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6 - 초상관리부 장관, 한승문 (2)
오고가는 말 속에 정이 싹튼다고, 패드립이 한번 터지니 대화에 사뭇 활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싸운 게 몇 번이고 같이 해먹은 공작이 몇 번인가. 같은 법조인인 데다 정계입문 전부터 정치검사와 운동권 네임드 관계로 안면은 있었으니, 햇수로 따지면 30년이 훌쩍 넘어가는 지인이었다.
두 노인은 서로 욕설 섞인 대화를 이어갔다. 체면 잊은 대화였다.
그래서.
“사실 손 사장한테 태블릿 갖다준 거 나야.”
“아이고 내가 은인을 몰라뵙고......”
별별 이야기가 다 튀어나왔다.
* * *
“아니, 근혜 걔가 MB 좀 밀었다고 나를 묻으려고 하잖아."
"크하하핰...!"
10년간 숨겨온 비밀이 밝혀지자 양판석은 체면도 잊고 박수치며 웃음꽃을 터뜨렸다. 원옥분도 웃음이라기에는 다소 이상했지만, 나름 히죽거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말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말이 많아진다는 건, 대화가 재미있을 때 말고는 없었으니까.
그녀는 불안정하게 새는 발음으로 느릿느릿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니 6년 전 일 품어두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는데. 검찰에서 내 뒤 파고 있다는 소식 줏어 듣고서는 얼마나 놀라 자빠졌는지 원......”
“선배 김기춘 쪽 친박이었다가 MB로 갈아타면서 뒤통수 까부수지 않았던가?”
“나중에 다시 돌아오긴 했어. 그래도 그렇지 원래 당적계파를 떠나 여성의원끼리는 뭉치는 게 룰인데......”
“아니. 선배도 09년에 명숙이 누나 묻으셨잖아. 나도 그때 좆될 뻔한 거 모르나? 초선에 라인을 잘못 타가지구......”
“내가 하면 로맨스지.”
“나, 참. 웃기는 사람 다 보네.”
원옥분은 사뭇 당당하게 미소지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얼굴 반쪽까지 굳어있는 삐뚜름한 웃음이기는 했으나, 그녀의 세월이 담긴 분명한 명품이었다.
“그래도 나는 유재광이한테 법무부 장관 따먹을 때까지 살았잖아. 보자. 노통 때 낙선했던 거 빼면......”
원옥분이 손가락으로 대통령을 세었다.
“김, 김, 이, 박, 문, 유. 내가 대통령 다섯 번 바뀌는 동안 살았네 그래.”
“대단한 사람 나셨수.”
“사는 놈이 이긴 거야.”
그녀가 자신의 정치인생을 읊었다.
“YS때 초원복집 나라시치는 거 도와주고. DJP 사이서 뚜쟁이 노릇도 좀 하고. 이회창한테 잘못 걸려서 낙선하긴 했는데, 초원복집 인연이었던 김기춘 라인 타고 올라가서 MB한테 붙고. 태블릿 하나로 문통 때 꿀 빨았다가, 요전에는 댁 도와 우리 당 쪼개서 장관 따먹고.”
“진짜 킹메이커는 따로 있었네 그랴.”
“이번 선거 질 거 알면서도 완주하고 나면, 대통령 하나 또 만드는 거 아닌가?”
“......”
허를 찔린 양판석의 침묵에 원옥분이 피식 웃었다.
“우리나라가 무슨 빨갱이 쉐리들도 아니고. 단일후보는 모양이 좀 우습지 않나?”
“그건 그렇지.”
“그거 말하려고 온 것도 맞고?”
“......눈치는 참.”
대선완주.
원옥분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였다.
선거가 기울어버린 가운데 양판석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진 상황. 게다가 양판석이 핵폭탄 관련 이면계약을 까버린다면 원옥분의 실각은 확실해진다.
허면, 원옥분은 양판석을 죽이거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야 하는 상황이 되는데, 본인은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대통령을 해먹고 싶지가 않았다.
수많은 죽음에 관여하면서 정치에 반쯤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이 애매한 상황에서, 원옥분이 양판석에게 먹일 수 있는 가장 큰 엿은ㅡ
“질 싸움은 안하는 게 맞지 않나?”
“......”
“으응?”
대선후보 사퇴였다.
대통령의 권위는 민주적 정당성에서 나온다. 즉, 양판석이 단일후보로 대선을 이겨봐야 절대 압도적인 국정장악력을 발휘할 수 없다.
원옥분이 아직 가지고 있는 30% 중반의 지지율이, 원옥분의 사퇴와 함께 커다란 기름불처럼 번져나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
그렇기에, 양판석에게는 페이스메이커가 필요했다.
“어째, 선배는 나 좀 도와줄 생각 있으신가?”
“뭐 줄건데.”
“말해보쇼.”
“데모하던 새끼는 이래서......”
양판석이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냐는 이야기를 꺼내자, 원옥분의 표정이 금세 험악해졌다. 제 발 저린 양판석이 쇼당을 붙였다.
“솔직히 국무총리까지는 생각을 했는데.”
“사지로 내모는구만.”
원옥분이 국무총리가 된다면 양판석이고 원옥분이고 둘 다 온갖 비난을 감수할 게 분명했다. 이럴거면 선거 왜 했냐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잃는 게 더 많을 도박이다.
양판석은 그걸 모르지 않았다.
“선배가 고르쇼.”
“......뭐? 국무총리?”
“그럼 본인이 하시던가.”
원옥분은 양판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있었으나 결코 길지 않았다.
원옥분의 판단은 아주 신속했다.
“......나, 원 참.”
양판석이 빅딜에 호의적이다 - 거래 받고 땡 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 차후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양판석이 필요하다 - 양판석의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하므로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 - 양판석에게 빚을 남겨야 한다.
“내가 뭐 떠먹여줘야 먹는 사람인 줄 아나?”
“안 먹을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지.”
“됐어. 나도 내 몫은 내가 따먹는 사람이야.”
“거어, 노인네 성격 참...”
양판석이 뭐라하든, 원옥분은 짐짓 삐뚜름하게 미소지었다.
“까짓 거 나라 위해 선거 정도 뛰어주지. 뭐.”
“......참, 나.”
“대신 나도 니한테 줄 댄 거다.”
“징글맞은 양반......”
기나긴 선거가 작은 골방 안에서 끝나는 순간이었다.
*
“그런데 우리가 윗동네에 떠넘긴 거 있지 않았던가?”
“으음?”
“서울 괴수들 말이요.”
돌아갈 준비를 하던 양판석이 문득 물었다.
“개성이랑 황해도에서 70만 명 죽었다고 알고 있는데. 북에서는 뭐라고 안 하던가?”
“좋아라 하던데.”
“......뭐요?”
낡은 1인용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로 구식 TV의 채널을 돌리던 원옥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조금씩 넘어오던 탈북자가 도합 12만 4700 언저리고. 개성에서 대규모 반란 일어났을 때는 사흘동안 3만 명이 내려왔었지. 그것도 김씨 추종세력 반란이었고.”
개성은 경기도 파주와 붙어있는 휴전선의 최남단이다. 그리고 북한 남부에 몰린 피난민들은 대부분 남한으로 탈출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니.
“리용수 눈에 개성은 반동 새끼들 천국이야. 우리가 대신 죽여줬으니 오히려 고마워하더군.”
“......그런가.”
공포가 퍼질수록 정권이 안정되는 국가도 있는 법이다.
“한가 놈도 아마 알고 그랬을 걸.”
“아니. 내 생각에는 지 핏줄 구하려고 눈 뒤집혔던 게요.”
“미친놈이구만.”
“결국 되었으니 된 게지.”
양판석이 떠날 준비를 끝마쳤다.
“그나저나 선배는 이제 뭐하고 지낼 거요?”
“보통은 이럴 때 외국 나갔다 들어오는 게 정석인데......”
“총 맞을 일 있나?”
“그게 문제지.”
흉흉한 세상이었다. 양판석은 원옥분에게 권했다.
“차기 노리기엔 나이가 문제고. 허면 국방당 돌아와서 당권잡을 생각은 없으신가? 요즘은 딱히 사람이 없어서 민심이 좀 부드러울 것 같은데. 나도 혼자 정치하기는 좀 불안하기도 하고. 워낙 세상에 미친놈이 많지 않은가? 나도 어지간하면 말 통하는 사람이랑-”
“나 검사야.”
검찰은 철저한 조직 기수문화다. 동기나 후배가 영전하면 배를 갈라야 한다. 검찰총장 하나가 나올 때마다 고검장 대여섯명이 사표를 쓰는 이유가 이것이다. 이는 상명하복 체제의 붕괴를 막으려는 노력인 동시에, 후배 밑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즉, 나는 사법연수원 후배인 양판석 밑으로는 안 가겠다는 뜻이었다.
“참나. 이상한 데서 곤조를 부리시오?”
“나도 나름 규칙이 있으니까.”
“썩 궁금하진 않은데.”
“누가 말해준다던?”
원옥분이 덧붙였다.
“......그리고. 반쯤 질렸거든.”
“......”
양판석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을 나서기 직전,
“쯧.......”
문고리를 잡은 채로 멈췄다.
어둑한 방에 잠시 침묵이 있었다.
“......하이고오.”
작은 한숨을 내쉬고서,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인사했다.
상당히 복잡한 인사였다.
“......수고 참 많으셨습니다. 선배님.”
“얘 좀 봐라. 누가 정치 그만둔다던?”
“뭐요?”
그제서야 양판석이 황당한 얼굴로 뒤를 살폈다.
원옥분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양판석이 그녀에게 물었다.
“질렸다면서?”
“아니, 질린 건 질린 거고.”
물론 원옥분이 반쯤 정치에 질렸다는 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ㅡ
“내년에 지방선거인거 모르나?”
ㅡ반쯤 미련이 남았다는 소리였다.
*
영광의 아침이었다.
키작은 중년 유재경은 여유롭게 거실로 나와 승리의 아침 토스트를 베어물었다. 계란과 햄의 조화가 환상적이었다. 안경에 우유가 튀었지만 그마저도 기뻤다.
그는 소파 뒤에 서서 TV를 지켜보았다.
[어제 새벽 3시 경, 양판석 후보의 당선이 확정됨에 따라......]
“우와아......”
소파에 누군가 누워있었다. 방금 와이프 옆에서 일어났던 참이니, 딸이 분명했다.
“일어났어?”
“응...... 아니, 못 잤어...”
초췌한 몰골로 리모콘을 붙잡고 비틀거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밤새 개표방송을 지켜본 모양이다.
녀석은 침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빠......”
“응?”
“양판석이, 되버렸네...”
“그렇네.”
“......안 되겠다.”
딸내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허리 즈음에서 우두둑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얘도 이제 20대 후반이구나 싶다.
“내가 빨리 취업을 하던가 해야지...!”
“대학원생이? 학위도 못땄으면서.”
“땄어!”
“아빠가 기재부 장관이라 아는데, 나였으면 정치외교학 석사는 안 뽑을 거야.”
“그래도 뭐 어떡해! 아빠 이제 장관 아니잖아!”
유재경은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딸내미가 하늘이 무너진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울상이 된 얼굴로 한탄했다.
“아빠는 원옥분계인데 양판석이 당선됐잖아! 자리 지킬 방법은 있어? 정무직이라 양판석 손가락질에 짤릴 게 뻔한데!”
“...크흠! 그래도 인마. 아빠 연금도 있고. 인맥으로 어떻게 못 비벼보겠-”
“아빠! 제발 착각 좀 하지마! 사람들은 아빠의 권력을 좋아하는 거지, 아빠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니까!”
유재경은 가슴에 비수가 박히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는 이를 갈며 피 토하는 심정으로 답했다. 골탕 좀 먹어보라고.
“......그래. 정 그러면 어떻게 일자리 좀 알아보던가.”
“후우... 정치 무섭다 증말. 어떻게 하루아침에 가장이 되냐...”
“못난 아버지를 둔 딸에게 정말 미안하구나.”
“아빠는 감빵 안 가지? 원래 전 정권 실세들 모가지부터 치면서 기강 잡는 게 정석 아니야?”
“글쎄다. 대충 무기징역 정도 뜰 것 같은데.”
유재경은 대충 대꾸하고서 양복을 차려입었다. 37만원짜리 마리넬라 넥타이(대통령 넥타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를 졸라매고, 특별한 날에만 쓰는 140만원짜리 린드버그 무소뿔테 안경을 장착했다.
그리고 공직인생 내내 험하게 굴린 허름한 양복과, 만원짜리 카시오 시계로 검소함을 몸에 두르면, 위풍당당한 고위공무원 룩이 완성된다.
유재경은 현관 전신거울 앞에서 위풍당당 미소지으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양손을 주머니에 꽂고서 허리를 치켜세운 자세였다.
물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딸내미는 아빠가 미쳤나보다 싶었다.
“......우리 장관님 마지막 출근이야?”
“오늘 토요일이야.”
“원래부터 주말 없이 살았으면서......”
보드라운 손길이 어깨에 느껴졌다.
이것은,
“ ! ”
참으로 오랜만에 딸이 어깨를 주물러주는 것이었다!
“아빠.......”
지난주 수요일 밤에 양념치킨 사다줬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유재경은 현관에서 딸이 콩콩콩 두드리는 안마를 받으며 세상에서 제일가는 행복을 느꼈다.
“평소에도 좀 이렇게 해라.”
“퇴직기념 안마야... 웃지 마...”
“좋기만 하구만 뭘.”
“공직인생 잘 마무리하고 와...”
딸이 슬픈 눈빛으로 아버지의 출근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유재경이 원옥분의 통수를 치고 진즉부터 양판석과 더럽게 붙어먹고 있었다는 사실은 와이프랑 김두식, 한승문 빼고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으니 저 심정도 대충 이해는 갔지만,
도살장 끌려가는 어린양 바라보듯 제 아비를 바라보는 딸의 글썽이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수많은 사람을 갈아마시며 위로 올라온 베테랑 공무원의 마음이 촉촉ㅡ
“부하들 시선 싸늘하게 변했을 텐데 너무 실망하지는 말구... 꼬우면 진즉 잘 챙겨줬어야지...”
ㅡ해지기는 개뿔.
“......오냐!”
유재경은 심통이 나서 문을 닫고 집을 뛰쳐나왔다. 아빠가 짤리기는커녕 영전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서 말이다.
살짝 삐졌다고 표현해야 적절한 감정이겠으나, 내심 딸이 어디 일자리를 구해오나 궁금하기도 했고, 아빠가 국무총리가 되어 돌아오면 딸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재경은 평생토록 이 날을 후회하게 된다.
가까운 훗날, 딸이 한승문 의원실 인턴비서로 채용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