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09화 (109/296)

EP 19 - 칼은 몸이 아니라 맴으로 쓰는겨 (3)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냉기에 눈이 떠졌다.

새벽하늘은 우중충한 파랑.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니 등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온몸에 엉켜있다.

몽롱한 정신으로 이불을 개고 이를 닦는다. 정신이 돌아온 건 양치하고 나오는 길에 식탁 구석의 푸로작을 발견했을 때였다.

손 위에 알약 하나를 올린다. 매일 아침 항우울제 챙겨먹는 생활이 반년이지만, 마음은 그닥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더 나빠지진 않으니 무덤덤하게 약을 삼킨다. 약병 옆 액자에는 가족들이 있었다. 언젠가는 그들을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라디오를 튼다. 가뜩이나 국고 빠듯한 와중에 새로 마련된 관사官舍라 그런가, 집은 넓어도 TV는 없었다.

[......청취자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지난주에 참사 1주기 추모식이 있었지요? 네. 이렇게 살아남아 그들을 추모할 수 있다는 게-]

“......”

1년이 지났다.

하늘에 구멍 뚫린 지 1년이 지나고, 사람 마음이 느껴지기 시작한 지 1년이 지나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1년이 지났건만, 자신은 무언가 바뀐 것 같지가 않았다.

흐르고 있느냐 묻는다면 고개를 저으리라. 돌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은 떠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대로 살아온 1년이었다.

사실 흘러가는 삶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사람 여럿 죽는 바람에, 삶이 수동적으로 변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가, 옷장에는 옷이 세 벌 뿐이었다. 옷을 사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피딱지가 말라붙은 너덜너덜한 교복은 옷이라기에는 누더기에 가까웠고, 그나마 한승문이 부산 신세계백화점 데려가서 맞춰준 정장 두 벌이 있었다.

“......”

옛날에는 그렇게 부모님을 졸라서 옷을 사입고, 친구들과 하루종일 옷을 보러 다녔건만, 이젠 취미라는 게 전부 말소되어버린 느낌인지라.

그렇게 묵묵히 단조로운 와이셔츠를 걸쳤다.

단추 4개 쯤 잠근 다음에야, 오늘은 출근이 아니라 등산을 하는 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뭐 입지.

* * *

“......장관님이 안 오셨다고요.”

여성용 정장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피채원이 황당한 기색으로 물었다. 목소리에 높낮이가 거의 없었던지라 묻는다기보다는 중얼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미안한데 그렇게 됐다.”

검은 에쿠스 운전석의 여도연이 찌푸린 얼굴로 혀를 찼다.

“아침에 갑자기 대통령한테 전화 받고는 짱개 빨갱이 대장이 왔다나, 이래서 리 씨랑 엮이면 안 된다나. 막- 이러면서 어디 가던데.”

아마 리충빈을 말하는 것이리라. 꼴이 우습게 되었지만, 피채원은 일말의 가능성을 품고 질문했다.

“저어...... 그러면 오늘은 돌아가 봐도 될까요?”

“둘이 갔다오랜다.”

반항하기에는 여도연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

“......알겠습니다.”

“일단 타.”

피채원은 후다닥 조수석에 탑승했다.

달칵, 안전벨트를 매고 나니 여도연이 엑셀을 밟았다.

덜컹 - !

너무 깊게 밟았다.

“으잌...!”

“꺅!”

두 사람의 단말마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

차량은 침묵 속에 지리산으로 향했다. 그나마 흘러나오는 라디오 음악만이 어색함을 가라앉혔다.

애초에 둘 다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을 뿐더러, 피채원은 한승문이 유독 싸고도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과 친분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함께 차재균의 뒤를 밟으며 첩보영화를 찍었던 감기자와 친밀했으나, 그 기억 자체가 떠올리기 끔찍해진 바람에 피채원이 그를 살짝 피하곤 했다.

고속도로의 풍경에 건물보다 산이 더 많아질 무렵, 연장자로서 이 분위기 좀 어떻게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으나 한참동안 망설이던 여도연이 큰 맘 먹고 입을 열었다.

“야, 오늘 괴수 나오면 어떡하냐.”

농담같지도 않은 농담을 피채원이 팩트로 받아쳤다.

“충청방어선 자체가 군소 게이트 활동범위 남쪽에 있으니까요. 그럴 일은 없지 않을까요.”

“......하긴. 그렇지.”

방금 그게 농담이었다는 것을 알아챈 피채원이 뒤늦게 맞장구쳤다.

“......뭐, 사실 언제 어디서 게이트가 열릴지 모를 일이긴 하죠.”

“......하긴.”

짧은 대화가 끝나자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

“......”

대저 진실이란 것은 끔찍하거나 피할 수 없을수록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고, 이건 피할 수 없는 끔찍한 진실이었으니까.

그들은 그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입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속 빈 감상이나 주워섬길 따름이다.

“......1년이나 지났네.”

“그러게요.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한 게 없기는? 충청방어선도 세우고. 초상관리부도 세우고......”

여도연의 말은 점점 흐려졌고, 종국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

“......”

간단한 이유였다.

언제 어디서 게이트가 열릴지 몰랐으니까. 지금까지 세운 모든 게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세상이었으니까.

당장 부산에 게이트가 열린다면 나라가 멸망한다. 행여 인간이 이겨내지 못할 괴수가 나타난다면 인류가 멸망한다.

은연 중 무시하고 있었으나, 마음 속 어딘가에 깊숙히 박혀있던 불안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피채원이 차마 입으로 내뱉기조차 꺼림칙해서 입을 꾸욱 다물고 있을 때.

“......아니, 뭐.”

중단발을 거칠게 헤집던 여도연이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나오면 또 잡으면 되는 거 아니겠냐.”

“......”

“저번보다는 더 잘 잡겠지. 건물 무너지면 다시 지으면 되고. 또, 그럴 수 있게 대비를 잘 하고? 으응? 그리고......”

여도연은 달변은 아니었고, 말이 길어질수록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으, 뭐시기. 뭐냐......”

지금이 딱 그 짝이었다.

그러나,

“괜히 복잡하게 재면서 어영부영할 시간에 최선을 다하자고.”

여도연은 결론만은 확실하게 낼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런가요?”

“그럼! 세상사 조빠지게 구르면 뭐, 어떻게든 되는 거지.”

“......그렇네요.”

피채원은 그런 사람도 싫진 않았다.

*

보통 세상이 싫어지면 산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산에서 산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불편함을 동반한다.

전기와 수도의 단절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한낮의 무더위와 오밤중의 추위, 어느 순간 신발 속에 들어가 있는 지네라던가, 자다가 축축해서 일어나보니 배꼽에 올라와 있는 민달팽이까지.

특히 야밤에 화장실을 가러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창문에서 나풀대는 커튼을 사람으로 잘못 인식했을 때 느껴지는 그 공포감이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산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불편과 공포보다 더 세상이 싫은 것이었다.

똑 - !

똑 - !

그러니 설진운은 노크 소리가 영 달갑지 않았다. 그는 깎아내던 목검을 내려두고서 현관으로 나갔다.

“누구세-”

“하이! 오랜만!”

홍선아였다.

“......이제 그만 오시라니까요. 협회장님.”

“우리 부협회장님, 이제 자연인 다 되셨네?”

홍선아는 살갑게 웃으며 설진운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면도는 좀 하고 살아!”

이제 그만 세상으로 쳐 기어 나오라는 말이었다.

“......협회에는 이름만 올려둔다니까요.”

“에잉, 그러지 말구! 협회 일도 하다보면 재밌다니깐?”

“......이만 돌아가주시면-”

“밥은 잘 챙겨 먹지? 자, 일단 이거부터!”

홍선아는 천연덕스럽게 축객령을 물리며 양념치킨을 들이밀었다. 설진운도 풀만 뜯어먹고 사는 건 아니었던지라 그녀를 집에 들였다.

“어머, 지난번에 갖다준 빵이 아직도 있어?”

“......그저께 주신 거잖아요.”

“빵 싫어해? 다음부턴 다른 거 사올까?”

“아, 아뇨... 싫은 건 아닌데, 살짝 부담스럽-”

“걱정 마! 내 돈으로 사는 것도 아닌데 뭘!”

사실 지리산에 틀어박힌 설진운을 먹여 살리고 있는 건 홍선아였다. 천금순이라는 지갑을 끼고서 매번 온갖 산해진미를 조달하는 것이다.

그러니 설진운은 일주일에 두세번씩 찾아오는 이 불청객을 도저히 물릴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불청객이 하는 말도 매번 똑같았다.

홍선아는 마루바닥에 앉아 치킨무 포장을 뜯으며 넌지시 물었다.

“그래. 이제 슬슬 부협회장 노릇할 마음은 들구?”

“아뇨.”

“흐음......”

홍선아의 미묘한 눈빛이 매번 거슬렸지만. 설진운은 애써 그 시선을 피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홍선아는 매번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매번 거절당하고서 푸념이나 조금 읊으며 돌아가고는 했다.

그게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오늘은 조금 길어지려는 모양이다.

“정말로 부협회장하고 싶은 마음 안 들어요?”

“......죄송합니다.”

그녀가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홍선아는 웃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미묘한 무표정으로 한참동안 설진운을 바라보았다. 설진운이 마른 침을 삼킬 무렵에서야 그녀가 다시금 질문했다.

“진짜로 헌터 때려칠거에요?”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피식.

돌아온 것은 그녀의 비웃음 뿐이다. 설진운의 눈쌀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홍선아가 재촉했다.

“그래요. 얼마나 더 지리산에서 웰빙을 하시려고?”

“......그건.”

설진운은 말을 끊고 한참을 망설였다. 그 망설임의 길이는 소년이 가진 부채감과 같았다. 그 부채감은 어깨 위에 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었다.

“......적어도, 동대문 캠프라는 조직이 완전히 해산될 때까지입니다.”

“아아.”

홍선아는 그제서야 이해했다는 듯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래요. 근데 설진운 헌터의 능력이 필요한 곳이 있지 않나요? 지금도 평택 쪽은 내려오는 괴수들 잡느라 고생이라던데.”

“......이제는 다른 PMC도 많이 생긴 걸로 압니다.”

“글쎄요. 그래봤자 설 헌터보다는 못하죠. 뉴스에는 안 나왔지만 그저께 다섯 명인가 죽었을 걸요? 천 사장님이 그거 덮겠다고 품 좀 파시더라구.”

“......”

설진운의 침묵은 그의 죄의식만큼 길었다.

즉,

미묘했다.

“......죄송합니다.”

“하아......”

홍선아의 한숨에 설진운의 어깨가 움찔 떨려왔다.

“그래요. 사실 설 헌터랑 나랑 비슷한 처지니까 이해해요. 밑에 있는 사람이 죽으면 기분이 더럽죠. 그 사람이 전우면 더더욱 그렇고.”

“......”

“근데 나는 이런 생각을 해요.”

으음. 뭐랄까.

“세상이 좆같아졌잖아요? 그죠?”

설진운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홍선아는 흡족스레 미소지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원래는 없던 2가지가 생겼죠?”

그녀가 검지를 세웠다.

“하나는 괴물.”

그녀가 중지를 세웠다.

“하나는 초능력!”

홍선아는 아이를 가르치는 유치원 선생님처럼 굴었다.

“그런데 마침 초능력자가 마석을 톡 건드리면 괴수가 죽어나가네? 그리고 마석을 먹으면 더 강해지기까지 하네? 그러면 초능력자는 괴수를 잡으라고 생긴 직업이 아닐까요?”

“......”

“알아요. 개소리인 거. 그런데 말이에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돕는 건 일종의 책무 아닌가? 의무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체에 살면서 헌신하는 건 인간으로서의 도리 아닐까요?”

치익 - !

콜라캔 따는 소리가 방에 울렸다. 홍선아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몇 모금 꼴깍였다. 그녀는 방바닥에 콜라캔을 내려놓고 다리를 꼬았다.

“특히 설 헌터나 나같은 경우는 더더욱 그래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있잖아요? 스파이더맨이 했나.”

“걔 삼촌이요.”

“아무튼.”

볼품없는 산골짜기 컨테이너 집에서 최고위 헌터 두 명의 대화가 이어졌다.

“구할 수 있으면 구해야죠. 살릴 수 있으면 살려야죠. 힘이 있고, 인망이 있으면, 앞장을 서야죠.”

“......”

“알아요. 결국 뭐, 애국페이 열정페이같은 허울뿐인 말 아닌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라는 뭐, 일종의 세뇌적인 윤리 아닌가? 제가 생각해도 그리 합리적인 생각은 아니거든요? 나만 잘 살면 됐지 뭐.”

“......”

“근데 이런 걸 보통 도리라고 부르고. 우리가 뭐 합리적으로 사는 생물은 아니잖아요?”

홍선아는 생긋 미소지었고, 설진운은 그 면전에 대고 반발했다.

“......할 만큼 했잖습니까.”

실적이 있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여기서 제가 뭘 더 해야 합니까? 제 밑에서 죽은 사람만 수백 명이 넘어갑니다. 협회라는 게 저같은 고등학생 하나 없다고 안 돌아가는 곳입니까?”

“네.”

“......그래도 이제는 예전보다 훨씬 나아지지 않았습니까.”

“위험은 항상 상대적인 거죠.”

“......꼭 저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능력이 있다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겁니까? 대체 언제까지요?”

“앞에서 애가 죽어가면 안 살릴 건가요?”

“......아프리카에서 누군가 굶어죽는 걸 알아도. 그리고 그 애들을 먹여살릴 돈이 있어도. 별 생각 없이 잘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자꾸 이제와서 저보고 누굴 도와라 살리라 강요하시는 겁니까?”

“굶어죽는 애가 느그 새끼가 아니라 우리 새끼니까 그렇죠.”

“장난치시는 겁니까...?”

“아, 인상 좀 쓰지 마요. 그냥 어른끼리 가볍게 이런 얘기 좀 할 수도 있지!”

설진운이 들이받을 기색을 보이자 홍선아는 슬며시 웃으며 뭉갰다. 그러나 그 삐뚤어진 입에서 나오는 말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제가 알기로는. 홍선아 협회장님도 위험에 무차별적으로 뛰어들기 싫어서 길드를 반으로 쪼갰다고 들었습니다.”

홍선아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아. 그거? 옛날에 그랬죠. 춘식이 아재 밑에 있다가. 그냥. 뭐.”

“......이제는 생각이 바뀌신 겁니까?”

“으음. 글쎄요? 다시 생각해보니까 깨달은 건 조금 있죠.”

그녀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그러나 설진운의 눈에는 그게 미소로 보이진 않았다.

“그런 투정도 결국 나 대신 불에 뛰어드는 양반이 있어서 가능했던 건데. 이제는 없잖아요.”

“......”

“안 그래요?”

홍선아의 묘한 미소에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설진운이 침묵을 고수하자, 홍선아가 피식 웃고서 설득을 이어갔다.

“사실 헌터들이 무조건 일반인을 위해 죽어야 한다고는 생각 안해요. 아직도 뭐, 기사 쓰는 아재들은 우리 목숨 맡아놓은 것처럼 굴긴 하는데......”

“......”

“근데 개인의 생각이야 어찌 됐건, 제가 협회장이라는 감투를 덮어쓰고 있는 이상. 헌터들의 이익을 챙겨야 한다는 건 맞잖아요? 그죠?”

“......”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설 헌터가 필요한 거에요.”

홍선아가 다시금 콜라를 꿀꺽꿀꺽 들이키고, 살짝 미식거리는 트림까지 하고서는 배시시 웃었다.

퍽 만만한 꼴이었지만 설진운은 그 앞에서 미동도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마력 때문이다. 어느새 이 방은 홍선아의 마력으로 지배되고 있었다.

“으음. 그래요. 어디까지 말했더라?”

“......”

“아. 그래. 아까 이제는 좀 세상이 안전해졌다고 했죠? 뭐, 충청방어선 이야기하는 건가?”

설진운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요. 나는 서울에 득실거리는 것들보다, 사람 하나가 더 무서운데.”

“......네?”

“아니, 뭐. 사실 여기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의외로 우리 부협회장님이 애국페이에 별로 관심이 없으셔서 특별히 말씀드립니다? 이거 공식적으론 비밀이에요?”

홍선아는 가볍게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붉은 마력이 은은하게 찰랑거렸다.

“설진운파라고들 하던데. 어제 저녁에 한승문 장관님이 그쪽 애들이랑 접촉했어요.”

“......네?”

“조만간 국제파병이 있을 건데. 그 사람들 교육을 그쪽 파벌한테 맡긴다고 하시더라고.”

“......”

“뭐어, 사실 저도 꼴은 협회장인데 그리 인망이 있는 편은 아니라서요. 그나마 압구정계 헌터들 대표긴 한데 옛날에 그쪽 절반 데리고 날라버려서 저 싫어하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

“물론 그렇다고 제 밑에 있는 GS 길드원들이 제 사람은 아니에요. 저보다는 천 사장님 사람이라고 보는 게 맞죠. 돈으로 꼬신 사람들은 물주한테 충성하는 법이니까.”

설진운은 줄곧 침묵을 지켰으나, 이어지는 말에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한승문 장관, 아니. 그때는 의원이었죠. 한 의원님도 그걸 모르진 않았을 거라고 봐요. 내가 협회를 장악하지 못하리라는 거.”

“......네?”

“생각해봐요. 이제 막 대학교 졸업해서 커피나 따르던 인턴이 수천명 단위 무력집단을 통솔한다? 물론 춘식이 아저씨 옆에서 보고 배운 건 있죠. 그런데 조직을 굴리는 건 리더십 하나로 하는 게 아니더라구. 몇 달 해보니까 알겠어요.”

“......”

“한승문은 협회를 천금순한테 준거야.”

설진운이 상황의 앞뒤를 파악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나 홍선아의 추측은 설진운의 이해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물론 천금순이 배후자로 있는 이상 협회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죠. 결국 정치권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었고. 그게 누구겠어요? 한승문이지.”

“......아니, 이게. 무슨-”

“결국 중간관리자 여럿 앉혀놓고 오너가 된 거에요. 그 의원은. 원옥분이 차기 대통령으로 예상되는 상황 속에서 헌터 협회 하나만은 철저하게 먹어놨던 거라고요.”

홍선아가 새로운 위협을 논했다.

아주,

아주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그런데 그 용의주도한 인물이 초상관리부 장관까지 됐네?”

“......”

“한승문이 예측하지 못한 유일한 변수는 우리 설 헌터가 지리산에 틀어박힌 것 뿐이에요. 원래는 설 헌터가 저를 견제해야 한다고요. 그래야 본인이 협회에 영향력을 미치기가 편해져요.”

“......”

“근데 봐봐. 설 헌터가 죄다 쌩까고 산에 틀어박혔어. 그러면 제가. 아니, 천금순 사장이 헌터 협회를 죄다 쓸어먹겠죠?”

“......”

“그러면 한승문은 헌터들한테 목줄을 채울거에요. 자기 손 밖으로 못 벗어나게.”

“......”

홍선아가 단정지었다.

"그리고 그건 아주 치명적일 겁니다. 뭔 짓을 할지는 모르지만, 확신해요."

“......”

“이해 안 돼요? 내 설명이 너무 어려웠나? 설 헌터가 지리산에 틀어박혀 있으면, 한승문이 헌터들 조지려고 칼을 빼들 거라니까?”

“......”

“그러니까 다같이 엿먹기 싫으면 자연인 노릇 그만하고 장관님이 씌워주는 감투 얌전히 받아써요.”

홍선아가 생긋 웃었다.

“대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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