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8 - 웰컴 투 코리아 (2)
사람이 정말 좆됐다 싶으면 몇 초 동안 껌뻑껌뻑 현실을 부정하고는 한다. 유치원에서 강연하는데 쌍둥이 빌딩이 터졌을 때나, 임기 첫 날에 게이트가 열리면 보통 그렇다.
주한 미국대사 로버트 윌슨은 전화를 받자마자 눈을 껌뻑거렸다.
그는 요즘 한국이 너무 배짱을 부리는 것 같아서 일부로 정치인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본국으로부터 그런 지침을 받고서 칩거 중이었다.
당연히 한승문의 장관 취임식도 안 간 상태다.
문제는-
[리충빈 부주석이 취임식에 참석했답니다!]
[뤼미에르 집행관이 김해공항에 도착했고, 회담 장소로 이동 중......]
자기 빼고 다 왔댄다.
* * *
로버트 주한미국대사는 3국 회담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집에서 뛰쳐나와 엑셀을 밟았다.
롯데호텔 1층에서 제발 들여보내 달라고 한참동안 경호원들과 드잡이질을 한 이후에야 그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하자 창문 밖으로 부산의 야경이 훤히 들여다보이기 시작했다.
“......”
빛의 도시다.
이 시간에도 항구에선 수많은 물자가 연안항해를 통해 이송되고 있으며, 강원도의 피난민들이 부산에 시시각각 도착하고 있었다.
한국은 충청 방어선을 통해 최북단 울진 원자력 발전소를 비롯한 모든 핵시설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부산의 야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미국 동부에서 원전 일곱 개가 폭발하여 수백만 국민이 피폭되고, 그로 인한 무정부 상태 속에서 수많은 역병종양 감염자가 발생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저절로 입 안이 씁쓸해지는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3국 회담이라. 참으로 암담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사태 초기 민주당과 공화당의 분열 때문에 미국은 외교를 반쯤 버리다시피 했다. 양측 후보의 포퓰리즘적 민족주의 정책만 판을 칠 따름이었다.
그 결과, 본토 지키겠다고 유럽에서 미군을 전부 빼버리지를 않나, 중국 견제한답시고 동아시아에 핵폭탄을 들이밀지를 않나. 온갖 실책이 이어졌다.
하여, 미국은 지금의 고립을 자처하고 말았다.
일본마저도 관동 정부군과 관서 야쿠자로 분열되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와중,
전통적인 가상적국 중국, 나토 해체로 이를 가는 EU, 얍삽한 실리주의자 한국이 삼각동맹을 체결하기라도 한다면. 미국은 유라시아에 대한 통제권을 대다수 상실한다.
그러면 진짜 좆되는 거다. 자기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그렇게 어깨 위에 올라간 책임의 막중함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키던 그때,
띠링 -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린다.
주한미국대사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조심스레 걸어 들어갔다. 그는 세계 초강대국을 대리하는 사람이었으나 그의 발걸음은 이전처럼 당당하지 못했다.
그는 비로소 세상이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테이블에 새로운 세상의 실세들이 앉아 있었다.
수억 명을 구원한 유럽의 성녀. 노아 뤼미에르 EU 집행위원장. 후광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그 머리카락은 파리의 기적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수백만을 학살한 정치장교.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러쑹비옌 상장. 인민복에서 튀어나온 비쩍 마른 손아귀에는 수백만의 죽음과 수천만의 군대가 매달려 있었다.
남한의 젊은 실력자, 초상관리부 한승문 장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입지전적인 인물. 고작 20대 후반에 일국을 틀어잡은 이였다.
“What...!”
그래서 로버트 주한미국대사는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이 모여있는 풍경은 한 마디로-
“쥐어- 밍-시엔 웨이판- 러 구이-위에!”
“세스트 퓨어- 라 큐미노티- 휴메니!”
“국제기구고 뭐고 일단 경협부터 짭시다! 예!?”
개판이었다.
*
국제기구의 핵심은 각성제를 통한 초인 공급이다. 그 방식은 선별인원을 한국에 입국시킨 뒤, 각성시켜서 돌려보내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여기까진 다들 화기애애했다.
문제는 누가 그걸 주관하느냐에서 발생했다.
“한국과 이미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정부개입을 떠나 민간협회가 공정하게 집행합니다.”
노아 뤼미에르는 각성자를 유럽에 공급해야 한다. 안 그러면 초인이 부족해서 지들끼리 인재 빼가려고 치고받고 싸우다 다 망하게 생겼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속 시꺼먼 EU 정치권력의 개입을 막아내야 하기도 했다. 그게 그녀가 초인기구 의사결정에서 정부의 개입을 반대하는 이유다.
뭐, 내가 예전에 뽐뿌질한 탓도 조금 있긴 할 거다.
반면,
“민간 협회가 공정하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소? 진정 보다 더 많은 인민을 구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관리가 필요하오.”
중국은 각지의 반란세력을 관官이 진압하고 있다. 절대로 민간에 초인선별 업무를 넘기면 안 된다.
결국 각성제를 투입하는 과정을 ‘민간’이 집행하느냐 ‘정부’가 집행하느냐의 문제였다.
그리고 타협안은 대충 2개 정도 나왔다.
첫째, 중국에선 정부가 담당하고, 유럽에선 민간이 담당한다.
“안 됩니다. 인류공영을 위한 국제기구가 몇몇 국가의 이권에 따라 움직인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UN이 신뢰를 잃은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뤼미에르가 반대했다.
이유야 뻔하다. 중국 정부에서 개입한다면 EU 정부에서 자기들도 끼겠다고 설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타협안.
유럽에서는 민간이 담당하고, 중국에선 민간의 탈을 쓴 허수아비 조직이 담당한다.
“용납할 수 없소. 우리는 공직자요. 정치적 명분을 위해 국민의 세금을 낭비한다니. 허수아비 조직이야말로 권위적 관료주의의 폐해 아니오?”
이건 리충빈이 반대했다.
왜냐, 공산당은 그 어느 때보다 위기에 몰려 있다. 적어도 겉으로나마 민간에게 양보하는 그림이 나온다면, 당의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보통 그 자존심을 명분이라고 하고, 명분이야말로 정치권력의 본질이었다. 자존심을 잃는다면 중국 내부 반란세력에게 여지를 주는 셈이다.
그러니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초인기구는 국익이 아닌 공익을 위한 기관입니다! 국가 이기주의에 휘둘리지 않고 인류의 공영을 위해야 한단 말입니다!”
“기저 도리란 것은 인간이 삶을 위해 만든 것이고. 뤼미에르 집행관의 말씀은 도리를 위해 삶을 버리자는 것에 가깝소. 명분을 위해 실리를 버려서는 안 될 것이오.”
개판이 되는 거다.
“새로 창설될 국제기구마저도 국가권력의 부당한 야욕과 로비로 물든다면, 세계 시민은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을 것입니다!”
“인민이 의지하든 말든. 인민을 이끌 방도를 생각하시오. 우리는 공영의 책임자요. 보다 더 많은 인민을 구하기 위한 길이 어디인지 돌이켜 본다면 답이 나올 것이외다.”
결국 뤼미에르와 리충빈이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들은 온갖 문자를 써가며 치열한 토론을 이어갔다.
나는 그나마 냉정을 지키며 와인잔에 생수를 따라 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번에 임명된 초상관리부 국제 1 차관, 전직 외교부 장관님의 조언을......
[아마 취임하시고 나면 국제기구에 관한 협상이 이루어질 겁니다. 그 부분은 정무적 영역이다보니 장관님께서 협상 테이블에 직접 오르셔야 할 거고요.]
[흐음. 조언을 여쭐 수 있겠습니까?]
[국제외교라는 게 품격있어 보여도 조금만 자세히 보면 구더기가 따로 없습니다.]
[네?]
[돈받고 물건 안 주고, 물건받고 돈 안 주고, 그러다 수틀리면 항공모함 빙빙 돌리면서 땡깡부리고. 그냥 자기 원하는 것만 말하는 어린애 달랜다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아, 으음......]
[뭐,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이 너무 치졸한 거 아닌가 싶으시겠지만. 이게 다 어깨에 지고 있는 게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책임자라는 건 원래 그렇습니다. 이권을 챙기지 못하면 책임지는 사람들이 무너지니까요. 결국 책임자들끼리 협상을 하다 보면 자기주장만 관철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줄타기 전략을 썼습니다. 양측의 의견을 조율하고, 필요하다면 우리가 양보하고, 최대한 어르고 달래면서 타협안을 찾아내는 거죠.]
[흐음... 그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지금까지는 그랬다는 겁니다.]
[지금까지라......]
[원래 시장이 붕괴한 상황에서는 현찰이 아니라 물건 들고 있는 쪽이 갑입니다.]
[......각성제 가지고 배짱을 부리라. 이 말씀이십니까?]
[중고나라에서 거래할 때랑 비슷합니다.]
초상관리부 국제 1 차관은 내게 이렇게 조언했다.
[입금 전까지는 절대로 물건 못 준다고 그러십시오.]
“한승문 장관!”
“아, 네.”
노아 뤼미에르의 부름 때문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각성제 투여인원 선별 말입니다. 민간 협회에서 주관하기로 한 것 아닙니까? 그쪽의 헌터 협회 말입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오가긴 했다. 양측 정부의 개입을 다 쳐내기로 약속도 했고 말이다.
왜 그랬느냐. 원옥분 엿 먹이려고 그랬다. 그때는 ‘정부’를 쳐내는 게 원옥분을 엿먹이는 거였으니 말이다.
근데 문제는......
“한 장관!”
내가 한승문 장관이다. 내가 이제는 ‘정부’ 측 인사가 되어버렸다.
“......”
그때는 선거 전이었고. 지금은 선거가 끝난 지 두 달이나 지난 시점이다.
“......하하.”
그리고 정치인은 선거철에 말한 건 까먹는 종류의 짐승이었다.
나는 사람좋게 웃었다.
“초상사회의 국제협력에 대한 논의가 이리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으니 다소 우려스러운 심정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처럼 중국과 EU 여러분께서 국제기구 창설에 그만큼 관심을 가져주신다는 뜻이니 참으로 감사하기도 합니다.
다만, 서로의 국방을 위해 뭉친 연맹이니만큼 초인양성에 대한 논의에 이해가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국방이라는 것이 초인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개인적인 의견을 조심스레 보태고자 합니다.
화석연료의 고갈과 국제무역의 단절로 인해 사회 인프라가 위기에 처하지 않았습니까? 단순히 초인양성에 그치지 않고, 식량난, 에너지 위기, 원자력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서로의 협력에 대해 조금 더 논의가 오갔으면 합니다.”
리충빈과 뤼미에르는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메시지가 너무 간접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뭐, 직설적으로 말해야지.
“초상협력에 대한 논의는 그 다음 순서가 될 것입니다.”
돈부터 내놔 이 새끼들아.
*
“인도주의적 절차에 따라 세계 시민을 구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이전부터 양국이 이해를 같이한 것으로 압니다. 우선 괴수대응인력의 긴급편성을 통해 인명부터 구호해야 합니다!”
[각성제 내놓으라고!]
“인명을 구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충분히 동의하나, 경협체제를 확립시키는 것 또한 인명구호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입금하세요.]
“자, 자, 진정하시오. 대한민국과 범유럽 군사연맹 간의 우선순위가 다를 수는 있어도 손을 잡자는 의지는 확고한 것으로 보이오. 자세한 건 차처하더라도, 우선 세상에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공표하는 게 어떻겠소?”
[일단 양키 새끼들 끼어들기 전에 국제기구부터 띄워. 지지율 올려야 됨.]
“내실 없는 껍데기는 결국 요식행위에 불과합니다. 조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우리의 우정이 그렇게 비춰질까 두려운 마음이 있기도 합니다.”
[입금하세요.]
“......경협은 EU 최고사령원에서도 의견 조율이 필요합니다. 우선 긴급한 사안을 행동에 옮긴다면 나머지는 차후 긴밀한 협조를 통해 해소해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일단 물건 먼저 받으면 안 될까...?]
“반석 위에 지은 집이 천년을 가는 법입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 수는 있어도, 차근차근 짚어 나가야 오랜 우정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입금하세요.]
나는 뤼미에르와 리충빈에게 강짜를 부리며 협상을 질질 끌었다. 교묘하게 둘 사이의 이권을 충동하며 어그로를 분산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쨌든 이 양반들은 각성제가 시급한 양반들이었으니 말이다.
‘필요’한 게 아니라, ‘시급’한 거다.
헌터가 부족해서 사람이 무지막지하게 죽어나가고 있다. 지금 당장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렇다.
그러니 협상이 늘어질수록 그들의 정치적 책임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뼛가루가 흐르는 모래시계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국가가 어디인가?
우리나라다.
충청 방어선으로 보호받는 나라. 더 이상 대다수 국민이 괴수에게 학살당하고 있지 않은 나라.
오직 우리뿐이었다.
“......”
간단한 논리다.
중국은 식량이 있고. 한국은 각성제가 있으며. 유럽에는 과학기술이 있고. 우리에게는 미국이라는 공동의 가상적국이 존재한다. 한국이야 살짝 애매하긴 하다만. 아무튼.
협력이 필수적인 상황. 그러나 협력의 조건을 조율하는 것에서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 중에서 가장 군사력도 약하고, 돈도 없으며, 인구도 적고, 핵폭탄도 별로 없다.
유일한 이점은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대한민국의 편이었다.
당연히, 이대로 협상이 길어질수록 저들은 조급해질 것이고. 그럴수록 우리나라가 이익을 본다.
모범답안이 존재하는 게임이다.
“......일단 오늘은 이만 하지요.”
조급한 쪽이 먼저 카드를 까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한테 주도권이 온다.
물론 공익에는 반하는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뭐 어쩌겠는가.
이런 거 하라고 뽑아놓은 정치인인 것을.
*
[중국 정부, 한국에 대규모 식량지원 결정!]
[초상연구본부 EU 연구원 대거 영입. 포션 신기술 상용화 목전!]
[한-중-유 초인연맹 출범. 초련에 대해 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