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7 - 장관이 너무 강함 (1)
달그락.
텅 빈 앞접시에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요즘 세상에 찾아보기 힘든 진수성찬이 약 40분에 걸쳐 지나갔다.
물론 제대로 먹지는 못했다.
“그나저나 우리 한 장관님은......”
“우리 원내대표님 뺏긴 것 같아서 참......”
50대 아저씨 두 명 때문이었다.
“하핫...!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십니다. 국회에서 큰 인물 하나 뺏어왔네요!”
“제가 보지 않아도 생기는 믿음이 있어서... 현명하게 푸실 것 같습니다.”
유재경 장관과 청중엽 지사는 젓가락으로 반찬을 떠먹여줄 것처럼 내게 달라붙었다. 하필 자리배치도 참 공교로웠다.
상석의 대통령, 건너편의 경제부총리, 옆쪽의 제주도지사에게 둘러싸여 식사를 끝마쳤다. 소화는 될려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타는 목마름으로 수정과를 식도에 쏟아 부으며 소화불량을 걱정하고 있던 그때,
“자아, 식사도 대충 끝난 것 같은데...”
양판석이 본론을 꺼내들었다.
“가볍게 뭐, 인수위 이야기나 좀 하십시다.”
* * *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뽑으라면 항상 언급되는 것들이 있다.
4대 권력기관(검찰, 경찰, 국세청, 국정원)부터, 여야 합의를 거친 특검에, 국무조정실 에이스 사냥개 콤비 공정위-금융위원회까지.
물론 재벌이야 당연히 포함된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는 모든 권력을 초월하는 조직이 하나 있었다.
“일단 인수위 방침을 대충 구상했습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선거 당선자가 대통령 직을 원활히 인수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위원회다.
허나, 인수위의 실상은 ‘인수’위원회라기보다는 점령군에 가까웠다. 특히 전현직 대통령이 사이가 나쁠수록 더더욱 그랬다.
전 대통령의 전략사업을 패대기치고, 온갖 정부부처를 통폐합시키고, 검찰을 무릎꿇린 뒤 카메라 앞에서 역도들의 모가지를 치는 게 인수위 주요 업무다. 여의도에서 밥벌어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인수위가 얼마나 강력한 조직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특히, 공무원들에게는 더더욱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왜냐하면 인수위의 주요 업무가 정부부서 통폐합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가 수십년간 일해온 직장이 부部에서 청廳으로 떨어지고, 심지어는 허공에 증발해버릴 수도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보통 대부분의 당선자는 인수위에서부터 온갖 사람들의 모가지를 치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는 했다.
그러나,
“인수위에서부터 뭐, 적폐청산, 구태심판, 그런 소리 가급적이면 안 나오도록 조처를 취하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양판석은 임기를 칼춤으로 시작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당면한 국정과제들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할 때이지, 밥그릇 놓고 싸울 때가 아니다. 뭐, 그런 생각입니다. 따라서, 정무는 일단 묻어두고, 바로 실무부터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여러분들 도움이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허허......”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선자께서 헛짓거리하다 걸리면 뒈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다들 뭐 어쩌겠는가. 이곳저곳에서 지당하신 말씀이라는 감탄이 연거푸 튀어나왔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음! 음! 당선자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 또한 마음이 편합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양판석은 히죽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내심 감탄했다. 확실히, 여야 갈등 상황에서 우세를 점하려면 전 대통령을 조지는 게 나은 선택이다. 그러나 지금은 여야가 대치하는 냉전상황이 아니었다.
명목상 원옥분과 양판석은 둘 다 국방당이었고, 지금은 연립내각이 성립된 상황이라 국민당과 국방당이 치고받고 있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원옥분은 국방당 내 공화당계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던 정치인이다. 괜히 양판석이 원옥분을 조지면 국방당이 다시 쪼개질 우려가 있었다.
그러니 이게 참 영리한 선택이다.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때,
“그래서 말입니다만.”
양판석이 묘수를 두었다.
“무궁화대훈장을 원옥분 전 대행에게 수여하려고 합니다.”
무궁화대훈장, 대한민국 최고 등급 훈장이다.
양판석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주변을 다독이듯 이야기를 풀어갔다.
“원래는 대통령 내외에게 수여되는 상이기는 합니다만, 본 취지가 국가발전과 안전보장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주는 훈장인만큼. 원 대행 또한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당선자께서 훈장 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다들 뭐 어쩌겠는가. 이곳저곳에서 지당하신 말씀이라는 감탄이 연거푸 튀어나왔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음! 음! 당선자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 또한 마음이 편합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당선자께서 임기 시작을 화해와 협치의 훈장쇼로 시작하시겠다는데 누가 감히 재를 뿌리겠는가. 모두가 딸랑이를 흔들자 양판석이 해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유재경 장관을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석재봉 정무수석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려고 하는데. 어찌들 생각하십니까?”
“...”
“...”
“...”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
“......”
“......와!”
약 2초 반 정도 되는 침묵이었지만, 그 존재감은 대단히 강렬했다.
“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아, 으음. 당선자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 또한 마음이 편합니다.”
“......아, 네. 찬성입니다.”
갑작스러운 인사권 행사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도 그럴 게, 국무총리와 비서실장이 둘 다 국가의 2인자에 가까운 직위였기 때문이다.
2인자가 왜 2명인가. 쉽게 말해, 국무총리는 빛의 2인자고, 비서실장은 어둠의 2인자다.
우선, 국무총리는 내각 장관들을 총괄한다. 또한, 국무조정실 직속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위원회로 재벌들을 후드려 팰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참고로 공정위는 일개 사무관이 대기업간 인수합병에 깽판을 놓는 곳이고, 금융위원회는 그 악명높은 금융감독원을 지휘하는 곳이다.
물론 이게 다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많이 아껴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안 그러면 서류에 도장만 찍는 허수아비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무총리가 그랬다.
그러나, 유재경은 다르다.
"유재경 국무총리는 실질적으로 국정을 총괄하시게 될 겁니다. 특히,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당면과제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생각도 있고요."
사태 초기 온갖 고위공무원이 다 죽은 상황.
군부에 차재균이 있었다면, 정부에는 유재경이 있었다.
사태 이전부터 모든 부처에 영향력을 미치고, 모든 부처 상황을 대강 파악할 수 있었던,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이라는 직위 덕도 있었으나, 결국 능력을 인정받아 세종시 정부청사를 통솔한 사람이 그였다.
그리고 정부세종청사는 애초에 말이 청사廳舍지 건물 하나 길이가 3.6km짜리였다. 어지간한 마을 하나가 째로 공무원들 직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세종시에 어지간한 정부부처가 전부 위치해있다는 점과, 거기를 이끈 사람이 유재경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는 사태 초기부터 실질적인 국무총리 역할을 수행했던 거였다.
하물며 원옥분 시절에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으니 그의 국정 장악력은 100%에 가까웠다. 그러니 양판석이 대놓고 조지지 않는 이상에야 유재경이 허수아비가 될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어둠 속의 2인자, 대통령 비서실장 또한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는 요직이었다.
국무총리가 대통령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허수아비가 되지만,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사랑하는 사람만 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비서실장은 온갖 수석비서관들을 부리며 어둠 속에서 국정을 지휘한다. 말이 비서지 비서실장은 장관급이고 수석비서관들은 전부 차관급이니, 대통령 비서실 자체가 어지간한 정부 부처나 다름없다고 봐야 했다.
특히, 민정수석비서관은 5대 사정기관을 조율하는 청와대의 칼잡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한민국 최강 공격수의 직속상관이 비서실장이다.
그러니 양판석이 말한 게 무엇이겠는가?
유재경 ‘국무총리’, 그리고 석재봉 ‘비서실장’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시국에서 국정에 커다란 변화를 주는 건 현명치 못하다고 봅니다. 이전부터 내각을 통솔하던 유재경 기재부 장관이 국무총리를 맡아주시고, 비서실 석재봉 정무수석이 비서실장을 맡아, 기존 인원들을 잘 다독여줬으면 합니다. 워낙 출중하신 분들이니 딱히 걱정하지는 않습니다만...... 허허.”
우선, 대외적으로 알려진 전 정권 인사들을 쓰며 국론을 통합시키기 위함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원옥분 밑에 있던 항장降將들을 중히 쓰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나한테 잘 보이고 싶으면 친분이 아니라 실적으로 비비라는 말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덕분에 전남지사 지회갑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썩어들어갔고, 몇몇 인사들의 표정 또한 썩 밝아보이지는 않았다.
반면,
“무거운 책임이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유재경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지만, 입꼬리가 살짝 씰룩거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석재봉 정무수석, 아니. 석재봉 비서실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남들 표정이야 똥을 씹든 꿀을 빨든. 양판석은 자기 페이스대로 허허실실 웃으며 국정의 방향을 제시했다.
하나같이 아주 파격적인 내용들이었다.
1. 국방개혁
“게이트라는 것은 침략이라기보다는 재난에 가까우므로 전략보다 임기응변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에, 군관구제를 부활시켜 즉각적인 대응에 용이하게 전권을 위임한 3개 군관구를 설치할 겁니다. 충청, 강원, 수도, 군관구사령관은 각각 김두식 대장, 유현종 중장, 그리고 강이식 합참의장 정도로 생각 중입니다.”
각 지역의 전권을 가지는 군구사령관을 임명한다.
2. 정부개혁
“인수위는 다른 분과는 최소화하고서 국무조정분과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인적자원과 예산 문제, 효율 문제가 심각하니, 18부를 12부로 줄일 겁니다. 문체부 교육부 통합, 외교부 통일부 통합, 과기부 중기부 산자부 통합, 보건부 여가부 환경부 노동부 통합...”
공무원들 죄다 죽고 돈도 없으니까 정부부처를 줄인다.
3. 4대 전략사업
“민생안정 4대 전략사업을 실시합니다. 국토교통부에서 국가재건사업. 농축산부에서 식량자급사업. 해수부에서 영해방위사업, 보건복지부에서 국민의료사업.”
의식주와 안전 보장.
4. 초상개혁.
“5차 산업혁명을 추진합니다. 초상관리부에 국가의 사활을 걸 겁니다. 마석무역사업, 초현상연구사업, 초인양성사업, 각성제로 주도하는 국제기구 신설까지. 앞서 말한 정부부처 통폐합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잔여인력들, 그 중에 정예들만 모아 초상관리부에 우선 발령합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싱글벙글 웃고 있던 양판석의 얼굴은 점점 무표정한 정치인의 그것으로 변해버렸고,
그의 목소리에 있던 여유와 웃음기는 싹 빠져버리고 남은 것은 오직 권력자의 카리스마뿐이었다.
"아시겠지요?"
"......"
"......"
그러니 이 방 안에는 오직 양판석의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 누구도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양판석이 차갑게 명령했다.
“하여, 인수위원회에 정식 위원장과 더불어 초상관리부 창설특별위원회 특별위원장을 하나 더 둘 겁니다.”
이쯤되면 불만있는 새끼 나가 뒤질 준비 하라는 소리였다.
침묵 속에 양판석이 손을 뻗어 수정과가 담긴 물병을 들었다. 그리고 자기 컵에 쪼르륵 따른 다음, 여유롭게 꼴깍꼴깍 마시며 목을 축였다.
“크흠...!”
그가 휴지를 한 장 뽑아 입을 닦을 때까지, 오직 양판석의 행동에서 나오는 소음을 제외하고는 어떤 잡음도 섞여나오지 못했다.
고관高官들이 숨소리마저도 죽이고 있던 그때,
“한승문 특별위원장?”
양판석이 방긋 웃었다.
“네.”
“앞으로 2주 주겠습니다.”
대통령의 명령이 내려왔다.
“앞으로 5년 동안 일할 직장, 스스로 만들어오세요.”
*
장관 5년이라.
대한민국에서 장관은 일종의 소모품 같은 고기방패인지라, 2년만 넘기면 장수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게다가 나는 차기 총선을 나가야 하는 몸이다. 대충 출마 90일 전에 장관 사퇴해야 하는데, 양판석이 내 국회의원 커리어를 작살내려는 건 아닐 것이고.
그러면 재선한 다음에 다시 내각으로 불러들인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전례가 없는 일이다.
게다가 초상관리부의 규모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물론 권력이야 있으면 좋은 거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이미 권력에 따라오는 책임이란 놈이 얼마나 지랄맞은 녀석인지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온갖 기대와 걱정에 휩싸인 채로 한참동안 홀로 상념에 빠져있으니.
“자.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 주중에 자리 한 번 더 마련하지요.”
양판석이 해맑게 웃으며 자리를 파했다.
“하루이틀 의논해서 추진할 사항도 아니니, 그때까지 다들 심사숙고하셔서 고견 보태주셨으면 합니다.”
오늘 자리는 회의라기보다는 양판석의 국정 프레젠테이션에 가까웠다. 아마 온갖 이권과 정치공학 계산기가 사람들 머리 속에서 팽글팽글 돌아가고 있을 터였다.
다만, 나는 오로지 걱정에 찬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주섬주섬 지팡이를 챙겼다. 일단 들아가는 길에 캔맥주나 좀 사다가 목구멍에 부어야겠다.
허나.
“아 승문이.”
오늘의 음주는 아무래도 좀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자넨 나랑 후식이나 좀 들고 가지.”
방에서 나가던 사람들 몇몇이 살짝 움찔거렸다.
그러든 말든 양판석은 태연히 미소지으며 컵에 수정과를 따랐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 문득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설탕이 위험한 나이 아닙니까?”
“맛있게 먹으면 상관없네.”
양판석의 표정은 변함없었으나, 나는 그의 손이 움찔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술담배 좋아하는 사람이 설탕까지 좋아하면 인생 진짜 막가자는 거-”
“자네 건강이나 잘 챙기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