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28화 (128/296)

EP 21 - 국경없는 기사회 (10)

“하아…….”

여도연의 입에서 여섯 번째 한숨이 새어 나오자 눈치 보던 피채원이 살짝 질문했다.

“……왜 그러세요?”

“아니, 그냥…….”

여도연은 입을 꾸욱 다물더니, 얼마 안 있어 속내를 툭 털어놨다.

“……승문이 그놈. 조금 이상한 습관이 있어가지고.”

물론 그 습관 덕에 서울에 있는 국립대에 가긴 했다만, 가족 입장에서 영 신경 쓰이는 습관일뿐더러, 대충 그놈이 뭔 짓거리를 하고 있을 지 뻔히 보였다.

건강은 좀 챙기고 살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힘들수록 자꾸 과로를 한단 말이지…….”

* * *

“크으으으……!”

부드러운 맥주가 목으로 넘어가고 난 다음에는, 저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오곤 한다.

아마 그 탄성은 삶의 고달픔이 우러난 거겠지.

유재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인중에 묻은 거품을 닦아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있었다.

무언가를 징징거리기 좋은 밤이다.

“한승문 그거 미친놈이라니까요 진짜!?”

“어어. 그래.”

“와, 씨……!”

금요일 밤 11시 36분.

2개월차 인턴비서 유재영은 치를 떨며 맥주 한 캔을 그 자리에서 비워 버렸다. 물론 딸의 주정酒酊을 지켜보던 아버지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어이구! 우리 딸 자알 먹는다. 잘 먹어.”

국무총리 유재경이 심드렁히 중얼거렸다.

“너 그러다 간 망가져, 요놈아.”

“조용히 하세욧!”

“술 먹는 것처럼 우유를 먹었으면 네 키가 적어도 150은 넘었을 거다.”

유재경 총리는 회식자리 아니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회식도 잘 안 했다. 그럴 시간에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

물론 예전에야 사회생활 때문에 강제로 알코올을 들이켰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 그에게 술을 먹일 수 있는 사람이 다섯 명도 안 되는 지금에는, 그는 철저한 금주가禁酒家였다.

그러니 아버지와 딸이 마주보고 앉아, 딸만 술을 들이키는 이 기묘한 술자리에선, 딸의 일방적인 신세한탄과 음주만 이어졌다.

“크으으으……!”

“야무지게 처먹네…….”

149cm짜리 인턴비서 유재영은 목구멍에 맥주를 쏟아 부었다.

마시고, 또 마셨다.

“크으으이잉……!”

결국 유재영이 식탁에 머리를 처박고 울먹였다. 유재경은 유재영의 등을 토닥였다.

“한승문……! 그, 가, 가, 간나새끼……!”

“어어. 그래. 그래.”

“어떻게 사람이 7시에 출근을 해요……?”

“재영아. 원래 정치인들 스케줄이 다 거기서 거기-”

“그러고 며칠 동안 퇴근을 안 해!”

“미친놈이네 이거.”

부녀父女가 쌍으로 한승문을 안주로 씹었다. 특히 유재영은 진짜로 한승문을 잘근잘근 씹어먹을 기세였다.

“집을 안 가……! 집을! 가끔 소파에 앉으려니까 거기서 누워서 자고 있더라니까요?”

“……그래도 한 장관이 젊은 나이에 고생이 참 많았어. 그게 습관된 거지, 뭐. 아빠도 예전에 고공단 심사 통과하고 워커홀릭 노릇 좀 했을 거다.”

“그래도 삼시세끼를 사무실 책상에서 먹는 건 너무하지 않나……?”

“으음. 너 밥은 잘 챙겨 먹니?”

“그래도 밥은 주더라고요. 맨날 짜장면 짬뽕 탕수육이라 문제지! 심지어 각자 책상에서 먹어야 하는 바람에, 탕수육은 소스 부어서 각자 몇 개씩 가져가서 먹어요.”

유재경이 그 잔인함에 치를 떨며 혀를 차고 있으니, 유재영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고개를 내리깔았다.

“……그래서 오늘 선배들이랑 몰래 나가서 밥 먹고 들어오기로 했는데. 하필 그것마저도 딱 걸리는 바람에-”

“아이고…….”

어쩐지 아까 술 먹자 그러더라. 유재경이 딸에게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래서 뭐라던?”

“말없이 카드만 보내더라고요. 그래서 다들 꾸역꾸역 먹다가 체해서 죽는 줄 알았어…….”

유재경이 무릎을 치며 탄식했다.

“재영아. 나였으면 몰래 빠져나와서 캔커피라도 들고 고개 숙이러 갔을 거다. 아빠 예전에 주말마다 정치인들 골프 따라가서 내기 돈으로 수십만 원씩 상납하던 거 보고 깨달은 게 없니?”

“아니! 그래서 사무실 갔더니 사라지고 없더만! 그래서 다들 초긴장 모드야.”

“……아아. 그러고 보니까 미국 외교 문제로 나한테 왔었을 거다. 아마.”

유재경은 미간을 찌푸리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요즘 젊은 것들은 참. 딸내미도 딸내미지만, 하여튼 한승문이도 장난 아니게 뺑이를 치는 모양이다.

“아니 뭐, 그러다 쓰러지면 정부 지지율 올라가고 좋긴 한데. 그래도 건강 좀 챙기면서 일하라고 그래라. 가뜩이나 비실비실한 양반이…….”

“……으음. 아빠는 가끔 인간성이 의심되는 것만 빼면 참 좋은 것 같아.”

“너는 아닌 것 같지?”

“그래. 기자들 앞에서만 조심하자 우리.”

그때였다.

띠링- 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를 확인한 유재영의 안색이 허옇게 질려 버렸다.

“……내일 출근하라네. 토요일인데.”

“보좌관이 다 그렇지 뭐…….”

유재경은 실실 웃으며 딸내미의 고생길을 비웃었고, 유재영은 아버지의 공권력에 달라붙었다.

“……아빠. 아빠가 뭐라고 해주면 안 돼?”

“아빠가 그럴 위치니?”

“국무총리잖아.”

“그래봤자 공무원이야.”

“……한승문은 공무원 아니고?”

“아빠는 짤리면 집으로 오지만, 한 장관은 짤리면 국회로 가잖니. 누누이 말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선출직은 가급적 멀리하는 게 좋단다. 합법적으로 갑질을 하는 유일한 직종이야.”

“……하. 인생.”

“꼬우면 성공을 하렴.”

“그래서 착실하게 대학교수 코스 밟고 있었잖아요……. 하늘에 빵꾸만 안 났어도 올해에 아마 지거국(지역 거점 국립대학교) 시간강사 정도는 됐었다니까?”

“야 임마. 내가 니 나이에는 공직 8년차로 4급 재경직에 들어갔고, 한승문이가 니 나이에는 대한민국 장관을 해먹었-”

띠링-하고 벨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유재경이었다.

마찬가지로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그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누구예요?”

“……한승문.”

“뭐래요?”

“……지금 오라네.”

달큰하게 취한 유재영이 신세를 한탄했다.

“하여튼 부녀가 쌍으로 누구 머슴노릇-”

“오케이. 스톱. 더 이상 말하면 아빠가 너무 불쌍해진다.”

“아빠 라이프스타일은 원래 이랬잖아요.”

“……딸. 너도 가끔 보면 인간성이 좀 의심될 때가 있다?”

“그것만 빼면 참 좋죠?”

“……그렇다 치자.”

* * *

유재경이 코드네임 청와대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1시 27분이었다.

200m 지하벙커의 밀실에는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고, 거기 둘러앉은 사람들 중에 장관급 아래는 없었다.

상석에는 대통령이 있었고, 왼편에는 국무총리가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의 오른편에 자리한 초상관리부 장관이 회의의 첫 마디를 열어냈다.

“……다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하군요.”

나름 대한민국 2인자였던 유재경이 보고 있으면 불쾌할 법한 모습이었지만, 애초의 그의 성품 자체가 강자에게 관대하고 약자에게 엄격한 스타일이었던지라, 그리 아니꼽지는 않았다.

그가 양판석의 왼편에나마 앉아있을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성품 덕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본인이었다.

따라서.

유재경은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한승문의 말에 미사어구를 붙였다.

“국궁진췌 사이후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시국에 다들 비슷한 마음가짐이실 터이니, 한 장관님께서 크게 마음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총리님.”

눈웃음치던 유재경이 남몰래 눈을 흘겼다.

역시나. 예상대로 양판석은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유재경의 차후 스탠스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든 말든 한승문은 본론을 꺼내들었다.

“미국이 달러의 절대적 기축통화화를 제시했습니다. 세계 경제를 선진국 중심으로 개편하고, 이전처럼 금융체계를 정상화시키자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양판석이 덧붙였다.

“그 대가로 항공모함도 증여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고, 한미방위조약이나, 작통권에서도 상당한 양보를 하더군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김두식 사령관?”

김두식의 답은 곧장 튀어나왔다. 마치 사전에 준비한 것처럼 말이다.

“항공모함은 애당초 한반도에서 쓰기에는 부적절한 함종입니다. 원양항해도 불가능한 지금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작통권이나 상호방위조약도 이미 실질적 한계로 이미 행해지고 있던 것을, 명문화시키는 것에 가깝다고 봅니다.”

“썩 매력적인 딜은 아니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양판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한승문에게 계속 말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국제금융이 정상화되는 게 국익에 불이익이 된다는 게 본 장관의 의견입니다.”

쉽게 말해 국제금융시장은 도박판이고, 환율은 룰렛이다.

그리고 미국은 도박판 룰렛이 어디에 멈출 지 아는 유일한 플레이어다.

지금이야 도박판이 문을 닫아서 망정이지, 도박판이 문을 여는 순간, 누가 판을 쓸어갈지는 명백했다.

그러니 당연히,

“……막아야 합니다. 이거.”

“허어…….”

유재경 총리가 대경실색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놀랐다기보다는 낭패를 겪은 심정이었다.

미국의 패권주의라.

괜히 건드렸다가 피 볼 것 같아서 굳이 입 밖으로 안 내뱉던 생각이었는데, 하필이면 이렇게 공론화될 줄이야.

유재경은 최대한 무난하게 넘어가기 위해 약을 치기 시작했다.

“……저어,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라는 게 그리 중대한 위협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개문 이전 시절에도 미국 중심이었잖습니까. 게다가 미국과 싸울 이유도, 여유도 없는 상황이고요.”

김두식이 반박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총리님. 군부 입장에선 패권국가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이런 시대에 말입니다.”

“아아, 말씀 잘 하셨습니다. 김두식 사령관. 물론 그 점도 고려를 해야겠지요. 다만,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신중해서 나쁠 건 없다.

즉, 신중론을 내세우면 일단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소리였다.

“일단 미국을 적대할지 사대할지 판단을 내리기 전에. 중국이나 EU 측과 면밀한 협의를 거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장관님?”

유재경은 외교부 장관에게 물었으나, 그 대답은 초상관리부 장관에게서 돌아왔다.

“EU는 경제를 신경 쓸 상황이 아니고, 중국은 아직 묵묵부답입니다.”

“아아. 그렇습-”

“그런데 말입니다.”

유재경은 최대한 빨리 발언을 끝내고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한승문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헌터 아카데미를 파국으로 이끌고, 유럽을 패닉에 빠뜨린 게 뭐였습니까?”

“…….”

“영국에 게이트가 열린다는 소식.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그 소식은 누가 전했는가?

뒷말은 생략되었으나 다들 그 질문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질문이 가지는 의미도 말이다.

결국, 유재경의 바람과는 다르게, 그 절름발이의 독기서린 목소리가 기어코 폭탄에 불을 붙였다.

한승문은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씹어뱉었다.

“……여기서 미국이 약 20일 전부터 영국에 열릴 게이트를 예측하고 있었다는 첩보가 사실이라면.”

“……!!!”

“이거 상당히 유감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콰앙-!

회의실 문이 열리고 중년의 국정원 요원이 다급히 들어왔다. 그리고 순간 회의실의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잠시 발걸음을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는 울상을 짓는 한이 있더라도, 곧장 대통령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귓속말을 전했다.

갑작스레 들어왔던 그가 회의실에서 잽싸게 도망친 이후, 회의실에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중국에서.”

그 침묵을 깬 건 양판석의 침통한 목소리였다.

“달러를 기축통화로 채택했다고 하는군요.”

양판석은 살짝 멍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미국에서는, 비상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선, 각국이, 기존의 영토주권에 보다 더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는 성명을 내놓았고 말입니다.”

“…….”

“……그러니까, 일단 말은, 괴수에게 자기방위가 안 되는 외국의 국민들을 돕기 위해, 군대가 인명 구호를 목적으로 국경을 넘어가도 된다는, 소리인데.”

“…….”

“……사실상 미국이 티베트, 대만, 남중국해, 조어도는 물론이고, 차후 중국의 영토 확장까지 승인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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