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10화 (110/296)

EP 19 - 칼은 몸이 아니라 맴으로 쓰는겨 (4)

홍선아는 설진운의 대답을 한참동안 기다렸다.

그러나 오랜 침묵 끝에 나온 것은, 답이 아닌 질문이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설진운은 의심했다.

“같이 목숨을 걸고 싸워놓고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자연스럽습니까?”

확실히, 이게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은 아니었다.

차라리 홍선아의 피해망상이라 치부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매 순간 영향력, 이해관계, 권력구도만 생각하며 사람을 대우한다니.

너무 기계적인 사고방식 아닌가.

“글쎄요?”

홍선아의 대답은 간단했다.

“일단 사람은 참 좋긴 하죠. 교과서에 나올만한 사람이고, 제 은인이기도 하고, 솔직히 살짝 심쿵한 포인트도 몇 번 있었구....”

“그런 사람을 의심하고 싶습니까...?”

“근데.”

그녀는 그가 사람이 아니라고 답했다.

“그 사람한테는 지켜야 할 권력이 있고, 나한테는 지켜야 할 유언이 있으니까.”

홍선아가 생긋 웃었다.

“의심해서 다칠 일은 없잖아요?”

가진 게 많을수록 생각은 복잡해지는 법이었으니.

* * *

“어쨌든!”

그녀의 나긋한 미소가 설진운을 압박했다.

“우리 설 헌터가 부협회장 노릇을 톡톡히 해줘야 장관님이 발 뻗고 주무실 수 있다 이 말이죠?”

“......”

“아핫...! 괜히 높으신 분 심기 상하게 하지 말고. 씌워주는 감투 얌전히 받아쓰는 건 어떨까요?”

설진운은 말이 없다.

“......부협회장 자리가 너무 부담스러울 수는 있어요. 당장 저만 해도 툭하면 이리저리 불려 다니고. 헌터들 사고 치면 기자들 앞에서 고개도 숙이고, 한국 헌터들을 대표해야 하는 자리니까.”

“......”

“근데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을 거에요! 그냥 정부 거수기 노릇 좀 하구, 신참들도 좀 가르치고! 가끔 제가 신호 보내면 인터뷰로 시비 걸면서 아웅다웅 치고받는 척-”

“죄송합니다.”

홍선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 하얀 얼굴에 남은 건 웃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모호한 무표정뿐이었다.

“......그래요?”

그 웃는 상相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인간성을 찾아볼 수 없었기에, 설진운은 기묘한 압박감 속에서 말문을 텄다.

“......부, 협회장은. 헌터가 아니라 정치인을 위한 자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헌터로 남으시겠다?”

“......제겐 너무 부담스러운 자리 같습니다.”

홍선아는 한참동안 미묘한 무표정으로 설진운의 눈을 들여다보았고, 설진운은 애써 그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숙였다.

결국.

“쩝......”

홍선아가 입맛을 다시며 활짝 미소지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죠 뭐!”

그녀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일어났다.

“마음은 이해했어요. 어깨 위에 뭘 더 올리기가 무서운 거죠?”

“......”

“동대문파 해산될 때까지 산에 박혀있겠다고 했잖아. 결국 리더 노릇이 이제는 진절머리가 나는 거. 맞죠?”

“......”

“......나, 참. 벽보고 말하는 기분이네.”

“......죄송합니다.”

홍선아의 입매가 삐뚤어졌다.

“그쪽이 부협회장 노릇을 해야 이 나라 헌터들이 한승문을 적으로 돌리지 않을 거에요. 그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헌터들이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 밑에서 단결하는 거니까.”

“......”

“장관님이 시키는 대로 애들이나 좀 가르치면 해결되는 일을, 이렇게까지 어렵게 꼬아버린다는 건......, 이유가 있는 일이겠지요?”

설진운이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자. 홍선아가 피식 웃으며 컨테이너 하우스의 문을 열었다.

산바람이 집 안에 들어와 식탁보를 나풀거리는데, 그녀가 휘날리던 머리카락을 한 차례 귀 뒤쪽으로 쓸어 넘기고서 몇 마디 쏘아붙였다.

“처음에는 좀 무거웠는데 나중에는 괜찮아지죠?”

“......예?”

“남들 앞에서는 냉정한 척 하는데, 사실은 진짜로 냉정해지잖아.”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홍선아가 가볍게 뱉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설진운의 마음에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사람 단말마가 생각보다 비참하지는 않죠? 그냥 감기 걸려서 끄응 끙 앓는 것 같고.”

“......”

“시체도 그래. 얼굴만 멀쩡하면 금방 일어날 것 같더라니까. 사람도 결국 죽으면 고기야. 고기.”

“......그만.”

“죽음에 무뎌지면 오히려 자존감도 생기는데. 그 사람들 본인 명령 때문에 죽은 거 알죠? 그거 가지고 들뜬 게 싫고 또.”

“그만 하십쇼.”

“일부러 울어보려고 하면 눈물이야 나오죠. 슬프지가 않아서 문제지.”

“그만...”

“이 와중에 살아남은 사람들 얼굴 보려니까 숨이 턱 턱 막히-”

“그만 - !”

악을 지른 설진운이 목검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순식간에 뻗어나온 시퍼런 칼날이 거칠게 일렁이며 식탁 다리를 자르는 바람에, 식탁 위에 있던 온갖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소년의 눈에는 핏줄이 돋아 있었다.

퍽 위협적인 모습이었으나.

홍선아의 입에서 피식- 하고 실소가 새어나왔다.

“아, 그래. 설 헌터도 혹시 밤에 귀신같은 거 보나?”

설진운은 홍선아의 비웃음을 견디지 못했다.

“......”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귀기鬼氣어린 검객의 칼날이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

피채원이 식사에서 재미를 찾는 부류는 아니었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저체중이었으니 말 다했다. 특히 부모님 돌아가신 이후로는 밥을 잘 넘긴 적이 없었다.

또, 운동을 좋아하는 부류도 아니었다. 강북에 있는 자사고에 다닌다는 건 극한의 경쟁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학교 학원만 빙빙 도는데 언제 운동을 하는가.

그리고, 이제는 무언가를 구매하는 습관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나마 매주 일요일마다 한승문이 불러서 이것저것 사주기는 했지만 대부분 생필품이다.

대충 이런 이유였다.

정장치마에 나이키 운동화 신고서.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지리산을 오르고 있는 것 말이다.

“흐이익...! 흐이이......”

피채원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심지어 침까지 뚝 뚝 떨어지기도 했다.

그나마 여도연이 뒤도 안 돌아보고 앞장서서 망정이지, 이런 비참한 꼴을 남한테 보일 수는-

“야, 괜찮냐...?”

“흐읍...!”

피채원이 잽싸게 입을 닫았다. 입에서 단내가 난다. 입 속에 들어간 머리카락을 손으로 최대한 빼냈다.

숨을 고르고, 땀을 닦아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괘, 괜찮아요...”

물론 스스로가 생각해도 괜찮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춘 여도연은 피채원을 묵묵히 째려보더니, 책망하듯 툭 내뱉었다.

“......아니, 왜 등산한다니까 치마를 입고 와.”

몸이 너무 지쳐서 능력 통제가 안 되는 바람에 여도연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사람 걱정되게 말이야......]

생긴거랑 영 딴판인 마음씨에 살짝 감동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정말로 지쳐 쓰러질 것 같아서-

콰지직 - !

“흐얔!”

피채원이 발을 헛디뎠다.

정확히는, 무게중심이 쏠린 곳의 흙바닥이 무너져내리며, 균형이 뒤쪽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즉, 등산하다 뒤로 자빠져서 뒤통수 깨지게 생겼다.

눈을 질끈 감고, 허공에 팔을 휘둘렀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때-

“야!”

여도연이 피채원의 가냘픈 허리를 감싸안았다.

“...!”

“조심 좀 해!”

피채원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네... 언니......”

갑자기 튀어나온 예상치 못한 호칭에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어색한 침묵 속에, 피채원이 말을 이었다.

“......라고 불러도 될까요?”

*

산새가 지저귀고, 바람에 나뭇잎이 사라락 나풀대는데.

지리산 어느 구석의 바위에서는 쩝쩝 소리만 울려 퍼졌다.

여도연과 피채원은 나란히 앉아 토마토김밥에서 사온 참치주먹밥을 나눠먹었다.

정확히는 여도연이 측은한 표정으로 피채원에게 자기 점심밥을 베풀었다.

입에 빨간 고추기름 묻은 깨가 묻었지만, 피채원은 반쯤 죽을맛이라 그런 거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야, 안 뺏어먹어.”

[천천히 좀 먹어라... 체한다...]

“...!”

피채원은 그제서야 생수병에 든 물로 간신히 목을 축이고, 자신의 몰골을 돌아보았다.

“......”

치마입고 등산하다 뒤로 자빠질 뻔했는데 발목까지 삐어서 걷지도 못한다.

그래서 결국 여도연에게 업혔다.

빠른년생이기는 해도 나름 고등학교 졸업할 나이인데 누군가의 등에 업히니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여도연이 미리 준비한 참치주먹밥 은박지에 고개를 처박고 게걸스럽게 식사를 하고 있다.

심지어 입에 자꾸 옆머리가 들어가서 머리카락이 씹힌다. 순간 치밀어오르는 자괴감에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싶을 무렵,

“......미안하다, 야.”

여도연이 뻘쭘하게 사과했다.

“네...?”

“승문이 얘도 다리 때문에 등산은 무리라. 원래는 지윤이 데려와서 날아가려고 했는데...”

“아......”

“승문이 이 양아치 새끼는 중국에서 손님 왔다고 빠꾸치지를 않나. 여수 앞바다에 왠 꼴뚜기 새끼가 나와서 지윤이가 긴급투입되지를 않나...”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인 거였다. 여도연은 혀를 차고서 목을 긁적였다.

“뭐, 어째 이렇게 됐다.”

“......재수가 없었네요.”

“그렇지. 발목은 이제 괜찮고?”

“네... 덕분에...”

“......그럼 다행이고 뭐.”

그 순간, 산들바람이 불어와 피채원의 기다란 생머리와, 어깨까지 내려오는 여도연의 중단발이 휘날렸다.

나뭇잎이 날아와 머리카락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세상이 뒤집혀도 6월은 초록색이다.

시원했다. 피채원의 입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소녀가 문득 하늘이 참 파랗다고 생각할 무렵, 여도연이 하늘로 손가락을 뻗었다.

“저거 보이냐?”

“네... 참 파랗네요...”

“아니. 시발, 저거.”

“......네?”

피채원이 정신을 차려보니 하늘에 작은 회색 실선이 있었다.

“......연기?”

“불 난 거 아니야?”

여도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업혀!”

피채원은 서둘러 여도연의 등짝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뛰어가는 게 아니라 날아갈 줄은.

*

불이 무서운 이유는 단지 뜨거워서가 아니다.

“불나면 타죽는 사람보다 질식사가 더 많다는 거 알아요?”

화재 사망자의 6할 이상이 질식사다. 불이 가진 가장 큰 위험은 단지 그 온도에 있지 않았다.

“커헉...! 끄으윽...!” 설진운이 그 점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사방이 타오르고 있다.

낙엽에 불이 붙어 바닥이 붉게 변하고, 나무가 잿더미가 되어 쓰러지고, 그의 컨테이너 집은 조각조각난 상태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홍선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설진운을 바라보고 있다.

“......”

“끄으윽...! 꺼어어억...!”

소년의 얼굴에 불이 붙어 있었다.

제아무리 몸부림치며 얼굴을 흙바닥에 뭉개도, 불은 꺼지지 않고 그의 얼굴에 붙어 있었다.

정확히는,

불이 그의 얼굴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홍선아가 손을 뻗어 불의 위치를 조정했다.

“함부로 칼 휘두르는 거 아니에요.”

불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설진운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한계까지 몰린 초인의 몸부림이 사방을 파괴하는 와중에도, 홍선아는 묵묵히 불길을 조종하며 자리를 지켰다.

그때.

“야.”

홍선아의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뒤돌아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불 꺼. 씹새끼야.”

여도연이 그나마 멀쩡한 반석 위에 서서, 반쯤 녹초가 된 피채원을 내려놓았다.

“우우윽...!”

피채원은 미끄러지듯 그녀의 등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홍선아가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말 안 들려?”

여도연이 이를 갈았다.

“불 끄라고. 새끼야.”

홍선아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후욱 - !

마법같은 일이었다.

사방을 에워싼 불길이 동시에 꺼졌다.

남은 건 매연과 잿더미 뿐, 그 어디서도 불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방이 불타 스러졌기에, 첩첩산중에 잿더미로 된 공터 하나가 생겨나 있었다.

여도연이 잿더미를 사뿐히 즈려밟으며 홍선아에게 다가갔다.

“애한테 뭐하는 짓거리야?”

당장 사시미칼 들고서 누구 하나 젓갈로 담굴 것 같은 표정이었고, 홍선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으음.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제가 선빵을 맞은 거라...”

“닥쳐.”

여도연이 홍선아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곳에 설진운이 있었다.

그녀가 땅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설진운을 똑바로 눕혔다. 설진운은 새까만 잿가루로 범벅이 되어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여도연이 잿가루를 닦아낸 뒤 설진운의 얼굴을 살폈다.

“......”

“멀쩡하죠?”

멀쩡했다.

여도연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홍선아를 째려보자, 그녀의 입에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왜요. 덜 뜨거운 불도 있을 수 있죠.”

“......”

“숨만 못 쉬게 한거에요. 숨만.”

나 죽이려고 덤비는데 당해줄 수는 없잖아.

홍선아가 와이셔츠를 살짝 들어올려 배꼽 옆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상처는 없어 보였지만 피가 흥건했다. 여도연은 경험으로 저게 피격 직후 포션을 부은 흔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홍선아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서, 잿더미 위에 쓰러져있는 설진운에게 다가갔다.

여도연이 경계했지만, 그녀는 설진운의 머리맡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투명한 포션을 손에 부은 다음, 로션 발라주듯 설진운의 얼굴에 치덕치덕 문댔다.

그제서야 설진운의 눈이 조심스레 떠졌다.

여도연과 홍선아가 동시에 물었다.

“야! 괜찮냐?”

“정신이 들어요?”

설진운은 눈을 꿈뻑이며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홍선아가 설진운을 내려다보며 눈을 맞췄다.

“혹시나 했는데. 이거 때문이었구나?”

“......”

“남한테 피해 주기 싫어서 산에 숨어 살려고?”

설진운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잿가루가 눈에 섞여들어가서 그런가, 눈물이 옆으로 주륵주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홍선아가 조심스레 소매로 그 눈물을 닦았다.

“문제가 생겼으면 상담을 받던가 해요. 거기서 살아나오고 멀쩡한 사람이 어딨어. 설 헌터만 그런 줄 알아?”

홍선아가 옷을 툭 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생긋 웃었다.

“나도 가끔 보이거든요. 귀신.”

여도연이 이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싶어 휘둥그레 눈을 치켜뜨는 동안, 설진운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동자를 연신 껌뻑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홍선아의 발치에서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냥. 이것만 알아둬요. 어느 쪽이든 간에 말이야..."

그녀가 마지막으로 싱긋 웃었다.

“피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고.”

불길이 순식간에 홍선아의 몸을 타고 번져나갔다.

이윽고,

불꽃이 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피채원은 오랜만에 지독한 두통을 느꼈다.

*

텅 빈 방안에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그 속에서 홍선아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휴지를 몇 장 뽑아 눈을 톡톡 두드리더니, 약병에서 곧장 몇 알 정도를 꺼내 물도 없이 꿀꺽 삼켜냈다.

지친 그녀가 식탁 의자에 주저앉아 추욱 늘어졌다.

그녀가 눈을 굴려 방을 살폈다.

방 한 켠에 있는 전신거울에서.

김춘식이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침에 양판석으로부터 오늘 새벽에 리충빈이 입국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것도 공식 일정이다.

게다가 나를 찾고 있댄다.

여기서 안 가면 한국이 중국을 ‘공식적으로’ 엿먹이는 상황이 된다. 그것도 쌀까지 듬뿍 받아놓고서 말이다.

그래서 설진운 찾으러 지리산 올라가는 것도 포기하고 달려갔다.

리충빈의 용건은 간단했다.

“연맹의 동지가 국제군 창설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익히 전해 들었소. 한국의 결단에 무한한 감사를 표하는 바요.”

중국에 지원군 보내달랜다.

“......하하, 아직 뤼미에르 집행관과 긴밀히 협의중인 사항인지라-”

해석 : 니네한테 보내주려고 만든 거 아닌데요.

“중화 10억 인민을 대표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겠소. 동지.”

해석 : 어쩌라고.

“아니, 그게-”

“고맙소!”

리충빈이 내게 살풋 고개를 숙인 순간,

뒤통수에서 식은 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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