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78화 (78/296)

EP 13 - 국제적 헌터 시점 (5)

손을 내밀어 준 것은 고마우나 현재 실질적인 정책 추진이 불가능하다. 선거 끝나고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자.

나는 그렇게 리충빈 상장을 돌려보냈다. 좋아. 일단 시간은 벌었다.

감지윤을 우리가 만든 생물병기로 생각했다라. 퍽 합리적인 추측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위적인 각성을 성공시킨 나라가 우리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각성 촉진제.

사람의 몸에 마력을 퍼뜨려 돌연변이를 촉진시키는 약물. 각성하는 능력의 종류에 따라 텔로미어의 소모량이 변한다.

즉, 랜덤으로 수명이 줄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각성제를 주사했다.

괴수를 잡고 싶어서, 이제는 몸밖에 안 남아서,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살리고 싶어서, 돈 벌고 싶어서.

이유는 다양했지만, 결과는 명료했다.

헌터들의 사회가 시작되었다.

국가에 등록된 PMC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중이고, 인천의 한 생존자 집단이 공중보급된 각성제를 맞고 충청도까지 탈출한 케이스도 있었다.

게이트가 열리지 않은 후방지역의 각성확률이 0.01% 미만,

게이트 바로 아래였던 압구정 캠프의 각성확률이 3% 가량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국의 초인사회는 각성 촉진제의 힘으로 규모를 키웠다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각성제 때문에 국제사회가 우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단 근본부터 짚어나가자. 각성제는 왜 개발되었는가.

무한한 소모전 속에 다가오는 예정된 멸망.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지속 가능한 전쟁이론.

탄약과 기름을 소모하지 않는 국방수단.

헌터.

......계획의 입안자, 차재균.

그리고 생체실험.

그 어두운 역사를 만나러 발걸음을 옮긴다.

* *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광덕산 절벽과 낙동강 반변천半邊川으로 둘러싸인 육지의 섬.

청송교도소.

생체실험에 쓰인 흉악범들이 원래 수용되어 있던 곳. 그래서 지금은 텅 비어버린 산골짜기의 으슥한 교도소.

그곳에 도박사가 있었다.

“이게 좀 아이러니죠. 내가 잡아다가 주삿바늘 꽂은 양반들이 있던 감방에 내가 들어가다니. 물론 제가 정말 물리적으로 잡은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는 이제 인간이라기에는 다소 기이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웃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 도화지처럼 하얀 피부와, 퍼렇게 비쳐보이는 혈관. 볼에서 시작되어 목에서 끝나는 커다란 입.

그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자기 말에 따르면 안면근육이 신경을 눌러서 하루라도 입을 놀리지 않으면 중추신경에 가시가 돋힌댄다.

“으음... 각성제의 개발과정에 대해 물으신다면, 개뽀록이 연달아 터졌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얀 가운을 걸친 도박사는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희 연구방침이 일단 쑤셔넣은 다음에 결과부터 확인하자였거든요. 조금 무식해보여도 사실 실험이라는 행위의 정석이 이겁니다. 흰 쥐새끼가 아니라 사람으로 하는 게 문제지.”

“......”

“사실 그때 모였던 사람들 모두 이쪽에 한 발 담그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저같은 경우만 해도 국정원이 쓰는 신경독이랑 자백제 만들던 사람이라......”

“......”

“......으음. 사실 더 무시무시한 것도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이 그, 살짝, 화학병기의 국제적인 권위자에요. 우라늄 수입하면 금방 들켜서 핵폭탄 못 만드니까 그런거라도 몰래, 아, 씨. 1급기밀인데...”

끼익. 뒤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원장이 비닐봉지들을 주섬주섬 챙겨 들어오자, 도박사가 피식 웃었다.

“과장님 오셨수?”

“어째 피부가 조금 더 하얘진 것 같습니다.”

“72. 81% 정도 괴수가 되니까 호르몬 기관이 작살나서 멜라닌이 없어지더라고. 멜라노시트스티뮬레이팅홀몬이라고 들어보셨나? 그래요. 그것보다는 댁이 들고 있는 봉다리가 더 중요하지. 오우, 어째 향기가 예사롭지가 않아?”

국정원 요원과 방위산업체 비밀연구원이었던 그들은 나를 통해 재회했다. 둘이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게이트 사태 이전부터 관리인과 관리대상의 관계였다고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장원장은 생체실험을 진두지휘한 연인산 지하벙커의 총책임자였고, 도박사는 생체실험의 핵심 연구원 중 한 사람이었다.

“아 맞다. 나 어제 혀 씹어서 싹뚝 잘렸는데 도로 자라나더라?”

“안 물어봤습니다.”

“아이. 과장님 왜 그래요.”

“그리고 저 이제 과장도 아닙니다.”

사람좋게 웃고 있는 장원장, 아니. 장소장은 들고있던 하얀 비닐봉지들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만두 냄새가 났다.

“콩밥 나왔습니다.”

그는 이제 청송교도소 소장이다. 죄수는 도박사 하나다. 그리고 감방에는 최신 연구시설이 있다.

으슥한 산골짜기의 교도소는 이미 연구소로 탈바꿈한 뒤였다. 그러니 사실상 둘다 반쯤 국정원에 복귀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정체가 들킨다면 즉시 남이 되어버리는 블랙 요원이었지만-

“원래 블랙이었는걸요. 뭘.”

그에게는 일상인 모양이다. 장소장은 나와 도박사가 앉아있던 테이블에 합석했다. 그리고 나무젓가락을 깔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생체실험이라... 사실 제가 총괄이었기는 했었습니다만 연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도박사가 해맑게 끼어들었다.

“술 먹고 운전은 했는데, 음주운전은 아니다?”

“닥치세요.”

“그렇다면 그런 거고, 아니라면 아닌 거지, 왜 사람한테 험한 말을......”

도박사는 입술만 움직이며 작게 계속 뭐라뭐라 중얼거렸고, 우리는 그 조잘거림을 배경삼아 담소를 나누었다.

내가 작게 한숨쉬며 말문을 텄다.

“사실 생체실험으로 각성제가 뚝딱 개발되었으면 중국은 진즉에 개발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미국이나 러시아도 마찬가지고요. 대체 우리는 어떻게 각성제를 개발한 겁니까? 저는 아예 무지해서 원......”

“의원님께서도 천화란 박사님과 각성제 개량 연구에 참가하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생쥐가 연구를 어떻게 압니까?”

“그도 그렇군요. 허면 천화란 박사님께선...?”

“마력배열 바꾸면서 부작용 줄인 게 전부입니다. 원리를 모르니 대충 감으로 때려맞춰야 했다고 하시더군요. 아시는 게 아예 없지는 않으시지만, 눈감고 코끼리 더듬는 꼴입니다.”

장원장이 실눈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그랬습니다.”

“예?”

도박사가 대신 대답했다.

“일단 주삿바늘부터 꽂고 나서 생각했지요! 다들 난 죄가 없다고 비명지르던데, 알고보니까 50명 중 한 명 꼴로 진짜 무죄일 줄은 몰랐지......”

“알았잖습니까?”

“사실 그렇긴 해. 우리도 감이라는 게 있으니까.”

도박사는 자기 꼴이 우습다는 듯 비웃었다. 그는 검지손가락을 입에 넣어 목까지 주욱 그어 올렸다. 조금 그로테스크한 모습이다.

“조국과 민족 뭐시기 하면서 버티긴 했는데 살다보니 어째 이렇게 됐습니다. 실험체들 폭주에서 겨우 살아남고. 총 맞는 거 무서워서 괴수밭이던 서울로 튀었는데. 꿈에 죽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자꾸 사람 살리는 연구를 하게 되더군요!”

장소장이 핀잔을 줬다.

“너무 갑작스런 고해 아닙니까?”

“가만히 있어 보세요. 아무튼 주삿바늘 꽂으니까 조금씩 재생능력이 생기더라고. 그래서 여러 가지 연구들을 했어요? 요래요래... 재생능력, 신체변이, 초인이 마석 흡수하는 메커니즘이나, 마석이 괴수에게 미치는 영향, 게이트 이면세계, 그리고 각성제에 대해 연구를 해봤는데......”

도박사가 혀를 내둘렀다. 혀가 쇄골까지 내려와서 조금 징그러웠다.

“각성제. 진짜 그거 하나만큼은 도저히 뭘 건드릴 수가 없더라고요.”

“어떻게 만드셨길래...?”

“수교수님이라고. 지금은 뒈진 양반 하나가 랩에서 노가다 뛰다가 막 우리를 부르는 거에요. 새벽 4시 쯤이었나? 암튼 그 양반이,

아아, 씨벌놈들아, 자네들 손가락 빨지 말고 이리 좀 와보게. 내가 어쩌다보니 이걸 이케이케 했는데 됐어!”

도박사는 성대를 변형해서 중년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흉내냈다. 조금 징그러웠다.

내 감상이야 어찌됐든 도박사는 한쪽 턱을 괴고서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가서 보니까 교수님이 이케저케 막 하더니 뚝딱 하셨더라고. 우리 중에서 죄수 가장 많이 죽인 양반이 그 사람일 거야. 살짝 변태끼가 있어가지구...”

“아니 그래서 만든 원리가 정확히 뭡니까?”

“원래 유전이나 세포변이는 운칠기삼이에요. 이름부터가 돌연변이잖아. 그런데 인류 역사상 듣도보도 못한 변이를 촉진하는 건 얼마나 거지같은 일이겠습니까?”

“결론만.”

“기적같은 운빨. 그 조잡했던 프로토타입이 세포의 온갖 가능성을 뚫고 이상적인 형태를 보여줬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그거 중심으로 개량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이후부터는 대충 아는 내용이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어지는 도박사의 말은 간단했다.

둘 중 하나의 성공을 셋 중 둘의 성공으로 바꾸고. 아주 심각한 부작용을 덜 심각한 부작용으로 바꾸었다.

“자세히 들어가면 복잡하지만 결국 그겁니다. 주삿바늘 아무렇게나 막 쑤셔넣다가 누가 한 번 성공해서, 그거 좀 더 괜찮게 다듬은 거죠.”

“......특별한 연구법은 없었던 거네요?”

“정답. 이런 말씀 드리기 부끄럽지만, 모인 양반들도 거진 또라이들 뿐이라. 실상-”

“다른 나라에서 각성제를 개발할 확률은 얼마나 됩니까?”

“우리가, 아니. 수교수가 맨 처음에 성공했던 거, 확률이 수백만분의 1이었어요. 나중에 계산해보니까.”

“......”

“조합식 없이 대충 때려맞추기로 만들려면 백년천년 걸려도 모자랍니다. 그거 만든 건 진짜 일종의 기적-”

“다른 나라에서 그걸 개발할 확률은?”

“거의 없죠. 아, 잠깐만요. 그러니까. 으음. 그. 2백만? 아니. 150만... 네. 연간 150만씩 갈아넣는다는 가정 하에 3%정도 됩니다.”

금방은 못 만든다는 소리다.

“......”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렸다.

도박사가 방금 머릿속에서 확률을 구하려 계산기를 두드린 것처럼, 나도 지금 정치공학 계산기를 두드려 본다.

세상이 이런 아사리판이 났으면 어지간한 나라는 생체실험을 이미 했을 것이다. 아마 사람 몸에 마력 쑤셔넣고 흐물거리는 괴물 비슷한 거나 만들었겠지.

근데 유일하게 성공한 나라가 대한민국뿐이다. 심지어 1차 개발, 2차 개량을 거쳐서 아주 안정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그 와중에 대한민국은 사회 인프라와 정치체제를 유지한 채로 공세방어에 성공했다.

그러면,

그게 뭐 때문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마 각성제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우리도 각성제만 있으면 괴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각성제의 제조법을 얻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면.

결국은,

한국과 친해져서 받아내거나, 한국을 공격해서 받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하아.”

줄타기 외교가 필요하다.

각성제를 줄 듯 말 듯. 각성을 시켜줄 듯 말 듯. 조합식을 알려줄 듯 말 듯.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그런 얍삽이가 필요하다.

덕분에 확신이 섰다.

나는 전문가를 찾아가려 전화기를 들었다.

- ......무슨 일입니까 한 의원?

“아, 원옥분 대행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그래서 어찌 한 겐가?”

“어쩌긴 뭘 어쩝니까. 대충 외국에서 각성제에 눈이 뒤집힌 상황이고, 그거 못 따라하는 상황이니까 보안 좀 더 철저히 하고, 외국에다 갑질할 방법 좀 찾아보라고 말씀드렸죠.”

"그래서 뭐라 그러던가?"

"균형외교. 그거 그림 좀 예쁘게 나올 것 같다고 하시던데요."

양판석은 아깝다는 듯 혀를 찼다.

“쯧. 자네가 하지 그랬어?”

“입법부가 왜 정부가서 얼쩡거립니까. 장관도 아닌데.”

“그래도 좀.., 자네가 원래 억지로 우겨넣는 거 잘하지 않나.”

"뭐, 그렇습니까!"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얼마 살지도 못할 거, 굳이 노욕을 부릴 필요가 있나.

국회의원 다시 300명으로 늘어나면, 가족들과 함께 여유롭게 여생을 즐길 심산이다. 양판석 대통령되는 거나 도와주면서 말이다.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양판석은 한숨까지 내쉬며 아쉬운 심정을 토로했다.

“상황 급박하게 돌아갈 때는 빠릿빠릿하더니, 좀 평화로워지면 은근히 맹탕이야 자네도.”

“사람이 제 이득만 챙기고 살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요.”

“......흐음. 어쩌면 내 성격이 조금 급해진 것일 지도 모르겠어.”

“각자 걸음에 맞춰 살면 되는거죠 뭐.”

“다 늙은 척 하기는......”

창문 밖으로는 활짝 핀 봄꽃이 거센 바람에 휘날렸다. 카페 안은 따뜻했고, 고즈넉한 커피 향기가 물씬 풍겼다.

양판석은 커피를 홀짝일 때마다 인생 이야기를 중얼거렸고, 나는 한층 여유로운 태도로 미소지으며 그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러니까 결혼이 미친짓인 이유가, 둘 중 하나만 남으면 인생이 참 허무해진단-”

양판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 전화 좀 받겠네. ......크흠!“

양판석은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근엄하게 바꾸었다.

“그래. 무슨 일인, 어어. TV를 틀라고...?”

나는 눈치좋게 리모콘을 들어 뉴스를 틀었다.

- 속보입니다! 노아 뤼미에르 EU 공동군 집행위원장이 방한 의사를, 아니. 방, 방한했습니다?

아나운서가 말도 제대로 못해서 채널을 돌렸다.

- EU 연합군 노아 뤼미에르 최고집행관이 제주 국제공항을 통해 비밀리에 방한했습니다. 현장 연결하겠습니다.

마력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금발의 여성이, 완고한 태도로 프랑스어를 읊조렸다.

실시간으로 번역된 자막을 읽었다.

나는 리모콘을 떨어뜨렸다.

‘한국의 성공적인 방위는 인류적 모범입니다. 유럽연합은 대륙과 민족을 초월하여 한국을 연합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으며, 저는 헌터들 간의 공조를 증명하기 위해 한승문 의원의 치료에 도움을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세계 최고의 치유사는, 손에 작은 약병을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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