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92화 (92/296)

EP 15 - 정치판 속 엑스트라 (6)

“저어, 서귀포 밑에 보시면 정방폭포 옆에 소남머리 절벽이 있습니다. 서귀포 항을 드나드는 커다란 배들과, 푸른 남해안이 보이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청중엽의 이야기는 소남머리 절벽 위, 할아버지의 옛이야기에서 시작되어, 조부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는지로 끝났다.

공산당 간부였다가 정쟁에서 밀려나 한국으로 도망친 상해방의 간부, 제주도의 순박한 시골여자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이루고, 작은 통조림 회사를 차려서 화기애애하게 살다 간암으로 사망.

조부께서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음식은 된장국, 회사를 운영하며 수많은 제주도 빈민을 구제, 그를 본받고자 했던 청중엽의 마음가짐. 등등.

모든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 청중엽은 잘생긴 얼굴로 입술을 꾸욱 짓씹고서, 울분에 찬 눈물을 뜨겁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선 원옥분에게 부관참시되셨습니다. 저는 할아버지가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검찰에 잡혀갔습니다. 제 보좌관은 검찰의 지하 취조실에서 16시간째 수사받고 있습니다. 제 아내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자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고, 제 아이들은 반역자의 자식들이라는 누명을 쓰고 손가락질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던진 폭탄.

“......제가, 국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원옥분 대행, 이제 그만하십시오.”

대한민국은 정치보복에 애매하게 민감한 나라였다. 거대한 역풍의 전례가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쪽 계파가 정권을 두 번이나 창출한 주류 계파였기도 했다.

당장 문재인 전전 대통령이나, 유재광 전 대통령이 친노였다. 이는 대한민국 정치권, 아니. 대한민국 유권자 절반가량이 공유하는 역린逆鱗이다.

청중엽은, 아주 영악하게도, 그 부분을 파고든 것이었다.

그는 탈출에 성공했다.

이제 청중엽의 할아버지가 삼합회와 결탁한 부패관료였고, 청중엽이 그 인맥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정치질에 써먹었다는 사실은, 어둠 속에 묻힐 것이었다.

* * *

정치란 참으로 이중적인 것이었다.

단어의 쓰임부터가 그러했다.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분배,

바르게 다스림,

이해의 조정과 질서의 유지, 등.

온갖 그럴법한 뜻을 政治 두 글자에 때려박아 놓고서, 아무도 이 말을 그 뜻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보통은 선동이나 뒤통수 칼질 비슷한 뜻으로 쓴다. 당장 정치꾼인 본인들부터가 그랬으니 어찌 이 이중성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이에 이호정이 생각하기를ㅡ

“이번 선거판 너무 정치적인데요.”

“당연히 선거가 정치적이지.”

소파에 반쯤 누워 뒹굴거리며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한승문의 대답에, 이호정은 율무차를 숟가락으로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청중엽도 나가리됐는데 어쩜 저리 한가하게 뒹굴거릴 수 있을까. 그래도 내심 저 오빠라면 어떻게든 하겠지 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인상이 찌푸려지지는 않았다.

그냥 살짝 불안해서 맥이 빠질 뿐이다.

“......그 정치 말고요.”

“나도 그 뜻으로 말한 거 맞아.”

읏차. 한승문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이번 선거는 돈이라도 안 오가지.”

그리고는 히죽 웃었다.

“지난번 총선 때 민주당에서 뭔 일이 있었는지 상상도 못할껄?”

그는 민주당 공관위원장의 보좌관이었다. 이에 진보당 보좌관이었던 이호정도 피식 웃었다.

“저희도 액수만 달랐지 비슷할걸요.”

김밥 싸들고 사무실로 들어오던 양일호가 중얼거렸다.

“우리 선임은 트럭으로 나르다가 감빵 들어갔는데요.”

참고로 양일호는 공화당 의원 보좌관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국민당 소속으로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고, 그를 위해 테이블에 김밥과 나무젓가락을 세팅했다.

허구헌날 이념타령하지만 참 낭만 없는 정치판이었다.

지역구 사무실 소파에서 뒹굴거리던 국민당 원내대표가 곧장 은박지 끝부분만 까서 김밥을 베어물었고, 양일호는 김밥을 펴놓은 뒤에 얌전히 나무젓가락을 쪼갰다.

그리고 자기 애인에게 말했다.

“호정아. 김밥.”

“......”

“호정아?”

“......”

“단무지 빼줄까?”

양일호의 말을 무시한 이호정은 충혈된 눈으로 아이패드와 핸드폰을 동시에 뒤적거리며, 종이에다 포스트잇 여러개를 붙여놓고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그녀가 무언가에 빠지면 가끔 저런다는 것을 알고있던 두 남자는 별 말없이 김밥이나 우물거리며 시간을 떼웠다.

“아, 일호야. 검찰 갔다왔냐?”

“네. 일단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당하긴 했는데, 판결이 어떻게 뜰지는 모르겠네요.”

“어이구. 어쩌다가?”

“형이 시켜서 치킨 뿌리다가요.”

“저런......”

“형 지금 저 놀려요?”

“이제 알았니?”

이호정의 기행奇行이 끝난 건 양일호가 젓가락으로 한승문을 찌를까 심사숙고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거 좀 보세요.”

이호정은 아이패드를 한승문과 양일호에게 들이밀었다. 그녀가 밤을 새며 인터넷을 분석한 결과물이었다.

“대중들 눈에 이번 선거판이 너무 네거티브했다는 게 확실시됐고. 그 결과가 나타났어요.”

“......”

“모든 후보들 지지율이 감소했습니다.”

양일호는 불안한 표정으로 손톱을 뜯기 시작했고, 한승문은 부처님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이게 다 업이지 뭐.”

당연한 결과였다.

고작 일주일도 안 되어 수많은 공방이 오갔다.

청중엽이 원옥분에게 ‘차재균 허수아비’ 프레임을 씌우며 뒤통수에 칼을 박고. 양쪽이 약해진 틈을 타 중앙정계와 거리를 두던 한승문이 헌터들을 데려와 중원에 깃발을 꽂고.

그 상태로 국방농단 프레임을 구축하며 요새를 세워, 원옥분에게 폭탄을 던지며 청중엽-한승문의 양면전선을 전개시켰다.

이 시점에서 원옥분은 ‘국방대통령’ 이미지를 잃고, ‘공격당하는 1인자’ 이미지가 생기며 위기에 몰렸으나, 검찰을 휘둘러 김조인을 보내버리자, 보급기지를 잃은 장군들처럼 한승문과 청중엽이 무력화됐다.

그런데, 청중엽이 사퇴의 눈물쇼를 벌이자 원옥분의 지나친 공권력 행사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주된 논리는,

“국방당도 까보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텐데 왜 검찰은 국민당만 터나? 원옥분의 개가 되어버린 거 아닌가? 이게 바로 그 검찰의 부당한 선거개입인가 뭔가 그거 아니냐?”

“우리한테 유리한 이야기긴 하네.”

“좋아할만한 현상은 아니에요.”

틱. 하얀 손가락 위에서 화려하게 돌아가던 모나미 볼펜이 멈췄다. 인상을 찌푸린 이호정이 볼펜을 입에 대고 잘근잘근 씹었다.

“양비론이 먹히기 시작했다는 거니까......”

양비론兩非論.

그놈이 그놈.

둘 다 나쁜놈.

어찌보면 좋은 전략이겠지만, 대한민국 정치판 큰물에서는 결코 용인받지 못하는 전략이었다. 이는 19대 대선에서 ‘국민의당’이 실패했던 사례로 증명된다.

반면, 양비론이 먹힐 때가 있다.

“......대중들이 이제 양쪽 다 똑같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거죠.”

“‘똑같이’가 아니라 ‘좆같이’겠지.”

이 또한 마찬가지로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성공했던 사례로 증명된다.

즉, 양비론이 먹히기 시작했다는 건, 기성 정치권에게 경종을 울리는 적신호였다. 그리고, 이제 국민당도 대중 눈에는 기성정당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신생 개혁정당의 이미지를 잃어버렸다.

이호정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네거티브가 너무 심했어요......”

살짝 수염이 올라온 턱을 매만지는 초췌한 한승문과, 동그란 무테안경을 슬쩍 기울이며 다가오는 양일호에게, 이호정은 찌푸린 얼굴로 설명을 계속했다.

“기본적으로 네거티브는 양쪽에게 데미지를 줘요. 절대로 승자가 안 나오는 구조에요. 그리고 실제로 마이너스 효과가 나왔죠.”

이호정이 핸드폰 화면을 크게 확대시켜 하향 그래프를 보여주었다.

“모든 후보들의 지지율이 떨어졌어요.”

“청중엽이 나가리됐는데 원옥분 지지율이 떨어졌다고...?”

“처음에는 과반이었는데 지금은 30프로 후반. 그리고 의원님도 15퍼 콘크리트 깨져서 12프로.”

거침없는 이호정의 지적에, 양일호가 사람좋게 웃으며 의견을 냈다.

“음......, 국민들의 정치혐오가 좀 세졌네요. 누구 뽑을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30프로니까, 아마 좀 더 도덕성 있는 후보를 원할 거고. 우리가 퇴역 헌터들 밀어주면서 버티면 나름 길이 보일 것 같슴다. 제 생각에 형 지지율은 김조인계 국민당이랑 엮여서 잠깐 떨어진 것 같으니까-”

“아뇨.”

이호정이 미간을 찡그리며 반박했다.

“유권자들에게 기억력을 기대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죠! 너무 짧은 시간동안 너무 많은 정치공방이 오갔고, 네거티브라는 자극제가 과다주입되는 바람에, 그 어떤 프레임도 국민들을 확고하게 장악하지 못했어요. 하필 정계개편도 이루어진 마당이라 거의 모든 유권자들이 중도층으로 돌아섰다고 봐야 해요. 그것도 자극적인 선동에 아주 무덤덤해진 중도층이요.”

“대중들이 자극에 무덤덤해졌다?”

“예전에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자기가 맞는지도 몰랐다면, 이제는 채찍을 하도 맞아서 고통을 못 느끼게 된 거죠. 어느 쪽이든 이제 채찍이 아니라 당근이 보이면 눈이 뒤집힐 거에요.”

그리고 애초에 이런 세상에서 도덕적 민감성이나 판단력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ㅡ

라고 이호정은 짧게 덧붙였다.

“5명 중 1명이 죽었어요. 거의 모든 국민들이 가족을 최소 하나 이상 잃은 상황이에요. 공포정치, 증오정치에 아주 취약한 상황인데, 양쪽에서 공포정치, 증오정치를 하도 충동해대니까 오히려 무덤덤해진 거죠.”

“......아무래도 슬슬 맛이 가겠는데.”

“이제는 국방당이고 국민당이고 무슨 말을 했는지 까먹을 때도 됐죠. 그냥 별 생각없이 ‘둘이 서로 싸우니까 둘 다 잘못했구나’ 라고 느낄 걸요? 복잡한 게 머리에 들어오기에는 세상이 너무 복잡하니까요. 게다가 실시간으로 괴물들이 아가리 벌리고 내려오잖아.”

한승문은 이호정이 건넨 아이패드를 천천히 내려보았다. 아주 깔끔하게 정리된 도표와 그래프들이 그녀의 의견을 뒷받침했다.

이호정의 말은 추론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숫자에서 나온 결과였다. 한승문이 깔끔하게 납득하고서 그녀에게 물었다.

“내 지지율이 떨어진 것도 양비론 때문이냐?”

“정확히는 너무 이미지를 소모하셨어요. 이번 양비론의 이유가 지나친 정치싸움인데, 의원님이 옳든 아니든 정치싸움에 끼어든 것 자체가 네거티브에 얽힌 거라고요.”

네거티브 싸움에 승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한승문도 마찬가지였다.

“김조인이랑은 상관없어요. 그 전에 원옥분을 공격한 게 문제죠. TV 나와서 누군가를 욕하는 행위 자체로 지지율이 떨어진 거에요.”

“흐음.”

“앞으로 네거티브는 저랑 일호가 할게요. 의원님은 덩치가 너무 커졌어.”

“이거 재밌네...”

이호정은 ‘누군가’와 참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고 생각하며 한승문은 골계적인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그는 시종일관 은은하게 미소지으며 그녀의 의견을 청취했다. 긴장감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쯤 되니 슬슬 이호정도 열불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양일호와 이호정이 금뱃지를 달 확률은 아주 높았다. 한승문의 측근이라고 대중에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사건을 계기로 말이다.

아마도 한승문은 그걸 노리고 자신들을 충청방어선까지 데려가서 선거법 위반에 같이 얽히게 한 거겠지. 위기까지 함께하는 한승문의 왼팔 오른팔 이미지를 주려고 말이다.

“......저어, 의원님. 아니, 오빠.”

“응?”

“지금 상황 많이 위험한 거 알죠?”

“응.”

그런데, 금뱃지고 나발이고.

원옥분의 당선이 유력한 마당에,

정권 바뀌고 나서 법원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실형 때리면 의원직 상실이었다.

양판석 인맥으로 판결을 최대한 늦췄다고는 해도, 법원은 분명 대선에서 승리한 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릴테니 말이다.

“총선 이겨봤자 대선 지면, 우리 의원직 상실이에요.”

“그렇지.”

“방법 있죠?”

“어.”

그리고, 이호정은 한승문이 자신들에게 꿀떡과 폭탄을 같이 떠맡긴 상황에서, 그가 폭탄을 해체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꿀빠는 걸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양일호는 집에서 자꾸 피가 나도록 손톱을 뜯는 걸 보니 불안을 주체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한승문이라는 상또라이새끼에 대한 확신이 존재했다.

비록 수염도 안 깎고 지역구 사무실 소파에서 뒹굴거리며 입에 김가루나 묻히고 있지만, 이 양반이 한 짓거리는 대한민국 교과서에 실릴만한 위업들이었고, 그녀가 지켜본 한승문이라는 사람의 됨됨이 또한 결코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가 지금 한승문을 책망하는 이유는.

“으음... 오빠가 신중한 사람인 건 잘 알아요. 근데, 그, 뭐냐......”

“음?”

“후우.......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저 원래 이렇게 사회성 없는 애 아니거든요? 근데 지금 상황 보니까 좀 불안해서 그래요. 제가 보기에는 우리 이번 선거 무조건 진 거 같거든요? 물론 오빠가 해쳐나갈 거라는 믿음은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거 너무 위험한 상황이라서요.”

“아니 뭔데 그래?”

“최대한 침착하게 들어주세요. 절대로 지금 오빠한테 막, 들이받고 이런 거 아니에요. 그냥 좀 투정 살짝 부리는 거야.”

“뭔데 그래, 무섭게...?”

섭섭해서였다.

“오빠 우리 못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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