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5 - 정치판 속 엑스트라 (1)
정치인의 대화란 대개 복잡하고 모호하다.
여러 이유가 있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정치인의 사망원인 중 3위인 ‘녹취록 스캔들’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통령의 명령은 문서로만 행해져야 한다는 법까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가 완곡화법을 즐겨 사용하는 또다른 이유는,
“청중엽 지사님께서 원 대행과 차재균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참 놀랐습니다. 제가 알기로 당시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을 텐데......”
[당신 뒤에 양판석 있지? 양판석 제보받고 이러는 거 아녀?]
“우리 한승문 의원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그래요. 네. 맞습니다. 정의를 위한 일인데 어떻게 저 혼자 투쟁할 수 있겠습니까? 같이 싸웁시다. 우리.”
[모르는 척 해라.]
서로가 어떤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 자체가 없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 *
청중엽의 기습으로 원옥분과의 전쟁이 개시된 가운데, 그 둘의 싸움은 결국 국민당과 국방당의 전면전으로 확산되었다.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대한민국의 정치역사의 적통 계승자와, 게이트 열린 이후의 세상에서 새로운 정치의 지평을 열겠다는 도전자.
언뜻 보면 막상막하의 치열한 혈전이었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리 원내대표님께서 당정에 손을 보태주시니 이제야 당이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습니다.”
한승문 없는 국민당은 팥 없는 찐빵, 이빨 빠진 호랑이, 파인애플 없는 피자였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가장 중요한 게 없다는 거다. 국민당의 당성黨性 자체가 한승문 지지자들의 모임이었기에 비롯되는 한계였다.
“참으로......”
그게 나를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김조인 대표가 카메라 앞에서 내 손을 꼬옥 붙잡고 미소 짓는 이유였다.
이곳은 부산에 마련된 국민당 최고회의장, 나란히 앉은 8명의 지도부와 수많은 기자들이 김조인의 모두발언冒頭發言에 집중했다.
“우리 원내대표께서 기성 정치권에 뼈아픈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당금의 세태를 보면 이런 말이 진즉에 나왔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김조인은 정중한 손짓으로 내가 데려온 퇴역 헌터들을 가리켰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필요한 시점에 과거사 청산에만 너무 치우친 측면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원내대표께서 이를 진즉부터 대비하시고 계셨다니. 기성세대로서 참 부끄럽습니다.”
단순한 덕담이 아니었다.
한승문이 국민당을 멀리했던 건 다 이걸 위한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다들 한승문을 욕하지 말아달라는 뜻이었음과 동시에, 나는 한승문을 좋아하고, 이 와중에 네거티브나 하는 청중엽은 쓰레기라는 뜻이었다.
이게 정치적 경륜인가.
70대 중반의 경제관료는 살풋 미소지었고, 청중엽은 그 잘생긴 얼굴로 다분히 웃는 상의 무표정을 유지하며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국민당 지도부(사실상 김조인 계파)의 대처는 아주 기민했다. 내가 30인의 퇴역헌터를 출마시키겠다고 선포하자마자, 김조인 대표는 깔끔하게 당론이 어긋났음을 시인하고 곧장 최고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즉시 공관위원장을 경질시킨 다음 비상 TF를 꾸려 대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내 요구조건을 모두 수용하겠다는 뜻이었고, 당연히 그를 위해서는 기존에 박아놓은 30명의 공천을 취소해야만 했다. 결국 자기가 일궈놓은 밭을 갈아엎는 짓이다.
그러나, 이는 나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선언임과 동시에, 청중엽에 대한 하드 카운터였다.
청중엽이 적진에 돌격한 장군이라면 김조인은 보급관이다. 그리고 지금의 사태는 보급관이 장군에 대한 보급을 끊어버린 격이었다. 그것도 나를 핑계로 기가막힌 명분까지 잡고서 말이다.
게다가 퇴역헌터 30명 박아넣기 위해 쳐낼 또 다른 30명이, 과연 김조인의 계파일까 청중엽의 계파일까?
그거야 모르는 일이겠지만 청중엽과 김조인의 견제관계를 생각해본다면 결과는 뻔했다.
이로써 국민당의 내전은 김조인의 판정승으로 종식되는 듯 싶었으나.
[3차 여론조사, 국방당 46% - 국민당 44%. 오차범위 내 골든크로스 성사!]
[양당합당 이후 최초로 국방당이 국민당을 이겼다.]
[국민당의 내분, 그리고 역풍.]
[미소짓는 원옥분, 칼을 빼든 한승문. 구경하는 김조인?]
최초로 국방당의 정당지지율이 국민당보다 높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
“길 잃은 헤이터는 이길 수가 없어요,”
Hater. 반대만 하는 사람.
“그게 공식이에요.”
어둑한 지역구 사무실, 이호정이 나와 양일호 앞에서 이번 현상에 대해 분석했다. 스크린에 커다란 PPT가 떠올랐다.
“국민당은 처음부터 공화당, 민주당의 밀실정치에 반발하면서 튀어나온 세력이잖아요. 오빠가 그때 기자회견장에서 합당이니 뭐니 엎어버렸을 때요.”
“그렇지.”
“정확히는 그때 국회의원 12명이서 고의로 선거를 늦췄다는 녹취록이 터지면서. 일종의 민주화 운동 비스무리한 탄력을 받았던 거죠. 금방 의정부에 게이트 열리면서 묻혀버리기는 했지만, 아무튼 국민당의 근본이념은 반권위적 민주주의란 말이에요?”
중단발 차림의 이호정이 뒤로 머리를 묶고서 안경을 썼다. 양일호의 얼굴이 헤벌쭉하게 변했지만, 내가 슬쩍 쳐다보니 금세 돌부처같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연애는 집에 가서 해라 이것들아.
그러든 말든 이호정이 PPT를 넘기자, 국민당이 좆된 3가지 이유라는 목차가 튀어나왔다.
“첫째. 국민들이 더 이상 자유민주 정신에 관심이 없어요. 원옥분 대행이 청중엽 지사 공격에 픽 쓰러지지 않은 이유랑 일맥상통한데, 이제 국민들은 군사정권의 하수인이든, 공화당과 민주당이 붙어먹었든, 그냥 일만 잘하면 상관없다는 거에요.”
이거 맞다. 조금만 더 국민들에게 여유가 있었더라면 원옥분의 지지율은 폭락세를 유지했을 것이다. 당장 청중엽 쪽에서 터뜨린 차재균과 원옥분의 녹취록만 3개다. 심지어 그럴듯한 물건들이었다.
다만 원옥분은 차재균의 암묵적 협박에 대처했던 것이라는 이유로 일관했고, 그 순간부터 이건 사실판단이 아니라 가치판단의 문제였다. 정치는 뭐가 사실이냐가 아니라 뭐가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느냐가 더 중요한 바닥이었으니까.
그리고 국민들은 민주적 정당성 운운하는 것보다 원옥분이 북한 핵폭탄을 뺏어왔다는 사실에 더 열광했으니,
언론통제고, 고의적 계엄령 연장이고, 차재균과의 밀실정치고, 이제는 그런 게 와닿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다는 게 자명했다.
한 마디로, 민주주의보다는 민족주의, 명분보다는 실리다.
그냥 그런 시대가 되었다.
“둘째, 원옥분 임기 실적이 의외로 괜찮아요. 의정부 사태는 충청 방어선으로 막았고, 서울은 헌터들이 잘 막았고요. 대충 수백만명 정도 죽기는 했다만 국방부 장관이랑 합참의장 조져서 진즉에 빠져나갈 구멍 만들어 놨던데요?”
이 또한 맞다. 물론 이러한 업적들이 원옥분의 유능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지만, 원래 임기 중 생긴 업적이나 실책은 했든 안했든 모두 자기가 떠안는 게 이 바닥 국룰이다.
또, 죽은 사람들에게는 투표권이 없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충청 방어선 덕분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북핵문제를 호쾌하게 처리한 게 가장 컸다. 각성자 특수부대로 북한 핵폭탄을 훔쳐오다니. 국민들의 자존심을 세워주지 않았는가. 도통 어떻게 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만 참 용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으음...”
이호정은 까칠한 눈매에 올라온 동그란 뿔테안경을 치켜올리며 내게 물었다. 녀석은 자신있게 미소지었다.
“국민당이 타켓팅한 지점이 어디죠?”
“기성 정치권.”
“그 시발점은?”
“12인 국회에서 나 빼고 전부.”
“그 중에 살아있는 사람이 몇 명이죠?”
원래는 4명이었는데, 녹취록 때문에 정치적으로 맛 간 양반은 지금 실종 상태고, 중상으로 병원에 입원해있던 양반은 침대에서 죽었다.
사실상 나랑 양판석 빼고 전부 죽었다.
“......나랑 양판석 의원님.”
“그러면 이제 국민당은 누굴 욕해야 하죠?”
“딱히...?”
“없죠?”
이호정은 어디선가 주워온 노란 손가락 모양 스펀지막대기로 스크린을 쿡쿡 찔렀다. 그곳에는 국방당 후보들의 유세장면이 있었다. 그녀는 현수막에 있는 문구를 읽었다.
“죄송합니다, 바꾸겠습니다. 국방당이 컨셉을 반성과 대안제시로 잡았는데, 국민당은 아직도 맨날 국방당 발목잡기만 하고 있으니 지지율이 유지될 리가 있나요.”
“흐음.”
“원옥분은 북한 핵폭탄 뺏어왔는데,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들만 욕하고 있으니 죽도 밥도 안 되는 거죠.”
사실 그것보다는 내가 국민당을 멀리했던 영향이 더 컸으리라. 다만 이호정은 눈치껏 그 이야기를 생략한 거겠지.
“...결론적으로 우리 당 지도부는 한승문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팔아먹어야 할 지 모르고, 지들끼리 치고받다가 망했다고 봐요.”
문득, 이 시점에서 양판석의 한 마디가 생각났다.
- 요즘같은 시대에 야당 끼 있으면 안 되는 거야. 당 굴려본 사람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노아 뤼미에르를 배웅하고 나서 들은 이야기였지만, 지금의 형세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김조인은 국회보다 내각과 청와대에 더 오래있었던 경제관료였고, 청중엽은 정치인생 내내 제주도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었으니까.
둘 다 중앙정치랑은 조금 먼 사람들이다. 정확히는 내 옆에는 그런 사람들만 모였었다. 그리고 양판석은 이를 알고 있었다.
이에 나는 질문했다.
“......지금 국민당이 미미하게 열세인 건가?”
“의원님이 헌터들 데리고 입당했으니까 미묘하게 우위일 수도 있어요. 이번 여론조사에 그건 아직 반영 안 됐으니까요.”
“......”
양판석이 항상 내게 말했다. 이번 총선은 5:5. 변수가 있으면 국민당 우세 6:4로 끝날 거라고.
“참, 내...”
그리고 이 시점에서, 나는 어떠한 흐름이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각종 변수와 권력욕이 휘몰아치는 이 난전 속에서, 누군가가 설계한 정치공학이 시계태엽처럼 달칵 달칵 맞춰지고 있었다.
그리고,
“귀신이 곡하겠네. 곡하겠어......”
어느새 나도 이미 판 위에 있었다.
판 위에 올라왔다는 걸 안 이후부터가 게임의 시작이다.
그게 NPC와 플레이어의 차이고, 기물器物과 기수騎手의 차이였다.
자꾸 피식 피식 웃으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이호정이 조심스레 먼저 의견을 내어놓았다.
“......국민당의 주요 타겟은 수도권 피난민이 아니라, 아직 민주주의 같은 소리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남쪽 사람들이에요. 살짝 강남좌파스럽긴 해도 입바른 소리 그럴듯하게 하면서 원옥분 정권 살살 맥이는 식으로 언플을 하면-”
“아니, 호정아.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될 것 같다.”
“네?”
“5대5가 되기에는 생각보다 국방당이 너무 세요. 그러니까 곧 GM이 밸런스를 맞출 거야.”
이호정과 양일호는 그게 뭔 해괴한 소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어, 으음. 나는, 그, 뭐냐, 정치에 우연이 없다고 생각하거든?”
내 성격이 원래 그렇다.
만약 예언자가 하나 튀어나오고, 예언자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나는 예언자가 미래를 예측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건의 배후에 예언자가 있다고 보는 게 아다리가 맞지 않냐 이거야.”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이해하라고 한 소리는 아니니까 괜찮아. 아무튼 섣불리 움직여서 변수 만들지 말고-”
핸드폰이 진동하며 번쩍번쩍 빛났다.
액정에 ‘유재경 장관’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씨익 미소지었다.
“......오더나 따르자고.”
*
“예비군 소집해제는 엄연히 원옥분 대행의 지시였습니다. 본인의 지지율을 올리기 위함이었지요. 헌데 책임을 덮어쓰고 감옥에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국방부 장관 아닙니까?”
“......”
“원 대행께서는 수권을 위해 내각과 군부를 이용하고 계십니다. 이런 국난에 내각과 군부가 정치권의 필요에 따라 흔들린다면 국정이 마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걱정하는 부분이 이것이고요.”
유재경 장관은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두식 사령관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녹취록 터지면 좆되기 딱 좋은 대화였으니까 말이다. 건너편에 앉은 한승문은 등산용 지팡이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승문이 무응답으로 일관하자 유재경이 겸연쩍게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겉으로는 멀쩡했으나 김두식은 유재경이 식탁 밑에서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걸 보았다.
“하하... 다소 조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저희는 군부와 내각이 독립적 권한을 행사하기를 원합니다. 그를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도 아끼지 않을 용의가 있-”
“유 장관님?”
한승문이 부드럽게 미소짓자, 유재경이 멈칫하며 얼어버렸다.
“어르신이 뭐 시키덥니까?”
“아.”
김두식은 대화의 맥락을 따라갈 수 없었으나, 유재경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고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네. 네? 아, 어, 저는 잘... 아뇨. 으음. 네. 아, 으음...”
유재경이 순간적으로 너무 많은 판단을 시도한 나머지 버퍼링에 걸렸고, 한승문은 미소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으며, 김두식은 뭔진 모르겠는데 좆됐구나 싶어서 식탁에 있는 떡갈비나 하나 집어먹었다.
그리고.
유재경이 한승문 라인을 타기로 결심함과 동시에, 그의 말문이 더듬더듬 트였다.
“엑스트라, 를 하나, 만들자고 하시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