한껏 깽판친 덕분에 미국이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한국을 아군으로 끼워줬다 그러지 않았던가.

만약 그 과정에서 한국이 무언가를 지불했다면, 만약 그래서 양판석의 손발이 묶인 거라면,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현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그런 판단이 선 순간, 나는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아, 예, 장관님. 무슨 일이십니까?

“감 기자님. 혹시 시간 되십니까? 다소 급한 일인지라. 조금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저야 뭐 근신먹고 자숙하는 입장인데요. 하하하! 어디든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러면 GS 그룹 1층 로비에서 뵙지요.”

-……감자탕집은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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