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6 - 초상관리부 장관, 한승문 (1)
참 낡은 집이었다.
작지는 않았지만 좋아 보이는 집도 아니다. 붉은 벽돌로 된 담벼락은 세월에 깎여 차라리 검붉다는 표현이 어울렸고, 반쯤 벗겨진 싸구려 청록색 페인트로 칠해진 대문에서는 쇠 긁히는 소리가 유독 심했다.
“기름칠 좀 하고 살 것이지......”
문을 열고 들어간다.
소담한 마당에 잔디가 누렇게 죽어 있었고, 낡은 개집 옆에는 그 주인으로 짐작되는 작은 흙무더기가 있었다.
양판석은 작은 손짓으로 양측의 경호원들을 물리고 담담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흐음.”
양판석이 숨을 쉬었으나 집 안에 살아있는 것은 없었다.
먼지, 곰팡이, 그리고 썩은 나무.
흔한 시골집의 냄새다.
한때는 살아있었으나 이제는 멈춰버린 무언가들.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움켜쥔 나머지 죽어버린 시체들.
산 것은 모두 떠나가버리고 이제는 미련만 남은 찌꺼기들 사이에서, 양판석은 묘지의 가운데로 발걸음을 옮겼다.
본인도 딱히 예외는 아니었으니 매스껍지는 않았다. 원래부터 이런 게 정치판이고, 어차피 관성으로 어영부영대다 멈추는 게 인생 아닌가.
하여, 이 마른 노인은 괜히 히죽거리며 집안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계쇼-?"
나무로 된 한쪽 벽면에 누군가의 결혼사진으로 추정되는 액자가 붙어 있었다. 상반신이 찢겨져나간 사진이기에 추측은 추측에서 나아갈 수 없었다.
2층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기에 그리로 향한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오를수록 소리는 점점 선명해진다.
낡고 커다란 TV 속에서 아나운서가 대본을 외고 있었고, 그 앞 소파에 튀어나온 뒤통수는 분명히 TV를 깔아보는 각도였다.
[신수광 후보가 대통령 후보에서 사퇴하며 양판석 대 원옥분의 양강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양판석 후보의 승리를 점치는 가운데, 승부는 점점 미궁 속으로......]
“뭐 재밌는 거라고 보고 있으야?”
“왔으면 인사부터 하지?”
“오랜만이우, 선배.”
밀실협상.
선거가 마지막 꽃을 피워내는 순간이었다.
* * *
정치인이 혓바닥으로 먹고사는 직종이라는 인식과는 다르게, 원옥분이라는 정치인은 말을 잘 못하는 정치인이었다. 검사까지 해먹은 본인 말빨이 딸리는 게 아니라 안면근육 절반이 수술 후유증으로 마비되면 대체로 말이 잘 안 나온다.
게다가 발음이야 원래부터 조금씩 샜다지만 70대 중반에 접어들며 말투도 어눌해졌다. 목소리도 가래가 껴서 갈라져버렸다. 덕분에 이제는 말하는 게 어려웠고, 또, 제 목소리 듣기도 싫었다. 하여, 원옥분은 공석에서 말을 할 때는 밤새도록 거울을 보고 연습을 하고, 사석에서는 가급적이면 말을 짧게 하는 편이었다.
이에 그녀가 양판석의 인사에 답했다.
“지랄.”
“에헤이......”
양판석은 평소처럼 느물거리며 서슴없이 그녀의 건너편에 자리했다. 끼이익, 낡은 소파가 삐걱댔다.
“날이 언제 이리 더워졌는지. 4월이라고 참 여름 흉내를 내는 모양이야. 선배는 그리 생각 안하나?”
“지랄.”
그는 넥타이를 풀고 양복을 벗어 소파에 걸었다.
“판검사끼리 한솥밥 먹어놓고 말이야. 연수원도 그렇고 국회도 그렇고. 선배 맞잖수.”
“지랄.”
“아니, 뭐. 선배 대접받기 싫음 관두시던가. 이 사람아.”
“야.”
말을 짧게 하는 방식에는 크게 2가지가 있다. 첫째는 존대어를 생략하는 것이고, 둘째는ㅡ
“내가 어디서 실수를 했나?”
ㅡ본론부터 들이미는 것이다.
갑작스런 질문이었지만 양판석은 미소조차 지우지 않고서 한 치의 지체없이 답했다.
“국정원장 막 함부로 자살시키고 그러면 안됐어.”
“옘병......, 그쪽이었나......”
“콧대 높은 것들은 때리면 이부터 간다니까?”
차재균 자살 직후, 차재균에게 중용되어 생체실험에 관여했던 국정원의 해외파가 숙청당했다. 그 과정에서 국정원장과 대테러정보국장을 비롯한 수많이 이들이 자살당했다.
대신 원옥분은 국내파를 기용했다. 국내파를 장악하여 해외파를 몰아낸 것이다.
정확히는, 국정원 내부의 반발을 내분으로 유도하고, 그것을 이용해 혼란에 빠진 국정원을 통제하려 했다.
Divide and rule.
분할통치술分割統治術이다. 피지배자 간의 내분을 유도하는 지배자의 계략. 보통 식민지를 지배하는 침략국이 사용하는 전략이었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 이 전략을 사용했고, 일제의 문화통치도 분할통치의 일환이었으며, 지역감정으로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의 술책도 큰 범주에서 보면 이쪽 계열이다.
“뭐, 나름 정석적인 방식이기는 한데 말이야......”
한국 정치판에서는 갈라치기, 내부총질이라고 부르는 유서깊은 전략이다. 무명의 재선의원 양판석이 이 방법으로 공화당을 쪼개서 유재광을 대통령으로 세우며 킹메이커라는 별명을 얻은 바 있다.
다만,
“결국 지들끼리 싸워봤자 직장 동료지. 목숨 걸고 일하는 놈들은 전우애란 게 있어.”
선거전략의 대가, 양판석이 히죽였다.
“폐쇄적인 집단은 갈라치기가 안 먹혀요. 내부총질하라고 탄을 주면 바깥에 쏜다니까?”
“.......”
원옥분은 국정원을 분할통치하려 애썼으나, 결국, 양판석이 국정원 내부의 반발세력과 접촉하는 데 성공하며 가장 중요한 정보가 그에게 흘러들어갔다.
[원옥분은 핵무기를 회수하지 못했다.]
그리고, 양판석이 이 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원옥분은 양판석을 공격할 수 없었다.
죽이면 해결되는 문제였으나,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이 자리에 앉아있고 싶은 욕심도 딱히 없었다.
그저, 모든 상황이 끝난 지금에서야 혀나 조금 찰 따름이다.
“쯧......”
“단도리 좀 하지 그러셨소.”
“했는, 콜록! ......안 통한 기야.”
“쯧쯔...”
양판석은 가볍게 한탄했다. 조롱이라기보다는 넋두리에 가까웠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받는 사람도 그리 받아들였다.
정치판의 승패는 영원하지 않았고, 둘 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중에 누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함부로 패자를 멸시해서는 안 됐다. 아니면 아예 다시는 못 일어나게 숨통을 끊어버리던가 해야지.
하여, 양판석은 사뭇 친근하게 비아냥댔다. 원옥분은 그저 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로가 서로를 읽을 수 없었다. 원옥분은 양판석의 미소가 무슨 뜻인지 몰랐고, 양판석은 원옥분의 흐린 눈빛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니 사뭇 가벼운 잡담만 오갈 따름이다.
“허이고오... 공천 받겠답시고 법사위만 해싸고 앉았으니까. 다른 데 돌아가는 물정도 모르는 거 아니요?”
“이게 내 방식이야.”
“빨갱이랑 쇼당 붙이는 게?”
“쇼당까진 아니고...”
“에헤이. 이 사람아.”
물론 그들 기준에서만 잡담이었다.
“백두혈통 기집애 하나 갖다주고 핵폭탄 뺏어온 척 했으면서.”
“흉내는 아니고.”
“몇 개?”
“큰 거 넷, 작은 거 열아홉.”
“저쪽에 남은 건?”
“큰 거 둘.”
“전략핵 두개라... 적당헌가?”
“부산 광주에 터뜨리긴 적당하지 않나?”
“최후협박용으론 적당하구만. 아무튼 저거 함부로 못 쓸테니 인자 저짝은 우리 공습에만 매달려야 하는 거 아니요?”
“코쟁이랑 쇼부쳤으니까 독박은 아니지.”
“쓰겄네.”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안정시켜주는 대신, 대량의 핵폭탄을 받아오고서 북한의 핵무기 사용을 억제시켰다. 대신 북측에 공습지원을 증가시켰으나, 이를 미군과 함께 부담했다. 미국은 원래는 하기 싫어했으나 한국이 중국 운운하며 끌어들인 것이었다.
여기에, 3국의 합의 하에 모든 것을 한국의 군사적 승리로 포장하고 국내선전용 프로파간다로 써먹기까지 했다.
그 결과는 이러하다.
마지막 발악용 전략핵 2개 빼고 싹 다 뺏긴 북한은, 어쨌든 정권을 안정시키고 외국의 지원을 유치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미국은 한국의 핵무장을 용인하고 북한을 지원하는 대신, 한국의 정치적 약점을 잡고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포석을 두었고-
한국은 깔끔하게 핵폭탄 23개를 획득하고 북한에 귀찮은 김씨잔당을 넘겨버리고서, 프로파간다로 원옥분 지지율을 한때 57%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으니, 원옥분의 외교술은 가히 경지에 이르렀다 봐도 무방했다.
빅딜이 성사되었을 당시, 외교안보수석과 외교부 장관은 와인잔을 치켜들며 완벽한 줄타기 외교였다고 칭송한 바 있다. 실제로도 거의 완벽했다.
양판석에게 들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양판석이 짐짓 신중하게 턱을 매만졌다.
“......리철진이는 죽었나?”
“탈북자만 남기고. 개성반군은 북으로 돌려보냈지.”
“시체로?”
“제 발로 묫자리에 걸어가라고 하랴? 리철진이 빼고 싹 올렸어.”
“어이고. 순간이동 쓰는 놈팡이가 언제 모가지에 칼 박을지 모르는데 발이라도 뻗갔수?”
원옥분은 휴지에 대고 가래 섞인 기침을 두 번 내뱉은 다음에서야 대답할 수 있었다.
“그, 군바리 중에 능력 빠꾸시키는 애가 하나 있더라고. 지리산 지하에 상주하면서 감시하는 중이고. 축지법도 함 배워볼라고 피 뽑는 중인데 연구결과 나오면 갖다 쓰던가.”
“탈출할 가능성은?”
“식물인간이 걸어다니는 거 봤나?”
“쓰겄네.”
양판석은 제 목숨 가장 먼저 챙기는 부분에서 서로의 공감대를 확인했다.
백두혈통과 개성반군을 전부 북송하는 대신 저쪽에서는 핵폭탄을 전부 뺏긴 척 엉엉 울어주고, 리철진이는 식물인간 상태로 지리산 지하에서 순간이동 능력에 관한 생체실험을 당하고 있단 말 아니겠는가.
“뭐어, 들은 거랑 대충 비슷하군. 선배 조언은 국정에 잘 반영하겠수.”
“선거 끝났나?”
“계속 할 생각이쇼?”
원옥분이 피식 웃었다. 양판석의 권력욕이 참 가소로웠다. 아니. 재미있었다.
“내가... 대충 1년도 못 해먹었지. 그간 몇 명이나 죽었는지 아나?“
“......”
양판석은 묘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를 지켜보던 원옥분이 입을 열 무렵,
“대충...”
“아아. 잠깐.”
양판석이 귀찮은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계산하고 있잖아.”
“......이노무 쉐끼가 데모하던 시절 버릇 못 버리고 어디 싸가지를 놓고-”
“아 좀 가만히 좀 있어보소! 어디 보자아......”
“산송장 다 됐네......”
양판석은 싱글벙글 웃으며 손가락으로 셈을 시작했다.
“개성반군 총살 3, 황해도에 괴수 올려서 70. 구조포기는 서울에 32, 경인권에 56...”
“그걸 또 세고 앉았나?”
“자기가 물어봤음서 그러네. 암튼 임기동안 죽은 사람은 대충 1200만 명, 직접 죽인 사람은 자국민 88만, 빨갱이 73만, 도합 160만 언저리 아니요?”
“그걸 알면서도 해먹고 싶나?”
“......”
질문의 어조는 전과 다를 바 없었으나 무게는 더할 나위 없이 무거웠다. 양판석 또한 이 질문의 의미를 깨닫고 심사숙고하기 시작했다.
권력의 이유.
“백정짓이 그리 하고 싶드나?”
160만의 핏값.
한평생 위를 올려다보며 산 인간이 대통령 노릇에 반쯤 질려버린 이유다.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
북한으로 돌려보낸 탈북자들. 구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고립시민들. 괴수를 북쪽으로 유도해 발생한 대규모 사망자들.
점심먹고 찍는 도장 한 번으로 수천명의 목숨을 좌우하는 피비린내 나는 일상.
붉은 정치.
“때 묻는 거랑 피 묻는 거는 손맛이 달라. 그거를 왜 모르나?”
“나는 애가 있잖아. 애가.”
원옥분은 양판석의 답을 비웃었다.
후손을 위해서?
“약 처먹고. 회삿돈 처먹고. 외간남자 좃물 처먹는 애들?”
“아이고, 시-빨. 우리 새끼들 가지가지 처먹는 건 나도 아는데. 왜 이리 남에 집안에 관심이 많어?”
“기회봐서 조지려고 그랬지.”
“어이고 무서븐거...”
“거기에 가치가 있나?”
후대後代는 선대先代를 반복할 뿐이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깨닫는 짐승이 아니었음에, 원옥분은 이를 비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허나, 양판석이 고개를 내저었다.
“갑자기 처 맞으니까 정신이 없네. 아무튼 내가 자식농사 잘못 지은 거는 당연히 인정을 하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검찰이 아는데 선배가 모르겠수?”
“그래.”
“근데 썩은 연놈들 사이서도 잎사귀는 나더만.”
원옥분이 삐뚜름한 입매를 다시금 꺾었다.
“장손녀 말하는 건가? 오죽 아끼던?”
“그래. 우리 똥강아지. 고 녀석 뵈기 안 부끄러운 세상 만들어줘야지. 오죽 죽어나갔나? 안전한 세상 만드는 게 우리 책임 아니겠수?”
“네 핏줄 아닌 건 알고?”
“알지 그럼.”
“...!??”
원옥분이 처음으로 평정을 잃었다. 심지어 입까지 벌어졌다.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면 주르륵 쏟아냈을 것이 분명했다.
양판석은 태연히 답했다.
“바람펴서 낳은 애면 어떤가. 고놈이 나를 할애비라 여기는데.”
“......”
“선배는 애 없어봐서 모를 거요.”
“......”
“아, 그래. 생각해보니까 선배 독거노인 아니요? 내 간병인 하나 넣어주까? 막내 사위가 병원장이라.”
“......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