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11화 (111/296)

EP 19 - 칼은 몸이 아니라 맴으로 쓰는겨 (5)

초인연맹 산하 무력기관.

자세한 건 아직 미정이다.

그래도 명분은 일단 세계평화를 위한 지원군 정도로 정해놨다.

그러나.

말이 국제평화군이지 외노자 대량생산을 위한 방책에 가까웠다. 이는 엄연히 뤼미에르의 부탁에서 시작된 정치공학적 행위다.

그 실상은, 유럽에 독자적인 헌터세력을 발족시켜 EU에게 경각심을 주는 것, EU가 유럽 헌터들에게 해외로 나가지 말아달라고 그들의 발목을 붙잡게 만드는 것이다.

괴수도 잡고.

마석도 가져오고.

헌터도 빼오면서 말이다.

아무튼.

EU는 돈 주고도 못 받을 귀한 가르침을 얻고, 유럽 헌터들은 엿같은 직장 때려치고 이직할 곳을 찾아낼 수 있고,

덤으로 우리는 양질의 인재들을 얻고, 국내 일자리 문제도 해결하는 거다. 게다가 마석수급을 통한 산업발전까지 이뤄내니,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잡는 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국제군 편성의 형세에 대해 여쭈어도 되겠소?”

리충빈에게 들켰다.

“으음? 한 장관. 어찌 말이 없으시오?”

* * *

정보가 어디서 샜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국이었으니까.

“한국 헌터들의 용력이 이루 말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 아닐 수 없소. 한 장관께서 심중에 그러한 힘을 동북아의 화평을 위해 사용하고자 하셨다니, 실로 반가운 심정이오.”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리충빈도 말이 안 통하는 부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부주석이 정말로 작정했다면 언론에 대고 터뜨렸을 것이다. 지금 이 대화는 밀실에서 단 둘이 있을 때 나온 이야기였으니, 이 양반도 어느 정도 딜을 붙일 건덕지가 남았다는 뜻이겠지.

즉, 지금의 행위는 그 대신에 내놓을 거 없냐고 면박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사실 가장 속편한 방법은 그냥 보내주는 거다. 유럽이나 중국이나 개판난 건 마찬가지고, 어느 쪽이든 간에 빡센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문제는, 중국이 각성제를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거다. 저쪽은 감지윤조차 각성제로 만들어낸 생체병기로 오인하고 있다.

만약 저쪽이 원하는대로 한국의 정예병력이 파병된다면 어떤 문제가 터질지 모른다.

“......네. 우선 유럽과의 긴밀한 공조 하에 국제군을 논의하고 있던 건 사실입니다.”

“오오!”

“다만. 유럽의 정치적 내부사항과 긴밀히 연계되어있는지라, 국제군은 유럽에 먼저 파병될 것 같습니다.”

“......흐음.”

리충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때.

“......실로 타당한 말씀이시오!”

리충빈이 방긋 웃었다. 그는 인자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유럽의 내사라면 내 익히 들은 바 있소. 필히 민관의 분열 때문이겠지. 그쪽은 중앙정부의 영도력이 부족하지 않소? 우리와는 다르게 말이오. 하하!”

“아, 아하하...”

리충빈의 호방한 웃음에 맞장구를 쳤지만,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동북아 중앙정부 통제력 운운하는 건 중화사상에 찌든 농담이 아니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중국을 도와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리충빈은 말 속에 칼을 담았다.

“그 부분은 우리 동북아가 이해해 줘야겠지. 같은 ‘연맹’이니 말이오.”

“차,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십니다.”

그는 찻잔을 홀짝이며 우정 드립을 치기 시작했다. 문자까지 쓰면서 말이다.

“허어, 별 말씀을. 세한지송백岁寒知松柏 아니겠소?”

“으, 으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송백의 푸르름은 겨울에만 알 수 있다.

중국의 격언이었다.

그리고,

이 격언에는 뒤쪽 시구가 있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지요. 그럼요.”

우정은 환난 속에서야 보인다.

患难见交情.

잠시 찻잔을 홀짝인 리충빈이 말을 이어갔다.

“......이물이 나타나 사람을 해한 지 1년이 지났소. 우리가 이처럼 건재한 건 이웃 간의 지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리 생각하는 바요.”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리충빈의 입에서 튀어나온 고풍스런 중국어가 낮게 울리며 내게 으르렁대는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오.”

해석 : 유럽만 니 친구냐?

리충빈은 담담하게 최후통첩을 날린 뒤, 조용히 미소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 늙은 정치장교의 눈빛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어떤 명분론이나 현실적인 한계도 이제는 무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2세대 헌터고 나발이고 아무리 징징대봤자 안 통하리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주변잡기로만 이루어진 말이었으나, 그는 명확한 맹점을 짚어냈다.

“......”

이제 중국에게 실리를 내어줘야 할 때였다.

안 그러면 이 미친 새끼들이 뭔 짓거리를 할 지 몰랐으니까.

“......하하하.”

젠장.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반쯤 나사를 풀고서 입을 털었다.

“국방의 어려움은 초인들의 미비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같은 위정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봐야, 탄환은 언젠가 떨어지기 마련이고, 그렇다고 사람의 용력을 키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허어. 당연한 말이오. 사람을 다루는 것이 어찌 쉽겠소.”

“그러니 헌터들의 능력을 대폭 증가시킬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

리충빈은 침묵을 지켰지만, 나는 그가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혹시 검기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이게. 그. 우리 정부에서 기밀리에 개발한 무술인데......”

“실전투입에서도 상당히 많은 실적을......”

“검기를 익힌 초인과 그렇지 못한 초인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

원래 약 팔 때는 최소한 영양제라도 파는 거라고.

설진운은 지리산에서 면벽수행이든 폐관수련이든 하고 있을 터였으니, 나는 조조장을 불러내서 리충빈에게 검기 열화판을 보여줬다.

그러나, 조조장이 장난감 고무칼로 강철을 무 베듯 썰어대는 모습을 보고서도, 리충빈은 흥미를 느꼈으나 거기에 만족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나는 한참동안 혀를 놀렸다.

“......헌터를 파견해봐야 일시적인 자구책에 불과합니다. 결국은 중국 헌터들의 역량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시오?”

“비단 헌터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제주도에 대규모 연구단지가 설립중입니다. 국력은 외세에서 가져올 수 없음을 지난 역사를 통해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외세의 힘은 결국 외세의 것이고, 대세를 위해서는 국력을 키움이 옳습니다. 그리고 한국이 그 자강을 도울 수 있습니다.”

“......”

“길게 보십시오 부주석. 우정은 100년을 가겠지만, 국력은 1000년을 좌우합니다.”

“......흐음.”

“아, 도착했군요. 이 영상 좀 보시겠습니까?”

결국 그를 설득한 건, 서울 사태 당시 촬영된 설진운의 무용武勇이었다.

“생각해보십시오. 양국의 긴밀한 공조 하에. 이런 헌터들을 대량으로 양성할 수 있다면......”

“......호오!”

결국.

가로등만한 검기를 사방으로 휘두르며 비행괴수들을 믹서기처럼 갈아버리는 그 모습을 본 리충빈은 기립박수를 치며 중국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가는 길에 기자들을 만난 모양이다.

장장 6시간의 마라톤 협상이 끝나고.

부산의 한 국밥집에서 소머리 국밥에 다대기를 풀고 있을 무렵, 홍보비서관의 다급한 전화에 네이버 뉴스를 확인했다.

[한승문 장관이 중국 헌터들에게 기술을 유출했다.]

[중국과의 공동연구, 득인가 실인가?]

[창조성장, 그 실체를 파헤치다!]

[리충빈 상장, 마도혁명에 동참하겠다. 공언!]

기사로 나온 것들 중에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나도 이게 뭔지 잘 모르는데 어떻게 정답이 나온단 말인가.

대충 창조경제와 혁신성장,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을 정의하라 하면 아무도 못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뭔가 좋긴 한 것 같은데,

뭔지는 잘 모르는.

그런 거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원래 미래는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과학자든, 정치가든, 경제학자든.

나도 마찬가지다.

사실 설진운의 검기가 쉽게 교육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애초에 다 가르쳐봤는데 흉내라도 내는 게 조조장 하나뿐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제주도 연구단지는 이제 막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게 어느 정도의 가치를 창출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중국과 어느 정도로 협력할 지도 모르고, 유럽에서 그걸 어떻게 생각할 지도 모르고, 다른 헌터들이 노하우를 순순히 전수해 줄지도 확실하지 않다.

애초에, 헌터들이 가진 그 노하우라는 게 그렇게 큰 가치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일단 좋게좋게 포장은 했다만은.......

그러나.

일은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괜찮네. 진행시켜.]

“예?”

부산 해운대의 멋들어진 관사官舍.

창문 너머로 찬란하게 빛나는 부산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왔고, 나는 뽀송뽀송한 목욕가운을 걸치고서 가죽소파에 쩍벌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으로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솔솔 불어왔고. 귀에 대고 있는 핸드폰 너머에는 대통령이 있었으니, 이 어찌 권력자의 표본이 아닐 수 있겠는가.

전부 다 마음에 들었다.

양판석이 하는 말 빼고.

[아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요지는 결국 한국이 중국을 가르친다는 소리 아닌가?]

“그, 그렇죠...?”

[뭐어, 진짜로 중요한 거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그림 괜찮게 나올 것 같은데 말이야.]

양판석은 살짝 혹한 목소리였다. 나는 애써 그를 만류했다.

“아니, 대통령님. 사실 리충빈을 잘 구슬려서 돌려보낸 것에 가깝습니다. 애초에 설진운 측과는 접촉도 못한 상황입니다만......”

[아무튼 뭘 개혁한다는 거 아니야? 헌터랑 초능력 관련해서?]

“그, 그렇긴 하죠?”

[그거 초상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나?]

초상개혁.

양판석의 캐치프레이즈이자 제 1 공약.

“......초상개혁이요?”

말에는 힘이 있다. 때로는 어떤 말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것도 일종의 프레임이다.

박근혜에게 창조경제가 있었고, 문재인에게 적폐청산이 있었고, 유재광에게는 민생안정이 있었다.

그리고 양판석은 초상개혁이다.

[안 그래도 쌀값이랑 뭐 이것저것 동결시킨 바람에 업자들 불만이 미어터지고 있어. 이 시점에 국민 자존심에 뽐뿌질 좀 넣어주면 괜찮을 것 같단 말이지.]

“......아니. 이걸 추진하란 말씀이십니까?”

[일단 와꾸만 잘 잡아 두게. 포장은 내가 할테니까.]

“......저도 이게 뭔지 잘 모르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구상을 하고. 구상을 했으면 실천을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말로는 다 하죠.”

[에잉... 장관은 폼으로 달았어?]

까라면 까랍신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래. 주말에 같이 장어나 먹으러 가지. 시간 비워두게. 토요일 2시.]

“저 익힌 생선 싫어하는데요.”

[맨날 날로 먹으려고만 들지 말고.]

“장어 안 먹는다니까-”

뚝 - !

“......”

하여튼 지 할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건 의원 시절이든 지금이든 똑같다.

나 원. 망할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아으으...!”

바닥을 굴러다니던 실내용 의족을 뭉툭한 정강이에 끼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진한 맥콜을 졸졸 따라 마셨다.

목에서 탄산이 터져 나온다.

“크으으...!”

물론 속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제기랄. 이렇게 된 이상 설진운을 어떻게든 설득해야-

딩 - 동 - !

초인종 소리에 인터폰을 확인했다.

꾸욱, 버튼을 누르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맥주 있냐?]

“어... 어?”

여도연이었다.

[있어? 없어?]

“이, 있는데...?”

[문 열어.]

“여기 관사인데요.”

[열어.]

“응.”

버튼을 누르자 현관 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손님들을 맞이하러 나갔다.

거지꼴 3인방이 나란히 집으로 들어왔다.

“......연탄 나르고 왔어?”

“닥쳐.”

세 사람은 시꺼먼 잿가루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여도연이 가장 먼저 집으로 들어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수 좀 할게요.”

“어, 어어.”

피채원이 나를 살짝 째려보더니 싱크대로 총총 달려갔다.

그리고.

“......오랜만입니다. 장관님.”

“어, 어어. 진운 씨. 오랜만.”

수염 난 설진운이 거지꼴로 오도카니 서 있었다.

......설진운?

“아, 아니! 우리 진운 씨!”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게 무슨 꼴이야! 일단 좀 씻어! 면도도 하고!”

나는 설진운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세수하던 여도연의 뒷덜미를 잡아 강제로 질질 끌어내고서, 설진운을 화장실에 집어넣고 문까지 닫아줬다.

“아! 씨발!”

“야, 이거 어떻게 된 일이야?”

“눈에 비누! 비누!”

나는 방바닥에 굴러다니던 내 티셔츠로 여도연의 얼굴을 박박 문댔다.

“설진운이 왜 여깄어! 그리고 이 숯검댕이는 어디서 묻혀왔고?”

“......거, 시발. 뭐. 쫌 있었수다.”

“뭔 개소리야!”

“아 쫌!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물어?!”

“설득은? 성공했어?”

“아, 몰라, 시발......”

“그래서. 우리 도와준대? 응...?”

그 대답은 설진운이 직접 했다.

“......초인 교육을 맡을 사람을 구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

“......혹, 제가 도울 부분이 있겠습니까?”

그 순간, 나는 온 우주의 기운이 나를 감싼 기분이 들었다.

아까 들은 양판석의 목소리가 뇌리에 천천히 울렸다.

[장관은 폼으로 달았어?]

그치.

그게 맞다.

판 깔아줘도 못 받아먹으면 그게 머저리지.

*

[삼성 사이오닉 신기술 발표, 플라즈마 난류란?]

[초인연맹 상임이사단 대거 임명. 중국 측 인사 다량.]

[초련 국제방위군 단장, 노아 뤼미에르 물망에 올라?]

[제주 연구단지 통폐합? 대규모 신도시 계획 발표!]

[4대 전략산업, 본격적인 가동 시작.]

[한승문 장관이 초상개혁의 신호탄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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