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21화 (121/296)

EP 21 - 국경없는 기사회 (3)

-내게는 책임이 있다. 대한민국에 이익이 되는 바를 해내야 한다.

-시발 일단 구하고 보는 거지. 뭔 국적이고 나발이고 지랄이야.

-초인연맹이 어째서 만들어졌는가? 헌터들이 힘을 모아 인류의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째서 정치가 정의를 무너뜨리는가?

-살고 싶다. 존나게 살고 싶다. 내가 죽어서 지구를 구하면 우리 딸은 누가 먹여 살리나?

-국가가 헌터를 통제해서는 안 된다. 헌터를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죽어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솔직히 나는 딱히 죽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가족이고 뭐고 남은 게 있나? 그냥 우리 마눌님 잘근잘근 씹어먹은 씹새끼들 도륙내다 죽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지. 가급적이면 사람도 살리고.

-유럽 애들이 영국 구하러 가는데 왜 우리는 안 가지? 초인‘연맹’ 아니었나? 아니 브렉시트고 나발이고 요즘 세상에 그게 뭔 상관이야.

-하. 씹. 다 뒤졌다. 이건 좀 아닌 건 같긴 한데. 걍 닥치고 있어야지…….

-장관님,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제발, GS 합격하게 해주세요. 제발. 시발. 시발……!

-이거 배신 아닌가? 우리 분명 어제 저녁 세미나 때까지만 해도 세계평화 운운하지 않았었나……?

* * *

피채원은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

정확히는 사람의 마음을 느낀다.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이었으니까.

기쁜 사람을 읽으면 웃게 되고, 슬픈 사람을 읽으면 울게 된다.

그리고 지금은 슬픈 시대였다. 그게 피채원이 두통약을 챙겨먹는 이유였고, 필사적으로 능력을 절제하는 법을 익힌 이유였다.

같은 맥락에서, 그녀가 자기 능력을 마음껏 풀어놓는다면, 소녀는 항상 형용치 못할 느낌에 휩싸이고는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토옥 -

유리컵에 빨간 물감 한 방울이 떨어진다.

물감은 서서히 퍼져나간다.

토독 -!

파란 물감 한 방울, 노란 물감 한 방울이 같이 떨어진다. 감정은 서로 뒤섞이며 서서히 침전한다.

이윽고,

우수수수 빗물처럼 떨어지는 감정에 소녀는 검게 물든다. 능력을 개방하면 개방할수록 사방에서 밀려드는 사고思考의 파도에 휩쓸리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마음이 검게 물들고, 한계에 다다랐을 무렵,

“흐윽……!”

피채원은 발작하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기다란 생머리는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다. 실은 다를 바 없었다.

“흐으으! 흐윽……!”

소녀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주륵주륵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오열하며 마음을 추스렸다.

모든 감정이 섞인 마음은 결국 검게 물든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결국 빛을 잃었다.

그러나,

그녀는 매번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보고야 마는 것이다.

“…….”

모든 이들이 옳았다.

슬픈 시대에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필요는 다름일 따름이지 틀림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불과 1년 전에.

소녀는 지금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다.

소녀는 그때 함께했던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초상관리부 감찰관 감 철입니-]

“……아저, 씨?”

[으음? 어, 채원이냐? 야! 이게 얼마만이냐? 전화 좀 자주 해!]

“크응!”

[…….너 지금 우니?]

* * *

호텔방의 벽시계는 자정을 가리켰다. 피채원이 차분히 중얼거렸다.

“……유럽 헌터들이 귀국하기까지 2시간 남았네요.”

“…….”

“아마 유럽으로 갈 수 있는 기회는 이게 마지막일거예요.”

바다와 하늘에도 괴수가 존재하는 이상, 국가 간의 교류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대양에 존재하는 거대괴수들을 피해 군함과 헌터의 호위를 받으며 연안항해를 감행하던가, 날갯짓으로는 올라갈 수 없을 정도의 고도에서 전투기와 함께 이동하던가.

그리고 유럽과 한국의 경우에는 후자였다. 호위도 없이 경비행기 따위를 타고 유라시아를 건넌다는 건 자살행위였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2시간 내로 제주공항까지 가셔야겠네요.”

“…….”

“그러고 싶으세요?”

피채원이 여도연에게 물었다.

“유럽. 대체 왜 가시려는 거예요?”

“…….”

“아까 장관님이랑 싸우셨다면서요.”

침묵을 지키던 여도연이 움찔거렸고, 피채원은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혹시 뭔가 있는 척하고 싶어서 괜히 반항하신 건 아니신가요? 고작 일주일 동안 어울린 친구들이 불쌍하긴 한데 화풀이 할 곳이 없어서-”

“야.”

여도연의 눈빛에 시퍼렇게 날이 섰다.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냐?”

“…….”

“…….”

여도연은 그 후로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러나.

여도연은 그 누구보다도 피채원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고 있었기에, 소녀는 그녀의 마음을 천천히 읊어냈다.

“…….불쌍해서 그러시는 건가요? 그 친구들이? 1주일 동안 소년병들 기구한 집안사정 조금 들었다고?”

“…….”

“그래서 유럽 갔다가 한국에 게이트 열리면 책임지실 거예요?”

“야!”

결국 여도연이 언성을 높였다.

“말은 바로 해야지! 열릴지도 모르는 게이트랑 곧 열릴 게이트랑. 그게 비교가 되냐? 그러면 영국에 게이트 열렸는데 우리가 안 가서 죽을 사람들은 누가 책임질 건데?”

“국가적 관점에서는 비교가 되죠, 당연히.”

“사람 구하는데 국적을 왜 따져?”

“그러면 진작 아프리카 가셨어야죠.”

“……하!”

피채원은 여도연의 모든 말에 따박따박 반박하며 그녀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여도연이 미간을 꾸욱 꾹 눌러피며 입을 다문 와중에도, 피채원은 여전히 여도연을 몰아붙였다.

“자기만족을 위한 도움인가요?”

“…….”

“손닿는 데까지만 돕는다기에는. 구분이 너무 감정적인데요?”

“…….”

결국 정답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여도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피채원은 분명히 그녀와 대화하는 중이었다.

“유럽 친구들 돕겠다고 목숨까지 거실 이유가 있나요?”

-목숨 걸겠다는 소리는 아닌데.]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신가요?”

[위험하기는 무슨. 솔직히 지금껏 괴수 상대로 목숨 위험했던 적은 별로 없었는데. 뭐. 그러니까 이런 속편한 영웅놀이도 가능한 거겠지만. 말해 뭐하겠냐. 기만하는 것도 아니고.]

“꼭 언니가 그 사람들을 도와야 할 이유가 있나요?”

[내가 이거라도 안하면 뭐냐 대체?]

“꼭 언니가 도울 필요는 없지 않나?”

[니가 사람 살리는 기분을 알긴 하냐?]

“고작 보람 얻자고 들이밀기에는 너무 위험부담이 큰 일 아니에요?”

[내가 보람을 얻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살리는 게 중요한-]

“인정하세요. 결국 일주일 동안 만난 사람들 불쌍해서 그러시는 거잖-”

“아 씨팔 진짜!”

여도연이 결국 삿대질을 올려붙였다.

“니도 인마! 어? 승문이가 미친짓으로 살려놓은 애야!”

“…….”

“그래! 결국 다 자기만족이다! 그러면 안 되냐!?”

“되죠.”

“뭐?”

“된다니까요.”

피채원이 생머리를 정리하며 무표정하게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까딱였다.

“따라오세요.”

* * *

“어, 저, 그, 출입이-”

“장관님께서 긴밀히 말씀 나누시겠다고 하십니다.”

“아. 네.”

피채원은 가볍게 경찰공무원들과 초인청 공안집행국 헌터들의 포위망을 뚫고 돌아다녔다. 그녀가 한승문의 오른팔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여도연은 어리둥절하게 소녀의 뒤를 따르며 호텔 복도를 거닐었다. 피채원은 각 방에 들려 누군가를 호명했다.

“박유정 씨 계십니까?”

“……무슨 일이시죠?”

“장관님께서 찾으십니다.”

잃은 슬픔을 알기에 누군가를 돕고 싶은 사람.

“신찬영 씨?”

“어, 예? 왜요?”

이미 다 잃어버려서 누구 돕다가 죽고 싶은 사람.

“조정식 씨?”

“……네.”

정 많은 사람.

“여다솔 씨?”

“넹!”

정 많은 사람이 마냥 좋은 사람.

“설진운 씨?”

“피 비서님?”

전쟁을 잊지 못하는 사람.

등. 등.

피채원은 대략 서른 명 남짓한 인원을 모았다. 진정으로 유럽에 차출되기를 희망하는 이들이었다.

“…….”

1,000명 중 고작 서른이었다.

고작, 서른이었다.

* * *

“……예쁘네요.”

“그렇죠?”

“참. 아름답네요.”

제주의 야경은 새벽이 되어서야 그 빛을 발했다.

비록 비행기의 좁은 창문 틈으로, 저어 멀리 보이는 건물들의 끝자락만을 확인할 따름이었지만, 도시는 분명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하아…….”

르윈은 복잡한 심경을 한숨에 섞어 내보냈다. 그럼에도 마음 속 밑바닥에 끈적하게 늘러붙은 감정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빛나는 도시에 대한 부러움.

곧 다가올 죽음에 대한 불안.

찾아오지 않는 손길에 대한 실망.

사람과 괴수에 대한 원망.

한국을 향한 날카로운 열등감.

평안을 누리는 사람들에 대한 질시.

이런 마음을 가진 자신에 대한 자괴.

그리고, 이어지는 지독한 무기력.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가 어린 소녀의 마음에 휘몰아쳤다.

“…….”

“……르윈.”

뤼미에르는 따스한 후광을 은은하게 빛내며 소녀의 어깨를 보드랍게 감싸줄 따름이다.

“이해해요.”

“…….”

“이해해요…….”

뤼미에르 또한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어찌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루미에는 괜찮아요?”

“익숙하니까요.”

국경없는 의사회의 파견전문의.

헌터가 되기 전이나, 헌터가 된 다음이나, 그녀는 사람을 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세상이 원래부터 지랄 맞은 곳이라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리고 이제는 이런 감정을 내색하지 않을 정도는 됐다.

“한숨 푹 자세요. 르윈.”

“……잠들 수 있을까요.”

“싸우려면 지금 자야죠.”

노아 뤼미에르는 원망하지 않는다.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일을 준비합시다.”

그녀는 해야 할 일을 한다.

다만.

그녀도 아직 초인은 아니라는 증명이었을까. 노아 뤼미에르의 미소는 평소보다 복잡한 심경을 나타내고 있었다.

“…….”

사실. 어쩌면.

살짝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눈을 붙였다.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면서.

천천히.

서서히.

잠들려던 그때,

[아 -아 -잠시 기내에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

[그, 뭐냐. 아무튼 행정적 착오 때문에 검문이 있겠습니다.]

한국어를 모르는 헌터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뤼미에르는 갑자기 이게 웬 개뼈다구 같은 소리인가 싶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보았다.

“아, 예. 지나갈게요.”

“어어, 저기 자리 있다!”

“창가는 내꺼다.”

헌터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하!”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십 명의 헌터가 뤼미에르가 앉아있던 자리를 지나, 비행기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착석했다.

그리고.

한승문과 함께했던 비서 또한 묵묵히 그곳에 있었다.

뤼미에르는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채원, 양이었던가요?”

“반갑습니다. 뤼미에르 집행위원장님.”

“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노아 뤼미에르는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 그리고 결국 말했다.

“……장관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전해드리진 못하겠지만. 아마 그 마음 충분히 아실 겁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뤼미에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을 무렵, 얼빠진 기내방송이 다시금 이어졌다.

[어, 지금 긴급 차출된 헌터들이 기내를 수색하는 도중이니, 승객 여러분은 잠시 수색에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참. 나.”

[어어. 기장님. 나 이제 갑니다. 출발시켜요. 고. 고-]

뚜욱-!

기내방송이 끊겼다. 뤼미에르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공무원 하는 일이 늘 그렇죠 뭐.”

* * *

새벽.

8월의 열대야.

엔진 소리 일렁이는 공항.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차가운 불빛이 번쩍이고, 어두운 공항의 라운지에 홀로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침묵과 어둠에 감싸인 제주공항의 2층. 저어 멀리 드리운 발걸음 소리가 서서히 다가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까이에 다가온 발걸음에게 말을 걸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찰관님.”

“네…….”

감기자는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잘한 짓인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질러놓고 보니까 성에 차긴 하네요!”

“…….”

나는 침묵을 지키며, 저어 밤하늘에 깜빡이는 비행기 편대를 지켜보았다.

8월의 열대야.

무미건조한 눈빛이 밤하늘을 향했다.

그가 내게 물었다.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

“하기 나름이라고 제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아, 그랬던가요?”

“그러니 안 하게 만들어야죠.”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제가 이제 와서 운을 바라기에는 너무 무책임한 행동 아니겠습니까?”

“…….”

“책임이라…… 예. 이제는 잘 되길 바라는 게 아니라, 잘 되게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되었군요.”

감기자는 대답이 없다.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들지 못하는 밤에, 하늘에는 별빛 하나 없었다.

어둔 하늘에 반짝이는 건, 이따금 일렁이는 비행기 불빛 뿐.

이제부터 그 어둠을 빛으로 가득 채워야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원.”

“하하…….”

“그냥.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요…….”

“언제는 알고 저질렀습니까?”

“닥치십쇼…….”

8월의 열대야.

비행기 불빛이 깜빡이며 어두운 밤하늘을 횡단했다.

“……오늘은 일찍 자고 싶군요.”

“술 한잔하시렵니까?”

“잔다니까요.”

“술 없이 주무실 자신 있으시면 상관없고요.”

“……갑시다.”

감기자가 내 휠체어를 끌기 시작한 와중에도, 나는 멍하니 창문 너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행기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하. 시발.”

8월의 밤하늘.

일렁이는 도시의 불빛이 밤하늘의 윤곽을 저며내고,

비행기는 꼴통 새끼들을 한가득 실고서 밤하늘의 끝자락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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