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29화 (129/296)

EP 21 - 국경없는 기사회 (11)

미국이 제창한 개념은 간단했다.

‘세계 시민을 구하기 위한 적극적 군사행동.’

괴수에게서 자주국방이 불가능한 나라의 시민들을 돕기 위해, 타국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 괴수를 잡아줄 수 있다는 소리였다.

실제로 미군은 멕시코 국경 인근의 괴수들을 소탕하고 사람들을 구출했다. 멕시코는 초인들로 이루어진 마약 카르텔의 내전으로 인해 망가져 버린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중국이 대만을 실효지배하고 있답니다.”

“허어…….”

“랴오닝 항모전단이 동남아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했고요.”

침략의 명분으로 이보다 더 좋은 핑계가 없었다는 거다.

* * *

‘어떤 나라가 괴수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인접국이 그 나라의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해야 한다.’

‘약소국의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강대국이 나서야 한다.’

‘이건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한 인도주의적 방책이다.’

이게 바로 미국과 중국의 논리였다.

그리고,

“……약 1시간 전, 인민해방군이 선양 인근에서 게이트 내부를 향해 화력을 투사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요?”

“……선양 게이트가 폭주했습니다. 북한 본토까지 괴수가 도달하는 데에 대략 64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중국이 선양 게이트를 폭주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온 건, 미국의 공식성명 이후 12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야아…….”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소식에 저절로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이가 갈렸다.

“씹새끼들…….”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새어나왔고, 내 앞에 서 있던 국정원 요원은 바짝 얼어붙었다. 나는 애써 표정을 풀며 그녀에게 손짓했다.

“아아, 죄송합니다. 선양이면, 랴오닝 성 맞지요? 중국 북부.”

“아,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북한 바로 위쪽이고요.”

“……네.”

설명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차분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선양은 중국 북부의 대도시다. 지름 100m 이상의 게이트가 3개나 존재하는 저주받은 지역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북한이 처음으로 핵폭탄을 사용했던 이유는, 사태 초기에 중국이 선양 지방의 괴수들을 한반도에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그 짓거리를 또 할 줄은 몰랐는데…….”

당연히 중국이 선양 게이트를 폭주시킨 이유는 뻔했다.

“……북한이 초토화된 이후에. 북한 인민들 구하겠답시고 인민해방군을 보내겠군요?”

“…….”

“이야아! 외통수네, 외통수야. 이거 이거 우리도 서울에서 나온 거 북한에다 갖다버린 전적이 있으니, 뭐라 하지도 못하겠고. 하하하!”

어째 상황이 미쳐 돌아가니 평소보다 웃음이 많아진 것 같다. 나는 웃는 상태 그대로 히죽이며 요원을 돌려보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이만 돌아가 보세요.”

“아, 넵……!”

요원은 잽싸게 내 사무실에서 떠나갔다. 나는 계속 히죽거리며 닫힌 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하!”

헛웃음이 멈추지를 않는다.

“하, 하하, 하하하…….”

나는 한참동안 책상을 두드리며 실성한 것처럼 히죽거렸다. 아니, 반쯤 실성해 버린 거 맞나. 그래도 상관없다.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니 나 혼자만 미친 건 아니었으니까.

“이야아. 씨발…….”

어째 세상에 미친 새끼들밖에 없냐.

하긴. 세상이 미쳤으니 사람이 멀쩡하겠나.

게다가 원래 정치는 미친놈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미친놈들이 미친 세상에서 미쳐 날뛰고 있으니 안 미치고 배기겠는가.

나는 떨리는 손으로 책상을 열었다. 그리고 라이터와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콜록! 크흐흐……!”

실로 오랜만에 담배에 불을 붙인다. 여전히 따갑지만 어째 기침이 덜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한참동안 국가주의의 비정함을 곱씹었다.

그래. 자국의 이익을 위해선 얼마나 죽어나가든 상관없다 이거지.

훌륭한 정치인들 나셨다.

“……허.”

사실 나도 그 사상 앞에 떳떳한 사람은 아니었다. 정치인이 원래 이런 거 하라고 앉혀놓는 직종이기도 했고 말이다.

당장 우리도 비슷한 짓 많이 하지 않았던가. 서울 사태 당시 괴수를 북쪽으로 돌려 버린 거라던가, 각성제 기술 독점하고 주변에 강짜부린 거라던가.

단지 스케일과 과단성의 문제일 뿐이다.

본질적으로는 같다.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다.

누가 더 멀리 나가느냐의 문제일 뿐이지.

나는 그리 생각하며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콜록!”

물론 역사가들은 이를 굉장히 비열하고 제국주의적인 생각이라 평할 것이다. 실제로도 맞는 말이다. 도덕적 측면에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중국이든, 미국이든, 다들 자기네 할 일 하는 거다.

당한 놈이 병신이지.

그리고 나는 이게 비겁하다고 징징대야 할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든 우리나라가 병신이 되지 않게 만들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 시점부터, 내 머리 속에는 여러 ‘생각’들이 스쳐갔다.

그리고 으레 정치인의 생각이라는 게 그렇듯, 굉장히 무겁고, 또 무서운 종류의 것이었다.

국군을 북상시켜 북한의 핵심 지역들만 선점하고 나머지는 버려야겠다는 생각부터,

북한 인민들을 받아 충청 방어선 바깥 지역에서 2등 시민으로 대우하며 노동력을 충당하겠다는 생각이라던가,

중국군의 진격로로 예상되는 지점에 핵폭탄을 미리 투하해서 방사능 낙진을 뿌려놓겠다는 생각까지.

이 미친 세상에서, 저 미친놈들처럼 살짝만 선을 넘어 생각하니 편리한 방법은 참으로 많았다.

그래. 기어코 피를 봐야 한다면, 손에 묻히는 건 내 피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뭔 짓을 해서든 간에 다시금 아득바득 기어 올라가서, 언젠가 싸그리 회를 쳐버릴 것이다.

나는 그렇게 충혈된 눈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담배를 뻐끔거렸다.

“…….”

어느새 기침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내 머리 속에서, 괴수를 막기 위한 충청 방어선이, 어느새 북한 피난민을 막기 위한 것으로 개조되고 있을 무렵,

---!

책상 구석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담배를 떨어뜨리고, 고개를 돌려 핸드폰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이름이 쓰여 있었다.

“…….”

피채원.

* * *

영국 수상과 대면한 이후.

피채원은 줄곧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런던의 하늘은 딱히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우중충했다.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말이다.

“하아…….”

피채원은 줄곧 한숨만 내쉬며 속을 달랬다. 그러나 그런 소녀의 마음도 모르고, 헌터들은 잔뜩 신나서 방방 뛰는 모양이다.

“이야아. 영국 뉴스에서도 우리 존나 빨아주네.”

“으흠……! 프랑스에서 제대로 한 건 했잖아요?”

“이 기세로 영국 조지고 귀국합시다!”

그들은 국제사회의 관심을 듬뿍 받고 있었다. 이건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여론의 문제였다. 모든 뉴스에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인스턴트 게이트에선 보통 강력한 단일개체가 나오는데, 파리 중앙에 A급 4마리가 퍼져나갔는데도 400명밖에 안 죽었다는 둥.

영국 초대형 게이트의 전조를 훌륭하게 막아냈다는 둥. 남의 나라를 위해 헌신적으로 싸워준 정신이 고결하다는 둥.

어찌 보면 그들이 영국을 위해 싸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끔 몰아가는 선동이었지만. 애초에 싸우려고 온 양반들이니만큼 그리 신경 쓰지는 않는 눈치였다.

게다가, 파리는 EU 중앙에서 통솔하는 유일한 쉘터이자, 유럽 본토의 물류를 총괄하는 요충지였으니, 정부 입장에선 파리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홍보해야 했으니 말이다.

호의적인 뉴스의 논조에는 아마 그런 영향도 있을 터였다.

“…….”

확실히.

이제 피채원도 이 정도의 정치적 감각은 갖춘 상태였다.

물론 그걸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어이.”

“…….”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피채원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결국 여도연이 소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뭐하냐?”

“…….아.”

피채원은 멍한 눈빛으로 여도연을 올려다보았다.

“뭐해.”

“…….”

그러나 소녀는 말이 없다.

결국 여도연은 피채원이 바라보던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도연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 피채원이 올려다보던 흐린 하늘이 아니라, 저어 아래에 호텔 입구에서 피켓을 들고 웅성이던 사람들이었다.

“으음……?”

여도연은 피켓에 적힌 문구를 보고 히죽 웃었다.

Thank you.

Please save us.

“어째 우리가 기대를 좀 많이 받는 모양인데?”

“…….”

“힘내자고.”

“……도연이, 언니.”

피채원이 더듬거리며 여도연에게 물었다. 살짝 과하게 차분하던 평소와는 달리 상당히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만약에요. 우리가 돌아가야 한다면, 저 사람들 반응이 어떨까요?”

“……뭐?”

“그러니까. 그…….”

소녀가 저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간절한 모습을 본 순간, 소녀는 뭔지 모를 고독함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

사실, 소녀가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이유는, 저어 아래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에게 시선이 가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소녀는 그 누구보다 저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차마 어린 아이들에게 죽을 날을 기다리라 말할 수 없어서, 저어 이름도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목이 터져라 고맙다고 소리치는 그 부모들의 심정을,

피채원은 세상 그 누구보다 마음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바로 그래서였다.

그들을 똑바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소녀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른이 되어 올려다본 하늘은 푸르지 않았다.

잿빛이었다.

* * *

……여보세요.

네, 장관님.

드릴 말씀이 조금 있어서요.

……게이트는 영국에 열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영국에만 열리지 않을 거예요.

……네. 최소 67개.

그리고 최대 140여 개의 중대형 게이트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확률적으로 영국 본토에 1개가 열린다면, 프랑스 북부에 4개가 열리고요.

……네. 미국과 영국은 정확하게 계산된 수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숨겼죠.

그 사람들은 파리를 멸망시키려고 하고 있어요.

……파리는 EU 중앙군이 유일하게 다스리는 쉘터죠. 그 이유는 유럽 전역에 물자를 보급하기 때문이고요.

……파리를 중심으로 한 보급망이 무너지는 순간, 유럽에 물자를 보급할 수 있는 거점은 영국뿐입니다. 정확히는 런던을 통한 항공보급망만 남죠.

당연히 파리가 무너지면 영국이 유럽을 주도하게 되고, 그리고 그 영국은 미국의 하수인과 다름없는 처지니까요.

그러니까, 그…….

……미국은 유럽을 제압하기 위해서.

……영국은 유럽의 맹주가 되기 위해서.

파리를 멸망시키고, 심지어 영국 남부까지 괴수에게 초토화되는 걸, 방치하려는 겁니다.

그래야 초인연맹이 해체되니까요.

……아, 네.

제 생각을 물으신다면.

영국에 있는 헌터들을 전부 프랑스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 *

[속보입니다. 한승문 장관이 긴급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초상관리부에서 개발한 괴수 탐지 시스템에 따르면, 영국에 열릴 것으로 예상되던 초대형 게이트가, 프랑스 북부에 열릴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미 국방부는 즉각적으로 공동연구를 제의하며, 연구인력을 포함한 대규모 사절단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SIDE EP - 모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잠들지 못하는 밤의 일이었다.

나는 관저의 베란다에 나와 정처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둡고 텅 빈 하늘에는 별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거실에 틀어놓은 TV에서는 아나운서라는 작자들이 나와 거짓을 보도했다.

물론 그걸 시킨 사람은 우리였다.

[……미국 외교사절단의 대표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은 양판석 대통령과 긴밀한 회담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속보입니다! 펜스 미 부통령이 호루스 시스템의 오류를 시인했습니다! 이로써 초대형 게이트가 프랑스 북부에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점차 가시화되고-]

[……한미 양국은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재난들에 발맞춰 대응하기 위해 테스크포스를 설치했습니다. 양국 과학자들은 양측의 연구 자료를 대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역대 최악으로 예측되고 있는 유럽 사태가, 초대형 게이트가 아닌 산발적 개문의 연속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추측이 제기되었습니다. 초상기술연구본부의 천화란 수석은-]

“…….”

그래.

이걸로 된 거다.

* * *

우리는 미국의 음모를 알게 되었지만 곧장 그것을 폭로하지 않고, 지극히 일부만 폭로함으로써 미국을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였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그 협상의 결과였다.

미국의 오보誤報는 호루스 시스템의 관측오류였고, 한국이 그를 지적해주자 미국이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며, 한국과 미국은 사이좋게 손을 잡고 올바른 재난예보를 도출했다.

적어도 뉴스로 확인한 상황으로는 그렇다.

자세한 건 내일 아침 국무회의에서 들어야겠지만, 이 사건은 아무래도 이정도 선에서 마무리된 모양이다.

양판석과 외교부가 어지간히 처리했을 터다.

그러니 이제 발 뻗고 자면 된다.

그러나 어떻게 이 상황에 잠을 자겠나.

죽을만큼 피곤하긴 했지만 뭔 짓을 해도 잠들 수가 없었다. 피곤한 줄도 모르고 피곤하게 살았더니 몸이 피곤을 일상으로 받는 모양이다.

그렇게 밤늦게 카페인만 홀짝이고 있던 터였다.

똑- 똑-.

도어락에 인터폰까지 달려있는 문짝에서 정갈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런 고루한 짓을 할 양반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재빨리 실내용 의족을 장착하고서, 옷매무새를 정리한 다음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빼꼼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어어. 안 자고 있었나?”

“……들어오시죠.”

“현관에서부터 홀애비 냄새가 나는군. 집에 페브리즈 같은 거 좀 없나?”

* * *

양판석이 내 관저에 쳐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대뜸 냉장고를 열어 온갖 맥주와 주전부리를 꺼내든 것이었다.

“어째 우리 집 냉장고랑 배치가 비슷하구만.”

“……제가 항상 정리해드렸잖습니까.”

“아아, 그랬지.”

양판석은 히죽 웃으며 오징어 버터구이 봉투를 뜯었다.

“이제 1년 겨우 지났는데. 자네나 나나 참 많이 바뀌었어. 오죽하면 세월이 가끔은 야속하다니까?”

혀에 기름칠한 것처럼 이야기가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을 보니, 냉장고 운운할 때부터 대화의 흐름을 계획해둔 모양이었다.

그래. 양판석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항상 헤실대고 다니지만 실은 그 누구보다 철두철미한 사람. 항상 누군가를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는 배후자.

떨떠름한 인간상일 법도 했지만, 나는 그에 대한 존경과 친애를 담아 살풋 미소 지으며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많이 바뀌긴 했죠.”

“그래. 평의원에서 대통령이라니. 출세했군.”

“그래도 좋게 바뀐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하다만.”

앓는 소리를 내며 거실바닥에 주저앉은 양판석이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세상은 영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말일세.”

주전부리를 깔아놓은 양판석은 풀어헤친 넥타이를 소파에 툭 올려놨고, 나는 술잔을 가져와서 공손히 그의 잔을 채웠다.

그는 술자리에서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항상 잔을 크게 기울이고서는 정작 한 모금만 마시는 버릇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드셔도 괜찮은 겁니까?”

“어어! 그럼! 괜찮고말고!”

“……그래도-”

“사람이 가끔은 취할 때까지 마셔야 간이 튼튼해져요.”

“……아, 예.”

양판석은 순식간에 술잔을 비워내고서, 금방 불콰해진 얼굴로 입꼬리를 히죽거렸다.

“그래. 승문이. 내가 가장 높게 평가하는 정치인이 누군지 아나?”

글쎄다. 당장 여러 이름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유재광. 심지어 김영삼, 이회창, 이인제까지.

나는 고심 끝에 답을 내놓았다.

“……김종필 총재 아닙니까?”

“아베 신조.”

이런. 예상 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역시 사람을 놀래킬 줄 아는 양반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양판석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가장 높게 평가하긴 하지”

“……아베를요?”

“으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우리나라에 손꼽히는 난제들이 있지 않았나? 경제, 저출산, 고령화, 청년실업, 등등…….”

“아, 네.”

“지금 생각하면 그 정도는 문제 축에도 안 들어가는 거긴 했지만. 나름 그때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단 말이지. 다들.”

“그랬죠.”

“아니야.”

양판석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어떤 문제든 간에 거시적 관점에서 해결하자면 곧잘 답이 나와.”

“……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그는 잠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려면 아버지를 해고하고 그 자리에 아들을 넣으면 되지 않겠나?”

“……네?”

“덕분에 노인들 삶이야 팍팍해질 거고, 겨울에 폐지 줍다 얼어죽는 사람도 많아지겠지만, 대부분의 노인은 경제활동 인구가 아니지 않나?”

나라에 쓸모없는 잉여인력이니 죽든 말든 놔둬도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나는 순간 골 때리는 기분으로 양판석을 쳐다봤지만, 양판석의 말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저출산을 해결하고 싶으면 20대 남성이 기득권을 잡기 쉬운 사회를 만들면 된다네.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살기 힘들도록 말이야.”

“……예?”

“아니면 둘 다 조지는 방법도 있지. 주택 임차료만 조금 건드리면 간단해져. 혼자서 집을 못 구하는 사회를 만들면 맞벌이 부부가 생기지 않겠나?”

“……어, 으음.”

“국민연금 의료보험 박살나는 것보다야 낫지 않나?”

“……그, 글쎄요.”

해결사 양판석은 이후로도 여러 국정과제들을 술술 해결해 나갔다. 물론 말로만 말이다. 그리고 말에서 끝나야 하는 일들이기도 했다.

“그래. 경제라. 경제 살리는 법도 간단하지. 법인세 낮추고 원가 절하시키면 되네. 수출하는 대기업만 잘 도와주면 GDP가 쑥쑥 올라갈 거야.”

“…….”

“물론 원화 가치 떨어지면 물가야 오르고. 서민들 삶도 팍팍해지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우리같이 수출에 목숨 건 나라에선 원가절하가 유리한데 말이야.”

“……그렇긴, 하지요.”

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싸악 가시고, 어느새 웃음 같지도 않은 웃음이 어색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무렵에서야, 양판석은 한층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 물론 실제 정치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지. 가급적이면 말이야. 왜겠나?”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그딴 식으로 하면 지지율이 박살나거든.”

아. 그래. 그렇군. 정치는 국민이 아니라 지지율을 바라보고 하는 거였다.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까먹다니. 나도 아직 멀었군,

양판석은 내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말을 이어갔다.

“이거 아이러니하지 않나? 나라를 위한 일을 하면, 지지율이 떨어지는 거 말일세. 결국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순 없는 게야.”

“……그래서 실제 정치는 어떤 식입니까?”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한 약을 쓰지. 그걸 보통 사상이라고 하네.”

나는 그 말을 세뇌라고 알아들었고, 양판석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폐지 줍는 노인을 위해 그들이 욕할 빨갱이를 만들고. 살기 팍팍한 청년들이 국가를 욕하기 전에 서로를 욕하게 만들고. 세계로 뻗어나갈 대기업을 위해 서민의 눈을 연예계로 돌리는 거지.”

“…….”

“그것도 정 복잡하다면 간단하게 가는 거야. 애국하자고.”

양판석은 샐쭉 웃으며 결론지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이런 작업을 가장 치밀하게 하는 양반이 아베 신조였지.”

“……그렇습니까?”

“그럼! 지지율 완전히 박살날 짓거리만 골라서 하면서 경제 살려놓고서. 정작 지지율은 극우 노릇 하면서 버팅기지 않았던가?”

양판석은 짧게 사족을 달며 입맛을 다셨다.

“물론 그쪽이야 우리랑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사회지도층 간의 커넥션이 끈끈해서 가능한 일이긴 했지.”

“……말이 커넥션이지 사실상 야합 아닌가요.”

“흐음, 사상을 다루지 못하고 사상에 먹혀버린 양반들도 꽤나 많았지만, 그것마저도 이용한 걸 보면 아베라는 인물이 참 걸출한 양반이기는 했어. 원전 터지고 나서 맛이 살짝 가긴 했다만.”

“……조금. 의외인데요.”

“글쎄. 일본 경제는 꾸준히 나아지는데 국민들 생활은 점점 나락으로 빠졌지. 그런데 그걸 우민화랑 극우 포퓰리즘으로 뭉개고 나간 것 아닌가? 우리는 그걸 보고 욕할 사람이 아니라 보고 배워야 하는 사람이네.”

“그렇긴 합니다만…….”

“당장 13년도에 국채매입으로 미국 채권위기 막아내고서, 미국 등에 업고 양적완화로 경제 풀어낸 것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양판석은 이 시점에서 말을 멈췄다. 그리고 평소처럼 살풋 미소 지었다.

“이런…… 서론이 너무 길었나?”

“서론이 어디 있습니까. 전부 새겨들어야지요.”

“그리 생각해 준다면 고맙겠군. 좋아. 다시 미국 이야기로 돌아가자고.”

그는 슬쩍 버터구이 오징어를 질겅거리기 시작했다.

“펜스 부통령과 대충 4시간 정도 만남을 가졌네.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꽤 재미있는 사람이더군. 재작년 미국 탄핵정국 이야기도 들려줬는데. 참…….”

“그래서 이번 일은 어떻게 된 겁니까?”

“아, 그래. 다행히도 그쪽 계획의 전말을 들었다네. 자세한 건 비밀이긴 한데. 결말만 알려주지.”

양판석은 산뜻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만약 미국의 계획이 순조롭게 성공했다면, 미국은 초인연맹, 즉, 유라시아를 분열시켰을 걸세. 그리고 우리를 도와줬겠지. 미국의 도움이 없으면 존속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말이야.”

“……병 주고 약 주고 아닙니까?”

“그래. 일종의 체질개선이지. 미국이 독보적인 패권국가가 되기 위한 전 세계의 체질개선 말일세.”

거참 폭력적인 체질개선이다 싶다. 그리 생각하며 내심 혀를 차고 있으니, 양판석은 내게 두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런데, 미국이 예상치 못한 두 가지가 있었다네.”

“…….”

“첫째는 한국이 유럽에 보낸 헌터들이고, 둘째는 자네가 어제 저지른 짓이야.”

확실히, 미국이 놀랄 만도 한 짓거리였다. 나는 소고기 육포를 오물오물 씹으며 양판석의 설명을 청취했다.

“미국의 계획은 크게 수정되었네. 그리고 그 계획에 우리가 동참하기로 했지. 미국의 우방으로서 말이야.”

“……그렇, 습니까.”

“자네 덕분이네.”

“……네?”

“이게 다 자네 덕분이라고.”

갑자기 튀어나온 칭찬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자세한 건 말 못해주겠지만. 자네가 한국을 한 번 구한 거야.”

“…….참. 사람 들었다 놨다 하십니다.”

“원래 늙은이 심보가 고약하다 그러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

양판석은 슬쩍 웃었다.

“피채원이한테 뭔가 있지?”

“…….”

“…….”

“……아. 예. 사람 마음을 읽을 줄 압니다.”

“이런. 내 경호원보다 더 낫구만. 그놈은 거짓말 탐지기인데 말이야.”

“……그렇습니까?”

“그래.”

양판석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

“하여튼 훈장을 챙겨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자네가 잘 좀 대해주게. 어린 나이에 고생이 참 많았어.”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말인데. 미국한테 협력하는 차원에서 몇 가지 조치가 예정되었네.”

그는 주섬주섬 넥타이를 다시 챙겨매기 시작했다. 나는 왠지 모를 탈력감에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치, 말씀이십니까?”

“그래. 꼭 필요한 조치이긴 한데. 국민들은 좀 싫어할 법도 해. 그래도 어쩌겠나? 살아야지.”

“…….”

“그래서 말인데. 자네 당분간 이 일에서 손 떼게.”

“예……?”

“당분간 물러나 있으라는 말일세.”

그는 태연스레 대답했다.

“지금 뉴스에 자네 과로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나왔을 거야. 당분간 집에서 나오지 말고 좀 쉬게나.”

“아, 아니, 이게 무슨……!”

나는 그제서야 헐레벌떡 일어나 그를 만류했지만, 양판석은 어느새 현관에서 구두주걱을 들고서 떠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손을 떼라뇨!”

“하하. 아무리 생각해도 현관 냄새가 너무 심하단 말이지…….”

그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기어코 구두를 신었다.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껏 비틀거리다 신발장에 몸을 기댄 양판석은 실실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래. 페브리즈 같은 거나 좀 사서 뿌리게. 여기 관저 통짜 방탄유리라 환기도 잘 안된다면서. 그러면 냄새라도 잘 숨겨야지.”

“…….아니! 그러면 그 조치라는 건 대체 뭡니까?”

“신발을 치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각하!”

양판석은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현관문을 나서며, 나를 슬쩍 돌아보더니 몇 마디를 남겼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든 놀라지 말게. 그리고 자세히 알려고도 하지 마.”

목소리는 엄중한 경고였으나, 그 눈빛은 경고하는 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따져 물었다.

“……대체 뭐길래 그럽니까?!”

“필요한 일.”

불콰하게 취한 양판석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현관문을 나서 떠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는 그가 떠나간 자리를 한참동안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 늙은 노인네가 괜히 비틀거리다 넘어지지나 않을까 싶어서, 기어코 슬리퍼를 신고서 현관문을 나섰다.

그러나,

저어 멀리 걸어가고 있는 양판석의 뒷모습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올곧았다.

SIDE EP

모두를 위한 나라는 없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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