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1 - 국경없는 기사회 (12)
충청 방어선.
제2 작전사령부 참모장이었던 김두식이, 서울 포위망 붕괴 이후 와해된 국군을 기워 붙여 만들어낸 방어망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가장 큰 요소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충청 방어선 덕분에 사람들은 다시금 괴수에게서 ‘비교적’ 안정을 되찾았고, 김두식은 군부의 실력자로 부상하여 차후 예편될 국군의 충청군구 군구사령관으로 보직이 예정되었다.
그러나, 충청 방어선이라는 이름에 무색하게, 그곳에 거대한 장벽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지형에 따라 바리케이트가 설치된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철조망이나 망가진 버스를 연달아 눕혀놓은 게 끝이었다.
게다가 충청 방어선은 이따금 꿈틀대며 모습을 바꾸기도 했다. 어떤 지역에선 조금씩 위로 북상하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애초에 충청 방어선이라는 게 지극히 복잡한 모양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럼에도, 서울 사태가 끝나고 충청 방어선이 안정화된 이후, 오발, 오폭, 폭행치사, 자살로 사망한 92명의 장병들을 제외한다면, 괴수에 의한 국군 사망자는 고작 5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게 가능한가.
충청 방어선이란 개념은 실제로 존재하는 장벽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일종의 방어전술과 진형배치를 가리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충청 방어선은 최적의 장소에 배치된 자주포들과, 완벽하게 장악된 제공권과, 정교한 방공망을 기틀로 한, 일종의 화망火網이었다.
그러니 괴수는 충청 방어선에 막혀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충청 방어선에 들어오면 곧장 집중포격을 받고 처리되는 것에 가까웠다.
충청 방어선은 그야말로 김두식이라는 장군이 정교하게 조율한 전략적 개념이었던 것이다.
즉,
[……정부에서 충청 방어선에 대규모 장벽을 설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진기복 국방부 장관은 오늘 오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의 긴급명령이 발동되었다는-]
[……국군은 방어선 이북에서 내려오는 국방에 대한 모든 위협을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일각에서는 본 조치가 북한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충청 방어선에 대장벽을 세운다는 소리는.
꼭 괴수를 막겠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 * *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사람은 흔들린다.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유럽은 한국발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일희일비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채원은 항상 호텔의 옥상에서 묵묵히 런던을 내려다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의 변화를 체감하기엔 충분했다.
소녀의 세상은 쏜살같이 변해갔다.
가장 처음, 초대형 게이트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 북부에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God save the Queen!”
“Long live our noble Queen!”
“Send her victo-rious!”
영국인들은 환호하며 길거리로 뛰어나왔다. 우중충한 런던의 노상에 축제의 물결이 퍼져나갔다.
수백만 인파가 하나되어 제창한 영국의 국가는 퍽 웅장한 멋이 없지 않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인파는 사라져버렸다.
이번 사태가 초대형 게이트가 아닌 수많은 게이트의 동시개문 형태로 발생할 것이고, ‘영국 또한 위험하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작은 소녀는,
“…….”
그저 묵묵히 세상이 꿈틀대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런던의 거리를 채웠다.
그들의 애타는 함성은 호텔 옥상까지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간절한 마음은 작은 소녀에게 닿았다.
[떠나지 말아달라.]
“…….”
그러나 오늘은 피채원이 영국에서 떠나는 날이었다.
비단 그녀 뿐만이 아니다. 영국에 파병된 대다수의 헌터들이 프랑스 본토로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한국과 미국의 모든 발표가 ‘진정한 위협은 프랑스를 향할 것’이라 예고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조금 찝찝하네.”
“뭘 어쩌겠어요. 더 심각한 곳으로 가야지.”
“그래도…….”
헌터들의 반응 또한 영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다들 동의하는 모양새였다. 이건 보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결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런던을 떠나는 마지막 날에도.
호텔 옥상의 난간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작은 소녀가 있었다.
먹구름 낀 하늘 아래, 수십만 명의 인파가 호텔을 둘러싸고 있었다. 누군가는 하늘을 향해 권총을 쏘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의 무장경찰들은 호텔로 밀고 들어오려는 수십만의 인파에게 고무탄과 물대포를 쏘아댔다.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영국의 공권력은 헌터를 보호했다.
“…….”
영국 정부는 예상외로 헌터들의 귀국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피채원이 생각하기에는 아마 정치적 협상이 오간 모양이었다.
“아, 피 비서관님.”
“……네. 무슨 일이시죠?”
“상황이 상황인지라 공항까지 이동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아서, 곧 수송헬기가 도착한다고 합니다. 오늘 내로 샤를 드 골 국제공항까지 도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오죽하면 헬기까지 보내주겠는가. 프랑스의 파멸을 방조하려던 영국 정부도, 어지간히 몸이 달아오른 모양이다.
아마 그 치들은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호의 또한 그 일환이겠지.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건 바로 자신이었다.
“…….”
기분이 이상했다.
정치에 대해 알아갈수록 무력함이 덜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 지독한 무력감은 대체 어디서 온다는 말인가.
바꾸지 못했던 옛날과는 달리, 피채원은 세상을 충분히 바꾸어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영국을 떠나는 소녀의 발걸음에는 진득한 무기력이 배어났다. 소녀를 잡아 세우는 수백만의 아우성이 있기 때문이었을까.
허나, 소녀는 묵묵히 헬기로 향했고, 결국 그 발걸음을 막아세운 건, 익숙한 얼굴의 수염쟁이였다.
“Hey.”
“……아.”
“…….”
“…….”
먹구름 낀 하늘 아래, 다니엘과 피채원은 한참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피채원이 그를 보고 움찔거렸고,
다니엘은 담담히 손을 내밀었다.
“Farewell.”
”…….”
피채원은 그녀 앞에 내밀어진 핑크색 고무장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 커다란 손을 맞잡고서,
살짝 흔들었다.
* * *
헬기가 잿빛 하늘로 날아올랐다. 런던의 모습이 점차 멀어진다.
“괜찮냐?”
“……아, 네.”
여도연은 런던을 아련하게 내려다보던 피채원의 안색을 살폈다. 아무래도 며칠 밤을 지새운 모양인지 눈 밑이 시꺼맸다.
쯧, 여도연이 가볍게 혀를 찼다.
“자.”
“네……?”
“자라고.”
여도연이 피채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피채원의 머리가 여도연의 어깨에 부딪혔다.
“……아야.”
솔직히, 여도연의 어깨는 바위처럼 딱딱했다.
그래도 따뜻한 건 따뜻한 것이었던지라,
피채원은 저도 모르게 스르륵 눈을 감았다.
“…….”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곤히 잠든 피채원을 깨운 건 미사일 터지는 소리였다.
“……!”
굉음轟音과 함께 헬기 기체가 거칠게 흔들렸다. 피채원이 화들짝 놀라 휘둥그레 눈을 떴다.
본능적으로 곤두세운 날카로운 기감이 순식간에 주변인의 심리를 훑었다. 그러나 이 폭발음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헬기 안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곧 조종사가 무전을 전달받았다. 그리고 외쳤다.
“Monster spotted!”
헬기 안이 순식간에 헌터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찼고, 피채원은 잽싸게 뒤돌아 조그마한 창문 너머를 확인했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여기는 바다 위쪽이었다.
“……!”
헬기 위쪽으로 전투기 하나가 순식간에 지나갔고, 저어 멀리서는 무언가 불타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수많은 점들이 보였다.
조종사는 계속해서 무전을 거듭했다.
“Blood bats? No way! This is B-24 Airspace! Please check where I am.”
그러나 조종사가 무전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Fu-”
검은 비행체가 헬기 앞으로 쇄도했다. 헬기가 크게 흔들리며 고도를 높였다. 헬기 아래쪽으로 비행체가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뒤쪽에서 폭발음이 들리는 것을 보니 호위기에게 격추당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날아드는 비행체는 한둘이 아니었다.
“Watch your three!”
“Mayday! Mayday! Lightning two down!”
조종사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기체는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고, 기체가 흔들릴수록 헌터들의 마음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창문 너머에서 재앙이 도래했다.
“옆에! 옆에!”
“저거 뭐야 썅!”
“방향 틀라 그래요! 빨리!”
저어 멀리 지나가던 작은 점들이, 이내 거대한 박쥐 떼처럼 헬기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헬기 프로펠러 소리만 울려퍼질 따름이었지만, 이제 육안으로 확인되기 시작한 그 친숙하고도 기괴한 모습에, 헌터들은 지긋지긋한 비행괴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호위기의 미사일이 파공음을 흘리며 날아가 잿빛 하늘에 커다란 불꽃을 터뜨렸지만, 거대한 무리의 일부만을 바스라뜨릴 뿐, 거대한 살덩이와 이빨의 무리는 폭발음에 이끌려 헬기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존나 튀라 그래! 빨리! 저 새끼들 어차피 느려서-”
“괜히 방향 틀었다가 포위되면 어쩌려고요! 방금 앞쪽에서 들이닥친 거 못 봤어요?!”
“터, 터지기 전에 뛰어 내릴까요? 어차피 이정도 거리는 수영으로도-”
“바다에는 괴물 없냐 새끼야!”
당황한 몇몇 헌터들이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헬기는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헬기가 터지고 헌터들이 바다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대부분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하늘과 바다에서 싸울 수 있는 헌터들은 몇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몇 명은 있다는 소리였다.
“박 팀장님! 외부 배리어 준비해 주십시오! 그리고 아름 씨랑 혜주 씨도 창문 바깥 주시하세요!”
설진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응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다시금 안정을 되찾았다.
“김 팀장님! 저쪽 추락하는 괴수 시체에서 불덩이 인터셉트 가능하십니까!?”
“……됐으!”
“일단 잡고 계시다가 괴수 오면 바로 날리세요! 그리고 정욱 씨는 프랑스쪽 헬기에 텔레파시 부탁드립니다! 당장 배리어 치고 염동술사들 중심으로-”
그때였다.
“……설 대장! 저기!”
앞서가던 프랑스측 수송헬기의 창문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어둑한 잿빛 하늘을 샛노랗게 물들였다.
압도적이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허공에 나타난 거대한 역장이 3시 방향에서 접근하던 비행체들을 차단했다.
괴수들이 허공에 부딪혀 추락한다.
그를 지켜보던 여도연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새어나왔다.
“뤼미에르……!”
설진운은 지체없이 수송헬기 조종석 쪽으로 나아가 상황을 확인했다.
3시 방향에서 다가오던 거대한 무리는 잠시 차단되었으나, 이곳저곳에서 비행괴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몇몇 괴수는 헬기로부터 도망치고 있었으나, 몇몇 괴수는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
프랑스측 헬기에서 누군가 뛰어내렸다.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던 누군가가, 순식간에 균형을 잡고 허공에 우뚝 섰다.
하얀 머리카락이 거친 바람에 나풀댔다.
르윈이었다.
소녀는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괴수를 직시했다.
하늘을 헤엄치는 상어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흉측한 보라색인 데다가 옆구리를 따라 눈알이 박혀있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상어가 순식간에 가속하며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고, 소녀는 상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때, 설진운의 눈에 무언가 보였다.
사실 느껴졌다고 하는 게 정확하리라.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항상 사용하는 마력 형태였으니 말이다.
르윈의 손에서 퍼져나온 마력의 파장이, 입을 벌린 채 돌진하던 상어의 몸을 절반으로 갈라버렸다.
상어는 검은 내장과 피를 흩뿌리며 바다 위에 곤두박질쳤고, 검푸른 마석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르윈의 손에 흡수되었다.
헬기 근처로 날아온 하얀 소녀는,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수평선의 끝자락에, 육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 * *
헬기가 착륙한 건 ‘Le Greis Nez’라는 프랑스 최북단의 해안마을이었다.
애초에 국토의 80%가 평야인 나라였으니, 헬기가 착륙하는 데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드넓은 농토는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졌고, 터덜터덜 헬기에서 내려온 피채원은 곧장 바닥에 쓰러져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헬기가 괴수를 피하려 수십 분 동안 아찔한 회피기동을 거듭한 까닭이었다.
그때.
투둑 - 툭 -
땅이 조금씩 젖어들기 시작했다.
소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
비가, 내렸다.
잿빛 하늘이 조금씩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눈물은 어느새 폭풍우가 되어 지상의 피를 씻어내렸다.
거센 빗줄기가 소녀의 머리카락을 적시고, 소녀의 얼굴과 목을 타고 뚝 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녀는 감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건, 참으로 익숙한 풍경이었으니까.
“…….”
천둥소리가 세상에 진동하고,
잿빛 하늘이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울부짖던,
그 여름의 끝자락에,
서늘한 푸른빛이 잿빛 하늘에 수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