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3 - 국제적 헌터 시점 (7)
뤼미에르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 의원님. 저희 측 요청이 너무 갑작스러운 면이 있다는 건 압니다. 그래도 엘릭서의 제조단가가 점차 안정되고, 각성제에 대한 공동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면-”
“죄송합니다만, 각성제를 섣불리 넘겨드리기에는 다소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완강한 거절에, 그녀의 미간에 처음으로 골이 파였다. 뤼미에르가 내게 말했다.
“......저는 한국에서 약 사흘의 시간을 소요할 예정입니다. 제가 그 시간을 유럽에 남아 싸우는 데 썼다면, 적어도 수만 명의 사람을 살릴 수 있었을 겁니다.”
언뜻 오만하게 들리는 소리였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나를 직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한국에 온 건. 각성제의 보급이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
“거꾸로 말하자면, 각성제를 얻지 못한다면 저는 수만 명을 죽이는 셈이 됩니다.”
그녀는 착잡한 기색으로 웃어보였다. 희망을 놓지 못한 게 보인다.
“서로의 타협점이 분명 존재할 겁니다. 엘릭서는 아직 양산이 불가능하고, 엘릭서가 각성제의 부작용을 진정 해소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상황이지만, 엘릭서는 분명 저희 기술의 최선입니다. 그리고 저희에게는 공동의 번영을 위한 확고한 의지가 있습니다.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아뇨, 아뇨. 그런 뜻이 아닙니다. 판돈이나 더 달라는 뜻이 아니에요.”
“네...?”
“저도 마찬가지로 유럽 국민들의 생존에 큰 우려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딱딱하게 굳어버린 뤼미에르에게, 나는 애석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각성제를 가져가도 딱히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계획대로였다.
* * *
서로가 분명 마주보고 있었으나 심정은 극과 극이었다. 물론 흔들리고 있는 쪽은 뤼미에르다.
“......어째서입니까? 의원님?”
나는 그녀의 주장을 정리했다.
“PMC들 사이의 인재영입 전쟁 때문에 곧 내전이 촉발될 것이고. 그를 방지하기 위해 각성제가 필요하다. 이 말씀 아니십니까?”
뤼미에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작게 뜸을 들이고서 다시 질문했다.
“EU 공동군은 유럽 국가들의 국군연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공군은 확보되어 있습니까?”
“......예.”
“그렇다면 그 전제부터가 잘못된 겁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유럽연합 공동군은 지방 길드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안하고 있는 겁니다.”
뤼미에르가 처음으로 아연실색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그녀에게 먹이사슬에 대해 설명했다.
괴수는 수효와 확산성 측면에서 군대를 무력화시키고. 각성자는 손쉽게 마석을 흡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괴수 상대로 효율적이다.
그리고 총알이 괴수보다 사람에게 더 효과적이라는 측면에서, 군대는 각성자보다 강하다.
즉.
“군대가 각성자에 대한 물리적 통제권을 잃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공군을 끼고 있으면 더더욱 그랬다. 막말로 PMC 통제하고 싶으면 스나이퍼 몇 명으로 본보기 조금 보이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EU 중앙군이 지방 길드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건, 참으로 의구심이 드는 말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까 PMC들 중 일부는 군대를 흡수했다고도 하셨는데. 그리 큰 규모는 아닐 겁니다. 맞습니까?”
그녀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고, 나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군대는 보급 없이 유지될 수 없는 조직입니다. 빨치산 이상의 정규군이 될 수가 없어요. 군권은 언제까지나 EU 공동군의 것입니다. 다만, 초기 대응에 실패한 나머지 국민들의 신뢰를 잃은 상황 같습니다. 그리고 그걸 중앙통제력의 상실이라고 부르는 상황 같고요. 여기까지 제 말이 맞습니까?”
“......다소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이건 정치적 사안입니다.”
나는 단정지었다.
“그렇기에 각성제 따위로 이 상황을 해결할 수는 없는 겁니다.”
“......어째서입니까?”
나는 EU의 입장을 대변했다.
“각 PMC가 주도하는 쉘터들의 도시국가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EU 공동군에 뭉친 중앙정부들은 다시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쥐고 싶어할 겁니다.”
간단한 논리다.
외적이 처들어왔는데 군대가 박살나서,
대신 의병이 적을 막았다.
그래서 의병들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
심지어 민주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가 의병을 견제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의병끼리 싸움을 붙이는 것이다.
즉, EU가 PMC들을 싸움붙이고 있다.
나는 그런 음모론을 꺼내든 것이었다.
“한승문 의원님.”
이에 뤼미에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직시했다. 대화의 맥을 짚지 못할만큼 우둔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모욕을 듣고도 웃어넘길 정도로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음과 동시에,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을 정도로 현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내게 아주 차분하게 경고했다.
“섣부른 추측을 지양하십시오.”
그녀를 감싼 빛이 한 차례 위협적으로 일렁였다. 나는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음모론을 빼들었다.
“EU 사령부는 지방 PMC들끼리 싸움을 붙이고 있습니다.”
“의원님!”
“저는 PMC들이 흡수했다는 그 소규모의 군 조직마저도. 중앙정부의 스파이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고상하게 말하면 차도살인, 이이제이고,
정치용어로 말하면 갈라치기와 내부총질이다.
뤼미에르는 내 과격한 언사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너무 비약적인 추측이십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걸 합리적 의심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EU에 각성제를 양도하는 게 꺼려집니다.”
조금 불쾌한 느낌을 드러내던 뤼미에르가, 각성제가 언급되자마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갑과 을 사이의 협상이란 이런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몰아붙였다.
“터놓고 말해봅시다. 왜 원옥분 대행이 아니라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그건-”
“제 인기가 좋기 때문이었지요?”
그녀는 답하지 못했다.
“제 동의를 얻으면 마침 선거철인 한국의 여론을 움직이기도 쉬울 것이고. 별다른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국제협력을 유도하기 쉽겠지요.”
민주국가가 가장 취약한 건 선거철이었다. 정책은 여론의 영향을 받고, 여론은 선동의 영향을 받는다.
“입국하자마자 시작된 여론몰이. 국민들이 제게 가진 묘한 부채감을 이용한 고도의 전략입니다. 물론 뤼미에르 집행관님이 이런 술수를 생각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이건 정치인의 마인드니까요.”
해석 : 니들 개수작은 진즉에 파악했다
즉.
“각성제에 관한 요청에 정치공학이 개입되어 있기에, 저로서는 집행관님의 인도주의적 목적에 다소 공감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유감입니다.”
해석 : 못 준다 이놈아
“......”
한참동안 침묵이 있었다. 졸지에 협상은 파투가 났고, 그녀는 실연이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노아 뤼미에르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백금발 사이로 얇은 눈썹이 추욱 늘어졌다.
“......EU의 지령대로 여론몰이를 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사죄합니다. 그리고, 일부 정치적 목적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겠습니다. 이 점은 차후에 배제하겠습니다.”
그녀는 보는 내가 다 민망해질 정도로 저자세를 유지했다. 자존감이 아니라 의무감에 묶여 사는 부류라는 게 문득 실감났다.
“또한, EU 공동군과 각지 PMC 사이에 다소 배타적인 알력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다만, 의원님의 말씀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습니다.”
“극단의 문제가 아니라 인과의 문제입니다. EU는 각성제를 화평의 수단이 아니라, PMC들에 대한 목줄로 사용할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막겠습니다!”
뤼미에르가 소리쳤다.
“일단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원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하겠-”
“미안합니다만.”
나는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집행관님이 여기에 오신 것부터가 다분히 정치적입니다.”
*
싸늘한 음성이 이어졌다.
“한국을 유럽연합에 가입시키고, 유력 정치인의 건강을 회복시키고, 대신 각성 촉진제를 받아가겠다라...”
뤼미에르는 차마 한승문에게 무엇이라 첨언할 수 없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불평등조약이었기 때문이다.
“육로도, 해로도 막혔는데, 저어 멀리 계시는 분들이 우리에게 어떤 경제지원을 해줄 것이고, 우리가 왜 유로화를 써야 하고, 왜 중국과 미국을 등져야 하고, 선거철 민심 선동을 위한 친절에는 어떤 호의가 있습니까?”
“......”
“생각하셔도 말이 안 되지요?”
한승문은 새삼 느물거리며 다리를 꼬고,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이거는, 이 한승문이가 어떻게든 더 살고 싶어서 발악하면서, 엘릭서 좀 주세요-하고 양국의 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을 때, 그런 상황에서야 간신히 성립될 수 있는 외교입니다.”
그는 가볍게 혀를 차며 한탄했다.
“제가 보기에는 안 될 거 알면서 보낸 겁니다.”
“......저 또한 어려울 것을 알고 왔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런 정치적 암수를 노린 건-”
“정치라는 건 알든 모르든 우리 사는 세상에서 시시각각 돌아가고 있어요. 모르면 모른 쪽이 바보가 되는 거지 몰랐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뤼미에르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대방에게 휘둘리다 보니 어느새 궁지에 몰렸다. 그녀의 불빛은 감정을 반영하듯 위태롭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때. 한승문이 말했다.
“이 협상 자체가 함정입니다.”
"결코 의원님을 곤경에 빠뜨릴-"
"아뇨. 제가 아니라."
그는 검지 손가락을 뤼미에르의 면전에 들이밀었다.
“당신을 잡기 위해 판 함정이란 말입니다.”
한승문의 말이 이어질수록, 뤼미에르의 굳은 표정은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언뜻 보면 유럽연합은 굉장히 큰 대가를 치뤘습니다. 유럽연합에 아시아 국가를 가입시킴으로써 미국을 등지고, 아주 커다란, 그, 조직적이고, 다분히 민족적인, 자존심을 대가로 주었지요. 최고의 영웅이 한국에 가서 존경이라는 단어나 운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일단 여기서 당신은 유럽시민들을 잠재적으로 실망시킨 겁니다. 대의를 위해서요.”
“......”
“그러나 실상 유럽연합은 이미 미국을 등진 상태고, 말에는 가격표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에서 말이 가지는 힘은 실로 강력합니다. 이번 협상이 파투난다면 유럽연합 내부에서는 커다란 파문이 생길 겁니다.”
“......”
“적어도 겉보기에는 커다란 판돈을 들고 가서 고꾸라졌는데. 허면 누가 책임을 덮어쓰겠습니까? 아니. 누구 책임으로 언론이 보도하겠습니까?”
뤼미에르는 떨리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마음 속 퍼즐들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정치인들의 미묘한 제스처 사이에서 오던 불안감. 불가능한 임무에 대한 회의감. 그리고 자꾸 흔들리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까지.
그녀는 착잡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무슨...”
감기자가 그 작은 읊조림마저도 통역했기 때문에, 한승문은 가차없이 내뱉었다.
“정치인의 생리입니다. 자기들은 죽만 쑤고 있는데, 어지간한 대통령 이상의 위상을 지닌 사람이 사방팔방 활보하고 다녀요.”
“......”
“정치인은 절대로 이런 사람 가만히 안 둡니다.”
뤼미에르는 그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차마 거기서 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얼음처럼 굳어 눈만 껌뻑이며 입을 뻐끔거렸다.
한승문은 애석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뤼미에르 집행관님의 방문 자체가 정치적이라고요. 그래서 제가 집행관님께 각성제를 드릴 수 없는 겁니다. 드리든 안 드리든 외통수입니다. 이 판 자체가 EU에서 짜낸 함정-”
“그러면.”
그러나.
뤼미에르는 충격받은 나머지 얼어버린 게 아니었다.
언제 굳어 있었느냐는 듯. 뤼미에르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헌터의 판단이 끝났다.
“의원님은 제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고작 하루의 만남으로 뒤바뀌기에는 유럽의 정치인들과 함께한 시간이 너무도 길었다. 당연히 그녀는 한승문의 말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즉, 일부 신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속히 정보를 수집하고 다음 행동을 준비해야 마땅했다. 충격받아 굳어있을 시간이 어디 있는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1초가 아깝다.
그게 헌터의 사고방식이었다.
정치인이 판을 깔고 기다린다면, 헌터는 판을 신속하게 돌파한다.
그 점에서 둘은 통하는 바가 있었다. 한승문의 대답 또한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EU 공동군 집행관께는 각성제를 드릴 수 없지만, 유럽의 영웅 노아 뤼미에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혹시 각성자 협회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네.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한국의...”
단지, 그와 그녀는 둘 다 헌터였지만, 둘 중 오직 한승문만이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혹시 협회의 상임고문을 맡아주실 생각 없으십니까?”
뤼미에르는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한승문의 판 위에 올라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예?”
“외국인이 고문 맡으면 그게 국제기구죠 뭐.”
한승문은 태연하게 미소지으며 판을 엎었다.
“각성제 분배의 주도권은, 대한민국도 EU도 아닌, 우리가 잡게 될 겁니다.”
뤼미에르는 코가 꿰인 것도 모른 채 한승문의 치밀한 정보력과 추진력에 기가 질려 내심 감탄했고.
감기자는 십수년 기자질 경력으로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서는, 한승문의 주장 중 절반 이상이 개소리라는 것에 진정 경악했고, 대체 언제부터 이런 큰 그림을 세웠는지 추론하기 시작했다.
그저 피채원만이 이게 다 즉흥적인 애드리브라는 걸 알고서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