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5 - 정치판 속 엑스트라 (3)
정치인이 사고를 치면 관심이 모인다.
아주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이름없는 정치인이라도 사고를 치면 국민적 관심을 받는다.
그러면,
대선 지지율 15%짜리 스타 정치인이 국가의 방패인 충청 방어선에서 치킨을 뿌리다 선거법 위반으로 잡혀놓고서 방송에 나와 아나운서랑 토크쇼를 하면 시청률이 얼마나 나올까?
나는 100%라고 본다.
모두가 본방송을 시청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방송내용이 전국민에게 전해질 것이라는 점은 기정사실이었다.
- 원옥분 정권의 군사적 실책은 이미 예비군 소집해제를 통해 드러난 바 있습니다.
- 아, 장범근 전 국방장관의 해임으로 일단락 된 사건 아니었나요?
-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습니다.
* * *
“원옥분 정권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방을 희생시킨다는 겁니다.”
프레임 Frame.
이라는 말이 있다.
“서울 방어선이 안정되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보병은 괴수 상대로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예비군을 소집해제시킨 건 국방이 아니라 여론을 우선시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원옥분 대행이 차기 대권을 노리고 포퓰리즘을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지지율 상승을 위해 국군을 이용했다는 편이 정확하겠습니다.”
Frame, 테두리, 창틀, 건축물의 기본 골격,
정도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다. 조금 더 확장시키면 ‘생각의 틀’ 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걸 공사판이나 정치권에서는 전문용어로 와꾸라고 한다.
그리고 정치의 기본은 와꾸를 짜는 것이다.
상대방을 어떠한 와꾸 안에 가둬놓고 줘패는 게 한국정계의 가장 기본적인 전략전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보통 프레임을 조성한다고 표현한다.
정부의 부당한 환율개입으로 인한 시장혼란이 수출경제에 악영향을 가져왔다고 표현하면 유권자들이 못 알아 들으니까, 그냥 경제무능 적폐세력이라고 욕하는 것이다.
여당과 야당, 그리고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수십년간 애용된 전술인 만큼, 이 유서 깊은 전통에는 당연히 클리셰가 존재한다.
경제무능 정권.
외교무능 정권.
북한에 퍼주는 빨갱이정권.
야당과 협치 안하는 불통정권.
비리로 얼룩진 적폐정권.
그리고 이번 경우에는,
“원옥분 대행이 국군을 정권의 시녀로 바라보지 않는 이상에야, 예비군을 소집해제시키겠다는 발상은 절대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국방농단에 대해 말씀하시는 건가요?”
“적절한 표현이군요.”
국방농단國防隴斷. 정도가 적절하겠다.
“예비군 소집해제 직후에 의정부에 게이트가 열리고. 서울 포위망이 돌파당해서 나라가 패망할 뻔했습니다. 다름 아닌 제가 그때 거기 있었고, 저희 부모님도 당시 역병종양에 감염되셨었습니다.”
“네. 김두식 사령관이 후퇴하는 국군을 수습해서 충청 방어선을 설치하지 않았더라면, 국가의 존망이 위험했을 사건이었지요?”
“고 김춘식 조합장과 감지윤 양, 그리고 수많은 각성자들의 공헌에 대해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영웅들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국가 정책이 영웅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국민들께서도 능히 알고 계실 것이고요.”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는 원옥분이 잘해서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아아...! 나라를 구한 건 선열들의 희생일 뿐, 현 정권의 시스템이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원옥분이 자꾸 계엄령 터뜨리면서 언론들을 쥐어짜서 그런가, 그도 아니면 양판석이 이쪽에 미리 손을 써놔서 그런가. 방송국에서 내게 붙여준 아나운서는 아주 현란하게 이빨을 까며 프레임 조성에 앞장섰다.
솔직히, 혓바닥 놀리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얼굴을 천천히 보니 낯이 익은 게, 아무래도 베테랑 아나운서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침통한 표정으로 내게 질문했다.
“한승문 원내대표께서는 그러면, 어떤 점에서 현 정권의 시스템에 의문을 가지셨던 건가요?”
“서울 참사를 예로 들겠습니다.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저 같은 경우는 사태가 끝날 무렵에야 겨우 도착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김춘식 조합장님, 그리고 설진운 각성자님을 비롯한 수많은 초인들이 분투 끝에 괴수를 막아내고 계셨지요. 그리고 수많은 분들이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서울 게이트를 막아낼 당시에 국군의 지원은 없었던 건가요?”
“단 한 차례의 공군지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각성자들이 외롭게 싸우다 죽었습니다. 국군과 초인들을 이어줄 연결고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수를 꿀꺽이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고 진중하게, 유튜브에 나도는 싸구려 정치꾼같지 않게, 최대한 냉철한 정치 평론가처럼 말을 이어갔다.
“물론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1차적인 책임은 중간에서 분탕을 친 탈북 주체사상파들에게 있겠지만, 근본적인 책임은 정부와 국방당에게 있습니다. 왜냐? 이능력용역조합이라는 국가헌터단체, 통칭 길드를 해체시킨 장본인이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네....... 공화-민주 양당합당 당시 한승문재단 압수수색이 성사되었었죠?”
“저를 공격하기 위해 길드를 없앴던 겁니다. 국방당은 당시 특검까지 움직여서 저를 내란혐의로 매장하기 위해 길드를 해체시켰습니다.
여가서, 특검을 통과시킨 국회가 지금의 국방당이고, 검찰을 움직였던 건 원옥분 대행이었지요. 결국 정치싸움에 애꿎은 각성자들만 피해를 봤던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헌터협회를 조직하면서 정부개입을 차단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던 겁니다. 다행히 실제로 그렇게 됐고요.”
이로써, 국방농단에 대한 논리가 성립되었다. 예비군 소집해제, 그리고 길드 해체.
나는 책상을 손가락을 쿡 쿡 찌르며 두 가지 사실을 깔끔하게 짚었다.
“지지율 올리려고 예비군을 해체시켜서 의정부에 게이트 열리니까 서울 포위망이 돌파당했습니다.”
첫째, 국군농단.
“정적을 없애려고 길드를 해체시켜서 서울 게이트 폭주했을 때 각성자들이 국군의 지원도 못 받고 싸우다 죽었습니다.”
둘째, 초인농단.
“군대도 줄이고, 길드도 없애면, 나라는 누가 지킵니까?”
결론, 국방에 대한 무능.
아나운서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원옥분 정권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방을 농단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나는 침통한 표정으로 유재경과 김두식에게 받은 자료를 주섬주섬 들이밀었다.
“국군 내부의 자금흐름입니다. 여기를 보시면......”
나는 빨간색으로 중요한 부분만 강조한 싸구려 판넬을 꺼냈다.
언젠가 종편에 나온 정치인들이 유치한 판넬 들이밀면서 목청 높이는 거 보면서, 참 힘들게 산다고 혀를 쯧쯧 찬 적이 있는데, 내가 그 짓거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싼티나는 말풍선 가운데에 적힌, 노란색 테이프로 붙인 글자, [1500억 증발!?] 을 손가락으로 쿡 쿡 찔렀다.
“돈이 증발했습니다.”
“네?”
“청와대와 기재부에서 국군에 긴급편성한 추경예산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겁니다.”
추가경정예산追加更正豫算.
나라를 굴리기 위해서는 예산이 필요하다. 기획재정부에서 예산안을 짜서 국회에 올리면, 보통 연말부터 연초까지 질질 끌다가 겨우 성사되고는 한다. 그때 정해진 예산으로 국가부처가 돌아간다. 그걸 본예산이라고 한다.
근데 갑자기 급전이 필요해서 원래 약속과는 다르게 돈을 땡겨쓰는 게 추경예산이다.
청와대가 요청하면 기획재정부가 추경안 짜서 국회에 올린다. 그리고 국회가 통과시키면 예산이 바뀐다.
보통 경제 조질 것 같을 때 급하게 통계라도 속이려고 정부에서 추경안을 통과시키고는 하는데, 이번 경우에는 국방 추경안이었다.
상식적으로, 전쟁이 터졌는데 국방부에 예산을 더 줘야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추경안은 진즉에 수없이 통과되었다.
근데.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6차 추경 당시 국민 세금 2조 5천억을 국군에 보냈는데, 도착한 건 2조 3500억 뿐입니다.”
“아...!”
“원옥분 정부에게 묻겠습니다. 1500억은 어디 갔습니까?”
물론 내가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니었다. 유재경과 김두식 또한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각성자 특수부대.
북한에서 핵을 훔쳐온 원옥분의 비밀 군사기관.
우리는 암암리에 그 돈이 그쪽으로 흘러갔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사실 어지간한 고위직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었다.
“저는 이 1500억이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물론 나는 모른다. 아무튼 모른다.
“한국 경제가 아무리 망가졌다고 한들, 1500억이 푼돈은 아니지 않습니까?”
“의원님께선 지금 군납비리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섣부른 속단은 자중하겠지만, 모든 가능성을 우려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국군에게 갈 돈이 어디론가 새어들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제가 왜 충청 방어선에 음식을 싸들고 갔겠습니까? 우리 장병들에게 주어질 식량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참신한 개소리를 진지하게 지껄이고서는, 그보다 더한 개소리를 차분히 읊조렸다.
“물론, 제가 원옥분 정부를 무조건적으로 질책하는 건 아닙니다.”
“아아, 네.”
“이런 사태는, 네.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범위 아니겠습니까? 전 세계적 위기에서 우리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들께서는 아주 굳건하게 국난을 극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는 그 점에서 원옥분 정부의 노고를 충분히 인정하고, 또 존중합니다.”
이어지는 마법의 단어.
“다만.”
“네.”
“국군을 자꾸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는 게 다소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과실을 자꾸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의 책임으로 떠넘기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원론적인 멘트를 읊었다.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임과 동시에 국군의 통수권자입니다. 헌데, 통수권자가 자꾸 책임을 피하고, 통수권을 부당하게 이용하는 건, 국가 지도자로서의 올바른 처신이 아니라고 봅니다. 대통령은 앞길을 제시해야지 자꾸 네거티브에 집중하면 안되는 겁니다.”
아나운서가 준비된 멘트를 읊었다.
“조금 외람된 말씀일 수 있겠지만......”
“아, 네. 말씀하세요.”
“국민당은 네거티브에 전념하지 않고 있는 건가요?”
“제가 그래서 우리 당 공관위의 판단을 한 차례 불신한 바 있습니다.”
나는 앉은 자세를 고쳐먹고, 사뭇 밝은 논조로 이야기의 흐름을 전환했다.
“이젠 미래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네.”
“저는 헌터들의 국제기구 설립을 추진 중입니다.”
“네?!”
아나운서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다.
“유럽연합의 노아 뤼미에르 집행위원장이 초인협회의 상임고문 직을 수락했다는 소식은 익히 전해진 바 있습니다.”
“네. 상당히 파격적인 방한이었죠?”
“저는 사실, 노아 뤼미에르 집행위원장 뿐만 아니라, 중국의 리충빈 부주석과도 긴밀히 회담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리충빈 부주석이라면...! 중국의 2인자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아주 건설적이고 국제적인 연합공조체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리충빈 부주석은 동북아시아의 평화로운 국제협력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신 바 있습니다.”
리충빈을 소개할 때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상급대장’, ‘중군위 상장’이라는 자극적인 칭호는 싹 빼고 말했다.
아까는 소개할 때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리충빈 상장'이라고 했는데, 아나운서랑 PD가 그냥 부주석이라고만 소개하라더라. 괜히 빨갱이 앞잡이 소리 듣는다고 말이다.
그래.
지금 이 인터뷰, 벌써 세 번째로 녹화하는 거였다.
아마 수 차례의 인터뷰에서 매 장면 베스트컷만 뽑아 기가막힌 인터뷰를 뽑아내겠지.
“물론 아직 국내 정세가 불안정한 상황, 그러니까. 아직 차기 정권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라 국제기구 창설을 추진하는 건 함부로 약속드릴 수 없었지만......”
그러니까 이건.
기나긴 계엄령동안 원옥분에게 억압받다 겨우 해방된 독기품은 언론과, 원옥분과 국방당에게 다구리맞고 내란죄로 감방 문턱까지 갔다 온 내가,
아주 세심하게 포장한,
"어쩌면 현 정권이 국방에 관심이 더 많았더라면, 지금쯤 우리가 새로운 국제질서의 중심에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엿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