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8 - 웰컴 투 코리아 (4)
처음에는 통역을 의심했다. 폭탄 목걸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저 황당한 심정으로 그녀에게 물어볼 따름이다.
“......폭탄, 목걸이라뇨?”
“말 그대로입니다. EU가 헌터들의 생사여탈권을 노리고 있습니다.”
“...! 아니 시대가 어느 시대인-”
문득. 말을 멈췄다.
그래. 시대가 어느 시대인가. 이런 지랄맞은 일이 생기기에는 충분히 지랄맞은 세상이었다.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 정신이란 게 그리 고결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 극한에 몰리면 미치는 법이다.
당장 유럽은 괴수와의 난전이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그때 듣던 바로는 각지의 군웅들이 도시별로 쉘터를 만들고 버티는 상황이라고 했다.
봉건 영주처럼 말이다.
그리고 왕이 비대해진 영주를 죽이려는 시도는 인류 역사상 수없이 이어진 행위였다. 그게 권력의 본질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그러니.
나는 불안한 예감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금만 더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주머니에서 작은 칩과 리모컨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뒀다.
“발단은 유럽의회에서였습니다.”
* * *
박애적인 구호의 나날이었다.
노아 장-마리 뤼미에르의 하루에는 낮밤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 13시간 이상 전장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그나마 나아진 수치다.
사태 초기에는 과장이 아니라 며칠 밤을 새며 싸우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게 다 그녀가 치유사라서다. 자기를 치료하며 싸우는 것이다.
물론 포션이나 힐을 통한 모든 급속회복이 그렇듯, 수명 대차게 깎아먹는 짓이었지만, 그녀가 싸우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죽는다.
그녀는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아 뤼미에르는 살짝 흔들리는 전용기 침대에 누워 담담히 읊조렸다.
“사실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일하던 시절에도 가끔 카슈미르같은 분쟁지역 파견되면 지금처럼 일했으니까요. 그러니 별 거 아닙니다.”
동료들의 반응은 간결했다.
일단 가장 먼저 소파에서 와인으로 병나발을 불던 영국놈이 ‘정중한’ 손짓과 함께 그녀에게 대답했다.
“Cut the crap.”
해석 : 개소리 집어쳐
다른 동료들도 한 두마디씩 응원을 보탰다.
“하여튼 프랑스 연놈들 허세떠는 건 남녀를 가리지 않는군.”
“저기요. 루미에 언니. 비타민이라도 좀 먹고 나서 말씀하시는 건 어떨까요. 슬슬 주름이 위험한 나이 아닌가? 물론 저는 젊고 싱싱해서 잘 모르겠지만요.”
“지랄 마라. 서양인.”
노아 뤼미에르는 가볍게 아랫입술을 삐죽였다.
“이런. 들켰네요.”
그녀는 하품하며 침대에서 몸을 꿈틀거렸다. 비행기 창문 너머로 상공 35,000 피트의 석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따사로웠다.
침대에 누워있던 그녀는 주홍빛 햇살에 이끌려 창문으로 데굴데굴 굴러가서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물론 태양은 아름다웠으나 지상은 폐허였다.
한참동안 무너진 세상을 구경하던 뤼미에르는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소파에 앉아있던 영국놈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왜 때려!”
“술 좀 그만 드십시오. 이 어린놈아.”
그녀는 쪼그려 앉아 소형 냉장고에서 비타민을 꺼내 으적거렸다. 온종일 괴수만 잡고 다니니 밥 먹을 시간도 없어 비타민을 애용했다.
그러니 노아 뤼미에르가 쉬는 시간은 주로 헬리콥터나 비행기를 통해 이동하는 시간이다. 요즘은 국제적 저명인사가 되며 안락한 전용기를 선물 받았다.
그리고 전용기 침대에서 추욱 늘어져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이, 최근 그녀의 소소하면서도 크나큰 행복이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침대로 돌아가 담요를 두른 노아 뤼미에르는 전용기 구석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마예드 알 무왈리드에게 물었다.
그가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예드? 뭐 보고 있습니까?”
“나. 보다. 뉴스.”
프랑스어라기에는 살짝 이상했지만 뜻이 통할 정도는 됐다. 뤼미에르는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내용인데요?”
“달러 인덱스가 붕괴했다.”
“그게 뭔데요?”
“미국이 좆됐다는 뜻이다. 알라께서 역사하셨군.”
누구든 간에 신이 있었다면 세상이 이렇게 변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뤼미에르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신이 있든 없든 문제일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노아 뤼미에르는 그딴 고민할 시간에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스위스 소녀가 다가왔다.
“루미에 언니. 이거 좀 보실래요?”
소녀가 들이민 핸드폰 속에서는 누군가 연설을 하고 있었다. 자막을 통해 알아본 그의 신상은 무려 의원이었다.
민주국가의 입법기구로 의회가 있듯, 유럽연합에도 유럽의회가 있다. 그리고 장 피에르 리즈레는 그곳의 의원이었다.
물론 700명이 넘어가는 의원 중 한 명이라 높으신 분은 맞지만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고, 대충 이름 보니까 프랑스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당을 확인한 뤼미에르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EPP네요?”
“루미에 언니도 계속 봐봐요. 뭐라 말하는지.”
유럽인민당 European People's party.
이름만 들으면 좌파정당 같지만 자유 보수주의와 기독교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우파 세력이었다.
그리고 현재 유럽의회의 최대 다수당이기도 했다. 성향은 중도우파지만 요즘 들어 우클릭을 거듭하며 민족주의 극우로 변하고 있었다.
그래서 뤼미에르가 보기에는 참 탐탁지 않은 곳이었고, 이 양반 말하는 꼬라지도 탐탁지 않았다.
[......그들의 힘과 주체할 수 없는 폭력성은 양날의 검입니다. 인류는 그들을 통제해야 합니다. 초인 범죄자는 지성이 있는 괴수와 다름이 없습니다.]
“으음. 멘트가 좀 세네요. 선거철인가?”
“계속 봐봐요. 이 사람, 루미에 언니 이름도 팔아먹더라니까?”
[물론 노아 뤼미에르와 같은 영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초인이 뤼미에르이기를 기대하는 건 못할 짓입니다.]
중간에 들어온 한 기자의 질문에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르몽드의 플뢰르 기자입니다. 실례합니다만 의원님, 의원님의 발언은 인류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우리 초인들에 대한 모욕으로 비추어질 수-]
[그렇다면 당신의 그 질문은 이상성욕자 초인에게 살해당한 제 딸에 대한 모욕으로 비추어질 수 있겠군요. 연설을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리즈레 의원은 법안 하나를 발의했다.
[......이에, 저는 초인관리법을 통과시켜, 모든 초인을 국가에서 통제하고, 그들의 위치정보를 비롯한 기본권의 제약이 일부 주어져야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수심에서 우러나온 법안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네. 마음 같아서는 폭탄 목걸이라도 달고 싶은 심정입니다만. 이게 제가 그나마 이성을 유지한 결과물입니다. 모든 초인을 국가에서 관리한다면 전략적, 사회적 이득을 볼 수도 있고. 통제불능의 초능력이 누군가를 해치는 일도 없을 겁니다. 간단한 논립니다. 총기에 번호를 붙이는 겁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 폭탄을 품어두고 살고 있습니다.]
어느새 전용기 안에 있던 모두가 그 연설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뤼미에르와 함께하며 인류를 위해 싸운 이들이었기에,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거친 분노를 표출했다.
노아 뤼미에르는 이 혼란스러움이 인류에게는 별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고서, 그들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가족 잃은 사람들 많이 보셨잖습니까. 당장 저도 한때는 저랬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지킨 사람들이 저런 선동에 넘어가 우리에게 칼을 돌리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
“......우리는 이런 갈등을 엑스맨과 어벤져스에서 충분히 겪지 않았었나요? 하하...”
실제로도 그녀는 저 정신나간 양반의 연설을 그리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떤 미친 인간들이 저런 생각을 지지하겠는가.
물론 원망할 게 없어서 구해준 사람을 원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세상이 워낙 가혹해서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한동안 변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런 정치선동에 기운 뺄 시간에 사람 하나라도 살리는 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인터넷 댓글창이 조금씩 물들기 시작해서, 어느새 온갖 리즈레 지지자들이 분탕질을 치기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전 유럽의 언론이 조금씩 물들기 시작해서, 어느새 하루종일 리즈레의 반-초인 사상을 논하기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그러나, 리즈레 의원이 EPP의 새로운 당권주자로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무언가 불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리즈레 의원이 신원불명의 초능력자에게 잔인하게 살해되었을 때는, 무언가 손을 쓰기에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
건너편에 앉은 노아 뤼미에르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머리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EU에서 정부와 헌터 사이에 내전이 터지는 것 아닌가. 연합정부는 대체 왜 나라 지키는 헌터들을 이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인가.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의문을 모아 그녀에게 물었다.
“......대체 왜 연합정부가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각 도시마다 헌터들이 쉘터를 만들어 버티고 있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헌터가 없어지거나 내분이라도 발생한다면 유럽을 잃어버리는 것 아닙니까?”
“연합정부는 유럽을 이미 잃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
정부가 유럽을 잃었다.
유럽은 이미 다른 이들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헌터.”
뤼미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부터 EU에는 국경이 없었습니다. 유로존끼리는 더더욱 그렇고요. 그런데 이제 각 도시의 쉘터와, 쉘터를 이끄는 길드, 클랜을 중심으로 유럽이 개편되었지요. 임기는 끝나가고 투표를 할만한 상황도 아닌데, 사람들이 점차 누구를 따르겠습니까?”
“......유럽연합 중앙군의 역할도 있지 않습니까? 보급, 공습, 지휘...”
“자원이 떨어지면 끝나는 것들입니다. 실제로도 그럴 기미가 보입니다. 그리고 각지 지휘권마저도 재량권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기고 있는 와중이고요.”
민주적 정당성이 무력에 밀리는 세상이니만큼 당연했다.
노아 뤼미에르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뭐어, 그러니 더 늦기 전에 헌터들의 목줄이라도 잡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방군벌 체제로 사회가 변화해버리니까요.”
얼마나 많이 울었으면 지금 담담할 수 있을까. 저절로 한탄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불쌍해하든 말든, 설명을 듣고 있으니 자꾸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사실, 충동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충동 말이다.
“......”
‘헌터 빼오기’
지랄 맞은 대우 받으면서 살 바에는 한국에서 편히 살라는 것이다.
당장 아랍이나 중국 쪽 갑부들에게 제주도 집문서 팔아서 외채 충당하고 있었으니, 현실성 없는 생각도 아니었다.
게다가 한국은 국방력까지 늘어나니 이것이야말로 윈-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헌터들이 없어진 사회가 어떤 운명을 맞을지는 뻔했다. 그것도 헌터들에게 의존하던 유럽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남겨진 이들이 괴수밥이 되겠지.
그리고 그런 짓을 내가 행할 수 있을까.
과연 나는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런 미래가 온다면 노아 뤼미에르는 도대체 어떤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나는 어떤 심정으로 붉은 한강 위를 질주하고 있을 것인가.
한참을 고뇌하고 있으니 노아 뤼미에르가 내게 말했다.
“제가 한국에 가겠습니다.”
“네?”
“......아니. 저를 한국에 받아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