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9 - 칼은 몸이 아니라 맴으로 쓰는겨 (2)
육체계와 정신계.
각성자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육체계는 몸속의 마력을 다루고, 정신계는 몸 밖의 마력을 다룬다.
전자는 강체술, 즉발성 신체강화, 신체변형 형태로 나타나고, 후자는 화염술사 염동술사 같은 형식으로 나타난다.
사실 각성자별로 특기가 조금씩 다 달라서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육체계와 정신계만은 명확히 구분된다.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육체계는 능력이 강할수록 오감을 비롯한 신체능력이 점차 강해졌으며, 정신계는 능력이 강할수록 마력을 느끼는 기감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여도연을 바라보는 음침한 인상의 남고생과, 소총을 든 여중생은, 김춘식 밑에서 빡세게 구른 육체계 능력자들이었다.
“너 임마! 출마한다고 빌려간 500만원 아직도-”
[아, 설진운이 바꾸라니까 그 얘기가 왜 나와!]
통화내용이 다 들린다는 소리다.
* * *
“니가 뭘 잘못한지를 모르겠냐? 응?!”
[나랑 밀당하자는 거야, 뭐야?]
“나한테 할 말이 진짜로 그거뿐이냐?”
[삐졌어?]
여도연이 움찔했다.
“......아니! 상식적으로 동생이 되가지고 몇 달 동안 잠수를 타다가 겨우 전화를 올렸으면, 아이고 누님 그간 기체후 일향 만강하셨느냐고 여쭙는 게 기본적인 싸가지가 아니냐 이 말이야!”
[그래서 삐졌어?]
“누, 누가 삐졌대? 너 엄마랑 아빠한테도 통화 한 번도 안했다며? 그냥, 그, 가족 간에 최소한 도리를 지키고 살자 이거지......”
[삐졌네.]
“아, 아니라고!”
지켜보던 두 헌터의 표정이 점차 썩어들어가는데, 비각성자였던 군인만이 안절부절 못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으응? 뭔데? 도연이 누님 지금 화난 거 아니야? 어디 괴수 나왔대?”
소총 맨 여중생이 음침한 남고생에게 속닥거렸다.
“도연이 언니 왜 저래...! 낮술했어...?”
“몰라...”
여도연이 그나마 냉정을 찾은 건, 산기슭에서 커다란 군용 수송트럭 여러 대가 줄줄이 내려올 무렵이었다.
트럭들은 거친 엔진소리와 함께 초소 앞 공터에 멈춰섰다.
어떤 트럭에는 사람이 타고 있었으나, 어떤 트럭에는 시체가 타고 있었다. 다행히도 시체더미 중에 사람 시체는 없었다.
열댓 명의 헌터들이 왁자지껄 수다를 떨며 트럭에서 내렸다.
한국군 제식소총인 K2와 M16을 매고 있는 헌터들은, 오토바이 헬멧과 경찰용 진압방패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무장상태는 제각각이었는데, 어떤 헌터는 맨몸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보통 무장상태가 빈약할수록 강한 헌터였다.
그리고 검은 정장만 입은 여도연은 언제 바락바락 소리쳤냐는 듯 얌전하게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진운이는 왜 찾는데?”
[어어, 우리 설진운 헌터 거기 계시나?]
“왜 찾냐고.”
[오랜만에 밥이나 한 끼 하자. 뭐, 이런 얘기지.]
“......여기 울진인데?”
[알아.]
밥 한 끼 먹자고 바쁜 헌터들을 울진에서 세종시까지 부르는 건가 싶어서 여도연이 머리를 살짝 갸우뚱거리자마자-
[지금 보이네.]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평선 언덕길 너머에서 검은 에쿠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쿠구구구구 - !
무거운 엔진음을 흘리는 방탄 에쿠스 세 대가 줄지어 다가왔다.
충청방어선 초소 옆 공터에 차량에 멈춰서자 수많은 양복쟁이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그 중엔 특수부대원도 몇몇 섞여 있었다.
게다가 예사롭지 않은 마력은 정신계 헌터들로 하여금, 경호원들 중 몇몇이 상당한 실력의 초인이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에쿠스와 두돈반.
검은 양복과 등산복.
방탄모와 오토바이 헬멧.
저격총과 K2.
질서와 군집.
“......”
“......”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무력집단이 본의 아닌 대치 상태에 빠지자, 군 초소 앞 공터에는 의미모를 긴장감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때, 세 번째 차량에서 지팡이가 빼꼼 튀어나왔다.
그리고.
“아이고, 반갑습니다-.”
넉살좋은 인삿말이 들려왔다.
“낯이 익은 분들이 참 많으시네. 갑자기 연락도 없이 찾아뵈어서 참 죄송합니다들.”
퍽 자연스럽게 눈웃음치는 한승문이 절뚝이며 걸어와 여도연과 다정하게 포옹했다. 물론 한승문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여도연을 일방적으로 껴안는 형태였다.
“우리 누님 인상 보니 잘 지내셨나보네.”
“너는 왜 할아버지가 다 되서 왔냐.”
“여전히 험악해서 참 좋아.”
여도연이 시큰둥한 모습이라 오히려 분위기가 한층 온화해졌다. 지켜보는 이들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설 헌터는?”
“여기 없어, 임마.”
“......으잉?”
여도연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도 못 본지 한참 됐다.”
*
치이이이익 - !
오리기름에 김치 자글자글 익어가는 소리가 불판 위에 가득했다. 나는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서 고기를 살짝 뒤집었다.
저절로 군침이 돈다.
그때, 가게 구석에서 떼창이 들려왔다.
“잘 먹겠습니다 - !”
헌터 다섯 명 정도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 분위기가 퍼지더니 불콰하게 취한 헌터들이 너도나도 인사를 건네왔다.
나도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답했다.
“맛있게 드십쇼!”
“예엡!”
활기찬 기합이 돌아왔고, 나는 기분좋게 고기를 뒤적였다.
옆에 앉아있던 여도연만 떨떠름한 표정이다.
“......국민 세금으로 사는 건 아니고?”
“천금순 사장 카드로 긁는 거야.”
“결국 남의 돈으로 생색-”
“쉿.”
“으웁!”
여도연의 입에 집게로 고기를 쑤셔 넣었다. 그녀는 맛있게 오물거렸다. 하기야 뜨거운 걸 느낄 짬은 아니었으니.
대관절, 나는 가게 하나를 통째로 빌려 헌터들을 대접했다.
우리는 여러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오리고기를 구웠다. 여도연과 나는 가장 구석 테이블에 단 둘이 앉았다.
물론 가게 안에 설진운은 없었다.
나는 소리를 낮춰 은근하게 물었다.
“......이게 진운 없는 진운팀인가 그거냐?”
“목소리 낮춰봤자 들을 사람은 다 들어.”
“아무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국가 헌터들은 철저하게 관리된다. 그리고 분명 설진운파 사람들이 울진에서 사냥을 한다는 보고를 받고 온 건데, 설진운이 없다니.
“......꽤 됐다. 아마 너 청문회 할 즈음이었나......”
여도연의 설명은 간단했다.
“......설진운이 헌터를 때려쳐? 그냥 이름만 올려두고 사냥을 안 해?”
“때려친 것까지는 아니고. 그냥, 좀, 질렸다 그래야 하나......?”
“......뭐, 처음듣는 소리는 아니긴 한데.”
설진운이 우리집 놀러왔을 때 지쳤다는 소리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 컨디션이랑도 꽤 비슷해서 착잡한 심정이었고 말이다.
하기야 이제 20살 된 애가 수백명의 목숨을 등에 지고서, 그 지옥도에서 살아 나왔는데 안 지치면 이상한 거였다.
게다가 오죽 죽었는가.
다만.
“쓰읍......”
인간적으로는 이해하나 정치인으로서는 용납 못 한다.
정치인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진운이 없으면 누가 홍선아(를 앞세운 천금순)의 독주를 견제하는가.
그렇게 골머리를 싸매고 있으니 여도연이 물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인데?”
“2세대 헌터들 중심으로 평화유지군을 파병하려고 하는데. 기초교육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해서......”
“2세대 헌터가 뭔데?”
“아, 씨......”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해야 했다. 실업난, 치안유지 이야기는 싹 빼고, 세계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치안유지군 컨셉으로 말이다.
“-그냥 보내면 못 쓰지. 교육을 시켜야 우리도 좋고 그 사람들도 좋지.”
“왜 설진운이 필요한데?”
홍선아한테 맡기면 헌터 협회 내부에서 천금순을 위시한 GS 라인에 너무 많은 힘이 쏠리기 때문에, 헌터 교육 관련으로는 설진운파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입 밖으로 내면 안 되는 종류의 정무적 판단이다.
그래서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뭐. 설 헌터가 이쪽 방면으로 재능이 있는 것 같더라고.”
“어라, 어떻게 아셨습니까?”
뒤에서 누군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밑반찬을 앞접시에 담고 지나가던 사람이었다.
"...!"
빠르게 모습을 스캔했다.
대충 고등학생 정도로 보인다. 살짝 음침한 인상에, 교복은 말라붙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허리에는 단검 두 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소총을 맨 여중생이 있었고 말이다.
“......아아! 그!”
기억났다.
얘네 압구정 캠프에 있던 애들이다. 정확히는 김춘식 옆에 붙어 다니며 신분당선, 의정부, 서울 전투까지 함께했던 베테랑 소년병들이었다.
정확히는 아마...
“정찰조...?”
“아! 기억해주셨습니까?”
“안녕하세요!”
나는 눈치껏 잽싸게 플라스틱 의자 두 개를 가져와 녀석들을 앉혔다.
“정찰조장이었던가요?”
“네, 맞습니다.”
남고생은 김춘식파 정찰조장이었고 여중생은 정찰조원 스나이퍼였는데,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음침한 인상의 남고생이 뻘쭘하게 웃었고, 여중생은 활기차게 엉터리 경례를 올려붙였다.
“저는 조정식이라고 합니다. 다들 어지간히 할 짓이 없는지 조조장 아니면 쌍칼이라고 부르긴 합니다.”
“군필여중생 여다솔! 도연이 언니랑 똑같은 의령 여씨 삭주공파입니다!”
여도연을 살짝 보니 피식 웃는 게 아무래도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나는 조조장과 여중생에게 차례로 악수하며 인사했다.
“같이 싸운 적은 세 번이나 되는데 이름도 기억 못해서 미안합니다. 그나저나 설진운 헌터가 사람을 잘 가르친다고요?”
조조장이 단검을 뽑아 들이밀었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호오.”
단검 끝에는 설진운이 사용하던 푸른 검기劍氣가 살짝 맺혀 있었다.
*
“서울에서 코쟁이 아저씨 죽고 나서 일단 홍선아 그 사람을 협회장으로 세워놓긴 했는데. 그 밑으로 들어가기는 조금 아니꼽더라고요.”
“흐음......”
“왜, 그렇잖아요. 예전에 길드에서 40명이나 데리고 독립해버린 거. 그게 지금 GS 아이기스 아닌가?”
“그렇긴 하지.”
회식이 끝나고 4명만 따로 카페에 왔다. 나는 이 베테랑 소년병들과 함께 카페 구석에 앉아 있었다.
딸기 요거트 스무디를 홀짝인 조조장은 냉소적으로 홍선아를 비웃었다.
“누구 때문에 집안 박살났는데 마지막에 이삿짐 조금 날라줬다고 동거하는 건 좀 아니죠. 그래서 설진운 쪽으로 이적했습니다.”
하긴. 신분당선, 의정부, 서울까지 김춘식을 따라다니던 아이들이다. 길드 헌터 40명 데리고 날라버린 홍선아를 싫어하는 것도 퍽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모든 것의 배후에는 내가 있었지만, 이건 그냥 입 다물고 있어야겠다. 나는 소총을 꼬옥 껴안고 있는 여중생에게 물었다. 녀석은 단 한 순간도 몸에서 총을 떼어놓지 않고 있었다.
“......다솔 학생도 그렇게 생각하나?”
“아뇨?”
“뭣...!”
즉각적인 대답에 조조장이 더 놀란 것 같았다. 여다솔은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
“선아 언니 심정도 살짝 이해해요. 옆에서 본 게 있는데.”
“......”
“근데 우리 조장님이 나간대서....... 살짝 힙찐따 기질이 있어가지구. 혼자 보내면 아싸 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나왔죠.”
알아듣지 못할 단어가 조금 있었지만 대충 뉘앙스로 이해했다.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찰조장이라...”
고등학생이긴 해도 압구정파 간부였다.
“이적하는 대가로 설 헌터가 비전을 전수해준 건가?”
대답은 여도연이 했다.
“아니. 걍 죄다 가르쳤는데 쓸 줄 아는 게 정식이 뿐이더라고.”
“......검기 살짝 보여줄래요?”
조정식 조장이 단검을 꺼내들고 인상을 찌푸렸다. 검은 칼날 끄트머리에 푸르스름한 검기가 송글 맺혔다.
카페에서 준 갈색 휴지를 갖다 대니까 사르륵 베여나간다. 참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이게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 기술이었나? 개인 특기 아니에요?”
“아뇨. 몸속에 있는 마력을 물건에 씌우는 기술이래요.”
“설 헌터가 그래요?”
“네. 뭔, 칼을 몸처럼 생각하면 된다 그러던데......”
다소 무협지같은 설명이었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인가 뭔가 그건가.
“근데 그냥 며칠동안 계속 마력 때려박으니까 되더라고요.”
“......실용성은 어떻습니까?”
“서울에서 보셨잖아요. 설 대장이 가로등만한 칼날 휘두르면서 무쌍찍던 거.”
“아니, 이거 쓸 만 합니까? 효율성이나, 뭐...”
조정식은 애매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배우기가 조금 빡세긴 하던데......”
그리고 슬며시 미소지으며 검기를 거둔 칼을 식탁에 박아넣었다.
“확실히 좋죠.”
단검의 칼날은 식탁을 뚫지 못하고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장난감 칼이었다.
이 시점에서 판단이 섰다.
“......설진운 헌터 어디 있습니까?”
“지리산이요.”
*
[여보세요...?]
“어, 채원아. 의원님이야. 밤늦게 전화해서 미안하다. 자고 있었니?”
[아, 네......]
“내일 등산 갈래?”
[......네?]
“등산 갈까?”
[......저어, 내일 토요일-]
“등산.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