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4 - 아사리판은 원래 또라이가 먹는다니까 (2)
- 국민당 김조인 대표는 당일 국민당 긴급 최고회의에서 원옥분 정권의 정당성에 큰 우려를 표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아울러, 5일 후 개최될 전당대회와 관련해 경선 후보자들의 진정성있는 행보를 기대한다고 발언했습니다. 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수님?
- 아, 그게 말이죠? 청중엽 지사가 사실상의 대선후보로 확정이 난 마당에 아직도 당이 후보자를 검증한다는 포지션을 강조했단 말이죠? 아마 김조인 대표와 청중엽 지사 사이에서도 상당히 곤란한 커뮤니케이션이 이어질 겁니다. 장군이 왕 허락 없이 선전포고를 한
상황 아닙니까?
- 국민당 수뇌부에서 내분이 발생했다는 건가요?
-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헌데, 한승문 원내대표는 이번 최고회의에 불참했지요?
- 예... 사실 이번 최고회의뿐만 아니라 국민당 당정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상 국민당이 지난 양당합당 사건 당시까지만 해도, 네. 사나웠죠?
- 의정부 건으로 묻히기는 했지만 사법파동도 있었지요. 내란특검까지 조성됐던 사건이었는데, 네. 여튼. 국민당이 아마 그때 한승문 의원 중심으로 뭉쳤던 인사들이었을 겁니다.
- 국민당의 시작이 한승문이고, 원동력도 한승문 의원이에요. 그런데 한승문 의원이 정작 당에서 정치를 안 하고 있단 말이죠? 여러 추측들이 있어요? 어째, 경험의 부족이라던가? 배후 조정자로 남는다던가? 그도 아니면 원옥분 대행과 커넥션이-
“형.”
운전대를 잡고 있던 양일호가 질문했다.
“형은 근데 왜 정치 안하는 거에요?”
“내가? 방금도 정치하고 왔는데?”
나는 동네 대형마트 할인코너에서 공개적으로 식사를 마친 이후였고, 카메라 앞에서 국밥을 말아먹는 건 정치의 핵심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양일호가 머쓱하게 웃었다.
“아아니, 중앙정치요...”
“......”
미소지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양일호가 조심스레 핸들을 돌리며 내게 물었다. 오죽 궁금한 모양이었다.
“제가 형이었으면 진즉에 공천권부터 잡은 다음에, 형한테 충성하는 사람들 전국에 출마시켜서, 마악 지원유세로 당선시킨 다음에 국회를 확! 먹어버리는 건데.”
“......”
양일호의 바램과는 다르게, 내가 국민당 당정에 손을 놓아버린 탓에, 당대표는 나랑 면식도 거의 없는 경제관료가 하고 있었고, 내가 국회에 꽂은 사람은 이호정, 양일호 두 사람에 불과했다.
녀석은 입맛을 다셨다.
“으음. 제가 뜬구름 잡는 소리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형 인기만 보면.”
“그러냐?”
“그냥, 좀. 한참 궁금했던 거에요. 예전부터 형이 유독 국민당에 힘 실어주기를 꺼리는 것 같아서. 정확히는 잘 안 얽히려고 한다고 해야 하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양일호가 머쓱하게 웃었다.
“말하기 어려우시면 대답 안 해주셔도 돼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는 말없이 텅 빈 군사도로 위를 질주했고, 저어 멀리 탱크 몇 대 지나가는데 라디오 소리만 울려퍼졌다.
- 사실 한승문 원내대표의 행적이, 네. 아시죠?
- 알죠.
- 솔직히 저는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 *
“한승문이라는 사람 속내를 짐작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달그락, 유재경 장관이 다소 거칠게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떡진 머리와 다크써클이 눈이 띈다. 김두식이 보기에는 금방이라도 길거리에서 철푸덕 쓰러질 것만 같은 몰골이었다.
사람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일을 시키는 회사는 그야말로 악질 중의 악질이 분명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대한민국 공무원이었다. 그것도 기획재정부 장관.
“제 몰골만 봐도 아시겠지만, 제 역량으로는 GS그룹 천금순이 미쳐 날뛰려는 거 막는 걸로도 간당간당 합니다.”
“그래 보입니다.”
“그런데 경제위기에 대처하기까지 해야 합니다.”
“노고가 많으십니다.”
“게다가 한승문이라는 기인이 호시탐탐 치고나올 기회를 노리고 있지요. 혹자는 한 대표가 경륜이 부족해서 중앙정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한 대표가 국회의원 십수명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것부터, 괴수들을 북쪽으로 몰아내서 개성을 멸망시키는 것까지 본 사람입니다. 과단성과 기민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에요.”
“저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자식이랑 동갑이라서 더 무섭습니다.”
“......”
대선 지지율 4, 5위를 달리는 그들은 어느 한식당에서 밀회를 가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유재경이 김두식을 불렀고, 김두식은 용건을 들으러 온 참이다.
물론 유재경은 말과 책임을 빙빙 돌리는 공무원식 화법을 구사했고, 김두식은 상관을 삼시세끼 밥먹듯이 들이받은 꼴통 군인이었기 때문에, 썩 즐거운 분위기의 대화는 아니었다.
“김두식 장군님께서는 GS그룹 총수, 천금순을 아십니까?”
“아, 네. 강원도 후퇴작전 당시 러시아에서 컨테이너선 끌어온...”
“악질 투기꾼입니다.”
“네?”
“자본주의가 낳은, 그, 최고의 씹... 아휴.”
기획재정부 장관과 GS그룹 총수는 치열한 쩐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덕분에 그 점잖고 차분한 유재경은 사람이 반쯤 망가져 있었다. 한승문이라는 인물에 대한 불안감을 가진 채로, 천금순이라는 폭탄을 떠안았기 때문이었다.
유재경은 대한민국 경제의 심각함을 토로했고, 그를 이용하려는 천금순의 사악함을 비토했다.
“대한민국 경제는 이미 무너지기 직전, 아니. 이미 무너졌습니다. 햇반이 인터넷 경매에 올라오는 시대인데요. 따라서, 우리는 최대한 변수와 확장을 경계하고, 국가의 통제 하에 경제를 복구시켜야 하는 상황입니다. 기회다 싶어서 돈 벌려는 미친 돈귀신들 사정을 봐줄만한 여력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군요.”
“근데 그 미친년 입에 칼을 물려준 게 누굽니까? 누가 GS 그룹한테 마석 물량 대부분이랑 각성제 생산시설 허가를 내줬습니까? 그러니 제가 한 대표 속마음을 짐작할 수가 있겠습니까?”
“없으시겠지요.”
유재경 기획재정부 장관은 마른 얼굴에 세수를 하며 이를 갈았다.
“이 와중에 청중엽이가 난리를 쳐서 전경련까지 잡아야 하고, 혹시 천금순이가 이 틈을 타서 한 대표 지령받고 뭘 꾸미지는 않을까. 어디서 뭐가 터지지는 않을까. 그렇게 신경을 쓰면서도 이 벼랑 끝에 몰린 대한민국 경제를 살려내야만 하는 입장이란 말입니다.”
“저런.”
“그러다 실수하면 저는 그대로 나가립니다. 장관은 원래 소모품이거든요. 젠장......”
김두식은 묵묵히 율무차를 홀짝이며 유재경 장관을 바라보았다. 유재경 장관은 불안에 시달리다 끝내 무너지기 직전인 것처럼 보였다.
김두식이 머리를 붙잡고 신음하던 유재경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괜찮으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을 못 자서.”
“얼마나 못 주무셨-”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유재경은 여섯 손가락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런.”
“김두식 장군님.”
“말씀하시죠.”
“손 좀 잡아주십쇼.”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김두식은 여느 때와 같이 무표정하게 질문했고, 유재경 장관의 눈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지만, 그 총기가 탁해지지는 않은 상태였다.
“장군님과 제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사람한테 자꾸 질문 유도하시는 거, 상당히 피곤한 대화법입니다.”
“우리는 정치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각자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 경제관료와 군인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지도부였다.
김두식 육군대장은 충청 방어선이라는 희대의 업적을 세운 사람이다. 의정부 사태 당시 무너져버린 서울 방어선(국군의 절반 이상)을 수습해서 피해를 최소화시키고, 그 즉시 월권으로 충청도에 방어선을 세워 괴수의 남하를 저지한 명장이었다.
그리고 유재경 장관은 게이트가 처음 열렸을 때, 일개 예산실장(일개라는 표현이 안 어울리는 직위이기는 하다)이었으나 그 능력을 인정받아 세종시 실-국장들의 합의추대로 국가행정을 총지휘한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러니 그들은 각각 군대武와 관료사회文의 대표자 격 인물이었다.
“우리는 그 덕분에 원옥분 내각에서 핵심 요인으로 분류됩니다. 겸사겸사 대통령 설문조사에서도 이름을 올리고 있지요.”
유재경은 두말할 것 없이 사실상의 국무총리 역할을 맡으며 내각행정을 총괄했고, 김두식은 충청 방어선 수습 당시 원옥분의 도움을 받아 일개 소장이 전권을 틀어쥔 케이스였다.
그러니 둘 다 범 원옥분 계열로 분류되는 인사다.
그리고 유재경은 자꾸 그 공통점들을 강조하고 있었고, 이에 김두식은 무덤덤하게 유재경의 말을 정리했다.
이렇게 말 돌리는 건 싫어했으니까.
“그렇죠.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성이 있고, 그 덕분에 현 체제에서 자리를 맡고 있군요. 듣고보면 장관님이랑 저랑 참 비슷한 포지션인 것 같습니다.”
해석 : 그래서 뭐 어쩌라고 새끼야.
유재경이 정색했다.
“그건 그냥 부차적인 겁니다. 가장 큰 공통점은 따로 있어요.”
“......뭡니까?”
“우리는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차가운 녹차를 들이마시면서도 피곤에 찌든 눈빛을 날카롭게 세워 김두식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책임지는 사람이 몇 명입니까?”
“......"
"많지요?”
"많지요."
“하지만 우리는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숙청될 수 있습니다. 헌데, 사실상의 업무는 우리가 다 하는 것 아닙니까? 왜 실무자가 이렇게 불안하게 살아야 하는 겁니까? 왜 우리가 그런 걱정에 시달리면서 업무를 등져야 하는 겁니까?”
“의회가 내각을 견제하는 게 민주주의 아닙니까.”
“이런 건 견제가 아니라 이용이라고 하는 겁니다.”
대한민국은 삼권분립이 그렇게 잘 지켜지는 나라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정치권이 필요에 따라 삼권분립을 지킬 때도 있었고, 안 지킬 때도 있었다.
“이대로는 못 해먹겠습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정치권의 파동이, 우리같은 일선에 미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
“그냥 마음놓고 대한민국 경제랑 국방 살리게 해달라 이겁니다. 왜 우리가 정치권 라인을 타고 심부름을 하느라 이 시국에 일을 못하고 있어야 합니까?”
유재경의 줄타기와 원옥분 시다바리짓은 자발적인 것이었으나, 어쨋건 그의 간곡한 호소에 김두식 또한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당장 자신 또한 한승문에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지 않았나. 정치권이 군부를 건드리지 못하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유재경에게 답했고,
“확실히, 장관님 말씀에 공감하는 바가-”
“장군님.”
유재경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두식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그것도 양 손으로.
“원옥분 밑에서 나가서 한승문한테 줄 좀 댑시다. 우리.”
방금까지 도저히 한승문 못 믿겠다고 지랄을 하던 양반이 갑자기 고무신 까뒤집고 꼬리를 치자는 소리를 하니, 김두식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유재경을 바라보았다.
“아니, 장관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짐작이 가는 부분이 어느정도 있어서 그럽니다. 이대로 가면 우리 둘 다 나가리에요.”
“예?”
“원옥분한테 달라붙어 있다가 같이 가라앉습니다.”
대화의 페이스는 어느새 완전히 유재경에게 넘어와 있었다.
“이대로 우리가 정치권에게 휘둘리면 나라가 휘청입니다. 평소였다면 괜찮았겠지요. 다만, 지금은 우리가 아니면 안 되는 시대 아닙니까. 우리가 각자의 분야에서 기둥처럼 버티고 있어야 관료사회든 군부든 기강이 잡히는데, 자꾸 교체니 뭐니 하면 결국 국가의 기둥뿌리가 흔들리는 겁니다.”
해석 : 나랑 손잡고 같이 밥그릇을 챙기자!
“......”
“장군님. 우리의 책임은 대한민국 공직사회와 국군 전체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흔들리지 말자는 건 우리 영달을 위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진 자리와, 그 자리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의무에요.”
애초에 약은 사람이 아니었으면 그 자리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유재경은 어느새 눈시울을 붉히며 김두식의 손을 양손으로 꼬옥 붙잡았다.
“장군님.”
“아, 아니, 지금...!”
“우리, 책임지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유재경은 곧장 보는 사람이 민망해질만큼 고개를 숙였다. 나이 지긋한 관료가 꿍 소리 나도록 식탁에 이마를 박았다.
“조만간 제가 행동에 나설 때, 부디 힘을 보태주십시오.”
“유, 유 장관님! 일어나십쇼!”
“도와주실 겁니까?”
“장관님...!”
유재경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어깨 위에 있는 사람들, 그 책임 그렇게 가벼운 거 아닙니다.”
그리고 유재경은 문득 생각하기를,
‘미주야. 아빠가 이러고 산다.’
그 책임이 그 책임은 아니었지만 결국 중년이 고개를 숙이는 건 다 책임 때문이라고.
*
“책임이 참 무겁더라고요.”
설진운은 내 건너편에 앉아 시무룩하게 광어회를 우물거렸다. 그것도 우리 집에서.
내가 우리집 밥상머리에서 이 20살짜리 소드마스터의 사연을 청취하게 된 계기는 이모의 지난 날 발언에서 비롯되었다.
병실에서 털어놓은 여도연의 행적에서 자주 등장한 설진운의 이름에, 이모는 언제 한 번 데려와서 밥이라도 좀 먹여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이었다.
푸짐한 시골인심이라기보다는 깐깐한 부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모의 품성에서 그 둘을 구분하지 않았다. 워낙 삐뚤어진 사람이라 표현이 조금 미숙할 수도 있는 거였으니까.
그리고 어느 쪽이든 녀석이 우리 집에서 푸짐한 생선회를 대접받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다분히 정치적인 사고다. 결국 이유가 아니라 결론이 중요하다.
그리고 내가 이런 잡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 이유는, 녀석의 말이 듣기 거북했기 때문이었다.
“......동대문 캠프부터 서울까지. 많은 사람을 살리려고 적은 사람을 죽였어요. 그런 제가 더 높이 올라간다고 한들 더 나은 일을 하게 될 것 같지는 않네요.”
“......”
“...네. 자존심 내려놓고 직설적으로 털어놓자면, 자신없고, 무섭고, 이제는 하기가 싫을 정도로 지쳤어요.”
설진운이 각성자 협회 부회장 자리를 거절한 이유는, 내가 총선에 적극 개입해서 집권하는 걸 기피한 이유와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