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0 - 헌터 아카데미 (5)
게이트의 상태는 3가지로 구분됩니다.
괴수가 출몰하지 않는 코드 그린.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코드 옐로.
게이트가 폭주하는 코드 레드.
이는 게이트 내부 생태계를 구분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자세한 건 첨부자료를 확인해 주시고요.
특히, 코드 레드의 폭주 현상은 해외에선 몬스터웨이브라고 별개 명명되는 상태이며, 국내 연구진에 의해 게이트 내부 생태계가 포화되어 발생하는 현상으로 밝혀졌습니다.
즉, 게이트의 크기와 몬스터웨이브의 위험성은 비례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작년 말 오스트레일리아 칼라밀리 국립공원의 적색경보였습니다. 직경 5㎞ 규모 이상의 게이트가 폭주한 유일한 사례이지요.
불과 사흘만에 한반도의 여섯 배 크기에 달하는 영역이 괴수화되었습니다. 특히 일부 지역에는 여왕까지 출몰하여 전술핵이 투하되었지요. 다행히도 감염형 개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만…….
칼라밀리 게이트의 폭주는 지금 오세아니아의 절반 이상을 상실한 가장 큰 원인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비슷한 사례로는 시베리아 빌류이스크 게이트와, 중부 아프리카의 마루아 게이트가 있겠군요.
아, 네. 북미 중부 감염폭발은 코드 레드가 아닌, 감염형 개체에 대한 초기대응 실패로 분류했으니, 차후 이어질 루델돌프 박사님의 강연을 참고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제가 주목하고 싶은 건,
서울 사태.
즉, 괴수에 대한 최초의 예방전쟁입니다.
* * *
“서울 게이트의 직경은 앞서 말씀드린 게이트들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충분히 거대했고, 명백히 코드 레드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대문파와 압구정파 헌터들, 그리고 우리 국군과 한승문 장관님의 공동작전이 게이트를 조기에 폭주시켰지요. 그리고 끝내 폐문閉門에 성공했습니다.”
“이에, 충청방어선 수호를 벗어나, 괴수대응에 있어 예방전쟁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헌터가 적극적으로 게이트 안으로 진입해야 합니다.”
“게이트 내부 괴수들에 대한 개체수를 조절하든, 코드 레드가 의심되는 게이트를 조기에 폐문하든. 우리는 방어적 태도에서 벗어나 괴수와 게이트에 대한 산술적 접근을…….”
헌터 아카데미는 헌터들만의 교류가 아니었다.
헌터들이 노하우를 교류하는 동안 기업가와 과학자들 또한 와인만 먹고 있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아카데미 7일차.
초상사회 세미나가 열렸다.
수많은 석학과 사업가들이 연회장에 모여 비전을 제시했다. 그리고 영광의 첫 순서는 한국 초상연구본부의 천화란 수석.
물론 나는 가장 앞줄에 자리했고, 나와 같은 라인에는 삼성 총수, 중국 국무원 총서기, EU 집행위원장, 헌터 협회장…….
“흐음…….”
그리고 GS 그룹 총수가 앉아 있었다. 덤으로 그녀는 헌터협회 상임이사단 대표이사이기도 했다.
천금순은 여느 때처럼 하얀 양복을 차려입었다. 짙은 다크써클은 화장으로 커버했는지 피부가 참 뽀송뽀송하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그녀에게 속삭였다.
“……피자는 잘 드셨습니까?”
“레드불이랑 같이 먹으니까 맛있던데요.”
“크흠……!”
단단히 삐졌군. 조만간 돈으로 풀어줘야 되겠다.
아무튼.
천화란은 수많은 내빈 앞에서 조리있게 발표를 이어갔다.
“……그러나, 예방전쟁을 수행한다 한들 게이트의 상태를 판별할 방법은 고위 사이오닉들의 육안밖에-”
“마력 측정기입니다. 아직 프로토타입 모델이긴 하지만, 게이트 인근에서 게이트 내부의 위험성을 판별할 수-”
“차후 소형화와 상용화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군용 트럭에 실어 실전 투입이-”
천금순이 내 팔꿈치를 쿠욱 찔렀다.
“저거 좀 괜찮은데요?”
“그렇습니까?”
“네……. 혹시 채산성도 파악 가능한가요? 코드 옐로 상태일 때의 괴수 생산량이라던가. 평균적인 마석 등급이라던가…….”
“잘은 모르겠지만, 연구원들에게 그 아이디어는 전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천금순이 해맑게 웃었다.
“나만 갈릴 수는 없지…….”
* * *
“jusqu'à ce qu'il obtienne toute la douleur. 모든 고통을 정복할 때까지. 사노피 포션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포션, 힐링, 각성제의 수명단축은 텔로미어의 소모에서 기인합니다. 헌데, 어째서 텔로미어는 재생되지 않는가? DNA! DNA입니다. 생명과학에 대한 망설임이 우리를 얽어매고……!”
“삼성 사이오닉 엔진 3. 새로운 혁신이 머지않았습니다. 삼성이 열어가겠습니다. 이상입니다.”
프랑스 제약회사, 중국 과학기술부, 삼성 사이오닉 등에서도 걸출한 발표물을 내놓으며 자리를 빛냈다.
그리고 정치인은 손가락만 빨았어도 자기 임기동안 일어난 건 모두 실적으로 넣을 수 있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GS 그룹도 만만치는 않았다.
“GS 쉴드코어. 이 작은 코어를 작동시키면 반경 1m 내에 보호막이 생깁니다. 코어가 커지면……? 보호막도 커집니다……!”
단상에 올라간 천금순은 손에 자그마한 코어를 들고 있었고, 그녀는 푸르스름한 보호막을 뒤집어쓰고서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총알도 막고, 괴수도 막습니다. 80㎞로 달리는 자동차도 견뎠습니다.”
그녀는 살풋 부드럽게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고,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돈 되는 게 뭔지 아는 여자다.
저 제품의 핵심 세일즈 요소는 헌터들의 방어구가 아닌, 비각성자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것.
즉, 돈 많은 비각성자들 눈이 돌아갈 만한 제품이라는 거다.
그를 눈치챈 기자가 그녀에게 질문했다.
“천금순 회장님?”
“천 사장이욥.”
“아, 네. 천 사장님? 혹시 쉴드코어는 비각성자도 사용할 수 있는 제품입니까?”
“제가 지금 쓰고 있습니다.”
“아, 네…….”
천금순이 너무 칼같이 대답해서 기자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지만, 이 세미나에 널린 돈 많고 권력 있는 비각성자들은 슬슬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저어 옆에 있는 중국 당조서기까지도 측근과 다급히 귓속말을 주고받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뤼미에르와 사담을 나눴다.
“저거 현장에선 어떨 것 같으십니까?”
“배리어 사용자가 쉘터나 길드 섭외 1순위 중 하나입니다.”
“헌터들의 필수 방어구가 되겠군요……?”
“포션이 아무리 비싸도 결국 목숨값이라 구매하는 것처럼, 저것도 아마 비슷한 취급을 받을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고, 기자는 천금순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아, 혹시 가격대는 어느 수준으로 산정되어 있습니까?”
천금순이 방긋 웃었다.
“비매품입니다.”
“네?”
“안 팝니다.”
“네?”
아니 저건 뭔 양아치 같은 소리야.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기 시작했다. 천금순은 방긋 웃는 얼굴로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오직 GS 방위대행사의 헌터들만이 대여받을 수 있고, 국군에게 대량 납품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상업용으로 무리하게 생산할 계획은 없습니다.”
기자가 저 말 같잖은 소리에 따져 물었다.
“처, 천 사장님! 혹시 판매하지 않는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사외비입니다.”
“그, 단가 문제입니까!?”
“사외비입니다.”
기자가 추가질문을 쏟아내려 입을 움찔거렸지만 천금순은 단호히 커트했다.
“연 생산량의 2할을 정부에 무상 납품할 계획입니다. 제조원가와 공정과정을 고려한다면 충분한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 *
쉴드코어.
개인용 보호막 생성기.
고급화 전략으로 재벌, 정치인, 헌터들에게 팔아먹으면 어마어마한 수익을 낼 물건이었다. 특히 요즘같이 달러보다 비트코인이 더 안정적인 시대에는 더더욱 말이다.
그러나.
천금순은 그걸 팔아먹는 걸 포기하고, GS 방위대행사의 시장지배력을 높이는 편을 택했다. 무려 2할을 정부에 던져주며 총알받이까지 시키고 말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런 헌터 업계에 대한 독점적 지위가, 일확천금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었다.
돈보다 주먹이 가까운 시대다. 헌터는 어떤 방식으로든 가치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분야에서든 이 바닥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유지한다면…….
“저는 초상관리부 장관이 됐죠.”
“아하하…….”
“천 사장님은 뭐가 될지 궁금하네요.”
GS 그룹이 PMC 업계의 선두주자로 올라설 수 있다면, 돈, 권력, 무력을 비롯한 모든 것을 쓸어가는 거다.
단 하나 궁금한 것은…….
내가 그걸 지켜보고만 있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걸 모를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대체 뭔 깡으로 그러셨을까?”
“아하하. 화, 나셨나요……?”
“후우…….”
세미나가 끝나고 연회가 열렸다.
그리고 나는 천금순을 데리고 연회장에서 벗어나 호텔방 하나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그녀를 취조했다.
“천 사장님 나사 빠진 거야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일일이 화내봤자 머리밖에 더 빠지겠습니까?”
“아하핫……!”
이거 개그 아닌데.
나는 짜게 식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기업 총수들한테 국세청 들이밀면서 서로 협력하라고 협박해서 모아놓은 자리에서 깽판을 쳐놓고 웃음이 나옵니까?”
“아, 죄송해요…….”
“죄송하고 말고가 아니라, 왜 그러셨냐니까요?”
수틀리면 천금순 기소해서 GS 그룹 주가 바닥으로 꼴아 박은 다음에, 계열사 몇 개 다른 대기업들한테 갈기갈기 찢어서 넘기면 된다.
그게 가능한 시대다. 그래서 다들 적당히 숙여주는데, 얘는 왜 갑자기 이 지랄이란 말인가.
내가 가장 무서운 건, 아니. 염려되는 건.
얘가 이유 없이 지랄할 애가 아니라는 거였다.
“앞뒤 각 재고 들이받을 만하니까 들이받은 거 아닙니까?”
“으음…….”
“괜히 머리 아프게 지지고 볶고 할 생각 없으니까. 깔끔하게 패 까고 쇼부 칩시다. 뭐 때문에 이러는 건데요?”
그녀가 답했다.
“도박이죠. 뭐……. 잘되면 대한민국 헌터판 쓸어가는 거고. 안 되면 기스 좀 나는 거고…….”
“……혹시 헌터등급 실적제 그거 가지고 삐진 겁니까?”
“에에이, 그거야 저도 아랫사람 갈구면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요? 저도 나름 CEO인데 자잘한 거 붙들고 밤새는 건 좀 아니죠…….”
“하이고……. 피곤하니까 본론부터.”
“제가 요즘 밤새면서 들여다본 게 있는데…….”
천금순은 히죽 웃으며 동전 모양의 손짓을 취했다.
“돈은 생각보다 많은 걸 말해줘요.”
“아, 예.”
“지난 한 달간 증시랑 달러를 주시했죠. 그거 때문에 여러 날밤 새기도 했고요.”
“결론.”
“그래서 제가 궁예질을 좀 해보니까, 근시일 내로 한 장관님이 제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릴 것 같더라구……?”
“하이고…….”
나는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
“돗자리 까시죠?”
“너무 화내지 마시고……. 저도 저지른 거 책임질 줄은 아는 사람이에요. 별일 없으면 방위대행사 통째로…… 까지는 아니더라도 헌터 협회에서 손 뗄게요.”
“…….”
“덤으로 국책사업에다 봉사도 좀 하고. 요즘 양 대통령님 많이 바쁘시던데, 건물 짓고 이것저것 무료봉사 좀 해드리죠.”
“…….”
“뭘 그렇게 빼요……?”
어둑한 호텔방 안에서, 제주도의 야경을 등진 그녀가 생긋 웃었다.
“우리 원래 도박 좋아하는 사람 아니었나……?”
* * *
찬란하고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로 뷔페식 진수성찬이 놓여 있는 가운데, 수많은 초능력자, 기업가, 정치인, 과학자들이 어울리고 있었다.
여도연은 웃음소리 사이를 떠돌았다. 여느 때처럼 후줄근한 와이셔츠 차림으로.
양복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뷔페를 어기적 어기적 어슬렁거리는 그 모습은. 먹이를 찾아 킬리만자로 산을 떠도는 굶주린 암사자와도 같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 흉흉한 기세에 질려 그녀를 피해 다녔다.
그때,
누군가 여도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줌마, 편의점 왔어?”
“어, 씨. 아저씨 뭐야.”
한승문과 여도연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울리기 시작했다.
“육회 어딨냐.”
“저어기.”
“그냥 니 접시에서 가져간다.”
“양심 있냐?”
“나한테 저기까지 갖다오라고 하는 니 양심이 더 문제야.”
한승문은 지팡이로 의족을 툭툭 쳤다.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여도연이 한승문을 공격하려던 그때,
“아! 장 서기님. 네, 네. 하하하, 저야말로 영광이죠. 리충빈 부주석께서도 이 자리에 계셨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 네. 직접 감사인사 못 드려서 민망하군요. 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한승문이 중국 당조서긴가 뭔가랑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쪽에서 한승문에게 찾아와 인사했다.
여도연은 중국 대빵이랑 이야기를 나누는 한승문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평생 방구석에서 같이 리모콘 가지고 투닥거릴 줄 알았는데.
“…….”
참. 뭐랄까.
사실 고등학생 때부터 하루종일 공부만 해대는 거 보면, 뭐가 되도 될 놈이라는 거는 알았다. 자신과는 다르게 말이다.
“흐으음…….”
뿌듯한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한 것 같기도 하고.
뭉클한 것……. 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치밀었다.
그래서 대충 웃었다.
* * *
그들은 한참 동안 연회장 뷔페를 돌아다녔지만, 한승문은 거진 다섯 걸음에 한 번 꼴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붙잡혀 인사를 듣곤 했다.
식사 같지도 않은 식사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의 밤거리.
“……네. 자잘한 정황 확인되면 일단 킵해두시고요. 네, 네. 또 천금순이가 사고 친 거 맞습니다. 아, 캐비닛에 이미 있다고요? 그러면 국민당 쪽에 반독점법 일단 청부입법 쏘겠습니다. 조만간 좀 줘패야……. 네, 감사합니다, 총리님. 네. 조만간 한 번 뵙지요.”
뚝 -
한승문이 전화를 끊었다.
“안 피곤하냐……?”
“으응?”
여도연이 툭 내뱉었다.
“밥도 제대로 못 먹은 거 같은데.”
“누나도 못 먹었잖아.”
“……그르네.”
그들은 묵묵히 거리를 걸었다.
“……라면?”
“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편의점으로 향하던 그때,
까톡-!
소리가 들렸다.
“…….음?”
여도연은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고, 앞서가던 한승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야.”
“어.”
“제자들이 술 먹는다니까 오라는데?”
* * *
아카데미 기간 동안 헌터들은 자유롭게 가르침을 청하고, 또, 가르치며 교분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오가는 건 지식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친분, 가끔은 사랑, 그리고 주로,
“위하여-!”
“Prost-!”
“乾杯-!”
“Sante.”
술잔이 오갔다.
으슥한 구석 호텔방에 꾸깃꾸깃 모여 앉은 14명의 헌터들은 온갖 술과 주전부리를 깔아두고 술잔을 나누었다.
그들은 모두 소년병들이었다. 연회장에서 술을 먹지 못하기에 으슥한 호텔방을 점거한 것이다.
“……Was ist mit deinem Bier……?”
“아하하핫……! 그래, 많이 먹어! 많이!”
“Ist das Wasser……?”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좋았다.
“누구 누구 불렀어요?”
“Um…… Mohad, Min-ho, Do-yeon,”
“아니, 도연이 언니도 불렀다고요?”
“Isn't she a teen?”
“노! 노! 썰틴! 마이너스 투!”
“What the……!”
그때, 호텔 객실의 문이 열렸다.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키들이 어디 술을……!”
“어, 언니……!”
“어른도 없이 처먹어!?”
여도연이 편의점에서 쓸어온 온갖 술을 비닐봉지에 담아 내던졌고, 소년병들이 시체로 몰려드는 좀비처럼 캔맥주를 가져갔다.
달큰하게 취해 있던 여다솔이 등에 K2를 매고서 엉금엉금 기어가 여도연의 허벅지에 매달렸다. 그리고 얼굴을 비볐다.
“헤헤……. 술 먹어도 돼요……?”
“니는 군필이잖아. 먹어.”
“하와와…… 군필여중생인 것이야요…….”
“징그러운 소리 내지 말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정식 조장이 여다솔의 뒷덜미를 잡고 여도연의 다리에서 떼어냈다. 소년은 여도연에게 머쓱하게 웃었다.
“빠듯하실 텐데 뭘 이런 걸 다…….”
“내 돈으로 산 거 아닌데?”
“예?”
여도연이 엄지손가락으로 뒤편에 있던 물주를 가리켰고, 한승문이 절뚝이며 현관으로 들어왔다.
“조조장이랑 여다솔 헌터도 여기 있었나……?”
“……어?”
“……진운 씨?”
“……아, 안녕하십니, 까…….”
“……채원아?”
“…….”
“……다들 언제 이리 친해졌대냐. 나 빼고.”
* * *
르윈 슈미트체바.
스위스 대표 염동술사가 바라본 한승문의 첫인상은 전형적인 정치인이었다.
한국 초인사회의 뒤편에서 헌터 협회를 주무르고, 여론을 선동하고, 대통령의 오른팔로서 정권을 쥐락펴락하는, 그런 이미지 말이다.
“…….”
생긴 건 예민하고 까칠하게 생긴 주제에, 매일 실실 웃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뭔가 음험한 책략을 꾸미고, 사무실에서 부하들에게 재떨이를 집어던질 것 같았다.
그래서 여도연 교관의 친인척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땐, 깜짝 놀라면서도 둘 사이가 마냥 나쁘겠거니 하는 막연한 생각도 했었다.
물론-
“아니, 도연이 얘 중학생 때 담배 장난 아니게 폈다니……. 으읍……!”
“아 닥치라고!”
동생 약점 폭로하다가 헤드락을 당하는 모습을 보니 그런 첫인상은 싸악 사라졌다.
탄창 없는 소총을 껴안고 있던 여다솔이 한승문에게 물었다.
“아……. 그러면 도연이 언니 일진이었던 거예요?”
“그건 아니고. 그냥 지 엄마 빡치게 하려고-”
“아 쫌-!”
한승문은 사람을 즐겁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발음은 영 신통치 못했지만, 영어와 중국어를 구사하며 헌터들에게 살갑게 접근했다.
[아, 리충빈 부주석은 잘 지내신대요? 원래 온다고 그랬는데.]
[사, 상장님을 아십니까……?]
[그럼! 친해요! 맨날 한국 올때마다 술도 먹고!]
[그, 그러셨군요……!]
비록 몇몇 헌터들은 그의 권력을 의식하고 바짝 얼어붙었지만, 대부분의 헌터들은 어느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실 헌터 협회의 기반이 만들어진 게 거기였을 거예요. 며칠 밤낮을 그 신분당선 아래에서 치고받고 난리를 치면서…….”
그러나, 르윈은 그의 이야기보다는 그의 태도에 더 관심이 있었다.
EU 의원들은 언제나 헌터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곤 했다. 게다가 쉘터 지도자들도 보통 성격은 아닌지라, 정치판이 열리게 되면 온갖 못볼 꼴이 펼쳐지고는 했던 것이다.
특히 최근의 EU는 광기로 치닫고 있었다.
시민들이 헌터를 통제해야 한다고 거리로 뛰쳐나오고, 이에 몇몇 헌터 지도자들은 쉘터에서 극성 반동분자를 추방시키기 시작했다.
실질적 사형이다.
정치적 분쟁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르윈은 이따금 자신이 안네 프랑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증오.
증오가 유럽을 뒤덮고 있다.
이에, 르윈은 동방의 정치가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 * *
“아…… 르윈 양은 스위스에서 오신 겁니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모님 치즈집에서 일만 했는데.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르윈 슈미트체바의 첫인상은 굉장히 특이했다.
하얀 머리카락.
그것도 노인들이나 가질 법한 푸석푸석한 머릿결이다. 거울을 보면 내 머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분명, 뤼미에르가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헌터를 살렸는데,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렸다고 했었던가.
나는 서툰 영어로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르윈 양은 뤼미에르 집행관님과는…….”
“루미에 언니는 혼자서 온 유럽을 떠돌며 사람을 구해요. 그리고 저는 루미에가 서유럽에 왔을 때 차출되어 같이 활동하죠.”
“아. 일종의 멤버인 겁니까……?”
“EU 중앙군 편제가 워낙 구멍 뚫린 치즈 같아서요. 정확히는 잘 설명 못 드리는데…….”
“대충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뤼미에르한테 치유받은 그 헌터가 맞는 모양이다.
친해져서 나쁠 것은 없으니 나는 일단 방긋 미소 지었다.
“하하! 한국은 어떠신가요? 지내기 편하십니까?”
“……글쎄요.”
르윈의 눈동자가 차갑게 내리깔렸다. 저런. 안 그래도 냉랭한 인상인데, 이제는 까칠해 보인다.
“몸은 편해도. 마음은 그렇지 않네요.”
“……이런. 어떤 부분이 불편하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루미에 언니 말이 맞았어요.”
르윈은 우수에 찬 눈빛으로 소주잔을 바라보았다.
“……옛날 생각나는 곳이라고. 그래서 참 좋다고 그러더군요. 한국이.”
“……뤼미에르 씨가 말입니까?”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곳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그 말은 틀린 것 같네요.”
르윈은 캔맥주를 몇 모금 넘기고서 슬프게 미소지었다.
“……때로는 그리움이 아플 수도 있-”
벌컥-!
호텔방 문이 열렸다.
바닥에 늘어져 뒹굴거리던 소년병들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고, 방 안을 둘러보던 뤼미에르가 르윈에게 시선을 고정하고서 성큼성큼 걸어왔다.
“르윈!”
“루, 루미에……?!”
뤼미에르가 르윈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앜!”
그녀는 프랑스 말로 르윈에게 뭐라뭐라 화냈고, 르윈은 입을 삐죽 내밀고서 고개를 휙 돌렸다.
뭔 말인지는 몰랐지만, 르윈의 술을 뺏어가는 모습을 보니 대충 감이 잡혔다.
르윈을 쥐 잡듯이 갈구던 뤼미에르가 문득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장관님?”
“좋은 저녁입니다. 뤼미에르.”
“……장관님이 여긴 왜……?”
“강제로 끌려왔습니다.”
뤼미에르는 한참 동안 나를 쳐다봤고, 나는 슬며시 그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흐음. 마침 잘됐군요.”
“예……?”
“마침 찾아다니던 중이었습니다.”
뤼미에르는 살풋 눈웃음치며 앉아있던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나가시겠습니까?”
* * *
호텔 테라스에 나오자 여름의 밤바다가 우리를 반겨줬다. 파도치는 수평선이 도시의 불빛을 받으며 일렁이고 있었다.
파도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게 어우러지는 가운데, 뤼미에르의 후광이 밤하늘 아래에서 은은히 빛났다.
그녀는 하늘에 뜬 반달을 올려다보며 문득 중얼거렸다.
“한국 헌터들도 별거 없더군요.”
“……네?”
“말 그대로의 뜻입니다.”
테라스 난간에 몸을 걸치고 풍경을 구경하던 뤼미에르는, 내게 시선을 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한국 헌터들은 유럽 헌터들보다 10배는 강할 줄 알았거든요.”
그녀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살짝 취한 모양이다.
“한국이 유럽보다는 10배 정도 나은 상황이니까요.”
“……아.”
“……저는 이게 헌터들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뤼미에르의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상 어디든 사람은 똑같더군요.”
“…….”
“한국이든, 유럽이든. 그냥 보통 사람들이. 이상한 세상에서. 보통을 지키려고 싸운 것뿐이었어요.”
그녀가 내게 물었다.
“세상에 영웅이 있습니까?”
그녀가 고백했다.
“수억 명이 영웅으로 떠받드는 저도, 제가 영웅이 아닌 걸 아는데. 세상에 영웅이 어디 있겠습니까?”
“……취하신 것 같군요.”
“비슷한 사람들이 세상을 지키려고 하는데. 유럽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 들고, 한국은…….”
그녀가 말을 멈췄다.
“이런. 조금 추했나요?”
“누가 집행관께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뤼미에르는 피식 웃고서 내게 삿대질했다.
“아무래도 당신 때문인 것 같습니다.”
“……네?”
“한국이 헌터들을 죽이려 들지 않는 이유.”
살짝 횡설수설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녀의 감정은 지극히 또렷했다.
“사람들이 헌터를 배척하지 못하고. 헌터들이 정부를 신뢰합니다. 바로 당신 때문에요.”
“……저는 반쪽짜리입니다만.”
“그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모든 사람들을 채워줄 수 있으니까요. 저는-”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 입을 오물거렸지만, 끝끝내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처연히 웃어보였다.
노아 뤼미에르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어쩌다가 말이 꼬였는지. 원.”
“흐음. 이제 한국어가 원어민 수준이라는 건 알겠군요.”
“그럼요. 열심히 배웠거든요.”
나는 한참 동안 고민했다.
이래도 되나 싶어서 말이다.
“…….”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녀에게 물었다.
“……뭐 때문에요?”
“…….”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글쎄요.”
파도소리가 여섯 번 들려온 이후에야,
뤼미에르는 살풋 웃었다.
“들리시나요?”
“……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파도 소리, 그리고 호텔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어우러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곳은 헌터 아카데미.
세계평화를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요.”
그리고 정확히 한 달 전이었다. 뤼미에르가 유럽을 위해 유럽을 배신하겠다고 한 건.
“어쩌면 제가 한국으로 망명하겠다고 한 건, 도망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군요.”
“…….”
“그러니까 그냥…….”
뤼미에르는 한참 동안 망설였다.
그리고,
결국 선택했다.
“……고맙다는 말을.”
“네.”
“하고 싶었네요.”
Merci beaucoup, Ministre.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나는 한참 동안 테라스에 남아 바다를 구경했다.
달이 참 밝았다.
* * *
테라스에 홀로 남아 세상을 구경했다.
도시의 광명은 밤을 이겨내는 중이다.
참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양일호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뉴, 뉴스! 뉴스 보셨어요?!
다급한 목소리다.
“……뭐야?”
-미국 국방부에서 역대 최대 규모 게이트를 예고했어요!
영국 런던, 게이트 탐지 시스템, EU 공식 발표문, 등등.
양일호의 다급한 목소리 속에 여러 단어들이 이어졌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공항 닫으라 그래.”
-……네?
“제주공항 닫으라고.”
아카데미가 끝났다.
EP 20
헌터 아카데미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