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1 - 국경없는 기사회 (4)
원내대표 선거에서 고전하던 이호정이 내게 찾아왔다.
“이번에 망언 한 번 있었죠? 헌터들 파견된 건 헌터들이 제멋대로 간 게 아니라, 한승문 장관이 암묵적으로 보낸 거라고.”
“아아. 국방당 김재룡 의원? 정치초짜가 관심 좀 끌어보려고 오바 좀 했더만.”
“김재룡이 아니라 김재용이요. 그리고 단순 망언이 아니라, 지역구에 피난민 수용소 끼고 사는 사람이라, 신수광이 부탁받고 품 좀 팔았던 모양이에요.”
“으음……. 원내대표 선거에서 너 조지겠다고?”
“그러면 왜겠어요?”
“그래서 국민들 반응은 어떻디?”
“뻔하죠 뭐.”
정치인이 욕을 먹는 이유는 간단하다.
양당제라서 그렇다.
“인터넷에선 장관님 옹호하는 의견이 대세인데, 원래 이기적인 의견은 입 밖으로 잘 안 내잖아요. 실제로는 반반 정도 될 것 같아요.”
정치인은 원래 뭘 해도 절반 정도에게는 욕을 먹게 되고,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면 다른 사람들도 어지간하면 시류에 휩쓸린다.
사람은 누군가를 욕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짐승이었으니까.
그러니 정치인은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게 정치인의 운명이리라.
그러나,
“……쓰읍.”
해결법은 간단했다.
“지금 초인지원청장이 뭐하던 사람이었냐?”
말뜻을 짐작한 이호정이 산뜻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으음. 서울지방경찰청장?”
욕받이를 들이민다.
“캐비닛 열라 그래.”
* * *
어둠을 은은하게 비추는 수면등과, 엔진 소리 사이에 섞여드는 히터 소리.
심야의 비행기는 침묵을 안고 밤하늘을 질주했다.
누군가는 잠들었고, 누군가는 잠들지 못했다. 각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와, 그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여도연은 그냥 잠이 안 왔다.
그녀에게 우려와 걱정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당장 동생놈 생각에 양심이 콕 콕 찔려오곤 하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그녀의 튼튼한 육신은 이제 수면을 취미 정도로 생각하게 만들 수준이었다. 다시 말해, 잠은 일주일에 몇 시간 정도만 자도 충분했다.
그러니.
“…….”
여도연은 비행 내내 멍하니 팔짱을 끼고 창밖을 구경했다.
새액새액 소리를 내며 잠든 피채원이 자꾸 자기 기다란 생머리를 오물오물 씹길래, 이따금 입에서 스윽 걷어내 주는 것만 빼면,
여도연은 비행 내내 창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창문 밖으로 뭔가 보이는 건 아니었다. 새벽의 밤하늘 속에 그저 희뿌연 구름들만이 어둠과 어둠을 미묘하게 구분할 따름이다.
여객기가 한계고도까지 상승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지상에서 더 이상 빛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었을까.
여도연은 창문 밖의 어둠을 보며 사뭇 우울한 사색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고.
“……어.”
문득 그녀는 어둠이 꿈틀대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눈이 침침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초인의 시력이 결코 무뎌지지 않는다는 건, 그녀 본인이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다.
여도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지상을 살폈다.
마침 새벽이었고, 어느새 어스름이 물러나 저어 지평선을 구분할 정도는 되었다.
지평선은 실로 울퉁불퉁했다. 빌딩숲의 모양이 아니었다. 깎아지른 산맥이 지평선에 늘어서서 하늘과 지상을 구분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커다란 산 너머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두운 하늘은 이제 푸르스름하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고, 하늘 구석에서 스며들기 시작한 햇빛이 세상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산 뒤편에 있던 태양이,
그 모습을 드러내어,
거대한 평원에 한 줄기 빛이 드리웠을 무렵에.
“…….”
여도연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충격에 몸을 떨었다.
“씨발…….”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왔고, 여도연은 줄곧 꿈틀거리던 어둠의 정체를 알아냈다.
어릴 적 보던 다큐멘터리가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세렝게티 평원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짐승들의 물결, 하늘 위 드론에서 비추어지는 거대한 군집의 흙먼지.
그때와 다른 건.
그녀의 시점은 드론이 아니라 한계고도까지 상승한 여객기에 있었고, 저어 아래 대평원에 수놓인 무수한 짐승들은,
고비 사막의 북쪽 지평선과 남쪽 지평선을 가득 채운, 가히 파괴적인 수효와 크기의 저 짐승들은,
“……하. 씨팔.”
결코 얼룩말 따위가 아니었다.
* * *
비행기가 파리에 도착한 건 오후 2시였다.
그리고 샤를 드 골 국제공항에 내린 헌터들을 가장 먼저 맞이한 건,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정치인들이었다.
사실 숫자로 따지면 기자들이 훨씬 많았지만, 대충 비슷한 사람들이었으니 그렇다 치자- 라고 피채원은 생각했다.
그리고 최대한 웃으며 설진운과 함께 프랑스 할머니의 영문 모를 인삿말을 들었다.
대충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보니까 이 할머니가 총리란다.
그리고 그녀가 고등학교 ‘법과 정치’ 시간에 배운 바에 따르면, 그리고 2학기 중간고사 서술형 2번 문제로 나왔던 부분에 따르면,
프랑스는 이원집정부제라고 대통령과 총리가 반반씩 해쳐먹는 나라였고, 비상사태에는 대통령이 전권을 쥐지만 총리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그런 나라였다.
아무래도 한승문이 반쯤 호구로 인식하던 유재경 총리같이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서, 피채원은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했다.
능력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는 의미다.
물론 공항은 인파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극심한 두통과 함께 눈물이 살짝 글썽였지만, 소녀는 최대한 꿋꿋히 앞으로 나서 총리의 인삿말을 들었다.
표층심리만 읽어도 외국어는 전부 이해할 수 있었으니 이해에 별로 지장은 없었다. 말하는 건 다른 문제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총리의 인삿말을 가장한 연설은 대충 이러했다.
[……손을 잡아야 살아남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절친한 우방이 내민 손을, 프랑스는 마음 깊이 감사하고, 또 기억할 것입니다.]
프랑스 총리는 주름진 얼굴을 느물거리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1,000명에 달하는 지원군을 보내준 한국에게, 무한한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정치판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 * *
프랑스의 정치판은 이런저런 정치역학이 꼬인 결과로, 총리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하원의회에서 선출하게 된다.
즉. 대통령과 총리의 당黨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거다.
물론 결선투표제 때문에 어지간하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우파右派 대통령과 극좌極左 총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게 바로 총리가 이 사단을 내버린 이유였다.
[연맹의 결속은 확고하게 인류를 지켜낼 보루가 되어-]
[총리님, 총리님……!]
뉴스화면 속 총리에게 보좌관 하나가 달려와 속삭였다. 그러나, 마이크에는 그 선명한 음성이 또렷하게 잡혔다.
[30명입니다……!]
[뭐, 뭐요? 30……?]
자료화면이 끝나고. 아나운서가 침통한 목소리로 보도했다.
[참으로 끔찍하기 그지없는 일-]
뚜욱 - !
“…….”
“…….”
뤼미에르가 TV를 꺼버렸고, 침대에 걸터앉은 피채원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프랑스의 총리는 지원군의 규모가 1,000명에서 30명으로 줄어든 것을 공론화시켜버렸다. 그것도 가장 최악의 방식으로 말이다.
“……미안합니다. 비서관.”
결국 뤼미에르의 입에서 사과가 나왔다.
“……대통령과는 당초 최대한 부드럽게 풀어가자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만, 우리 총리의, 다소, 무례하기 짝이 없는-”
“총리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실수라고 변명하더군요.”
정황상으로도 실수는 아니었고, 피채원이 듣기로도 실수는 아니었다.
총리는 한국에서 온 헌터들을 순식간에 천하의 개쌍놈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뤼미에르가 그 뒷사정을 설명했다.
“……대통령은 EU의 통합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면, 총리는 EU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그러니 뻔한 민족주의를 퍼뜨리려고-”
정말로 뻔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이들에게는 뻔한 이야기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프랑스에 순식간에 반한反韓 감정이 퍼져나갈 것이야말로 뻔했다.
“…….”
피채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해외파견 노동자들을 국제 구호군으로 포장했으나, 지금의 상황에서 그게 오히려 독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한국은 이해타산에 안 맞아 ‘파견인력’을 물렸지만, 프랑스는 오기로 했던 ‘지원군’이 없어진 것과 다름없어졌다.
이게 각자의 사정이란 걸까.
물론 정치인들끼리는 알거 모를 거 다 알고 있었겠지만, 국민들에게는 이러한 ‘명분’이 감정을 움직이는 1요소였다.
사람은 누군가를 욕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존재였으니까.
프랑스라고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
한승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피채원의 사고가 그 지점에 닿은 순간, 소녀는 뤼미에르에게 물었다.
“…….저어, 미국이 게이트는 언제 열린다고 했나요?”
“근시일, 이라는 언급뿐이었습니다. 다만 펜타곤에서는 1주일 이내로 예상 중이더군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통령을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 * *
“굉장히…….”
프랑스 대통령의 첫 인상은, 살짝 한승문 비슷해 보였다.
“유감스럽군요.”
젊은 사람이 고생한 티가 난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여튼 그 마귀할멈이 일을 낼 줄은 몰랐습니다. 수습하는데 고생깨나 하겠군요! 하하!”
물론 한승문보다는 4배 정도 유쾌한 사람이었다. 웃음이 많다는 점에서 2배, 주말에 등산을 안 시킬 것 같다는 점에서 2배.
피채원은 그리 생각하며 대통령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상석에 대통령이 있었고, 건너편에는 뤼미에르가 있었다.
뤼미에르가 쓰게 웃으며 대통령에게 말했다.
“각하. 제발 체통 좀…….”
“품격은 태도가 아니라 행실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뤼미에르.”
대통령은 가벼운 삿대질과 함께 익살맞게 웃으며 뤼미에르에게 윙크했고, 뤼미에르는 정색하며 칼대답했다.
“행실이 변변치 못하면 태도라도 있어 보여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음! 다소 비판적인 격려 고맙습니다. 집행관.”
“비판 맞습니다.”
여러모로, 참.
가벼운 분위기였다.
그건 아마 두 사람의 관계가 이 정도 선을 용납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덤으로 그것을 명시하는 것이었고 말이다.
“뤼미에르는 처음 봤을 때부터 변한 게 없군요. 내 인생에서 까칠한 여자는 우리 마누라랑 딸로 족하단 말입니다!”
“여사님께 그대로 전해드리지요.”
“이거 봐요. 무섭다니까. 그렇게 생각 안 합니까? 비서관 피?”
“괜한 비서관님 건드리지 마시고-”
피채원이 대통령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 네. 뭐. 그렇죠.”
뤼미에르가 정색했다. 대통령이 깔깔거리며 말했다.
“한국어는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요! 아무래도 피 비서관과 나는 다소 긍정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고 통역해 주시겠습니까? 뤼미에르?”
뤼미에르는 피채원에게 ‘원래 얘기하다 보면 두통 생기는 사람입니다. 양해해 주십쇼’라고 말해놓고서, 대통령에게는 잘 통역해 줬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흐뭇하게 웃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뤼미에르의 통역 하에 대화를 이어갔다.
“자, 피 비서관이 한 장관의 대리자라는 한국 대통령의 연락이 있었습니다만. 사실입니까?”
“……부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연결책으로 생각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이제부터 향후 계획에 대해 논해볼까요?”
피채원이 무뚝뚝하게 질문했다.
“게이트가 1주일 내에 발생한다는 예측이 사실입니까?”
“흐음. 미국의 말에 따르면 그러합니다만. 실상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겠지요.”
“게이트 예상지역이 영국 런던 남동쪽 82㎞ 지점 맞습니까?”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이 상당히 급박하군요.”
“그렇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에 착륙했습니까?”
“으음!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비서관!”
프랑스의 대통령은 방긋 웃었다.
“그건, 우리가 아직 영국이 EU인지 아닌지 규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 *
그날 저녁.
대통령과의 회담을 마친 피채원은 호텔로 돌아왔다. 1,000명을 위해 마련된 호텔이었기에 30명이 쓰기에는 아주 아늑했다.
“하아…….”
피채원은 객실 침대에 철푸덕 드러누워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상념에 빠졌다.
대통령과의 대화는 참으로 뻔한 이야기였다.
영국을 도와줄지 말지 국론이 분열했다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은 도와주자 말하고, 총리는 도와주지 말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지금의 정국에서는 총리가 주도권을 잡은 상황.
영국에 섯불리 지원군을 파견했다간 정권이 흔들릴 수도 있는 상황이랜다.
그는 최대한 빨리 해결해 볼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답을 남겨놨다.
뤼미에르도 대통령과는 사태 초기부터 함께했던 모양인지라, 퍽 신뢰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러니 그냥 믿고 기다리면 될 터였다.
그러나.
“으아아…….”
피채원이 이렇게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 위를 뒹굴뒹굴 굴러다니는 이유는,
총리에게 한국을 엿 먹이라고 지시했던 게, 바로 그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