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EP - 인형놀이
[원옥분 대행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세 개 있습니다. 첫째, 국방을 정치에 이용했다. 둘째, 국방을 정치에 이용하고 있다. 셋째, 국방을 정치에 이용할 것이다.]
[과도한 네거티브는 삼가시기 바랍니다.]
[네거티브가 아니라 팩트입니다. 예비군과 길드를 해체시킬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선거 이기려고 예비군 소집시켜서 서울을 수복하자는-]
[예비군 재소집한다는 이야기는 결코 나온 적 없습니다!]
[그러면 서울 어떻게 탈환하실 겁니까?]
[그건 더 신중한 논의가-]
[청와대 정무수석이 그런 것도 대답을 못하시면 어떡합니까?]
[이호정 보좌관! 국정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충분한 논의가 더 이루어져야 하는 사안을-]
[그러면 논의를 하고 말씀을 하셨어야지요? 정치를 가볍게 생각하는 게 누구입니까? 논의도 안하고 포퓰리즘을 하니까 이런 일이-]
[발언시간 지키세요 좀!]
[지켜야 할 건 발언시간이 아니라 도리입니다. 국방비 1500억 횡령해놓고. 장병들한테 음식 조금 기부했다고 검찰 시켜서 기소까지 한 게 누굽니까? 그것도 한승문이라는 사람을-]
[허위사실 유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김두식 사령관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키야아아...!"
흥분한 중년의 목소리에 맞서는 냉랭한 여성의 목소리. 그리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청와대 정무수석의 얼굴과, 무표정을 유지하는 이호정의 포커페이스.
“그림 나온다. 그림이 나와.”
“확실히 전투력이 세네요.”
사무실에서 TV 토론회를 지켜보던 한승문이 감탄을 내뱉으니, 옆에 있던 양일호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문을 텄다.
“상황이 이렇게 풀릴 줄은 정말 예상도 못했는데요...”
“그러게 말이다...”
“청와대 안에서 누가 도와줘서 그런 걸까요...?”
“글쎄 말이다...”
토론은 선거의 꽃, 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커다란 잎사귀 정도는 된다. 토론으로 흥하고 망한 정치인은 셀 수 없을 정도니까. 충분한 변수가 되는 게 이 끝장토론이란 투견장이다.
[서울 탈환이라는 정책 자체가 상당히 전체주의적인 발상입니다. 무슨 나치들이나 할법한-]
[이봐요!]
[사람 죽이는 정책 아닙니까?]
그리고 이호정은 적성이라도 찾은 것처럼 미쳐 날뛰고 있었다. 본론부터 들이박는 두괄식 화법에, 시청자들에게 팍팍 와닿는 자극적인 단어선정.
게다가 지가 먼저 상대방 빡치게 해놓고 정작 본인은 침착한 척까지 한다.
“역시 SNS 오래한 사람은 다른가...”
“트짹이 경력 10년이면 어지간한 토론 마스터할걸요.”
“키보드 워리어를 세상에 풀어놨군......”
이호정이 들으면 ‘트위터가 아니라 인스타거든요!?’ 라고 대번에 반박할 소리였지만, 딩-동 하고 들려온 마법의 소리에 양일호가 후다닥 일어나 달려갔다.
“네-에!”
양일호가 나라찾은 김구 선생님처럼 해맑게 웃으며 현관문을 열자, 헬멧 쓴 배달부가 철가방을 들이밀었다.
“탕수육 하나, 짜장면 하나, 짬뽕 하나 맞으시죠?”
“네에!”
“19만 8천 9백원입니다.”
양일호가 카드를 내밀었으나, 배달부가 손을 내저었다.
“그거 안 받아요. 카드사가...”
“아, 그래요? 언제 망했나?”
“사장님이 삼성카드 아니면 GS만 받아오라고 하셔서......”
양일호가 뒤돌아 외쳤다.
“의원님!”
“어어. 금순 씨한테 뺏어온 카드 하나 있다.”
절뚝거리며 걸어나온 한승문이 카드를 긁고, 카드결제기에 싸인하고, 한승문을 알아보고 흥분한 배달부의 헬멧에 싸인까지 하고 나서야, 그들은 점심밥을 먹을 수 있었다.
양일호는 비닐을 개봉하지 않은 채로 짜장면을 마구 흔들며 비벼댔고, 한승문은 망설임 없이 탕수육 소스를 개봉한 다음-
“아, 아앗!”
부어버렸다.
“......”
죽은 눈빛의 양일호가 나라 잃은 김구 선생님 표정을 짓자, 한승문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뭐야. 찍먹이었어?”
“......형 나한테 왜 그래요?”
“으음. 꼬우면 권력을 잡는 게 어떨까?”
“형은 자기 인간성에 대해 좀 반성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 * *
정치 평론가 산나비입니다.
정치판이 개판이라 요즘 포스팅을 참 자주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따지자면 나쁜 일 같군요. 세상이 개판인데 정치판도 개판이니 개 짖는 소리 때문에 불안해서 잠을 못 자겠습니다.
[다크써클에 찌든 한승문의 사진. 워낙 피곤해보이는 바람에 국민적 밈이 된 사진이다.]
대관절, 나는 불과 일주일 전에 차기 대통령은 원옥분이라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주된 근거는, 한승문이 대선 나가려면 개헌을 해야 한다. 국민당이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원옥분은 권한대행의 신분으로 대선에 임하므로 권력을 잡고 있다. 정도였지요.
실제로 국민당은, 심지어 그 한승문마저 네거티브의 늪에 빠졌고, 권력을 잡고 있던 원옥분의 반격 덕분에 국민당 주류 김조인계가 완전히 실각했습니다. 그리고 원옥분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지요.
[검찰에 출두하는 김조인의 사진. 아래쪽에 반투명한 KBS 공영방송 워터마크가 박혀있다.]
그러나, 내 의견을 전면 철회하겠습니다. 원옥분은 절대로 대통령 못합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서울 탈환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과제가 나치즘적 전체주의로 매도당하고, 모든 언론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신수광이라는 자영업자를 신으로 떠받들 줄이야.
그렇게 신수광이라는 뉴페이스가 튀어나와 원옥분의 대항마로서 박빙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거품이야 있겠지만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결과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평범한 정치적 이변입니다. 그리고 나는 예측에 실패한 평론가이지요. 구질구질하게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자연재해를 누가 예측합니까?
그러나 내가 이렇게 글을 올리는 이유는, 이게 자연재해가 아니라는 분석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풀어 말하자면, 처음부터 모두 짜고 치는 플레이였던 겁니다.
나는 이번 선거를 ‘인형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실에 걸린 마리오네트 사진. 그림자 때문에 무서워 보인다.]
이번 선거는 처음부터 작전세력이 주도한 치밀한 대국민 프로파간다입니다.
지난 포스팅들에서 누누이 밝혔듯이, 원옥분은 자잘한 건수만 생기면 곧장 계엄령을 때리며 언론을 잡아 조졌습니다. 매번 TV에는 군복입고 국경 시찰하는 모습만 나오지만, 실상은 하루종일 SNS만 확인하는 부류의 인간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방통위 경고먹은 게 그 증거입니다. 그날 이후로 마티즈만 보이면 흠칫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KBS를 제외한 모든 방송사가 원옥분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메인 프레임이 일치하는 건 참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그 누구보다 이익에 민감한 집단입니다. 권력과 돈이 있는 곳에는 항상 기자들이 먼저 도착해 있습니다. 절대로 권력을 공격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언론이 원옥분에게 개긴다는 건, 언론에게 원옥분이 다음 대통령이 안 된다는 확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이들은 원옥분이 사실상 유일한 차기대통령의 위치에서 군림하고 있을 때부터 원옥분을 공격했다는 겁니다.
[네이버 뉴스 캡쳐본. ‘원옥분 정권의 반년을 돌아보다, 과연 대한민국은 안전한가?’]
즉. 언론은 가장 처음부터 일반 대중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알고서 원옥분을 공격했습니다. 즉, 이 정국의 이면에는 처음부터 ‘무언가’가 존재했고. 이에, 나는 다분히 극단적 음모론적 시점으로 이번 정국을 분석했습니다. 그제서야 아다리가 맞더군요.
‘인형술사’는 존재합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실 달린 인형에 불과합니다. 이 치밀한 사회역학을 조절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형들이 관여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청중엽, 한승문, 신수광이 대표적인 인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이 원옥분의 과거, 현재, 미래를 부쉈습니다.
본격적인 정국의 시작은 청중엽의 네거티브 공세였지요. 원옥분이 흔들리기 시작한 시점도 이 때입니다. 원옥분이 차재균의 허수아비라고 했나요. 상당히 그럴듯한 녹취록이 많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청중엽이 원옥분 정권의 ‘정당성’을 부쉈습니다.
그 다음은 한승문이었지요. 여도연 자살기도와 설진운 염산테러라는 쇼크를 일으키더니, 대뜸 헌터 30명을 데리고 중앙정계를 헤집어놓은 뒤, ‘국방대통령’으로 추앙받던 원옥분에게 국방농단 프레임을 씌워버렸습니다. 곧장 원옥분의 반격으로 무력화되긴 했습니다만, 아무튼.
한승문이 원옥분 정권의 ‘실적’을 부쉈습니다.
그 다음이 신수광입니다. 네이버 TV 정치채널에 올라온 흔한 동영상이 전국에 방송을 타더니 대뜸 조회수 2천만을 찍고, 순식간에 국민당 대선주자로 떠오르며 서울 탈환을 저지시킨 과업을 달성하신 분이지요. 서울 탈환에 관한 문제는 다른 포스트에서 다루겠습니다만. 어쨌든.
신수광이 원옥분 정권의 ‘비전’을 부쉈습니다.
인류 역사상의 모든 정치권력을 지탱하는 3요소가 있습니다. 정권의 정당성, 실적, 비전이 이것입니다.
왕정이든 민주정이든 ‘정당성’ 없는 정권은 과거사 문제로 붙잡힙니다. 또한, ‘실적’ 없는 정권은 대중의 즉각적인 불만을 야기합니다. 마지막으로, ‘비전’ 없는 정권은 대중이 원하는 미래를 만들지 못하는 권력이라는 뜻입니다.
이 3요소가 권력의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할 수 있을만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3요소가 무너진 원옥분은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원옥분의 사진. 일그러진 얼굴에 착잡한 기색이 감돈다.]
그러나. 저는 신수광 또한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 대한민국은 엄연히 안 그런 척하는 엘리트주의 사회고, 절대로 자영업자 ‘따위’를 국민이 자기 머리 위로 올리지 않을 겁니다.
또, 아무리 서울 탈환의 생명윤리적 정당성이 지적받는다 한들, 선거는 익명이기에 도덕성과는 딱히 관련이 없습니다. 남 죽든말든 결국 자기 이익에 따라 투표지에 도장을 찍는 게 인간입니다.
또한, 서울 탈환이 지금이야 언론의 선동 때문에 악의 축으로 보이겠지만, 결국은 찬반양론이 극명하게 구별될 가치판단의 문제입니다. 싸우다 죽을 사람은 반대를 할 것이고, 안 싸워도 되는 사람은 찬성을 하겠지요.
나는 이제 이 거대한 인형극의 인형술사가, 중도적 타협안, 국민적 대타협, 그리고 협치와 공존이라는 마법의 명분을 들고 기어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형들과 치고받다가 레임덕에 걸린 원옥분 정부에 대한 정권심판론을 들고서, 어린애 손목 비틀듯 대선에서 승리하겠지요.
인형들도 참 노났습니다. 청중엽은 이번 일로 김조인을 쳐냈고, 신수광은 대번에 전국구 정치인으로 떠올랐지요. 한승문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각하가 감투라도 하나 얹어주지 않겠습니까.
[취임선서를 하는 유재광 전 대통령의 사진. 바로 뒤쪽 내빈석에서 그의 정치참모였던 양판석이 실눈으로 미소짓고 있다.]
*
“우리의 경제는 무너졌고. 우리의 국방은 위태롭습니다.”
수많은 헌터들의 묘역이 자리한 지리산 현충원.
파란 하늘에 솟은 현충탑을 배경으로, 수많은 기자들이 생방송을 송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답이 존재합니다. 국가적 개혁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초상사회에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국제무역과 마석사업으로 식량난을 해소하고,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초인육성을 통해 국방과업을 달성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기나긴 재생의 여정 끝에서야. 우리는 우리의 고향을 탈환할 수 있으리라고. 저 양판석은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고민이 응어리진 모습으로, 착잡한 표정의 양판석이 고개를 숙여 갈라진 목소리로 절절히 외쳤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론을 모아야 합니다...! 갈등의 정치, 분열의 정치, 증오의 정치를 멈춰야 합니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시뻘겋게 부릅뜬 눈에는 오직 확신만이 남아 있었다.
“이에, 저 양판석은, 제 21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함과 동시에, 국민당에 연립내각을 제안하겠습니다.”
기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허나, 양판석은 한치의 흔들림 없이 강력하게 연설을 이어갔다.
“5차 산업혁명. 그리고 최초의 초상개혁을 이루어내기 위해! 헌정 사상 가장 강력한 정부부처를 신설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건, 오직 이 땅의 국민들만이 창출해낼 수 있는 과업입니다!”
게임이 끝났다.
“국민당 한승문 원내대표께 간곡히 부탁하겠습니다.”
초상관리부超常管理部의 장관을 맡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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