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3 - 국제적 헌터 시점 (3)
휴게소의 낡은 벤치에 앉아 문득 생각하기를,
보좌관은 참 열악한 직업이었다.
20년 근속하면 공무원 연금을 받는다지만 의원한테 밉보이면 모가지가 날아가고, 그렇다고 의원이랑 너무 친해지면 대신 감방도 간다. 물론 구해줄 지 안 구해줄 지는 의원 마음에 달렸다.
나는 허심탄회하게 회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버텼는지 몰라. 양 의원님 막내아들 꽐라된 거 클럽에서 업어오고 그랬었는데.”
“아, 그... 물뽕?”
“쉿!”
쉽게 말해, 생사生死가 의원에게 달린 사람들이다. 비슷한 직업으로는 기사의 종자, 조선시대 노비, 재벌일가 비서실이 있다.
문득 양일호와 이호정이 옛날 일을 추억했다. 추억이라기에는 다소 민망한 것들이었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면 저는 공짜로 과외까지 해줬어요. 3명이나.”
“우리 영감은 대놓고 흩어보는 거 눈 찌르고 싶었다니까요.”
엿같아도 꾸욱 참고, 까라면 까야하는 신세니, 결국 비슷한 신세끼리 친해지곤 한다. 그게 바로 나, 양일호, 이호정, 강석호였다.
보좌관 패거리는 심심찮게 의사당 주차장 벤치에 모여앉아 컵라면을 끓여먹었다. 먹는 중에 걸려온 의원 전화에 일어나다 국물 엎은 건 추억이다.
그때의 감성을 느끼며 탄성을 내쉬었다. 라면 냄새가 유독 향기롭다.
“이야아, 씨. 그래, 이...... 냄새가 있어. 주차장 흡연구역 옆에서 끓여먹는 추억의 라면맛이-”
“그게 뭐가 추억이에요.”
양일호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이호정이 피식 웃으며 옆구리를 찔렀다.
“그때는 하늘에 구멍은 안 났었잖아?”
“그때가 좋았네!”
양복쟁이 세 명은 체신머리없이 낄낄거렸지만, 퍽 즐거운 봄날의 오후였음은 분명했다.
날이 풀렸는지 햇살은 따스했고, 눈 녹은 아스팔트는 반짝반짝 빛났으며, 낡은 벤치 위에서는 컵라면 세 개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는 네 개여야 하는데.
“......형, 아직 석호 소식 들어온 거 없어요?”
녀석들도 문득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없어.”
"......후우."
"시호 찾으려고 그랬는지 의정부로 향하는 CCTV는 찾았다는데, 실종자 하나 때문에 그 의정부 괴수 한복판에 수색대를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컵라면 끓여먹는 자리에 함께 있었어야 할 강석호는 지금 실종 상태였다. 정확히는 의정부 사태 당시 즈음해서 연락이 끊겼다.
"의정부에 게이트 열려서 도망칠 때 엇갈린 것 같은데..."
"......어째, 우리는 매번 석호만 버려두고 도망치는 것 같네요."
녀석의 하나 남은 동생, 강시호는 일호와 호정이가 거둔 상태다. 이호정이 가볍게 머리카락을 꼬며 한숨 쉬었다.
“요즘 시호도 너무 우울해 보여서 걱정이에요.”
“어쩐대냐...”
“신경 별로 못 써준 저희 잘못도 있긴 한데...”
“내 잘못도 반쯤 있지 뭐...”
물론 녀석들도 보좌관은 보좌관이라서 제대로 된 육아인력은 아니었다. 내가 녀석들 부려먹는 거 보면 야근에 주말근무는 기본이었으니까.
“보통 감기자님이 저희 일 나가는 동안 돌봐주시는데, 예전에는 그나마 또래가 있어서 곧잘 놀더니......”
“지윤이랑 친했나?”
“네. 그나마요. 그런데 지윤이도 이제 잘 안들어오니까. 현관문만 쳐다보고 있다네요.”
“현관문...?”
“형 언제 오냐고 보챈다고......”
입맛 씁쓸해지는 이야기다. 전쟁고아의 기다림이라. 죽음만은 정치가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니, 나는 그저 측은한 마음으로 한숨만 푸욱 내쉴 따름이었다.
이호정이 갑자기 앙칼지게 버럭했다. 분위기 풀려고 그러는 것 같다. 사실 원래 성격이 좀 많이 까칠한 편이기도 하다.
"아 진짜! 왜 갑자기 또 분위기가 죽상이야!"
"세상이 곤죽이 됐으니까 분위기가 죽상이지."
"......오빠는 그걸 농담이라고-"
"라면 익었으니까 히스테리 그만 부리고 맛있게 먹으세요. 방금까지 질질 짜던 녀석이-"
컵라면 뚜껑에 끼워놨던 나무젓가락을 똑 부러뜨리던 그때.
- !
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나무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습관 때문이다. 중요한 사람들마다 전화벨 소리를 바꿔놓는 습관.
양판석에게 전화가 오면 씻다가도 기어나가서 받으려고 만든 습관이었지만, 덕분에 나는 전화가 온 순간 누구의 전화인지 즉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원옥분의 전화다.
“......여보세요?”
- 한 의원.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리충빈 부주석이 독대를 원합니다.
* * *
중국의 상황은 열악했다. 정확히는, 대부분의 나라가 열악한 상황이었다.
전선前線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괴수와 뒤섞여서 싸운다.
우리는 반도半島국가였기 때문에 충청 방어선이라는 전선이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나라는 국경 내부와 외부에서 미쳐 날뛰는 괴수들을 상대해야 했다.
자연스레 군대의 힘이 약해진다.
사태 초기, 국군이 괴수 상대로 쪽을 못 쓴 이유는 그놈들이 민간인 사이에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괴수와의 전쟁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이것이었다.
민간인과 괴수가 섞이면 군대가 혼란에 빠진다.
차재균이 월권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독단적 판단 하에 괴수들을 서울에 가두지 않았다면, 우리도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처지였으리라.
아무튼, 모든 국가들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다.
민간인 사이에 섞인 괴수들을 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민주국가는 쏘지 않아서 물적 피해가 커졌고, 독재국가는 쏴서 정치적 피해가 커졌다.
중국은 후자다.
그래서 우리를 상대로 프로파간다를 걸었던 것이다. 원전 보호를 빌미로 감지윤을 보내라고 말하고서 거절당하기를 기다렸다. 정국政局 안정을 위해서 말이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추정했다.
“지난 요청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하는 바요. 본디 폐를 씌울 생각은 아니었지만, 다소 상황이 급했던지라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소.”
아니랜다.
중국을 지배하는 공산당, 그리고 그 공산당을 지배하는 중앙군사위원회의 부주석, 러쑹비옌 상장上將은 가볍게 웃으며 일전의 일을 언급했다.
“타국의 사변을 빌미로 그를 겁박하는 건 중국의 정치가 아니오.”
그는 군인이라기에는 너무 정치인스럽게 웃었고, 정치인이라기에는 그가 입은 군복에 달린 훈장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속단할 수 없는 게,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양복냄새가 참 심했다. 특히 거짓말을 웃으면서 늘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결국 안심할 수 없는 게, 이 나보다도 한참 작고 깡마른 노인이, 자국민 머리통을 최소 백만 개 이상 날렸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온 입장에서는, 차마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정치인과 군인 사이의 애매모호한 어딘가,
리충빈 상장은 그곳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정치장교임을 증명하듯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부디 괴뢰국이 선동한 바가 양국의 화합에 패악을 끼치지 않았으면 하오.”
예전 일은 전부 북한 탓으로 떠넘기고서 뭉개고 넘어가자는 뜻이었다. 그쪽이 저지른 프로파간다든, 우리가 북한을 꼭두각시삼아 중국을 후려쳤던 일이든.
물론 여기서 아니라고 말할 리가 없다.
힘의 논리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국제사회에서, 괜히 명분으로 뻗대다가 얻어맞으면 골로가는 거였으니까. 우리가 북한을 반병신으로 만든 수단 또한 외교가 아니라 주먹질이었다.
옆에 통역을 데려왔지만, 나는 썩 괜찮은 발음으로 대답했다.
“큰 일을 앞두고 소인배 말에 귀 기울여 무엇하겠습니까?”
“전해 들었던 바와 같이 화통하시오, 한 대표.”
제 2 외국어는 한국대학교 학생의 소양이었다.
리충빈은 내 입에서 유창한 중국어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는지 금세 화색을 띄었다.
“한어를 아실 줄은 몰랐소.”
“이웃이니까요.”
“진정 그리 되었으면 좋겠소만.”
아직 이웃이라 부르기에는 이르다는 뜻인가. 초장부터 세게 나오는 걸 보니 쉬운 대화가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리충빈은 허허실실 웃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눈빛과 말투에서 드러나는 모양새가 퍽 사람 대하는 게 익숙해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베이징에서 살다간 폐병걸려 하직하겠다 싶었는데. 요새는 확실히 세상이 맑아졌구려.”
“확실히 미세먼지가 없어져서 좋긴 합니다.”
“바람은 맑은데 피비린내가 나서 문제요. 안 그렇소?”
“......하하.”
솔직히, 중국이 추가적인 접촉을 해올 것이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만한 일이었다. 오히려 살짝 늦은 감이 있다.
다만, 대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퍽 자연스러웠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 모르는데 권한대행이랑 외교관계를 터봐야 뭐하겠는가.
최근 원옥분이 차기 대권을 쥐는 게 기정사실이 되었고, 이에 중국이 원옥분 체제 하의 대한민국에게 외교관계를 제안하는 셈이라고 본다면, 그리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원래 선거철에는 외교 안하는 법이었으니까.
문제는,
“그나저나 한 대표는 부쩍 수척해 보이시오.”
“요즘같은 시대에 정치가가 건강한 것도 조금 이상하지요.”
“내 전후사정은 익히 들어보았지. 인민을 위한 헌신에 존경을 표하는 바요.”
“부끄럽습니다.”
왜 하필 나를 콕 찝어서 만나자고 그랬냐는 거다.
리충빈은 사람 좋게 미소지으며 주름진 눈매를 유연하게 기울였다.
“......개인적으로. 한 대표께서 한어를 그리 유창하게 구사하시니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오.”
“하하...”
“아니, 진정 고맙소.”
그는 자기 뒤에 서 있는 양복쟁이 하나를 가볍게 손짓했다. 양복쟁이가 문득 움찔거렸다.
“한 대표를 위한 통역사요.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친구를 죽여 입을 막으려 했소.”
순간, 내가 중국어를 아직 잘 몰라서 말을 잘못 알아들은 줄 알았다.
“한 대표의 사려 덕에 중국인 하나가 목숨을 건졌으니, 내 어찌 감사를 말하지 아니하겠소?”
우리는 양국 정보부가 철저하게 엄선한 밀실에 있었다. 어떤 도청기도 존재하지 않고, 어떤 잡음도 들리지 않는 차분한 응접실.
그렇기에 침묵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렸다.
나는 얼굴근육에는 미동도 없이, 눈만 굴려 통역사의 표정을 살폈다. 하얗게 질려있는 게 짜고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굳이 내가 뭐라 첨언할 필요는 없겠지. 나랑 대화하자고 한 쪽은 저쪽이니까.
나는 침묵으로 조심스레 대답했다.
말을 하고 싶으면 개수작부리지 말고 본론부터 털라고.
그러자 리충빈이 가벼이 웃으며 침묵을 깼다.
“이 곳에서 일어날 대화를 아는 사람은 한 대표와 나, 그리고 양측의 통역사들 뿐 아니겠소?”
“내보낼까요?”
“늙은이 욕심이라 생각하시고 들어주셨으면 하오.”
중국의 2인자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데에는 필히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나는 내 통역사에게 가볍게 턱짓했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네, 의원님.”
그녀가 차분히 뒤돌아 밀실에서 나가자, 리충빈 측 통역사도 화들짝 놀라 방에서 도망쳤다.
“......”
아무래도. 이번에 만난 빨갱이도 또라이인 모양이다. 뭐 한것도 없는데 유독 빨갱이들과 악연이 깊다.
나는 내 인생을 거쳐간 빨갱이들에 대해 곱씹었다.
삼팔선 너머로 백두혈통 빼돌린 원조 빨갱이 대장 리철진.
쿠데타 일으키고 탈북자 10만명 죽이려던 신흥 빨갱이 대장 리용수,
그리고 옆동네 빨갱이 부대장 리충빈까지.
하여튼 빨갱이 나라에 사는 ‘리’ 씨들이랑은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나는 애써 미소지었다.
“이제 되었습니까?”
“아아, 고맙소.”
리충빈 상장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턱을 긁었다.
“내가 잔인해 보이시오?”
넹.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신중하구려. 좋은 태도요.”
상장은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고,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가 큰일을 성급히 꺼내지 않는 관습이 있다지만, 한 대표에게는 내 본론부터 이야기해야겠소.”
“말씀하시죠.”
“궁극적으로, 미국을 상대로 한 동아연방의 설립을 원하오.”